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2주간 금요일]나병 환자 치유 (마태 8,1-4)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계약의 표지로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으라고 하시며, 사라가 아들을 낳아 줄 것이니 그 이름을 이사악이라 하라고 하신다. (창세 17,1.9-10.15-22)
1 아브람의 나이가 아흔아홉 살이 되었을 때,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나는 전능한 하느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살아가며 흠 없는 이가 되어라.”
9 하느님께서 다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계약을 지켜야 한다.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이 대대로 지켜야 한다. 10 너희가 지켜야 하는 계약, 곧 나와 너희 사이에, 그리고 네 뒤에 오는 후손들 사이에 맺어지는 계약은 이것이다. 곧 너희 가운데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는 것이다.”
15 하느님께서 다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아내 사라이를 더 이상 사라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마라. 사라가 그의 이름이다. 16 나는 그에게 복을 내리겠다. 그리고 네가 그에게서 아들을 얻게 해 주겠다. 나는 복을 내려 사라가 여러 민족이 되게 하겠다. 여러 나라의 임금들도 그에게서 나올 것이다.”
17 아브라함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웃으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나이 백 살 된 자에게서 아이가 태어난다고? 그리고 아흔 살이 된 사라가 아이를 낳을 수 있단 말인가?’ 18 그러면서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이스마엘이나 당신 앞에서 오래 살기를 바랍니다.” 하고 아뢰자, 19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너의 아내 사라가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것이다. 너는 그 이름을 이사악이라 하여라. 나는 그의 뒤에 오는 후손들을 위하여 그와 나의 계약을 영원한 계약으로 세우겠다. 20 이스마엘을 위한 너의 소원도 들어 주겠다. 나는 그에게 복을 내리고, 그가 자식을 많이 낳아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 그는 열두 족장을 낳고, 나는 그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21 그러나 나의 이 계약은 내년 이맘때에 사라가 너에게 낳아 줄 이사악과 세우겠다.”
22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다.
시편 128(127),1-2.3.4-5(◎ 4 참조)
◎ 보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복을 받으리라.
○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그분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 네 손으로 벌어 네가 먹으리니, 너는 행복하여라, 너는 복을 받으리라. ◎
○ 너의 집 안방에 있는 아내는 풍성한 포도나무 같고, 너의 밥상에 둘러앉은 아들들은 올리브 나무 햇순 같구나. ◎
○ 보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이렇듯 복을 받으리라. 주님은 시온에서 너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너는 한평생 모든 날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리라. ◎
예수님께서는,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다고 고백한 나병 환자에게 손을 대시어 고쳐 주신다. (마태 8,1-4)
1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2 그때에 어떤 나병 환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3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그의 나병이 깨끗이 나았다.
4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제1독서(창세17,1.9~10.15~22)
아브람의 나이가 아흔아홉 살이 되었을 때,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나는 전능한 하느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살아가며 흠없는 이가 되어라." (1)
'아흔아홉 살이 되었을 때'는 아브람이 하란을 떠난 지 24년이 되었고(창세12,4). 그의 첩 하가르가 이스마엘을 낳은지 13년이 되는 해였다(창세16,16). 그런데 창세기 16장의 마지막 내용인 이스마엘이 출생한 기록이 나온 후, 곧 바로 13년이나 건너뛴 것은 그 동안 하느님의 계시가 아브람에게 없었던 것을 암시한다.
이처럼 장시간 동안 하느님의 계시가 없었으므로, 아브람에게는 이스마엘에 대한 애착이 강해졌을 것이고, 그를 통한 약속의 성취를 계속 기대했을 것이다. 이것은 창세기 17장 18절의 '이스마엘이나 당신 앞에서 오래 살기를 바랍니다' 라는 아브라함의 고백에서 엿볼 수 있는 사실이다.
또한 13년간의 침묵은 창세기 17장에 나오는 새로운 하느님의 계시와 약속을 아브라함이 매우 놀라운 사건으로 여길 수 있게 하는 이유가 된다.
그동안 이스마엘을 중심으로 자신의 기업을 확장해 가려던 그 모든 생각이 옳지 않았다는 것을 한순간에 깨닫게 되었을 때 아브라함의 좌절은 심각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약속이 새롭게 주어지는 것을 통해 아브라함은 그 좌절의 혼란속에서 다시금 믿음을 일깨우는 계기를 가지게 된 것이다.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나타나'로 번역된 '와예라'(wayera; appeared)는 단순 재귀형이 사용되어 '그리고 그는 자신을 보여주다'이다. 여기서 '보여주다'에 해당하는 '라아'(raah)는 자신이 직접 경험하고 숙고하여 깨달아 아는 것을 의미한다(창세11,5; 에제21,26; 호세9,10). 말하자면 주님께서 자신을 보여 주시는데, 아브람이 직접 경험하여 구체적으로 깨달아 알도록 보여 주신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자신을 보여 주신 이유는 이스마엘이 약속의 자녀가 아니라는 것과 동시에 사라이를 통한 이사악의 출생 약속이 임박했음을 말씀하시기 위한 것이다(창세16,16; 17,19).
'나는 전능한 하느님이다'
히브리어 문장에서 주어가 어떤 단어의 접두어나 접미어로 사용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여기서처럼 '나는'에 해당하는 인칭 대명사 '아니'(ani)가 독립적으로 사용된 경우는 바로 지금 하느님께서 자신을 공적으로 소개하시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전능한 하느님'은 '엘'(el; '하느님')과 '샷다이'(shaddai)의 복합어이다.
여기서 '엘'(el; '하느님')의 어원인 '울'(ul)은 '능력 있다', '강하다'는 의미이다. 또한 '샷다이'(shaddai)는 '~하는 자'(she; 셰)와 '충분한'(dai; 따이)의 복합어로서 '충족적인 자'를 의미한다. 따라서 '전능한 하느님'은 권능이 있으면서 또한 '(자기)충족적인 하느님'임을 나타내는 명칭이다.
이 명칭은 특별히 사람과 계약을 세우실 때 사용되는 하느님의 명칭이다 (창세28,3; 43,14; 48,3). 이 명칭이 주로 계약과 관계되어 사용된 것은 하느님께서 한번 맺으신 계약은 그 어떤 경우에라도 반드시 지킬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지니신 자기 충족적이신 분이심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다.
'너는 내 앞에서 살아가며'
'너는 내 앞에서 살아가며'로 번역된 '히트할레크 레파나이'(hithhallek lepanai)는 직역하면 '너는 내 얼굴 앞으로 스스로 걸으라'이다. 여기서 '히트할레크'(hithhallek)는 '걷다'(walk)는 뜻이 있는 '할라크' (hallak)의 재귀형이므로 '자기 스스로 걷다'란 의미가 있다. 그리고 '레파나이'(lepanai)는 '얼굴'을 의미하는 '파님'(panim)에 '~을 향하다'는 뜻이 있는 전치사 '레'(le)가 결합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하느님께서 아브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결정하여 어떤 일을 하더라도 하느님 대전에 하는 것처럼, 즉 하느님을 의식하고 의롭게 행동해야 함을 명령한 것이다.
'흠없는 이가 되어라'
'흠없는 이가 되어라'로 번역한 '웨흐예 타밈'(yehye tamim)은 직역하면 '그리고 너는 완전하라'는 명령형이다. 그런데 '타밈'(tamim; perfect)이란 용어는 하느님께 바치는 제물로 사용되는 흠이 없는 동물을 표현할 때도 쓰였다. 하느님께서는 흠없는 제물만 받으신다(레위22,14~25).
그러나 이 단어가 사람에게 사용될 때는 도덕적으로 성실하고 깨끗한 자로서 하느님과 친교를 나눌 수 있는 자를 가리키는 데 쓰였다(시편15장; 101,6).
이것은 노아를 묘사할 때도 쓰인 말로서(창세6,9), 아브람은 믿음이 없는 세대 가운데서 도덕적으로 성실하고 깨끗하여 하느님과 친교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춤으로써, 하느님의 완전하심을 보여 줄 수 있는 모습이 되라고 하느님께로부터 명령받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흠없는 이가 되어라'고 명령하신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아브람이 하가르를 첩으로 취한 것이 하느님께는 완전하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브람의 지난 13년간의 삶을 한순간에 뒤돌아보게 하는 명령이었다.
둘째는 모든 인간이 하느님 대전에서 절대적인 의미로 완전할 수 없지만, 그것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도덕적으로 순결할 것과 성숙할 것에 대한 요구이며, 아브람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인 모든 성도들이 추구해야 할 삶의 자세이다.
"그때에 어떤 나병 환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2~3ㄴ)
마태오 복음사가가 산상설교가 선포된 후에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고치신 사건을 메시야로서의 왕권을 드러내신 치유 기적 사회의 첫번째 기사로 소개한다.
예수님께 가장 먼저 나온 사람이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를 주관하는 사제도 아니고, 율법을 연구하는 랍비도, 율법을 잘 아는 바리사이들도 아니었다. 가장 먼저 예수님을 찾은 그는 몹쓸 병에 걸려 성 밖으로 내쫓겨 격리된 나병 환자에 불과했다.
그가 예수님께 나아가기로 결심한 데에는 많은 군중들이나 예수님의 제자들에 의해 돌에 맞아 죽을 각오까지 한 상태였다(레위13,14장; 민수12,10.15; 2역대26,19~20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치유하시는 하느님을 믿었고, 하느님의 역사(役事)하심을 간절히 필요로 하였기 때문에,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님 앞에 엎드렸던 것이다.
마태오 복음에 있어서 예수님을 향해 '주님'으로 번역된 '퀴리에'(kyrie; Lord)라는 호칭을 사용한 경우를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는 자들로 구분된다. 특히 후자의 경우는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인정하여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본다기 보다는, 다만 예수님을 하느님께로부터 파견을 받은 메시야적 대사로 인정하여 '주님'이라고 불렀다.
여기에 기록된 나병 환자가 어떤 의미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 이미 행하신 치유 기적에 대해 듣거나 보고 난 뒤에 (마태4,23.24) 예수님을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있는 분으로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마태오 복음사가는 마태오 복음 7장 21~29절에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과 구원은 별개의 문제라고 이미 밝혔다.
한편, 마태오 복음 8장 3절에서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대신다. 율법은 부정한 물건이나 사람에게 손을 대는 사람까지도 부정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민수12,10; 욥기18,13; 레위13.14장).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정한 것에 접촉함으로써 그 부정에 전염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정한 것을 거룩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의 하느님이시다. 여기서 '대시며'에 해당하는 '헵사토'(hepsato; and touched)의 원형 '합토마이'(haptomai)는 '대다'는 뜻 외에도 '만지다', '껴앉다'라는 뜻도 있다.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에 해당하는 '레프로스'(lepros; a leper), 즉 악성 피부 질환에 걸린 사람을 직접 만지신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조항이나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초월적인 사랑의 성품을 소유하고 계심을 보여 준다.
그리고 열왕기 2권 5장 11절에도 나오지만,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병자들을 고쳤는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느님이시므로, 다른 제 삼자의 이름이나 권위를 빌리지 않고, '내가 하고자 하니'에 해당하는 '텔로'(thelo; I will)라는 말을 통하여 스스로의 이름과 권위와 의지로 병자를 고치신다.
강하다는 것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이집트를 정복하고 한 곳에 서서 ‘이 곳에 나의 이름을 딴 도시가 세워졌으면 좋겠다.’라고 말했습니다. 신하들은 일사천리로 도시 계획을 세우고 알렉산드리아라는 굉장한 도시를 세웠습니다. 원하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 이것이 바로 힘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내가 원한다고 해서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미워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용서를 하려고 해도 그것조차 잘되지 않는 것을 우리는 삶에서 체험합니다. 그 때마다 우리의 무력함을 느낍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무력감은 이 외에도 너무 많이 체험하며 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단점을 고쳐보려고 부단히도 애를 씁니다. 그러나 고쳐지지 않자 곧 자포자기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난 천성이 이래요! 난 성격이 이런 유형이라 절대 그렇게 바뀔 수 없대요.”
할 수 없다, 어쩌면 이것은 진정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원하니 큰 도시가 하나 세워졌던 것처럼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에게도 사실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알렉산더 대왕과 비교도 안 되는 굉장한 힘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물론 전능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원하는 것’과 ‘하실 수 있는 것’이 일치하는 유일한 존재이십니다. 이것을 두고 우리는 전능하다고 말합니다. 모든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원하다' (want to)와 '할 수 있다' (can) 는 동사는 예수님께 같은 의미로 적용됩니다.
“주님! 주님께서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대로 만들어졌다면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이 능력을 우리도 지니고 있어야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전능하신 하느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이처럼 무력해져서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 이유는 하느님의 도움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한 인간으로서 당신의 모든 능력을 아버지로부터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청을 들어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은 죽은 라자로를 살리시고 아버지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아버지, 제 청을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도 죽은 이를 살리는 권능을 아버지께 청해서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능력대로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도 하느님께 그 능력을 청해야 하는 것입니다. 죄는 하느님과의 단절과 성령의 은혜를 거부하게 함으로써 우리 안의 능력을 감소시킵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의 청은 안 들어 주시지만 하느님을 공경하고 그 뜻을 실행하는 사람의 청은 들어 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요한 9,31)
진정으로 원하면 불가능은 없습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느님을 통하면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자신의 능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고, 또 내가 원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일치하는지도 살펴보아야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한없이 바라기만 하십시오. 믿고 기도하면 그 일은 이미 이루어졌다고 보아도 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예수님의 사랑>
“그때에 어떤 나병 환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그의 나병이 깨끗이 나았다(마태 8,2-3).”
여기서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라는 말은, “저는 주님께서 저의 병을 고쳐 주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이라는 말은, “저의 병을 고쳐 주기를 주님께서 원하시면”이라는 뜻인데, 이 말은 그 병자가 주님의 의향을 모르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자기의 병을 고쳐 줄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은, 즉 예수님의 능력은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청한다고 해도 자기의 병을 고쳐 주실지 어떨지는 못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자비심에 대한 믿음은 없거나 부족한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많습니다.
간절하게 기도하는데도 아무런 응답이 없을 때, “혹시 지금의 내 처지에 대해서 관심이 없으신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하거나, “나를 조금도 딱하게 생각하지 않으시는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하거나, “혹시 예수님은 너무 냉정하신 분은 아닐까?” 라고 생각하거나...
예수님을 믿으려면, 예수님의 권한, 권능, 자비심을 모두 믿어야 합니다.
만일에 예수님의 자비는 안 믿고 권능만 믿는다면, 그것은 사랑 없는 신앙이 되고, 그러면 결국 기복신앙으로 변질될 것입니다.
반대로 권능은 안 믿고 자비만 믿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라면 예수님을 존경하기는 해도 하느님으로 믿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아닙니다.
마르코복음 9장에 나오는 어떤 아이의 아버지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저 영이 자주 아이를 죽이려고 불 속으로도, 물속으로도 내던졌습니다.
이제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마르 9,22).”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도와주실 것이라고 믿고 예수님께 오긴 했는데, 예수님의 권한과 권능에 대한 믿음은 부족했습니다.
‘하실 수 있으면’이라는 말이 바로 그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9,23).”
이 말씀은,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음을 믿어라.” 라는 뜻입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라는 예수님 말씀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나는 원한다. 깨끗해져라.”입니다.
이 말씀은, 인간을 고쳐 주고 구원하는 일은 처음부터 예수님께서 원하신 일이었음을 나타내는 말씀이고, 또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를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셔서 세상에 오셨고, 사람들을 구원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우리가 청하지 않아도 우리의 딱한 처지를 보시고 먼저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분입니다.
이 말에서 다음 말씀이 바로 연상됩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예수님은 완전히 일치되어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은 예수님께도 해당됩니다.
예수님의 권한과 권능과 자비를 모두 제대로 믿고 있다면, 기도의 응답을 얻지 못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또 어떤 일이 기도한 대로 되지 않더라도, 실망하지 않게 되고, 더욱더 기도하면서 기다릴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나의 어려운 상황을 알고 계시고, 나를 딱하게 생각하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방법으로 가장 큰 은총을 주실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바라는 때에, 바라는 방식으로, 바라던 그것을 얻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실망하거나 낙심하면 안 됩니다. 실망과 낙심은 믿음 없는 태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11)”
예수님을 믿는다면, 이 약속의 말씀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일을 우선 먼저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요한 1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1요한 4,9-11).”
여기서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라는 말은, 우리가 먼저 하느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부르셨고, 또 우리가 먼저 하느님을 사랑해서 하느님께서 그 사랑에 응답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 쪽에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그 사랑에 응답하는 방법은 바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요한 4,21).”
“지금 빌고 있는 소원이 이루어지면 그때 가서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지.” 라고 말하면서 사랑 실천을 미루면 안 됩니다. 그런 말은 ‘사랑 없는 이기심’을 나타낼 뿐입니다.
소원이 이루어지든지 이루어지지 않든지 간에 ‘먼저’, 그리고 ‘항상’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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