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라뿌니!” (요한 20,1-2.11-18)
복음서의 여러 군데에 나오는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는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루카 8,2)로 소개되어 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는 십자가 밑에(마태 27,56 참조), 예수님의 무덤 곁에 있었던 여인이다(마태 27,61 참조). 또한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첫 번째 사람으로(요한 20,11-16 참조),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알려 주었다(요한 20,18 참조).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 시신이나마 모셔 가려 했던(요한 20,15 참조) 그녀에게서 주님에 대한 극진한 사랑을 엿볼 수 있다.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에 대한 공경은 12세기부터 시작되어 널리 퍼졌다.
아가에서는 밤새도록 성읍과 광장을 돌아다니다가 사랑하는 이를 찾은 신부의 기쁨을 노래한다. (아가 3,1-4ㄴ)
신부가 이렇게 말한다. 1 “나는 잠자리에서 밤새도록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아다녔네. 그이를 찾으려 하였건만 찾아내지 못하였다네. 2 ‘나 일어나 성읍을 돌아다니리라. 거리와 광장마다 돌아다니며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으리라.’ 그이를 찾으려 하였건만 찾아내지 못하였다네.
3 성읍을 돌아다니는 야경꾼들이 나를 보았네. ‘내가 사랑하는 이를 보셨나요?’ 4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았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어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셔서, 나와 너희의 아버지이시며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고 하시며, 가서 형제들에게 이 말씀을 전하라고 하신다. (요한 20,1-2.11-18)
1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2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12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13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14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15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6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17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18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7월 22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일(아가3,1-4ㄴ)
<아가>의 히브리어 성경 이름은 '쉬르 하시림'(shir hashirim)이다. 직역하면, '노래들의 노래'인데, 히브리어 문법에서는 소유격을 이용한 반복은 최상급을 뜻하기 때문에, 이를 '최상의 노래' 혹은 '가장 아름다운 노래'로 옮길 수 있다. 라틴말 성경은 '칸티쿰 칸티코룸'(Canticum Canticorum)이라 한다. 이런 뜻으로 중국에서는 아가(雅歌: The Song of Songs)로 옮겼다.
<아가>서에는 언제나 3인칭으로 나오는 솔로몬의 이름이 6번 나오고, 고유명사없이 '임금'이란 낱말로 세번 나오나, 솔로몬은 저자가 아니라고 본다. 이 책에 나오는 두 연인 가운데, 여자가 남자보다 더 적극적이고 분명한 태도를 보인다는 점에서 저자를 여성으로 추측하거나 이 책의 일부를 여성이 썼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저작 시기에 대해서는, 이 작품이 바빌론 유배이후 페르시아 시대나 그 이후 시대에 속하는 어휘와 표현들이 본문에 나오기 때문에, 적어도 유배이후 페르시아 시대에 나왔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구약의 아가에 영향을 끼친 사랑이야기로 지목되는 것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신화와 이집트 시문학에 나오는 사랑이야기로 본다. 수메르 신화의 남신들과 여신들 사이의 사랑이야기는 계절의 변화와 풍산(豊産)과 직결되는 주제이며, BC 14-12세기의 것으로 여겨지는 이집트의 시들은 상대방에 대한 예찬과 동경, 육체적 배경, 자랑등 감각적 사랑이 강조되고 있다.
어쨌든, <아가>서는 인간적 사랑을 노래한 연애시의 모음집으로 보면 무난하다. 학자들은 이 책의 저자가 수집한 노래들을 적게는 여섯개, 많게는 스물 다섯 개의 이상까지 추정하는데, 저자는 자신의 입수한 노래들을 남자와 여자 사이에 오간 대화의 틀 안에서 아래와 같은 구조로 배열했다.
노래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주도하고, 그밖의 등장 인물들, 곧 예루살렘의 아가씨들과 여자의 오빠들, 그리고 남자의 친구들이 거드는 형태로 되어 있다.
1,2-6: 도입부로서 여자가 자기 애인를 몹시 그리워하면서 예루살렘 아가씨들을 자기 대화에 끌어들인다. 1, 7-2,7: 남여의 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더 적극적인 여자의 프로포즈와 남자의 수락, 서로의 예찬이 나온다.2, 8-17: 여자의 회상(여자는 창가에서 자기 애인이 찾아 왔던 때를 회상하며, 그가 다시 자기를 방문해 주길 고대한다.)
그리고 오늘 독서의 내용인 3장 1-5절이 나온다. <사랑이야기의 단골 메뉴인 부재와 재회의 주제가 나온다. 여자는 예루살렘 아가씨들에게 자기가 어떻게 애인을 잃고, 찾아 헤매다 발견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3, 6-11: 여자의 친구들이 여자와 그 애인을 예찬한다. 4, 1- 5,1: 남자가 여자를 예찬. 5, 2- 6,3: 여자가 예루살렘에서 나눈 대화가 나오는데, 여자의 애인이 또 다시 사라졌으므로, 여자가 예루살렘 아가씨들에게 자기 애인을 찾을 수 있도록 협조 요청하는 내용과 이를 수락하는 내용이다.
6,4-12: 여자에 대한 남자의 또 다른 예찬이 나온다. 특히 6장 10절은 가톨릭 레지오 마리애 기도문(까떼나)에 그대로 인용되어 성모 마리아께 적용된다.
<새벽빛(먼동/여명/서광)처럼 솟아오르고 달처럼 아름다우며 해처럼 빛나고 기를 든 군대처럼 두려움을 자아내는 저 여인은 누구인가?>
여자의 아름다움은 이 세상 어느 누구와 심지어 수많은 왕비,후궁, 궁녀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는 내용이다.
7,1-8,4: 남자가 여자의 아름다운 몸매를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8, 5-14: 부록으로서 단편 시들의 모음이다.
이 대목의 백미이자 아가 전체에서 가장 강렬한 표현은 8장 6절의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 정열은 저승처럼 억센 것"이다. 죽음과 저승(셔올)이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를 끈질기게 쫓듯이 남녀간의 사랑도 정열도 그만큼 강렬하고 분명하게 서로를 추구한다.
구약에서 관능적 사랑을 본격적으로 그리고 적나라하게 다룬 책은 <아가>말고는 없다. <아가>서에서 묘사된 사랑은 문자적 의미가 모두 에로스(성적이고 육체적 사랑)과 관련있다고 여기는데, '성적 방종'과는 거리가 있다.
아가의 저자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그대로의 남녀 관계를 아름답게 받아들이고, 인간의 성(性)을 건강하게 표현한다.(잠언 5,15-23참조)
그런데,<아가>에 묘사된 남녀 관계를 순수한 성적,인간적 사랑으로 본 것은 18세기 이후 부터이고, 그 이전까지는 알레고리(우의적:寓意的) 해석을 통해, 유다교의 경우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로, 그리스도교의 경우는 그리스도와 교회, 하느님과 백성 개인의 관계로 이해했다.
예를 들면, 하느님을 떠나 풍요와 다산의 신숭배에 빠져든 이스라엘 백성과 불충과 배반을 종종 간음이나 창녀짓등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또한, 여자가 자기 애인을 잃었다가 찾는 과정을 이집트에서 출발하여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 왕정 제도를 수립한 뒤에, 바빌론에 유배 갔다가 다시 회복하는 이스라엘의 역사 전체를 반영한다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오늘은 7월 22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인데, 미사의 독서로 아가서 3장 1-4ㄴ을 인용하는 것은 오늘 복음인 요한 복음 20장 1-2, 11-18절과 관련이 되어 있다.
죽으신 예수님의 시신을 제대로 모시고 싶어서 무덤에 찾아 갔다가, 빈 무덤을 발견하고 놀라고 당황하고 애달파하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모습이 아가서에서 신부가 신랑을 찾는 모습에서 이미 예표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이를 찾으려 하였건만 찾아내지 못하였다네.~~야경꾼들이 나를 보았네. '내가 사랑하는 이를 보셨나요?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나는 내가 살아하는 이를 찾았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2.13참조)
아가서의 <야경꾼들과 그들>은 요한 복음에서는시몬 베드로와 예수님이 사랑하신 다른 제자(요한 20,2) 혹은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요한 20,11)에 비유할 수 있겠다.
왜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신을 그렇게 찾는지?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은 성모님을 제외하곤 왜 막달라 마리아에게 당신 모습을 처음으로 보여 주었는지? 를 묵상하면 좋겠다.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일 복음(요한20,1-2.11-18)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17)
'나를 붙들지 마라'에 해당하는 '메 무 합투'(me mu haptu)에서 '붙들지'에 해당하는 '합투'(haptu)는 현재 명령형이고, '메'(me)라는 부정어가 사용되어서 현재 이미 진행되고 있는 행위를 금지시킨 것이다.
그리고 '합투'(haptu)의 원형 '합토마이'(haptomai)는 '비끄러 매다', 즉 서로 떨어지지 않게 붙잡아 매다라는 매우 강한 의미를 갖는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계속해서 강하게 붙들고 있는 마리아에게 이제 그만 놓을 것을 명령한 것이다.
아마도 부활하기 전의 예수님과 부활하신 뒤의 예수님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한 상태에 있는 마리아에게 깨달음을 주시기 위해서 하신 말씀일 것이다.
당시 마리아는 자신이 그토록 찾던 예수님을 만났으므로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심정으로 예수님을 꼭 붙들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곧 만져질 수 있는 상태에서 만져볼 수 없는 상태로 바뀌어야 했다.
부활하신 몸으로 제자들과 계속해서 머물러 있어서는 안되고 승천하셔서(사도1,9) 영이신 성령을 보내셔야 했기 때문에, 계속 육신을 지닌 채 머물 것을 강요하는 듯한 마리아의 행동을 자제시킨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당신의 부활이 제자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그리고 그들이 이제 앞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할지를 깨닫기를 원하신 것이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 것이 아니며, 나머지 사명들을 그들에게 위임하신 후에 아버지께로 가실 것이라는 사실과 가신 후에는 성령을 보내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마리아는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예수님의 본질과 사명에 대해 점진적으로 깨달아 갔다.
특히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이라는 구원사적 계시를 깨닫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었다는 것이 요한복음 20장 11~18절에서 사도 요한이 강조하는 바이다.
첫번째 부활에 대한 깨달음은 16절에서 '마리아야'라고 부르시는 부름에 의해서, 두번째 승천에 대한 깨달음은 17절에서 '나를 붙들지 마라'는 교훈에 의해서 암시되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에 대한 우리의 불완전한 지식을 말씀을 통해 조금씩 더 풍부하게 만들어 가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거나 자신의 영적인 귀를 하느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개방하지 않는다면, 신앙의 진보는 없다(묵시2,7).
한편, '올라간다'에 해당하는 '아나베베카'(anabebeka)는 '아나바이노'(anabaino)의 완료형 동사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이 성령을 제자들에게 보내주기 위해서 아버지께로 올라가야 하는데, 아직까지 올라가지 못하고 있는 상태를 강조함으로써 이렇게 당신이 마리아와 머물러 있는 것이 하느님의 구원 사업의 계획을 진행시키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니까 본문은 '내가 아버지께로 올라가야 하는데, 나의 사명이 완전히 종결된 것은 아니다'라는 의미이다.
사도 요한은 여기서 예수님께서 부활과 승천을 서로 단절된 별개의 사건으로 보지 않고, 구원 사업의 연속선상에서 당신 자신이 이루어야 할 구원사업의 마지막 마무리로 보고 계신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올라가다'에 해당하는 '아나바이노'(anabaino)가 미래형이 아니고 현재형으로 기록된 사실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앞으로 승천할 것이라는 것이 아니고 지금 승천하고 있는 과정 중에 있다는 사실이며, 이 사실을 망각하고 당신 자신을 이 땅에 계속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17절의 마지막 문장은 '(너는)가서 ~전하라'('포류우 ~에이페'; poreuu ~eipe; go ~say)라는 현재 명령형이다. 이것은 부활하심으로 끝나지 않고 이제 얼마있지 않아 승천해야 할 예수님을 붙들고만 있는 마리아에게 지금 바로 그녀가 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 주는 내용이다.
이 내용은 예수님 공생활 초기를 묘사하고 있는 요한 복음 1장 39절의 '와서 보시오'(come and see)라는 명령과 서로 대구를 이룬다.
이것을 종합해 보면, 예수님의 사업은 '데리고 와서 보여 주는 일'로 시작되었고, '내보내서 전하게 만드는 일'로 마친다고 볼 수 있다(요한20,21).
우리도 성숙한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항상 보고 들은 것으로 자족하지 말고, 그것을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야 하는 것이다(사도1,8).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다.>
바오로 사도는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
예언도 없어지고, 신령한 언어도 그치고, 지식도 없어집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인 것은 없어집니다.
......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1코린 13,8-13).”
바오로 사도는 왜, ‘믿음’이 으뜸이라고 말하지 않고,
‘사랑’이 으뜸이라고 말했을까?
‘믿음’과 ‘사랑’의 관계에 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1코린 13,2).”
‘사랑 없는 믿음’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고,
그래서 ‘사랑’이 으뜸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을 믿지만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사랑 없는 믿음’은 이기적인 기복신앙의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면 반대로 ‘믿음 없는’ 사랑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바오로 사도는 믿음 없는 사랑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은 믿음으로 바로 이어지기 때문에 말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왜, 어떻게, 사랑이 믿음으로 바로 이어지는가?
하느님은 사랑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믿게 됩니다.
사랑에는 그런 힘이 들어 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에서 가장 많이, 가장 깊이 예수님을 사랑했고,
그 사랑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진 인물이 바로 마리아 막달레나입니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요한 20,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11-13)”
마리아 막달레나가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이른 아침에 예수님의 무덤으로 간 일,
그리고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신을 모셔 갔다고 생각하고 울고 있었던 일 등은,
예수님에 대한 마리아의 지극한 사랑을 나타냅니다.
그때에는 아직 사도들이나 신자들에게는 부활 신앙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안 믿고 있었던 것에 대해서는 탓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떻든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더 깊이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마리아 막달레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를 가장 먼저 만나신 것에 대해서,
마리아 막달레나를 가장 많이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또는 편애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사람들 쪽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이런 약속을 하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18-21).”
무덤 앞에서 마리아 막달레나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일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라는
예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런데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생깁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바로 눈앞에 계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요한 20,14-15).”
그토록 사랑했던 예수님인데, 마리아 막달레나는 왜 알아보지 못했을까?
예수님의 모습이 변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고,
아직 부활 신앙이 없는 상태에서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아니라,
돌아가신 예수님의 시신을 찾고 있었고, 울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사랑하는 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생각이 눈을 지배하는 일은 누구든지 경험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요한 20,16).”
이 장면에서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요한 10,3-4).”
마리아 막달레나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자마자
바로 예수님을 알아보고 믿는 모습은,
‘사랑’은 믿음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잘 나타냅니다.
(예수님을 참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그 사랑이 곧바로 부활 신앙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8).”
송영진 모세 신부

오늘 복음은 마리아 막달레나가 점차 예수님을 알아 뵙게 되는 과정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생전에 마리아 막달레나에게서 일곱 마귀를 쫓아내신 적이 있었지요(루카 8,2 참조). 그 뒤 그녀는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하며 끝까지 예수님을 지키지 않았습니까?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어 그녀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셨지요. 물론 막달레나는 예수님께서 앞에 계신데도, 알아 뵙지 못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부르시지요.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예수님의 이런 화법은 무엇을 뜻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런 질문을 통하여 상대방이 자신의 처지를 스스로 깨닫게 하시지요. 이어 당신의 정체를 드러내십니다. 이때 요구하시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신앙입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예수님의 질문에 막달레나는 뭐라고 대답합니까?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이처럼 그녀는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예수님께 최선을 다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다른 이들은 모두 도망갔어도 그녀는 예수님에 대한 확신을 버리지 않았지요. 그 결과 예수님의 현존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대하게 되는 그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예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내 앞에 현존하시고 활동하고 계심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신약의 아가서
“마리아야! 라뿌니!”(요한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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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가 서 |
요한복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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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 “그대 연인이 다른 연인보다 나은 게 무엇인가?”(아가 5,9). |
천사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 2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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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자↘ “나의 연인은 눈부시게 하얗고 붉으며 만인 중에 뛰어난 사람이랍니다.”(아가 5,10). |
마리아↘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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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 “그대 연인은 어디로 갔는가?”(아가 6,2) |
예수님↘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 2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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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자↘ “나는 내 연인의 것, 내 연인은 나의 것. 그이는 나리꽃 사이에서 양을 친답니다.”(아가 6,3). |
마리아↘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요한 2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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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자↘ “나의 애인이여!”(아가 6,4) |
예수님↘ “마리아야!”(요한 2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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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자↘ “오셔요!”(아가 7,12). |
마리아↘ “라뿌니!(스승님)”(요한 2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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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자↘ “그대여, 친구들이 그대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구려.”(아가 8,13). |
예수님↘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요한 2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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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자↘ “일어라, 북새바람아! 오너라, 마파람아! 불어라.”(아가 4,16). |
마리아↘ (제자들에게)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18).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