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5주간 목요일]내 멍에를 메고 (마태 11,28-30)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다.”라고 하시며, 이집트 임금에게 가서 히브리인들을 내보내 달라고 말하라고 하신다. (탈출 3,13-20)
그 무렵 떨기나무 한가운데에서 주님의 목소리를 들은 13 모세가 하느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서,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분 이름이 무엇이오?’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14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15 하느님께서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신 야훼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이것이 영원히 불릴 나의 이름이며, 이것이 대대로 기릴 나의 칭호이다.
16 가서 이스라엘 원로들을 모아 놓고, ‘주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께서 나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고, 그들에게 말하여라. ‘나는 너희를 찾아가 너희가 이집트에서 겪고 있는 일을 살펴보았다. 17 그리하여 이집트에서 겪는 고난에서 너희를 끌어내어, 가나안족과 히타이트족과 아모리족과 프리즈족과 히위족과 여부스족이 사는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기로 작정하였다.’
18 그러면 그들이 너의 말을 들을 것이다. 너는 이스라엘의 원로들과 함께 이집트 임금에게 가서, ‘주 히브리인들의 하느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저희가 광야로 사흘 길을 걸어가, 주 저희 하느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여라.
19 그러나 강한 손으로 몰아세우지 않는 한, 이집트 임금은 너희를 내보내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20 그러므로 나는 손을 내뻗어 이집트에서 온갖 이적을 일으켜 그 나라를 치겠다. 그런 뒤에야 그가 너희를 내보낼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나에게 오라고 하시며,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우면 안식을 얻을 것이라고 하신다. (마태 11,28-3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제1독서 (탈출3,13-20)
모세가 하느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서,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분 이름이 무엇이오?'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14-15)
'그분 이름이 무엇이오?' 라고 번역된 '마 셰모'(ma shemo)에서 '이름'을 뜻하는 '솀'(shem)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고대 근동 사회에서 '솀'(shem)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어떤 사람을 부르는 데에만 사용되었던 것이 아니고,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의 성격이나 신분 또는 운명등을 반영하였다(창세17,5.15; 32,28).
따라서 과거 사람들은 그 이름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았으며,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했다(창세14,22; 16,13; 17,1).
창세기 14장 22절에서는 아브라함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이신 주님'으로, 창세기 16장 13절에서는 하가르가 '저를 돌보시는 하느님'으로, 창세기 17장 1절에서는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전능한 하느님'으로 소개하고 불렀다. 이런 이름들은 모두 하느님께서 누구인가를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한편 고대 근동의 임금이나 군주들은 사신을 보낼 때, 그 사신에게 자신의 권위를 전적으로 위임한다는 의미에서 자신의 이름이 담긴 인장을 주거나 아니면 그 인장이 찍힌 편지를 주었다. 모세는 이러한 차원에서 하느님의 신임을 요구한 것이다.
'나는 있는 나다'
'나는 있는 나다'의 원문은 '에흐예 아셰르 에흐예'(ehye asher ehye)이다. '에흐예'(ehye)는 '있다'(창세1,2)라는 뜻의 영어의 'be'동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야'(haya)의 1인칭 미완료형으로 '나는 존재한다'(I am) 또는 '나는 ~이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아셰르'(asher)는 'that, which, what, who' 등과 같은 관계대명사이다. 즉 '~것', '~자'의 의미로, 뒤에 나오는 문장을 묶어 앞뒤로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에흐예 아셰르 에흐예'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라는 뜻이다. 히브리어에서 동사의 미완료형은 완료되지 않은 동작이나 계속되는 상태를 나타낸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시간 개념처럼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영원으로부터 영원까지 존재하시는 분이심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묵시1,4.8).
이것은 결코 스스로는 존재할 수 없고 무엇인가 앞선 원인에 의해서만 존재하면서 또한 그 원인에 의해서 지배당할 수밖에 없는 여타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유일하게 스스로 존재하시며, 따라서 모든 원인으로부터 자유로우시고 나아가 다른 모든 피조물이 존재할 수 있는 궁극적 원인이 되어 주시는 하느님의 유일한 자존성(自存性)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영원자존자'(永遠自存者)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여타 피조물과 비교할 때, 당신의 고유한 본질과 성품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자존성을 나타내는 칭호를 당신의 이름으로 삼으신 것이다.
이것은 초월적 절대자로서 모든 인과(因果) 법칙을 초월하셔서 자존하시는 분으로서 전 우주에 퍼져 있는 여타 모든 피조물들의 궁극적 근거와 기반이 되시는 하느님의 자존성(自存性)과 영원성(永遠性)과 절대성(絶對性)을 그대로 반영한 이름이다.
또한 이 이름은 우선적으로 하느님의 자존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동시에 여타 모든 신들이 존재하지 않는 거짓 신들임에 비하여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살아계시는 분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에흐예'(ehye)라는 말에서 유래된 '야훼'(주님)이란 이름은 하느님과 그 백성의 계약 관계를 나타낼 때 많이 사용되었다. 즉 절대 초월자이신 하느님께서 각 계약을 체결하시고, 그 계약들의 신적 기원임을 강조하는 동시에 그 계약들이 영원한 하느님처럼 절대 불변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본문만을 보고, 하느님의 이름이 이때 모세에게 '에흐예'(야훼)로 비로소 처음 계시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창세기 2장 4절의 창조 기사에서부터 이 이름이 발견되며, 더군다나 창세기 4장 26절에서는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는 사실 즉 공식적인 예배가 드려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탈출기 3장 14절과 15절은 지금 계시를 주시는 분이 영원히 자존하시는 주님 ('에흐예'; 야훼)이심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준다는 의미를 가지며, 그 이름의 진정한 뜻에 대한 신적 해석이 비로소 이때 온전하게 알려졌음을 드러낸다.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복음(마태11,28~30)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28~30)
'고생하고'로 번역된 '코피온테스'(kopiontes)는 '육체적으로 피곤하고 지치다', '감정적으로 용기를 잃고 낙담하다'는 뜻을 가진 '코피아오'(kopiao)의 현재분사 2인칭 복수 호격이다.
희랍어에 있어서 분사형이 진행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것은 한 번 낙담하거나 지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계속 지치고 낙담 중에 있는 사람들아'라는 뜻이다.
그리고 '짐은 진 너희는'으로 번역된 '페포르티스메노이'(pephortismenoi)는 '남에게 어떤 짐을 지우다'라는 뜻의 '포르티조'(photizo)의 현재 완료 수동 분사 2인칭 복수 호격이다.
그러니까 이들은 '누군가에 의해 무거운 짐이 지워진 자들'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지워진 짐은 무엇인가? 그 짐은 일차적으로 바리사인들과 율법학자들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요구한 무거운 율법적 관행들(마태23,4)이며, 더 나아가 '마귀들의 꾐에 넘어가 지은 죄의 짐'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란 당시 로마의 압제 속에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치고 낙담한 사람들이며, 당시 종교적 관행이 요구한 율법의 짐과 마귀들의 꾐에 넘어가 지은 죄의 짐 사이에서 눌려 있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한편,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에서 '안식을 주겠다'에 해당하는 '아나파우소'(anapauso)는 '쉬게 하다','영적인 휴식을 주다', '안식하다'라는 뜻을 가진 '아나파우오'(anapauo)에서 유래했다.
특히 '아나파우오'에서 유래한 명사 '아나파우신'(anapausin)은 '쉼'이라는 뜻인데, '안식'과 동의어이다(히브3장,4장). 그리고 '내가'에 해당하는 '카고'(kago)는 '카이'(kai; and)와 1인칭 대명사인 '에고'(ego)의 복합어로서, '그러면 내가'라는 뜻이다. 본문에서 인칭대명사를 사용한 것은 동작의 주체를 강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원어의 뉘앙스를 살리면,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오는 지치고 피곤한 죄인들에게 '쉼'을 주시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쉼'(안식)은 인간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인데, 현재적인 '쉼'도 의미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천국에서 누릴 영원한 '안식'을 의미한다(히브3,18~4,11; 묵시14,13).
그리고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마태11,29)에서 '온유'로 번역된 '프라위스'(prays; gentle meek)은 '친절하고 너그러운 태도'를 가리키며(마태5,5), '겸손'으로 번역된 '타페이노스'(tapeinos; humble; lowly)는 높아짐과 반대인 '낮아짐'(야고1,10), 심지어 지위와 신분을 낮춘 '비천함' (2코린7,6), 혹은 자신을 일부러 낮추는 '겸허','겸비'(2코린10,1)를 나타낸다.
이것을 종합하여 반영하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오는 사람들을 향하여 친절하고 너그러운 마음가짐과 일부러 자신을 낮추는 겸허한 자세를 가졌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셨지만 고난받는 인자(人子)의 모습을 취하셨고(이사42,2.3; 53,1.2), 모든 권세를 받으신 만왕의 왕이셧으나 동시에 종이 되어 오셨으며, 높은 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종으로서의 삶을 사셨다. 그리고 당신 제자들에게도 그런 삶을 요구하셨다(마르10,43.44).
예수님께서는 낮고 비천한 자리에서 지치고 피곤한 자들에게 '눈높이 교육'을 하기위해 자신을 낮추셨으며,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취하시고 비천한 자리로 내려오셨던 것이다.
'진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30)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gar; for)로 시작되는 본문은 '주님의 멍에를 메고 그에게 배우면 왜 마음에 안식(쉼)을 얻는지'에 대한 이유를 밝혀 주는 이유 부사절이다. 그 이유는 주님의 멍에는 편하고 그의 짐은 가볍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본문은 '내 멍에는 편하고'의 전반부와 '내 짐은 가볍다'의 후반부가 동의적 평행 대구로 나열된 형태인데, 둘은 본질적으로 같은 뜻이다.
여기서 '멍에'로 번역된 '쥐고스'(zygos; yoke)는 가축이 짐수레를 효과적으로 끌 수 있도록 목에 씌우는 것을 가리키며, '짐'에 해당하는 '포르티온'(phortion)은 주로 배에 싣는 무거운 짐(burden)을 가리키는데(사도27,10), 여기서는 둘 다 비유적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이 '짐'은 율법학자들을 비롯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백성들에게 지운 무거운 종교, 의식적 행위들을 가리킨다(마태23,4; 루카11,46).
또한 '멍에' 역시 유대주의자들이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까지 강요한 무거운 율법적 행위들을 가리킨다(사도15,10).
반면에 주님의 멍에와 짐은 유대주의자들이 구원의 방도로 지키고 가르쳐 온 613가지의 교훈 및 규칙과는 다르게, 주님 자신의 가르침의 핵심인 '사랑의 계명'을 비유하는 표현이다.

<내 멍에를 메어라.>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이 말씀에서 ‘고생’과 ‘무거운 짐’은
신앙생활의 어려움들, 박해, 고난, 시련들로 해석할 수도 있고,
또는 인생살이의 어려움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인생 자체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시편 저자는 인생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의 햇수는 칠십 년, 근력이 좋으면 팔십 년.
그 가운데 자랑거리라 해도 고생과 고통이며,
어느새 지나쳐 버리니, 저희는 나는 듯 사라집니다(시편 90,10).”
예수님은 인생이라는 짐과 멍에 때문에 허덕이고 있는 인간들을 구원하려고
하늘에서 이 세상으로 오신 구세주입니다.
또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정녕 의로우시어,
여러분에게 환난을 겪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을 겪는 여러분에게는 우리와 같이 안식으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이 일은 주 예수님께서 능력을 지닌 당신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나타나실 때에 이루어질 터인데, ... (2테살 1,6-7).”
여기서 우선 먼저 ‘안식’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안식’은 하느님 나라의 참 생명과 참 평화를 누리는
지극히 행복한 상태로 해석됩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묵시 21,3-4).”
바로 이런 행복, 이런 평화가 ‘안식’입니다.
이 안식을 주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라는 말씀을,
요한복음에 있는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뜻을 생각하면, 두 말씀은 표현만 다를 뿐이고, 사실상 같은 말씀입니다.
여기서 ‘배고픔’과 ‘목마름’이라는 말은,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고통, 두려움, 슬픔 등을 가리키는 말로,
즉 ‘안식’과 정반대 상황을 가리키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런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입니다.
“모두 나에게 오너라.” 라는 말씀에서 베드로 사도가 했던 말이 연상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8).”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주님이시고, 목자이시고, 구세주이십니다.
참 생명, 참 평화, 참 행복, 참 안식을 누리려면 예수님만 믿고 따라야 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라는 말씀의 뜻은,
“내가 주는 안식을 얻으려면, 나를 믿고, 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라.”입니다.
여기서 ‘멍에’ 라는 말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멍에’를 주시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은,
우리가 메고 있는 온갖 멍에를 벗겨주는 열쇠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라는 말씀은,
“너희가 메고 있는 멍에를 벗겨 주는 열쇠를 내가 너희에게 줄 테니
이 열쇠를 받아서 내가 가르쳐 준 대로 사용하여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일에 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그래서 “혹시 멍에가 십자가를 가리키는 것은 아닌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만일에 예수님 뒤를 따라가는 과정에서 지게 되는 십자가가 멍에라면,
예수님 뒤를 따라가는 일 자체가 괴로운 일이 되어버립니다.
신앙인의 십자가는 참 해방과 참 자유와 참 안식을 얻기 위한 도구입니다.
그러니 멍에가 될 수 없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노력하면,
몸은 좀 고달프고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과 영혼은 기쁨에 가득 차게 됩니다.
(몸만 편히 쉬는 것은 안식이 아닙니다.
마음과 영혼이 참 평화를 누리는 것, 그것이 안식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휴식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안식은
완전히 차원이 다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설령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가 되어
여러분이 봉헌하는 믿음의 제물 위에 부어진다 하여도,
나는 기뻐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와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로 기뻐하십시오. 나와 함께 기뻐하십시오(필리 2,17-18).”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사도직 수행을 ‘멍에’로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겪는 고난과 박해를 ‘기쁨으로’ 견딜 수 있었는데,
신자들에게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무슨 일이든 투덜거리거나 따지지 말고 하십시오.
그리하여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필리 2,14-15).”
신앙생활은 억지로 해서 될 일이 아니고, ‘기쁨으로’ 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라는 말씀은,
“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은 너희의 멍에를 벗겨서 너희에게 편안함을 줄 것이고,
너희의 짐을 내려놓게 해서 너희를 가볍게 해 줄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집트에서 고통받는 이스라엘 민족을 끌어내는 사명을 새롭게 주십니다. 모세가 하느님께 징표를 받고자, 그들이 하느님의 이름을 물으면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하느냐고 아뢰자, 하느님께서는 “나는 있는 나다.”라고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은 항상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특정한 모습으로 당신 자신을 고정하지 않으시지요.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방법과 장소에 따라 사람을 구하시고자 자유롭게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서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시지요. 이런 의미로 “나는 있는 나다.”라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무거운 짐이란 형식적인 계명들입니다.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계명은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지요.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하느님을 알려면 사랑을 해야 합니다(1요한 4,8 참조). 하느님을 사랑하려면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하지요. 만일 하느님을 무서운 분, 벌하시는 분으로만 정의한다면 신앙생활이 얼마나 힘들고 어렵겠습니까? 불필요한 계명들만 많아질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려면 누가 내 이웃인지 알아야 합니다. 어느 범위까지를 내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요. 이웃을 예수님의 눈길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습니까? 만일 나에게 필요한 사람만 내 이웃으로 받아들인다면 매우 편협한 사랑이 될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