[연중 제12주간 수요일]거짓 예언자 (마태 7,15-20)
아브람이 주님을 믿자 주님께서는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시며, 나는 이집트 강에서 큰 강 곧 유프라테스 강까지 이르는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준다고 하신다. (창세 15,1-12.17-18)
그 무렵 1 주님의 말씀이 환시 중에 아브람에게 내렸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너는 매우 큰 상을 받을 것이다.”
2 그러자 아브람이 아뢰었다. “주 하느님, 저에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저는 자식 없이 살아가는 몸, 제 집안의 상속자는 다마스쿠스 사람 엘리에제르가 될 것입니다.” 3 아브람이 다시 아뢰었다. “저를 보십시오. 당신께서 자식을 주지 않으셔서, 제 집의 종이 저를 상속하게 되었습니다.”
4 그러자 주님의 말씀이 그에게 내렸다. “그가 너를 상속하지 못할 것이다. 네 몸에서 나온 아이가 너를 상속할 것이다.”
5 그러고는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너의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6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 7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주님이다. 이 땅을 너에게 주어 차지하게 하려고, 너를 칼데아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이다.”
8 아브람이 “주 하느님, 제가 그것을 차지하리라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묻자, 9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삼 년 된 암송아지 한 마리와 삼 년 된 암염소 한 마리와 삼 년 된 숫양 한 마리, 그리고 산비둘기 한 마리와 어린 집비둘기 한 마리를 나에게 가져오너라.”
10 그는 이 모든 것을 주님께 가져와서 반으로 잘라, 잘린 반쪽들을 마주 보게 차려 놓았다. 그러나 날짐승들은 자르지 않았다. 11 맹금들이 죽은 짐승들 위로 날아들자, 아브람은 그것들을 쫓아냈다.
12 해 질 무렵, 아브람 위로 깊은 잠이 쏟아지는데, 공포와 짙은 암흑이 그를 휩쌌다. 17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자, 연기 뿜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이 그 쪼개 놓은 짐승들 사이로 지나갔다.
18 그날 주님께서는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집트 강에서 큰 강 곧 유프라테스 강까지 이르는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준다.”
예수님께서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라고 하시며,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고 하신다. (마태 7,15-2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5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 든 이리들이다. 16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거두어들이고,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거두어들이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19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진다. 20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제1독서 (창세15,1-12.17-18)
"그는 이 모든 것을 주님께 가져와서 반으로 갈라, 갈린 반쪽들을 마주 보게 차려 놓았다. 그러나 날짐승들은 자르지 않았다. ~~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자, 연기 뿜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이 그 쪼개 놓은 짐승들 사이로 지나갔다."(창세15,10.17)
'반으로'로 번역된 '빳타웨크'(bathawek)는 '~안에'(in)을 의미하는 전치사 '뻬'(be)와 정관사 '하'(ha) 및 '정 가운데'를 의미하는 '타웨크'(thawek)가 합쳐진 말로서 '바로 그 정가운데'(in the midst)라는 의미이다.
하느님께서 바로 그 정 가운데를 쪼개라는 것은 좌우로 조금의 치우침도 없이 하느님 말씀에 완전히 순종하라는 뜻일 수도 있다.
그리고 '빠타르'(bathar; 자르다, 쪼개다)라는 표현은 창세기 15장 18절에 나오는 '뻬리트'(berith; 계약)와도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왜냐하면 '뻬리트'(계약)도 '자르다', '쪼개다' 란 의미를 갖는 '빠라'(bara)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계약'이란 용어의 어원이 암시하듯이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계약을 맺을 때 그 표적이 되는 쪼갠 희생 제물 가운데로 계약의 두 당사자가 지나가는 관습이 있었다. 이것은 만약 계약이 성실하게 지켜지지 않을 때, 그 위반자는 희생물과 같은 운명이 될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의미를 지닌다(예레34,18-21).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처럼 희생 제물을 쪼개는 것은 장차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실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 지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인해 하느님과의 계약을 일방적으로 깨뜨린 이후로, 모든 인류는 계속 원죄가운데 태어나 본죄를 지음으로서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깨뜨리며 살아감으로, 모든 인간은 마땅히 죽어야 될 운명이지만,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스스로 죽으심으로 하느님의 공의를 채워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구약의 모든 희생 제사의 제물이 예표하고 암시하는 그리스도의 피흘림의 구속 공로로 말미암아 영적 죽음을 모면했기 때문이다.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자, 연기 뿜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이' (17)
여기서 '화덕'(풀무)으로 번역된 '탄누르'(thannur)는 진흙으로 만든 꼭대기에 통풍을 위한 구멍을 낸 화로를 가리킨다.
그런데 창세기 15장 17절의 연기뿜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에 대해서는 두 가지 상반된 견해가 있다. 하나는, 화덕의 횃불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당한 혹독한 고난을 상징하고(신명4,20; 이사48,10), 뿜는 연기는 고난 가운데서도 하느님의 구원의 때를 알지 못해 방황하는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나타낸다는 견해다.
또 다른 하나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를 여행할 때 밤낮으로 지켜준 불기둥과 구름 기둥처럼(탈출13,22; 14,24; 33,10) 화덕과 연기도 하느님의 현존과 임재의 상징으로(탈출3,2; 19,18; 이사31,9) 볼 수 있다는 견해이다.
이 두 견해가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지만, 뒤이어 나오는 횃불이 쪼갠 짐승들의 고기 사이로 지나감으로써 하느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계약이 체결되는 것을 볼 때, 횃불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는 화덕과 연기도 하느님 현존과 임재의 상징으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하다.
하느님께서 짙은 어두움 가운데 고뇌하고 있던 아브라함에게 횃불과 연기 가운데 임재하신 것처럼, 성도들이 죄악으로 어두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지를 알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을 때, 하느님께서 홀연히 찾아 오셔서 위로해 주시며 마음에 확신과 더불어 죄악을 극복할 힘을 주신다(이사41,10).
' 그 쪼개 놓은 짐승들'
이처럼 '바로 그'란 의미의 정관사 '하'(ha)와 '이것들'이란 의미의 지시 형용사 '엘레'(elle)가 사용된 것은 아브라함이 준비한 제물(창세15,9)을 상징한다. 본문에 등장하는 이 제물들은 모두 정결한 것으로서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하느님께서는 죄악으로 오염된 이방 사람들이 아니라 이들과 구분된 정결한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제물 위에 임하시는 것처럼, 오늘날에도 마음이 깨끗한 이들에게 찾아오신다(마태5,8).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안다.>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 든 이리들이다(마태 7,15).”
이 말씀에서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요한 10,1).”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
우리는 착한 목자 예수님만 충실하게 따라가는 착한 양이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 2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에 거짓 예언자들이 일어났던 것처럼,
여러분 가운데에도 거짓 교사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들은 파멸을 가져오는 이단을 끌어들이고,
심지어 자기들을 속량해 주신 주님을 부인하면서 파멸을 재촉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그들의 방탕한 행실을 본받아,
그들 때문에 진리의 길이 모욕을 받을 것입니다.
그들은 또 탐욕에 빠져, 지어낸 말로 여러분을 속여 착취할 것입니다.
그들에게 내릴 판결은 오래전부터 준비되어 있고,
그들에게 닥칠 파멸은 채비를 갖추고 있습니다(2베드 2,1-3).”
사탄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해서 죄를 짓게 했던 때부터 지금까지
가짜 예언자, 가짜 목자, 가짜 메시아가 나타나서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일은 끊임없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들이 가짜라는 것을 잘 알아보고 그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조심하는 일은
신앙생활에서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요즘에도 겉으로는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는 종교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느님과 예수님 말씀을 따르지 않는,
또 성경 말씀을 무척 많이 강조하지만
사실은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이비 종교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이비 종교들의 말에 속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자기들이 사이비라고 말하는 사이비 종교는 없습니다.
항상 자기들이 진짜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더욱더 조심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생기는 이단도 있는데,
그것은 교회 밖에서 생긴 사이비보다 더 위험합니다.
식별하기가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거두어들이고,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거두어들이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마태 7,16-18).”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마태 7,20).”
이 말씀은, 어떤 예언자의 활동 결과를 보면
그가 진짜 예언자인지 가짜 예언자인지 알아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어떤 예언자의 활동으로 사람들이 하느님과 예수님을 더 잘 믿게 되고,
신앙생활을 더욱 충실하게 하게 되었다면 그 예언자는 진짜이고,
반대로 사람들이 하느님과 예수님에게서 멀어져버렸다면 그 예언자는 가짜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판단하는 일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누가 무슨 권한으로 좋은 열매와 나쁜 열매를 구분할 수 있는가?
바로 그런 이유로 교회의 교도권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와 사도들에게 그 권한을 주셨습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8-19).”
이 권한은 사도들의 후계자들, 즉 주교들에게 계승되었습니다.
사적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 때,
그 일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인지, 아니면 악령이 하는 일인지 판단하는 일은
사도들의 후계자들인 주교들의 권한입니다.
우리는 우리 교회도 처음에는 이단 종교로,
또는 사이비 종교로 취급받았음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교에서는 그리스도교를 이단 종교라고 생각했고,
로마제국 정부와 조선 정부는 사이비 종교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가말리엘’이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합니다.
“이스라엘인 여러분, 저 사람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잘 생각하십시오.
얼마 전에 테우다스가 나서서, 자기가 무엇이나 되는 것처럼 말하였을 때에
사백 명가량이나 되는 사람이 그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가 살해되자 그의 추종자들이 모두 흩어져 끝장이 났습니다.
그 뒤 호적 등록을 할 때에 갈릴래아 사람 유다가 나서서
백성을 선동하여 자기를 따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게 되자 그의 추종자들이 모두 흩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사도 5,35-39).”
이 말은 ‘하느님의 참 종교’를
사이비 종교나 이단으로 오판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일단 내버려두고 지켜보자는 뜻으로 한 말인데,
우리 입장에서도 중요한 교훈이 되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또는 내가) 하는 일이 하느님 뜻에 합당한가?(하느님을 위한 일인가?)
아니면 나 혼자만의 뜻인가?(나 혼자만을 위한 일인가?) 를
양심적으로 잘 판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하느님을 위한 일이라고 내세우면서
한 개인이나 집단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일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나쁜 열매를 맺는 나쁜 나무가 되는 일입니다.
즉 사이비 종교로 전락하는 일입니다.
나쁜 나무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 말씀은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진다(마태 7,19).”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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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살면서 맺고 사는 열매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육(肉)의 열매’와 ‘성령의 열매’입니다. 육의 열매는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 시기, 질투, 적개심, 분쟁, 분노, 이기심과 같은 것이지만,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라고 했습니다(갈라 5,17-23 참조). 우리가 본성대로 살면 우리 안에 엉뚱한 나무가 자라서 육의 열매를 맺고, 주님의 뜻을 따라 살면 좋은 나무가 자라서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틱낫한 스님은 마음을 ‘밭’에 비유하시지요. 그 밭에는 기쁨, 사랑, 이해, 즐거움, 희망과 같은 긍정적인 씨앗이 있는가 하면, 두려움, 분노, 미움, 절망, 시기, 외로움, 그리고 건강하지 못한 집착 등과 같은 부정적인 씨앗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씨앗에 물을 주어 열매를 맺을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의 마음 밭에는 늘 말씀의 씨앗이 뿌려지고 있습니다. 날마다 말씀을 읽고 새기고 묵상하면 저절로 우리 안에 좋은 나무가 자랍니다. 좋은 나무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되면 본성에 뿌리를 두고 자라던 ‘못된 나무’는 시들시들 힘을 잃고 맙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 큰 나무 그늘에 모여 쉴 수 있는 넉넉한 사람이 됩니다. 성령의 열매가 맺혀 삶이 풍요롭고 아름다워집니다. |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알맞은 햇빛과 비, 풍부한 거름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그 열매를 보면,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그리고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농부는 좋은 열매를 맺게 하려고 구슬땀을 흘리며, 나무에 필요한 환경을 만들어 줍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하느님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 예언자가 하느님의 사람으로 제대로 성장할 수 있는 좋은 환경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아무리 좋은 거름과 좋은 환경을 제공해 준다고 해도, 하느님의 말씀은 열매 맺을 수 없습니다.
교회는 세상에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입니다. 어두운 곳에 빛을 밝혀 주고, 좌절이 있는 곳에 희망을 던져 주는 정의와 희망의 전달자입니다. 그러려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먼저 하느님의 말씀에 젖어 있어야 하고, 정의와 희망, 사랑과 평화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자기가 갖지 못한 것을 결코 다른 사람에게 내어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야기한 것을 나 자신은 스스로 지키고 있는지 생각하면 부끄럽고 당혹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말은 쉽지만 행동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말이 머리에서 논리적으로 나오지 않고, 몸과 마음에서 우러나올 때 언행이 일치될 수 있습니다. 우러나온다는 것은 온몸이 그것으로 젖어 있다는 뜻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