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4주간 화요일]복음 선포 (마태 9,32-38)

2017. 7. 11. 오전 4:3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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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4주간 화요일]복음 선포 (마태 9,32-38)


야곱은 가족을 이끌고 가다가 하느님과 겨루어 이기고는 축복을 받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창세 32,23-33)
그 무렵 야곱은 밤에 23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데리고 야뽁 건널목을 건넜다. 24 야곱은 이렇게 그들을 이끌어 내를 건네 보낸 다음, 자기에게 딸린 모든 것도 건네 보냈다. 25 그러나 야곱은 혼자 남아 있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나타나 동이 틀 때까지 야곱과 씨름을 하였다. 26 그는 야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야곱의 엉덩이뼈를 쳤다. 그래서 야곱은 그와 씨름을 하다 엉덩이뼈를 다치게 되었다. 27 그가 “동이 트려고 하니 나를 놓아 다오.” 하고 말하였지만, 야곱은 “저에게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놓아 드리지 않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8 그가 야곱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묻자, “야곱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9 그러자 그가 말하였다. “네가 하느님과 겨루고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으니, 너의 이름은 이제 더 이상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 불릴 것이다.”
30 야곱이 “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십시오.” 하고 여쭈었지만, 그는 “내 이름은 무엇 때문에 물어보느냐?” 하고는, 그곳에서 야곱에게 복을 내려 주었다.
31 야곱은 “내가 서로 얼굴을 맞대고 하느님을 뵈었는데도 내 목숨을 건졌구나.” 하면서, 그곳의 이름을 프니엘이라 하였다. 32 야곱이 프니엘을 지날 때 해가 그의 위로 떠올랐다. 그는 엉덩이뼈 때문에 절뚝거렸다.
33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오늘날까지도 짐승의 엉덩이뼈에 있는 허벅지 힘줄을 먹지 않는다. 그분께서 야곱의 허벅지 힘줄이 있는 엉덩이뼈를 치셨기 때문이다.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바리사이들이 말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신다. (마태 9,32-38)
그때에 32 사람들이 마귀 들려 말못하는 사람 하나를 예수님께 데려왔다. 33 마귀가 쫓겨나자 말못하는 이가 말을 하였다. 그러자 군중은 놀라워하며,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고 말하였다.
34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였다.
35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36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37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38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제1독서(창세32,23~33)

   그러나 야곱은 혼자 남아 있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나타나 동이 틀 때까지 야곱과 씨름을 하였다. 그는 야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야곱의 엉덩이뼈를 쳤다. 그래서 야곱은 그와 씨름을 하다 엉덩이뼈를 다치게 되었다. 그가 "동이 트려고 하니 나를 놓아 다오." 하고 말하였지만, 야곱은 "저에게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놓아 드리지 않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25~27)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간의 삶을 청산하고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결심한다. 말하자면 지금은 타향 생활 20년만에 드디어 다시 고향길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야곱이 집에 돌아가는 것을 생각할 때에 제일 장애가 되는 것이 자신의 형 에사우를 만나는 두려움이다.

사실 지금까지의 야곱의 삶을 보면, 그가 한번 마음 먹은 것은 안되는 일이 없었다. 치사한 방법으로 기어이 장자의 권한도, 아버지 이사악의 축복도 독차지했고, 마음에 둔 여인도 끝까지 참아서 결국에는 아내로 맞이했었다.

야곱은 목표를 한번 정해 놓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목표를 반드시 관철시키는 불패의 삶을 살았다. 그런데 이제 귀향을 앞두고, 장애와 자기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야곱은 형 에사우가 복수의 칼을 들고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형 에사우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 소위 '뇌물'을 준비하여(창세32,14~23) 미리 보낸다.

야곱은 밤에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이끌어 야뽁 강을 건네 보낸 다음, 자기에게 딸린 모든 것도 건네 보낸 뒤(창세32,24) 이제 혼자 남게 되는 것이다.

야곱은 제일 먼저 형 에사우에게 전령을 보내어 상황을 파악하고, 형 에사우의 마음을 떠 본다(창세32,4~6). 형 에사우가 장정 사백명을 거느리고 마중 나온다니까 야곱은 겁을 내어 살려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한 뒤, 인간적인 방법으로 형을 만날 준비를 한다(창세32,10~22).

형 에사우에게 바치는 뇌물의 양이 많음을 드러냄과 동시에 여차하면 만일의 상황을  대비하여 도망갈 준비까지 갖춘다.

뇌물을 종들의 손에 한 떼씩 나누어 들게 하는데, 그것을 거리를 두어 행렬지어 가게 하고, 레아보다도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는 아내 라헬과 아들 요셉을 제일 뒤에, 야곱의 자신의 곁에 배치하여 가게끔 해놓는다. 그렇게 해놓고는, 이제 야뽁 강가에 혼자남게 되는 것이다.

야곱은 분명히 형 에사우를 만날 생각에 불안과 초조에 떨며 고민도 하고, 기도도 했을 것이다.

바로 이 순간, 야곱이 다른 사람의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는 상태에 있게 되었을 때에, 자신의 당면 문제 뿐만 아니라 자신 안의 근본적인 내면의 문제까지 정직하게 들여다 보게 되면서 하느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이 순간을 준비하셨고 기대하셨으며, 이 순간을 놓치지 않으신다.

'어떤 사람이'라고 번역된 '이쉬'(ish)'한 사람' 혹은 '어떤 사람'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것은 야곱이 그 사람에 대하여 어떤한 정보도 갖고 있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씨름을 하였다'로 번역된 '와예아베크'(wayeabeq)의 어근 '아바크'(abaq)는 본래 '먼지에 쌓이다', '붙잡다'는 뜻이다. 이것은 땅에서 먼지가 일어나 쌓일 정도로 서로 붙잡고 격렬하게 싸우는 모습을 묘사하는 말로써 '씨름하다', '맞붙어 싸우다'라는 뜻을 지녔다. 원문에서 이 단어가 사용된 것은 야곱과 하느님의 천사와의 씨름이 매우 격렬했음을 보여준다.

야곱이 엉덩이뼈(환도뼈)가 실제로 다치게 된 것과(창세32,26) 호세아 예언자의 말을 종합해 볼 때(호세12,2~4) 실제로 하느님의 사자와 야곱이 씨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씨름은 단순한 힘겨루기가 아니었고, 야곱이 하느님의 사자에게 매달려 울부짖으며 처절하게 간구하는 기도까지 포함된 씨름인 것이다. 

야곱은 처음에는 '어떤 사람'이 하느님의 사자인지 몰랐으나, 그가 곧 하느님의 사자임을 알게 되었고(창세32,27), 자신의 생애 최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하느님께 복을 간구했던 것이다.

'그는 야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여기서 '이길'에 해당하는 '야콜'(yakol) '승리를 얻다', '해내다'(1사무26,25) 라는 뜻 뿐만 아니라 '능력이 있다'(창세13,6), '우세하다', '성공하다'(1열왕22,22) 라는 의미도 있다. 이것은 하느님의 사자가 야곱에게 패배를 당했다는 말이 아니라 야곱이 매달리는 것을 꺽을 수 없었다는 뜻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백성이 필사적으로 매어 달리며 간구할 때 하느님께서 외면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해 주는 말이기도 하다.

'야곱의 엉덩이뼈를 쳤다'

원문은 '와익가 뻬카프 예리코'(yaigga bekap yereko)로서, 직역하면 '그러자 그는 그의 넓적다리 바닥을 쳤다'이다. 여기서 '넓적다리' 해당하는 '야레크'(yarek)'넓적다리'(창세24,2.9: '샅'; 탈출28,42; 민수5,22: '허벅지')외에 '허리'(탈출32,27; 시편45,4)로도 번역된다.

허리나 넓적다리는 다같이 인간의 생식기관과 관련된 부분이며, 생(生)의 원천을 상징한다(히브7,5). 또한 손바닥으로 치는 것은 깊은 슬픔과 수치와 애절한 회개의 표시였고(예례31,19; 에제21,12), 서약을 행할 때에는 넓적 다리 아래에 손을 넣고 서약함으로써 서약에 대한 보증과 신실성을 표현했다(창세24,2; 47,29).

그리고 '바닥'에 해당하는 '카프'(kap)는 '우묵한 곳', '바닥', '구멍'을 뜻하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넓적다리의 우묵한 부분'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문의 엉덩이뼈(환도뼈)의 정확한 부위둔부 아래쪽에 있는 좌골 (坐骨)로 엉덩이의 골반을 형성하는 좌우 한 쌍의 뼈(창세24,2)이다.

한편 '쳤다'에 해당하는 '나가'(naga)'닿다', '만지다'(창세3,3; 레위5,3; 다니8,5), '건드리다'(잠언6,29)라는 뜻으로서 본문에서는 하느님의 사자가 야곱을 때린 것이 아니라 단지 만지기만 하셨음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사자가 만지기만 했는데도 야곱이 무기력하게 된 것은 하느님의 능력의 위대성을 보여준 것임과 동시에 인간의 무능과 한계를 다시 한 번 보여준 것이다.

'다치게 되었다'

'다치게 되었다' 해당하는 '왓테카'(watheqa)의 어근 '야카'(yaqa)의 기본 의미는 '찢어지다', '탈골되다'라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이것은 뼈가 살을 찢고 빠져 나가 탈골된 상태나 뼈가 부러진 상태라고 볼 수도 있다.

하느님께서 야곱의 엉덩이뼈를 다치게 하신 이유육신을 믿고 살아온 야곱에게 육신의 나약함을 일깨워 주기 위한 것이었으며, 동시에 야곱이 하느님을 상대로 씨름할 때 버텨진 힘의 근원을 치심으로써, 더 이상 하느님을 경쟁자로 여기지 못하게 하셨고, 꺾인 다리를 통해 그가 붙들고 의지해야 할 대상은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신 것이다.

또한 생식과 관련된 엉덩이뼈를 다치게 한 것 앞으로 태어날 야곱의 후손들, 즉 계약의 자손들인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하느님만을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동이 트려고 하니 나를 놓아 다오'

'나를 놓아 다오'라고 번역된 '샬레헤니'(shalleheni; let me go)는 직역하면 '너는 나를 가게 하라'는 뜻이 있는 '샬라흐'(shallah)강조 능동 명령형이다.  하느님의 사자가 야곱에게 자신을 보내 달라고 부탁한 것이 아니라 강력하게 명령한 것이다.

하느님의 사자가 얼마든지 야곱을 뿌리치고 떠나갈 수 있음에도 굳이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육신이 망가진 야곱이 과연 하느님을 의지하고 있는지 시험하시고자 함이다.

 '놓아 드리지 않겠습니다'

'놓아 드리지 않겠습니다'로 번역된 '로 아샬레하카'(lo ashallehaka)'절대 당신을 보내지 않겠다' 뜻인데, 강한 금지를 나타내는 '로'(lo)'샬라흐'(shallah)강조형 능동 미완료가 사용된 사실이 그것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 야곱은 축복하여 주지 않는 한, 결코 보낼 수 없다는 자신의 의지를 강조하여 전달한 것이다.

이러한 야곱의 억지에 가까운 요구는 자신과 씨름한 상대가 하느님의 사자이며, 하느님의 사자의 축복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복음(마태9,32~38)

마귀가 쫓겨나자 말못하는 이가 말을 하였다. 그러자 군중은 놀라워하며,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였다.  (33~34)

'말못하는 이'에 해당하는 '코포스'(kophos; dumb)'둔한', '무딘'이라는 뜻을 지니며, '벙어리'(마르9,25; 루카11,14) 뿐 아니라 '귀머거리'(마태11,5; 루카7,22)도 가리킨다. 여기서도 귀먹고 말못하는 복합 장애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본 적이 없다'에서 '본'에 해당하는 '에파네'(ephane; it was seen; has been seen)'보다'라는 뜻의 '파이노'(phaino) 3인칭 단수 직설법 과거 수동형이다. 그래서 직역하면 '이스라엘에서 이런 일이 보여진 때가 없었다'이다.

희랍어 성경에서 수동형이 사용될 때, 행동의 주체가 뚜렷이 나타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행위로 볼 때가 있다.

여기서 '에파네'(ephane)수동태로서, 마귀를 쫓아내고 벙어리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것과 같은 놀라운 기적은, 하느님께서 예수님 이전에는 일어나도록 하신 적이 없었다는 뜻이다.

이런 일은 이사야 예언자가 이사야서 35장 5절, 6절에서 오실 메시야께서 행하실 일에 대해서 예언한 내용과 같다.

한편, 앞절에서 '군중'에 해당하는 '호이 오클로이'(hoi ochloi; the multitudes; the crowd)예수님의 기적에 대해 경이롭게 생각하고 놀라움을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마태오 복음 9장 34절 '바리사이들'에 해당하는 '호이 파리사이오이'(hoi pharisaioi; the Pharisees)가 오히려 예수님을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 (마태10,25)의 힘을 빌리기 위해 그와 접촉하는 자로 모함한 사실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 자체에 대해 반박할 수 가 없게 되자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의 원천에 대해서 비방한 것이다.

같은 사건에 대해서 '눈먼 두 사람'( 마태9,31)이나 '군중'(마태9,33)과는  전혀 상반된 반응을 보인 이러한 사실을 제시함으로써, 마태오 복음사가는 '믿음'이란 객관적 사실에 대한 경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 자각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또한 마태오 복음 8장 1절부터 시작되어 마태오 복음9장 34절로 마무리되는, 메시야로서의 예수님의 신적 권능을 드러낸 9가지 기사에 대한 바리사이들로 대변되는 이스라엘의 종교 기득권자들의 반응을 총체적으로 기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말 못하는 이를 고치시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 사람들이 마귀 들려 말 못하는 사람 하나를 예수님께 데려왔다.

마귀가 쫓겨나자 말 못하는 이가 말을 하였다.

그러자 군중은 놀라워하며,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고 말하였다(마태 9,32-33).”

 

마귀 들려서 말을 못하고 있다면, 마귀를 쫓아내면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 말씀만으로 마귀를 쫓아내셨을 것입니다.

“마귀가 쫓겨나자 말 못하는 이가 말을 하였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장애를 고쳐 주셔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지만,

그 사람이 예수님 덕분에 마귀의 억압에서 해방되었고,

자유를 되찾았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마르코복음에 이 이야기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마르 7,32-35).”

이 두 이야기를 모두 상징으로 해석한다면,

귀먹은 상태는 복음을 알아듣지 못하고 있는 상태를 상징하는 것으로,

말을 못하는 것은 복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사도들의 경우를 보면, 그들은 예수님이 체포될 때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고(마태 26,56),

특히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 면전에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했으니(마태 26,69-74),

그때만 해도 그들은 제대로 말을 못하던 사람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랬던 사도들이 나중에 성령을 받은 뒤에는 놀랍게 변화됩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성령으로 가득 차 그들에게 말하였다. ...

...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예수님과 함께 다니던 사람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사도 4,8-13).”

제대로 말을 못하던 사도들이 그렇게 변화되어서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고 예수님을 증언할 수 있게 된 것은

예수님의 은총과 성령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고,

또 그들 자신들도 그만큼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다는 각오도 했고.)

 

바오로 사도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형제 여러분, 나도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뛰어난 말이나 지혜로 하느님의 신비를 선포하려고 가지 않았습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에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사실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나는 약했으며, 두렵고 또 무척 떨렸습니다.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1코린 2,1-5).”

사실 바오로 사도는 원래는 말을 잘하던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또 예수님의 은총과 성령의 힘으로,

모든 부족한 점들을 극복하고 위대한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지식이 많고, 학력이 높아도,

하느님 말씀을(복음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있다면,

또는 믿고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듣지 못하는 장애 상태입니다.

아무리 말을 잘해도, 하느님 말씀을(복음을) 제대로 전하지 않고 있다면,

또 말씀대로 살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말 못하는 장애 상태입니다.

(입만 열면 거짓말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상태는 마귀 들려서 말 못하는 상태와 다르지 않습니다.

원래 마귀는 거짓말만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듣고, 제대로 말하려면 예수님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6-38)”

 

여기서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다.” 라는 말은,

아직 복음도 모르고 예수님도 모르고 있는,

그래서 구원의 진리를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가리키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듣고 싶어도 듣지 못하고, 그래서 말도 못하고 있는...)

아직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는 일은

듣지 못하는 상태에 있는 사람들의 귀를 열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되어서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말 못하는 상태에서 벗어나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결국 선교활동이란, 사람들의 귀와 입을 열어주는 일이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는 일꾼을 모집하는 일과 같습니다.

따라서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라는 예수님 말씀은, “더 많은 사람을 인도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여라.” 라는 뜻이 되고,

사실상 “선교활동을 더욱 열심히 하여라.” 라는 지시가 됩니다.

 

신앙인은 누구나 예외 없이, 각자의 위치에서 한 사람의 선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자기가 있는 그곳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온 삶으로’ 믿음을 증언하면서 산다면, 그 삶 자체가 선교활동이 됩니다.

(선교활동은 말로 하기 전에 먼저 ‘삶’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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