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4주간 금요일]아버지의 영 (마태 10,16-23)

2017. 7. 14. 오전 5:3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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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4주간 금요일]아버지의 영 (마태 10,16-23)


하느님께서 환시 중에 야곱에게 이집트로 내려가라고 하시자 야곱은 모든 자손을 거느리고 이집트로 가 요셉을 만난다. ( 창세 46,1-7.28-30)
그 무렵 1 이스라엘은 자기에게 딸린 모든 것을 거느리고 길을 떠났다. 그는 브에르 세바에 이르러 자기 아버지 이사악의 하느님께 제사를 드렸다. 2 하느님께서 밤의 환시 중에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다. 하느님께서 “야곱아, 야곱아!” 하고 부르시자,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그가 대답하였다. 3 그러자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하느님, 네 아버지의 하느님이다.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그곳에서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4 나도 너와 함께 이집트로 내려가겠다. 그리고 내가 그곳에서 너를 다시 데리고 올라오겠다. 요셉의 손이 네 눈을 감겨 줄 것이다.”
5 그리하여 야곱은 브에르 세바를 떠났다.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아버지를 태워 오라고 파라오가 보낸 수레들에 아버지 야곱과 아이들과 아내들을 태웠다. 6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얻은 가축과 재산을 가지고 이집트로 들어갔다. 야곱과 그의 모든 자손이 함께 들어갔다. 7 야곱은 아들과 손자, 딸과 손녀, 곧 그의 모든 자손을 거느리고 이집트로 들어갔다.
28 이스라엘은 자기보다 앞서 유다를 요셉에게 보내어, 고센으로 오게 하였다. 그런 다음 그들은 고센 지방에 이르렀다.
29 요셉은 자기 병거를 준비시켜, 아버지 이스라엘을 만나러 고센으로 올라갔다. 요셉은 그를 보자 목을 껴안았다. 목을 껴안은 채 한참 울었다.
30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말하였다. “내가 이렇게 너의 얼굴을 보고 네가 살아 있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는 기꺼이 죽을 수 있겠구나.”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보내시며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라며, 내 이름 때문에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 (마태 10,16-23)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16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17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18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19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20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21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22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23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제1독서 (창세46,1~7. 28~30)

"나는 하느님, 네 아버지의 하느님이다.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그곳에서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46,3) 

 '나'라는 뜻을 가진 일인칭 대명사 '아노키'(anoki; i am)주어를 강조할 때 쓰인다. 하느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을 강조하시는 것으로 말씀을 시작하신다. 

'하느님, 네 아버지의 하느님'에서 앞의 '하느님'에 해당하는 '하엘'(hael)은  정관사 '하'(ha)를 동반한 단수형이며, 뒤의 '하느님'에 해당하는 '엘로헤'(ellohe)은 복수형이다. 따라서 문자적으로 '(나는) 그 엘이니 네 아버지의 엘로힘(이다)'이 된다. 

특히 하느님의 명칭 중 '엘'(el)과 그 복수형 '엘로힘'(ellohim)은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강조하는 이름이다.  

특히 '엘'(el)은 '능력자'로 번역될 수도 있다. 말하자면, 하느님께서는 너의 아버지와 함께 했던 그 능력자 하느님이 바로 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관념 속에만 존재하시는 추상적인 신이 아니라 필요할 때 이렇게 친히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으로 불안해 하는 야곱에게 능력의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과 도움을 베푸신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을 주시려는 사려깊은 배려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을 '야곱의 아버지(이사악)의 하느님'으로 드러내시는 것은 이사악을 돌보시던 동일한 사랑으로 야곱을 돌보시겠다는 암시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두려워하지 마라' 

'두려워하지 마라'로 번역된 '알 티라'(al thira)에서 부정어 '알'(al)바램, 소망 (창세13,8; 판관19,23)이나 선택(잠언17,12)을 촉구하는 문장에서 사용되는 단어로서 권고적인 금지의 의미가 있다.  즉 강한 금지를 나타내는 '로'(lo) 보다는 훨씬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부정어이다.

따라서 '두려워하지 마라'는 하느님의 말씀은 불신앙에 대한 책망이라기 보다 위로의 말씀인 것이다.  

'내가 그곳에서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원문에는 '왜냐하면'으로 번역되어 이유나 근거를 나타내는 접속사 '키'(ki)로 시작된다. 본문의 서두에 '키'(ki; for)로 시작하며, 큰 민족을 만들어 주겠다는 말씀이 야곱이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바로 그 이유임을 밝히고 있다. 

이집트가 야곱의 눈에는 두려움의 땅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오히려 이집트의 풍부함을 사용해서 이스라엘을 큰 민족으로 만들 계획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큰'으로 번역된 '까돌'(gadol; great)'강하다', '우람하고 크다'(신명2,10), '부유하다'(1사무25,2), '존귀하다', '위대하다'(2사무7,9)로도 번역되는 단어인데, 야곱의 후손들이 단지 그 수효가 많아지는 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실로 위대한 민족이 될 것임을 보여주는 단어이다. 

과거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창세12,2; 18,18) 이사악에게(창세26,4.24) 내리신 복이었고, 야곱 자신에게도 여러 번 확증시킨 적이 있는, 위대한 민족을 만들어 주겠다는 복에 대한 약속을(창세28,3.14; 35,11), 바로 지금 내려가게 될 이집트에서 이루실 것임을 다시 한번 알려주는 것이다. 

'그곳에서'로 번역된 '샴'(sham)'장소'를 나타내는 부사이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 즉 이방인의 땅에서 430년간 나그네로 살게 될 것이지만 큰 민족을 이루게 된다는 그 약속이(창세15,4.5.13.14) 성취될 장소가 바로 이집트라는 것을 명확히 밝히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신으로 가나안 지역의 남방 경계선인 브에르 세바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야곱에게 이집트가 바로 약속 성취의 장소임을 분명히 지적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야곱에게 있어서 큰 아픔을 주었던 요셉의 실종이나 기근이 하느님의 오묘하신 뜻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가 되고 있음을 발견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믿는 이들은 어려움과 불확실함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발견해야 하고, 바로 '그곳에서'(샴) 하느님의 역사(役事)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창세기 45,27을 보면, 야곱은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고 이집트의 재상이 되어 자신을 모시고 오라는 명을 내렸다는 말을 믿지 않다가 요셉이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야  믿는다. 

하지만 야곱의 생각을 복잡하게 하는 것이 있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이 약속하신 축복의 땅(가나안)을 놓고 가는 것이 과연 하느님의 뜻인가?  하는 것이다.

오늘 독서의 창세기 46,1을 보면, 일단은 이름이 <이스라엘>이 된 야곱이 자기에게 딸린 모든 것을 거느리고 길을 떠난다. 그런데,이집트로 들어가기 전, 가나안의 경계인 브에르 세바에서 자기의 아버지 이사악의 하느님께 제사를 드린다. 

우리는 이것을 배워야 한다. 무슨 일을 결정할 때, 결정하고도 불안할 때 해야할 일이 제단을 쌓고 제물을 드리는 일이다. 멈추어 서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제사를 드렸을 때, 하느님의 음성이 들리고, 그분의 마음이 느껴지고, 그분의 인도를 받는다. 

희생 제사를 드린 날 밤의 환시중에, 하느님께서 "야곱아, 야곱아"하고 부르신다.(창세46,2)

약속을 지키는 신실하신 하느님, 복받을 자격이 없으면 자격을 만들어서라도 복주시고 사랑하시는 하느님, 죄인을 의인으로 만들어서 복을 주시는 하느님이 야곱을 부르신다. 

"예, 여기 있습니다."라고 야곱이 대답하자 "나는 하느님, 네 아버지의 하느님이다." 하신다.  여기 창세기 46,3 의 "나는 하느님" 이 인데,' 하'는 정관사 'the'와  같다. 그래서 <내가 바로 그 하느님이다, 네 아버지 이삭의 하느님이다>라는 뜻이다.

아비에게 주신 약속을 아들에게도 주시는, 약속과 복을 전승시키는 신실하신 하느님이시다고 말하는 것이다.  

창세기 46,3 을 보면, 하느님은 야곱의 제사에 대해 이런 응답을 주신다. 

첫째, "나는 네 조상의 하느님"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필요해서 급조된 하느님이 아니다는 것이다.  태초부터 계신 하느님, 천지를 창조하시고 역사를 이끄시는 하느님,  네 조상을 믿음으로 세우신 하느님, 너를 지으신 바로 그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둘째, "이집트를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는 말씀을 주신다.  하느님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주셨는데, 이제는 이집트로 가라고 하신다.  하느님이 하라고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은 무조건 순명하고 해야 복이 있다.  다른 것에 기웃거리고 고집부리면, 건강도 명예도 잃고, 시간도 잃고 돈도 잃는다.

세째, "내가 이집트에서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는 말씀을 주신다. 거기 이집트에서 약속을 이루겠다고 하신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씀은 이집트에 나도 너와 함께 내려갈 것이며,  그곳에서 다시 너를 데리고 올라오고, 요셉의 손이 너를 눈감게 해 줄 거라는 것이다. 하느님은 이집트에서 영원히 살게 하시지 않고 다시 돌아 오게 하겠다. 말하자면, 결로은 약속의 땅(가나안)이다.

이 말씀을 들었을때, 야곱은 모든 불안이 사라지고, "휴우~~"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약속의 말씀은 창세기 46,28-29 에 이집트 고센지방에서 요셉과 야곱의 극적 상봉이 눈물속에 성취되면서 험한 세월을 살았고 소망이 없던 늙은 야곱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고백을 하게 만든다.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복음 (마태10,16-23)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게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16)

열두 사도의 파견과 관련된 '선교 활동 대상과 내용 및 복음 전파자로서의 자세에 관한 교훈'(마태10,5~15)을 마친 후에, 복음 전파자로서 제자들이 받게 될 박해와 고난에 대한 예고 및 교훈(마태10,16~23)이 나온다.

제자들이 받게 될 박해는 유다인들로부터 뿐만 아니라 이방의 권력자들로부터도 올 것이다(마태10,17~18).

또한 마태오 복음서의 일차 독자인 유다계 크리스챤들에게 이글이 읽히는 시기도 여러 가지 박해 가운데 있을 때였다.

그리고 본 단락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박해받는 자를 도우시는 성령과(마태10,20), 구원 (마태10,22)과 주님의 재림(마태10,23)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복음 전파자로서 박해 받는 일이 영원하지 않으며, 종국에는 하느님의 축복이 있을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서 '나는'이라고 번역된 '에고'(ego) 일인칭 남성 단수 대명사 주격이다.

희랍어에는 동사에 주어의 인칭이 포함되므로, 굳이 인칭 대명사 주격을 기록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에고'(ego)라는 주어를 사용한 것은 제자들을 복음 전파자들로 파견하시는 일의 주권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유다교의 글에서 '양'에 해당하는 '프로바톤'(probaton)이스라엘을, 그리고 '이리'에 해당하는 '뤼코스'(lykos)이방 민족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에서는 '양'은 거의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교회'가리키고, '이리'는 신약 성경에서 교회를 해치려는 세력을 상징한다(요한10,12; 사도20,29)..

한편 마태오 복음 10장 16절에서 '뱀'으로 번역된 '오페이스'(opheis)직역하면 '뱀들'(serpents)이며, 원형 '오피스'(ophis)는 희랍어 구약 성경인 70인역(lxx)에서는 창세기 3장 1절에 나오는 '뱀'과 동일한 단어이다.

이러한 전통에 따라 코린토 2서 11장 3절에서도 '뱀'(ophis)하와로 하여금 선악과를 따먹도록 유혹한 간계와 교활함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 10장 16절에서는 뱀의 특성 가운데 교활함이 아닌 '슬기', '지혜'(wisdom)를 가진 것으로 말하고 있다. 또한 '비둘기'에 해당하는 '페리스테라'(peristera; dove)는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분노하지 않는 '선'(virtue) 악에 오염되지 않는 '순박', '순결'(purity)의 상징이었다.

여기서는 두 짐승이 모두 '박해'와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로마서 16장 19절에서 사도 바오로가 교훈한 것처럼, 악한 세력으로부터 박해를 받을 때 악에 대해 실제적인 통찰력을 가짐과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처럼 간교하지 않은 선(善)을 가지고 악(惡)을 이기라는 뜻이다.

선(善)이 없는 지혜(슬기)는 간교함이며, 지혜(슬기)가 없는 선(善)은 악한 세력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양자의 균형잡힌 구비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지혜(슬기)는 사람의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믿는 이들 안에 계셔서 도우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지혜를 말한다.



<박해를 각오하여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마태 10,16-18).”

 

이 말씀에서 ‘이리 떼’는, 예수님의 제자들을(신자들을) 붙잡아서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총독들과 임금들 앞으로 끌고 가는”

박해자들을 가리키는데, 그들은 순한 양을 잡아먹으려고 하는 이리 떼처럼

제자들을(신자들을) 괴롭히고, 고문하고, 죽일 것입니다.

여기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라는 말씀을,

“이리 떼 같은 박해자들 가운데에 있게 되더라도 양의 본성을 잃지 마라.”

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박해자들이 이리 떼처럼 덤벼들어도

신앙인은 자신이 ‘목자이신 예수님의 양’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되고,

살든지 죽든지 간에 양의 본성을 버리면 안 됩니다.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양’으로서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

또 어떻게 선교활동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뱀’은 ‘지혜’를 상징하고, ‘비둘기’는 평화, 온순함 등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지혜롭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신앙인답게 사는 것이 지혜롭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지혜’를 ‘주님을 경외함’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집회 1,14.16.18.20).

이리 떼 가운데에 놓여 있는 양 같은 처지가 되어도

신앙인답게 사는 것을 포기하면 안 됩니다.

박해와 고난이 힘들어서 신앙인답게 사는 것을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는 것’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갚는 것,

원수도 사랑하고 박해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는 것입니다(마태 5,44).

‘하느님의 선의 힘’이 ‘악의 힘’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믿어야 하고,

선으로써 악을 굴복시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라는 말씀은, “사람들이 너희를 박해하여도

믿음을 잃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 증언할 것이다.”는 “박해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인데,

“박해를 받더라도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멈추지 마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2티모 4,2).”

“그대는 어떠한 경우에도 정신을 차리고 고난을 견디어 내며,

복음 선포자의 일을 하고 그대의 직무를 완수하십시오(2티모 4,5).”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19-20).”

 

이 말씀은, ‘성령의 힘과 도움’을 믿으라는 가르침입니다.

복음을 선포할 때, 또 신앙을 증언할 때,

자신에게 말재주가 없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복음 선포와 신앙의 증언은 말재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합니다.

그러니 성령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하면 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용기와 힘을 주실 것입니다.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라는 말씀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서,

“어떻게 신앙을 지킬 수 있을까 걱정하지 마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사람의 힘으로만 하는 생활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살아계시는 하느님의(성령의) 힘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신앙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어떤 고난과 박해가 닥쳐도 신앙을 지키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온 마음을 다해 믿고, 기도하고, 인내하는 일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자기는 의지가 약하다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성령께서는 약한 의지도 강하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마태 10,21-23).”

 

가정에서의 박해는 정말로 견디기 힘든 고통이 될 텐데,

그런 경우에도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라는 원칙을 유지해야 합니다.

베드로 1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교인들 가운데에 살면서 바르게 처신하십시오.

그래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라고 여러분을 중상하는 그들도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지켜보고,

하느님께서 찾아오시는 날에 그분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 2,12).”

“......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남편들도

아내인 여러분의 말 없는 처신으로 감화를 받게 하십시오(1베드 3,1).”

종교와 신앙을 이유로 식구들과 싸우는 것은 역효과만 일으키는 일이 될 것이고,

‘말 없는 처신으로’ 감화를 받게 하는 일만이

슬기롭고 순박하게 박해를 극복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는 것처럼 여겨지는 극한의 상황이 되더라도,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끝까지, 즉 죽을 때까지 노력해야 합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라는 말씀은,

박해를 피할 수 있다면 피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육신의 목숨을 지키라는 뜻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계속하라는 뜻입니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라는 말씀은 정확하게 해석하기가 어려운 말씀인데,

박해자들이 그리스도교를 없애려고 해도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고,

마지막 승리는 예수님 쪽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제자직의 본질인 고통의 수용  

오늘 복음은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박해, 시련, 고통, 재판, 미움을 받게 된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10,21). 이러한 일은 사람들이 ‘올곧지 않아’(미카 7,6)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분의 정의와 진리를 거부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도 기쁠 때보다는 고통스러울 때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암담한 미래의 벽 앞에 좌절하는 젊은이들, 기본적인 생계유지마저 힘든 비정규직 노동자들, 늘어만 가는 가계 부채 앞에 한숨 쉬는 수많은 서민들, 고독사를 택하는 노인층 등 고통과 시련은 그렇게 호흡처럼 우리들 가까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 때문에 더한 고통과 박해를 받게 된다니 참 힘든 삶입니다. 

어떻게 고통 가운데서 예수님을 따라야 할까요? 먼저 인간의 죄로 인한 고통은 힘을 모아 저항하고 극복하도록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고 괴로워하시기 때문입니다. 한편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고통도 있습니다. 그런 고통은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채우는"(콜로 1,24)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고통 앞에 무조건 인내해야 한다거나 고통을 하느님의 벌로 생각한다거나 정화의 과정이라고 쉽게 단정해버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막연히 고통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칠 때에는 고통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됩니다. 또한 고통 그 자체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고통을 함께 지려는 의지와 마음이며, 구체적으로 함께 나누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삶에서 십자가의 수난을 수용하지 않은 채 부활의 영광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고통은 피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직면하고 끝까지 참아내고 사랑으로 받아들이며 서로 나눌 때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인도할 것입니다. 우리는 고통과 박해 상황을 주님께 대한 믿음 안에서 순박함과 지혜로움, 신뢰와 인내, 곧 죽음보다 강한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10,16). 

고통은 인생의 본질적인 부분이요, 고통의 수용은 예수님의 제자직의 본질입니다. 이제 우리를 위하여 갖은 박해와 멸시를 받으시고 고통 중에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나의 이 무거운 짐’을 그분께로 가지고 갑시다. 보이지 않지만 참으로 고귀한 예수를 따르는 삶에 힘과 용기를 모아 앞만 보며 그분께로 달려갑시다.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겪는 고통은 결코 헛되지 않으며 우리를 영원 생명에로 이끌어줄 것입니다. 이제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씀을 듣고 용기를 냅시다.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5,3-5) 

우리 모두 삶이 고달프고 나를 속일지라도 주님 안에 머물고 그분만 차지할 수 있다면 고통은 오히려 기쁨이 될 것임을 믿어야겠습니다. 오늘도 일상에서 하느님의 선과 정의를 위하여 예수님의 마음으로 겪어내는 고통의 씨앗에 숨겨져 있는 참 행복의 보화를 알아보는 기쁜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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