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5주간 화요일] 회개(마태 11,20-24)

2017. 7. 18. 오전 4:5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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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5주간 화요일] 회개(마태 11,20-24)

파라오의 딸이 강에서 건져 기른 모세는, 자기 동포인 히브리 사람을 때리는 이집트인을 때려죽이고 도망친다. (탈출 2,1-15ㄴ)
그 무렵 1 레위 집안의 어떤 남자가 레위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2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기가 잘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겨 길렀다.
3 그러나 더 숨겨 둘 수가 없게 되자, 왕골 상자를 가져다 역청과 송진을 바르고, 그 안에 아기를 뉘어 강가 갈대 사이에 놓아두었다. 4 그리고 아기의 누이가 멀찍이 서서 아기가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5 마침 파라오의 딸이 목욕하러 강으로 내려왔다. 시녀들은 강가를 거닐고 있었는데, 공주가 갈대 사이에 있는 상자를 보고, 여종 하나를 보내어 그것을 가져오게 하였다. 6 그것을 열어 보니 아기가 울고 있었다. 공주는 그 아기를 불쌍히 여기며, “이 아기는 히브리인들의 아이 가운데 하나로구나.” 하였다.
7 그러자 아기의 누이가 나서서 파라오의 딸에게 말하였다. “제가 가서, 공주님 대신 아기에게 젖을 먹일 히브리인 유모를 하나 불러다 드릴까요?” 8 파라오의 딸이 “그래, 가거라.” 하자, 그 처녀가 가서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왔다.
9 파라오의 딸이 그에게 말하였다. “이 아기를 데려다 나 대신 젖을 먹여 주게. 내가 직접 그대에게 삯을 주겠네.”
그리하여 그 여인은 아기를 데려다 젖을 먹였다. 10 아이가 자라자 그 여인은 아이를 파라오의 딸에게 데려갔다. 공주는 그 아이를 아들로 삼고,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냈다.” 하면서 그 이름을 모세라 하였다.
11 모세가 자란 뒤 어느 날, 그는 자기 동포들이 있는 데로 나갔다가, 그들이 강제 노동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때 그는 이집트 사람 하나가 자기 동포 히브리 사람을 때리는 것을 보고, 12 이리저리 살펴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 그 이집트인을 때려죽이고서 모래 속에 묻어 감추었다.
13 그가 이튿날 다시 나가서 보니, 히브리 사람 둘이 싸우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잘못한 사람에게 “당신은 왜 동족을 때리시오?” 하고 말하였다. 14 그자는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와 판관으로 세우기라도 했소? 당신은 이집트인을 죽였듯이 나도 죽일 작정이오?” 하고 대꾸하였다. 그러자 모세는 “이 일이 정말 탄로 나고야 말았구나.” 하면서 두려워하였다.
15 파라오는 그 일을 전해 듣고 모세를 죽이려 하였다. 그래서 모세는 파라오를 피하여 도망쳐서, 미디안 땅에 자리 잡기로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않자,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 소돔 땅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라며 꾸짖으신다. (마태 11,20-24)
20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1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22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23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24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제1독서 (탈출2,1-15ㄴ)

그가 이튿날 다시 나가서 보니, 히브리 사람 둘이 싸우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잘못한 사람에게 "당신은 왜 동족을 때리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자는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와 판관으로 세우기라도 했소?  (2,13-14ㄱ) 

'잘못한 사람'에 해당하는 '라샤'(rasha)'죄인', '악인'(창세18,23), '살인자'(민수35,31), '악인', '악을 행하는 자'(시편75,5; 잠언24,19)로도 번역된다. 이것은 단순히 판단을 잘못하여 실수를 한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사악한 행동을 한 '악인'을 일컫는 말이다.

'당신은 왜 동족을 때리시오?' 

'동족'에 해당하는 '레아'(rea)'친구'(창세38,12; 신명13,6), '여인', '연인'(예레3,1.20; 호세3,1)으로도 번역되는 단어로서 '매우 친밀한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모세가 서로 싸우고 있던 두 히브리인들에게 '본토인'(레위18,26)이라는 뜻의 '에즈라'(ezra)라는 말 대신에 특별히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같은 동포, 동족간의 관계가 '친구'와 '연인'처럼 친밀한 관계이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모세는 지금까지 왕궁에서 성장해 왔기 때문에 히브리인들이 당하는 것과 같은 고통을 체험하지는 못했지만, 히브리인들에게 뜨거운 민족애를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탈출기 2장 9절에 나오는대로, 모세의 어머니 요케벳(민수26,59; 남편은 아므람 :1역대6,3; 23,13)이 단순히 수유만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유아 교육까지도 맡게 되었고, 모세가 '주님 신앙'을 갖게 되고 40년에 가까운 궁중생활에서도 히브리인으로서의  민족 의식을 잃지 않았던 것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요케벳을 통한 히브리식 교육의 덕택이라고 본다. 

히브리인들은 보통 3살 정도에서 젖을 떼었으므로(창세21,8; 1사무1,22-24 ; 2역대31,16) 탈출기 2장 10절에서 아이가 자랐다는 말은 젖을 먹지 않아도 될 만한 나이인 서너 살이 되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모세가 어머니의 품을 떠나 이집트의 궁전으로 들어간 때는 그의 나이가 3,4세 정도로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적어도 3-4년을 어머니의 젖을 먹고 양육되었으니, 모세의 피속엔 히브리인의 피가 흐르는 것이고, 적어도 어머니의 무릎팍에서 전수된 성조들로부터 물려받은 신앙과 선민의식과 민족애는 40년간의 이집트 궁중에서의 고등 교육에서도 지워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오히려 이집트 궁중에서 왕자 교육을 받으면서 더욱 더 자신의 민족에 대한 의식과 사랑이 확고부동하게 성장했을 것이다. 

바로 그러한 시각으로 자신의 동족(동포)들을 바라보는데, 같은 혈통을 가지고 동일하게 이집트인으로부터 극심한 고통을 당하며, 주님 신앙을 공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이해하며 사랑하기는 커녕 서로 때리고하는 모습을 보자 모세는 그들에 대한 분노가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와 판관으로 세우기라도 했소?' 

여기서 '지도자'로 번역된 '사르'(sar)'다스리다', '주관하다'(에스텔1,22; 잠언8,16)라는 뜻을 지닌 '사라르'(sarar)에서 유래한 단어로, '우두머리', '주관자'(잠언28,2), '관리', '사람'(1열왕5,16)이라는 뜻인데, 탈출기 1장 11절에 나오는 '감독'과 동일한 단어이다. 

히브리 사람은 자신들에게 고역을 부과하기 위해서 이집트인들이 세운 관리 제도를 기준으로 해서 모세가 자신들의 일에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이 도무지 없음을 말했던 것이다. 

어쩌면 이집트 왕자의 신분이었던 모세는 히브리인들의 눈에 동포들의 아픔을 외면하고 자기 혼자 궁중에서 호의호식하는 민족 배반자로 비쳐졌을 수도 있다. 

결국 히브리인의 이러한 반감어린 말로 인해, 같은 동족으로서 동족의 문제에 과감히 끼어든 모세의 동포애는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다. 

그리고 '판관'으로 번역된 '쇼페트'(shophet)'판가름하다', '판결하다'(민수35,24) 뿐만 아니라 '징벌하다', '심판하다'(2역대20,12)는 의미도 있는 '샤파트'(shaphat)의 분사형이다.

따라서 이것은 단순히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재판장', '판관'(신명1,16)이란 뜻만이 아니라 상벌을 시행하는 '관원', '통치자'(시편2,10), '방백', '판관'(1사무7,16)의 뜻도 있다.

이 구절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때와 방법이 아닌 모세 자신의 방법과 자기식의 의(義)로 모세가 스스로 자기 힘으로 동족 이스라엘을 구하고 싶다는 표현을 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것이 바로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와 판관으로 세웠다는 말이요?' 의 내면적 뜻이다.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복음 (마태11,20-24)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23~24)

카파르나움(gapernaum)예수님의 갈릴래아 활동의 전략적 요충지였으며(마태4,13), 특히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을 베푼 곳이었다(마태8,5~12; 14~17; 9,1~8).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권능을 많이 체험하고도 완고하고 사악하여 그들의 교만이 하늘에 닿았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심판을 선언하셨다.

여기서 '아니'(not)라는 뜻을 지닌  부정(否定) 불변사 '메'(me)부정적인 대답이 예상되는 질문에 쓰인다.

이런 원어의 뉘앙스를 살려 해석하면, '네가 하늘까지 높아지겠느냐? 그러나 결코 높아지지 못할 것이다'라는 뜻이 된다. 카파르나움이 하늘에까지 높아질 수 없음을 반어법적으로 강조해 주는 것이다.

특히 이 구절은 구약의 이사야서 14장 13절과 14절에 나오는 '나는 하늘로 오르리라. 하느님의 별들 위로 나의 왕좌를 세우고 북녘 끝 신들의 모임이 있는 산 위에 좌정하겠다. 나는 구름 꼭대기로 올라가서 산 위에 좌정하리라.'는 말을 연상시킨다. 구절은 역사상 바빌론을 가리키며, 영적으로는 사탄의 교만을 나타낸다.

당시 카파르나움의 교만함이 역사상 대제국 바빌론의 교만과 영적으로는 사탄의 교만에까지 비교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 11장 23절의 후반부 역시 하늘까지 교만했다가 저승으로 떨어졌던 사탄의 세력에 대한 이사야서 14장 12~13절의 묘사를 연상시킨다.

여기서 '저승'에 해당하는 '하두'(hadou; hell; the depths)원형 '하데스'(hades)'보다'(to see)라는 뜻을 가진 '에이도'(eido) 부정 접두어 '아'(a)가 붙어 보이지 않는(not to be seen) '지하의 깊은 세계'라는 뜻을 가진다.

신약에서 '저승'무신론자들이 벌을 받는 장소로 여겨졌다. 특히 마태오 복음 11장 23절과 24절의 문맥을 볼 때, '저승''소돔'(sodom)에 비유된다.

성경은 소돔(sodom)이 하늘의 유황불이 내려 멸망했다고 말한다(창세19,1). 그런데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소돔 부근의 아스팔트(역청) 구덩이(창세14,10)이 있어 지진에 의해 땅이 함몰했고,  석유와 가스의 폭발 때문에 불바다가 되어 사해 속으로 사라졌다고 본다.

마치 땅이 입을 벌려 코라에게 딸리 모든 사람과 모든 재산을 삼켜 버렸으므로 그들이 저승에 빠졌던 것처럼(민수16,31~33), 소돔도 땅속으로 꺼져들어가 멸망했던 것이다.

실제로 소돔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사해 저지대에 있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지중해보다 해발 392m가 더 낮은 지중해의 해수면 아래에 잠기게 된 소돔은 지구상의 저승과 같은 곳이다.

그러니까 마태오 복음 11장 23절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하고 사악한 죄를 저지른 카파르나움이야말로 지상의 저승인 소돔보다 더 깊은 저승까지 낮아질 것이라는 예수님의 엄정한 심판의 선언이 담겨져 있다.

한편 마태오 복음 11장 24절'견디다'는 뜻으로 번역된 '아네크토테론'(anektoteron; more tolarable; more bearable)'지속할 수 있는', '참을 수 있는'이란 뜻을 가진 '아네크토스'(anektos)의 비교급이다.

이러한 비교급의 뉘앙스를 가지고 다시 번역하면, '소돔 땅의 사람들이 카파르나움 사람들보다 심판을 더 잘 견디고, 더 잘 참아낼 수 있을 것이다'는 뜻이다.

이것은 마치 심판에도 등급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지만, 본문은 심판의 차별성에 강조점이 있다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카파르나움 사람들의 죄가 참으로 크며, 심판 날에는 반드시 처벌받게 될 것이라는 확실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마태 11,20-24)”

 

1) 예수님께서는 왜, 회개하지도 않을 고을들에게 은혜를 많이 베푸셨을까?

그들이 회개하지 않을 것을 모르셨을까?

이것은 하느님의 전지전능이 아니라,

인간들의 자유의지에 초점을 맞춰서 생각할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분”입니다(마태 12,20).

예수님은 사람의 눈에는 전혀 가망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 죄인들도

어떻게든 구원하려고 애를 쓰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에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은

그들이 회개하기를 기대하셨기 때문입니다.

(회개하라고 사랑을 베풀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받으려고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고 있기 때문에 회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대해서 이렇게 한탄하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마태 23,37).”

이 말씀은 예수님의 사랑과 안타까움을 잘 나타냅니다.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에게 하신 말씀도

예수님의 사랑과 안타까움을 나타내는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2) 예수님의 불행 예고 말씀은,

이미 확정되어 있는 미래를 예언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으면’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따라서 지금 죄 속에 있더라도 ‘회개하면’ 심판과 멸망을 피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꾸짖으시는 것은 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서이고,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미 멸망이 확정되어 있다면 꾸짖을 필요가 없습니다.)

 

‘니네베’ 라는 도시의 경우에,

요나 예언자가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고 선포하자,

하느님을 믿고, 단식을 선포하고, 회개합니다(요나 3,4-9).

그래서 재앙을 피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요나 3,10).”

이 말을 겉으로만 보면,

하느님께서 한 번 결정하신 일을 나중에 취소하신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아니고, 하느님께서 요나에게 니네베의 멸망을 선포하라고 시키셨을 때,

“회개하지 않으면 사십 일 뒤에 니네베는 무너진다!”

라고 선포하라고 시키셨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살고 싶으면 사십 일 안에 회개하여라.” 라는 뜻의 선포입니다.)

 

3) 예수님께서는 왜 티로와 시돈에서는 왜 기적을 일으키지 않으셨을까?

예수님께서 주로 갈릴래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시고,

이방인 지역에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제자들에게 맡기신 것은

복음 선포의 순서일 뿐이고, 이방인 지역을 차별 대우하신 일은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티로와 시돈 지방에서

기적을 행하신 일도 있습니다(마태 15,21-28).

소돔의 경우를 보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롯에게

미리 소돔의 멸망을 예고하셨기 때문에

소돔 사람들에게 회개할 수 있는 시간을 주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창세기 19장에 있는 롯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소돔 사람들을 회개시키기 위한 기적이 전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4) 하느님께서 어떤 도시를 멸망시키실 때,

단순히 그 도시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시민들이 전부 다 무조건 멸망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소돔의 멸망을 예고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진정 의인을 죄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

...... 의인을 죄인과 함께 죽이시어 의인이나 죄인이나 똑같이 되게 하시는 것,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 온 세상의 심판자께서는 공정을 실천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창세 18,23-25)”

그러자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소돔 성읍 안에서 내가 의인 쉰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들을 보아서 그곳 전체를 용서해 주겠다(창세 18,26).”

개인에 대한 심판은 개인적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느님은 의인을 악인과 함께 취급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의인이라고 해도 악인과 함께 있다가 휩쓸리는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천사가 롯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 이 성읍에 벌이 내릴 때 함께 휩쓸리지 않으려거든,

그대의 아내와 여기에 있는 두 딸을 데리고 어서 가시오(창세 19,15).”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 멸망을 예고하실 때,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루카 21,20-21).

여기서 휩쓸리지 말라는 말은,

다른 사람들이 멸망하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악인들의 죄에 휩쓸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은 다수결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전부 다 어떤 하나의 길을 걸어가고 있더라도,

그 길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길이라면 신앙인은 다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신앙인은 외롭고 힘들어도 ‘좁은 문’을 향해서 걸어가는 사람입니다(마태 7,13).

송영진 모세 신부


오늘의 묵상

오늘 제1독서를 보면 모세가 등장합니다. 모세는 구약 성경 전반부에 등장하는 가장 위대한 인물이지요.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구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율법의 모체가 되는 십계명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일생은 파란만장했지요. 태어나자마자 죽을 고비를 넘겼고, 우여곡절 끝에 이집트 왕궁에서 자라게 되었습니다. 출생 비밀을 알게 된 모세는 동족을 위한 일이 탄로 나 미디안으로 도망칩니다. 그 심정은 어떠하였겠습니까?
하지만 모세가 그 미디안 땅에서 암울하게 지내는 기간은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장차 더 큰 일을 하려고 자신을 정화하는 시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있는 고을들인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을 꾸짖으십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이미 예수님을 뵙고 기적마저 체험했지요. 그런데도 그들은 회개하지도 않고, 변화된 삶을 살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지한 이방인들, 죄악으로 물든 티로나 시돈, 소돔 사람들보다 주님을 아는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더 큰 책임을 져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을 함으로써 내 삶이 어떻게 변했는지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가족 관계, 인간관계는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또한, 내가 아직도 놓지 않은 악습이 있다면, 이를 어떻게 변화시켜 나갈 것인지 성찰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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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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