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6주간 목요일] 하늘 나라의 신비 (마태 13,10-17)

2017. 7. 27. 오전 5: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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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하늘 나라의 신비 (마태 13,10-17)


이스라엘 자손들이 시나이 광야에 진을 치자, 주님께서는 온 백성이 보는 앞에서 시나이 산 위로 내려오시어 모세를 부르신다. (탈출 19,1-2.9-11.16-20ㄴ)
1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뒤 셋째 달 바로 그날, 그들은 시나이 광야에 이르렀다. 2 그들은 르피딤을 떠나 시나이 광야에 이르러 그 광야에 진을 쳤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그곳 산 앞에 진을 쳤다. 9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내가 짙은 구름 속에서 너에게 다가가겠다. 그러면 내가 너와 말하는 것을 백성이 듣고 너를 언제까지나 믿게 될 것이다.”
모세가 백성의 말을 주님께 그대로 전해 드리자, 10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백성에게 가거라.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하게 하고, 옷을 빨아 11 셋째 날을 준비하게 하여라. 바로 이 셋째 날에 온 백성이 보는 앞에서 주님이 시나이 산에 내릴 것이다.”
16 셋째 날 아침, 우렛소리와 함께 번개가 치고 짙은 구름이 산을 덮은 가운데 뿔 나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자, 진영에 있던 백성이 모두 떨었다.
17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모세가 백성을 진영에서 데리고 나오자 그들은 산기슭에 섰다.
18 그때 시나이 산은 온통 연기가 자욱하였다. 주님께서 불 속에서 그 위로 내려오셨기 때문이다. 마치 가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연기가 솟아오르며 산 전체가 심하게 뒤흔들렸다.
19 뿔 나팔 소리가 점점 크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모세가 말씀을 아뢰자, 하느님께서 우렛소리로 대답하셨다.
20 주님께서는 시나이 산 위로, 그 산봉우리로 내려오셨다. 그런 다음 주님께서 모세를 그 산봉우리로 부르셨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다며, 너희의 눈은 볼 수 있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고 하신다. (마태 13,10-17)
그때에 10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12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13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14 이렇게 하여 이사야의 예언이 저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15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16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제1독서(탈출19,1~2.9~11.16~20ㄴ)

 "백성에게 가거라.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하게 하고, 옷을 빨아 셋째 날을  준비하게 하여라. 바로 이 셋째 날에 온 백성이 보는 앞에서 주님이 시나이 산에  내릴 것이다." (19, 10ㄴ~11) 

탈출기 19장은 시나이산 계약을 보여 주는 말씀이다. '계약'이란 말은 히브리말로 '베리트'(berit) 이고, '베리투'란 단어에서 나온 말이다. 그 뜻은 본래 '묶는다'(bind)는 뜻이다. 즉 둘 사이를 연결시킨다는 뜻이다.  

그리고 '계약을 맺는다'고 했을때, '맺는다'는 말은 히브리말로 '카랏'(karat)이란 동사를 쓰는데, 직역하면 '자르다'는 뜻이다. 예레미야서 34장 18절을 참조하고,'신부님 묵상글'에서 '계명준수'를 참조하기 바란다. 

어쨌든 둘이 연결되고 계약을 맺으려면 쌍방이 만나야 되는데, 이 계약이 맺어진 시기가 이집트 땅을 떠난 지 약 3개월 만이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뒤 셋째달 바로 그 날, 그들은 시나이 광야에 이르렀다.' (탈출19,1) 

계약 체결의 장소시나이 광야 혹은 이다. 광야와 산이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이 시나이 산에서 계약 체결이 이루어졌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산으로 올라가고, 하느님께서 하늘로부터 친히 영으로 강림하셔서 시나이 산에서 서로 만나서 계약을 맺은 것이다. 

사실, 계약의 기초인 사랑, 계약의 조건인 순종, 계약에 약속된 축복이 들어 있는 계약 체결을 약속하시는 말씀(탈출 19,4~6)은 오늘 독서에서 다 생략되었다. 

오늘 독서는 계약 체결을 준비하는 말씀(탈출19,9~11)과 하느님께서 시나이 산에서 나타나신(theophany) 장면이 나온다(탈출19,16~20ㄴ). 

오늘 독서의 근본 주제는 하느님의 신현(神現)도 아니고, 하느님과 모세의 만남도 아니며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만남이다. '계약 당사자끼리의 직접 대면'(direct meeting between covenant partners)이다. 

그래서 탈출기 19장 17절이 아주 중요한 말씀이다.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모세가 백성을 진영에서 데리고 나오자  그들은 산기슭에 섰다.' 

구름당신 모습을 드러내시지 않고 행동하시는 하느님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계약을 맺기 위해 하느님께서 짙은 구름속에서 (탈출19,9.16) 다가갈 때, 세째날에 있을 것으로 예고된, 하느님의 현현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 조건이 무엇인가? 

'자신을 성결하게 하고, 옷을 빨아 셋째날을 준비하게 하여라'(탈출19,10~11)는 것이다. 이것은 제의에 있어서 관습적으로 행하는 제의적 정결 행위를 명하는 것이다. 이 명령은 '금욕'에 대한 요청으로 특별히 의복의 세탁이 언급된다. 

창세기 35장 2절에서 야곱이 하느님의 지시로 베델에서 제사를 지내기 전에 가족들과 자기에게 딸린 모든 사람에게 명을 내린다. 여기서 옷을 빠는 것을 제외하고는, 탈출기 19장 10~11절과 유사한 내용을 발견한다. 

1) 이방신상을 제거함, 2) 제의적인 성결, 3) 베델로 올라가서 제단을 쌓음.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 인간은 특별한 준비를 해야 하는데, 약한 계약 당사자인 이스라엘은 강한 계약 당사자인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 이런 준비를 하는 모습을 보인다. 

오늘 독서에는 안 나오지만, 제의적 성결 기간 동안 성적 접촉을 금지하는 것(탈출19,15) 구약에서 예를 발견할 수 있고(레위15,16~33; 1사무 21,5~7), 레위기 15장 16~18절에 남자의 정자가 묻은 옷이나 가죽을 씻는 의무가 등장하는 것처럼, 탈출기 19장 10ㄴ절과 14ㄴ절에서 주어진 옷을 빠는 것과 탈출기 19장 15절의 규정이 공존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렇게 탈출기 19장 10~11ㄱ절은 하느님을 만나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 자신들의 준비가리키는 반면, 탈출기 19장 12~13ㄱ절은 하느님의 현현 장소인 산 주위에 경계를 치는 것, 산에 대한 준비를 가리킨다. 

우리는 오늘 독서에서 '제의적 정결'의 영성적 의미를 묵상해 보자.  

'계약 당사자끼리의 직접 대면'에 있어서 이스라엘의 상대가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을 대표하는 제1속성은 '거룩함'이니 이스라엘 백성은 '제의적 정결'로 다가가야 한다. 

물과 기름이 함게 섞일 수 없듯이 속성이 다른 두 존재가 결코 공존할 수 없기에 이스라엘 안에 하느님의 현존을 지속하려면, 그 분과 같은 속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요청되는 것이다. 

'거룩함'(聖性)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코데쉬'(qodesh)로서 '카다쉬'(qadash)라는 동사에서 파생되었다. 그 뜻은 '구분하다', '분리하다'이다. 이스라엘이 거룩해야 한다는 것모든 장소, 시간, 사건, 사람들 안에서 다른 민족과는 구별되는 무엇인가를 드러내야 함을 뜻하는 것이다. 

우리는 전혀 거룩하지 않은 세상에 어우러져 살면서 우리가 거룩함을 유지한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우리 마음안에 거룩하신 하느님을 담고 산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속화(俗化)된 세상과 사람들과 일들에서 벗어나 무인도에서 살라는 말이 아니다.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무엇을 하든지 어디에 있든지 거룩한 상태로, 즉 하느님을 알고 모시고 사는 사람으로서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이 땅인 전부인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별제된' 태도로 일관되게 살라는게 아닌가! 

하느님의 사람, 하느님의 영광과 일만을 위해 사는 성별(聖別)된 사람이란 누구인가? 

세례 성사때의 거룩한 은총지위를 유지하는 사람, 거룩한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품위와 지위와 신분을 거룩하게 유지하는 사람, 항상 하느님 대전에 부끄럼없이 설 수 있는 사람,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성삼위 하느님'의 내주(內住)를 항상 의식하고, 삼위일체 하느님 앞에서 심성(心性)의 결백을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자신을 거룩하게 하여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레위 11,44; 19,2; 20,7.26; 21,6.8; 1베드1,15)

하느님과 계약을 맺는 당사자인 이스라엘 백성이 '제의적 정결'을 회복하고 유지해야만 하느님을 뵈올 수 있고, 계약을 맺을 수 있으며,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복음(마태13,10~17)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15) 

여기서 '무디고'에 해당하는 '에파퀸테'(epachynthe; is waxed gross; has become calloused)'두껍게 만들다', '살찌게 만들다'는 일차적 의미와 '마음을 무감각하게 하다'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 동사 '파퀴노'(pachyno)의 부정 과거 수동태형으로서, 백성들의 마음이 자기들 스스로가 아닌 제3의 존재에 의해서 무감각해졌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사야서 6장 10절에 의하면, 주님께서 이사야 예언자에게 백성들의 마음을 무디게 하라고 명령하신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백성들의 마음을 두껍게 살찌게 만들어 무감각하게 하는 주체는 예언자이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자이다. 그러나 예언자가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백성들이 자아를 포기하지 못하고, 죄로 기울어지는 인간 본성을 버리지 못함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며, 그 결과 그들은 더 이상 하느님의 말씀과는 관계없는 자들이 되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죄로 기울어지는 성향에 쉽게 길들여지고 타협하며 죄짓는 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수록 그 마음이 더욱 완고해지고 사악해지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백성들의 마음을 완고하고 사악하게 만드는 주체는 바로 죄스런 인간 본성으로 가득 차 있는 백성들의 마음에 거슬리는 주님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예언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고쳐 주다'로 번역된 '이아소마이'(iasomai; I should heal)'치료하다', '(병을)고치다'(루카9,11)는 의미를 지닌 동사 '이아오마이'(iaomai)의 직설법 미래 1인칭 단수이다. 

그런데 이 문장 앞에 '결코 ~하지 않도록', '혹시라도 ~하지 않도록'이라는 의미를 지닌 부정어 '메포테'(mepote)가 있어서, 직역하면 '결코(혹시라도) 내가 그들을 고쳐 주지 않도록'이다. 그러니까 백성들을 고쳐 주지 않기를 바라는 주체는 백성 자신들이 아닌 '하느님'이다. 

하느님께서 완고한 사악한 상태의 백성들을 고쳐 주기를 거부하는 것공의로우신 하느님께서 회개의 여지가 없는 완고하고 사악한 그들을 심판의 자리에서 보자는 의지의 표명이다. 

이러한 사상은 '그들이 하느님을 알아 모시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분별없는 정신에 빠져 부당한 짓들을 하게 내버려 두셨습니다'라는 로마서 1장 28절의 내용과도 상통한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 13장 16절이하에 나오는 데로, 구약의 많은 예언자와 의인들은 천국 비밀의 그림자만 보았을 뿐 실체를 보지 못했으나(히브11,39), 비록 예언자도 의인도 아니지만 예수님 바로 곁에서 그분을 통해 천국의 실체와 그 비밀들을 보고 듣는 제자들은 참으로 복된 자들이 되는 것이다.


2016년 7월 21일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마태 13,10-13)”

 

여기서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군중을 차별해서 대우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의 뜻은,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구원의 은총을 받지만,

믿으려고 하지 않고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구원의 은총을 받지 못한다.”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고,

모든 사람을 하늘나라의 잔치에 초대하신 분입니다.

(어떤 특정인들에게만 잔치 참석을 허락하시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허락하지 않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허락을 못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스스로 참석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사용하신 것은,

복음을 믿으려고 하지 않고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입니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라는 말씀은,

“믿으려고 하는 사람은 예수님 말씀을 알아듣게 되는 은총을 받겠지만,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은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결국 말씀을 들을 기회마저 잃게 될 것이다.”입니다.

(하늘나라 잔치에 참석하라는 초대장을 받아도 참석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참석 자격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초대장을 빼앗기는 것과 같은 일이 됩니다.)

‘탈렌트의 비유’에도 똑같은 말씀이 나오는데(마태 25,29), 뜻이 다릅니다.

여기서는 예수님의 복음 선포 단계에서,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배척하는 사람들 사이의 차이에 관한 말씀이고,

‘탈렌트의 비유’에서는,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는 신앙인들 가운데에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과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의 차이에 관한 말씀입니다.

(‘탈렌트의 비유’에서의 뜻은,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서 은총의 열매를 맺는 사람은 구원의 은총을 받겠지만,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입니다.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이미 받은 은총을 모두 빼앗기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저들의 눈과 귀와 마음을 열어 주기 위해서 비유를 사용한다.” 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좀 더 쉽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알아듣고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비유를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마귀 들려 말 못하는 사람 하나를 예수님께 데려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시고 그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마태 9,32-33).

그때 바리사이들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마태 9,34).”

하느님의 기적을 직접 보았으면서도 믿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그 일을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마귀의 일이라고 비방한 것입니다.

그런 말을 한 자들이 바로 ‘보아도 보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자렛에 가셔서 사람들을 가르치셨을 때(마태 13,54),

나자렛 사람들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마태 13,54-56)”

그들은 예수님이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라는 것만 생각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은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자들이 바로 ‘들어도 듣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던 날 아침에 무덤에서 일어난 일을 처음 목격한 사람들은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이었습니다.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났다.

그리고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무덤으로 다가가 돌을 옆으로 굴리고서는 그 위에 앉는 것이었다.

그의 모습은 번개 같고 옷은 눈처럼 희었다.

무덤을 경비하던 자들은 천사를 보고 두려워 떨다가 까무러쳤다(마태 28,2-4).”

그들은 자기들이 본 일을 수석 사제들에게 알립니다(마태 28,11).

그러자 사제들은 그들에게 돈을 주면서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 하여라(마태 28,13).” 라고 말합니다.

경비병들은 돈을 받고 시킨 대로 합니다(마태 28,15).

그 사제들과 경비병들이 바로 ‘깨닫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비유를 사용해서 사람들을 가르치신 일은 효과가 있었을까?

누군가는 비유 덕분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알아듣고,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깨닫고,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끝끝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그래서 예수님을 믿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았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여기서 ‘못하다.’ 라는 말은 어떤 장애가 아니라, ‘하지 않는’ 태도를 뜻합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는 자들은 눈을 감고서 안 보려고 하는 자들입니다(마태 13,15).

들어도 듣지 못하는 자들은 귀를 막고서 안 들으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깨닫지 못하는 자들은 안 믿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겠다고 불평하기만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8-69).”

먼저 믿으면, 언젠가는 모든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16,13).”

 

송영진 모세 신부



오늘의 묵상

오늘 제1독서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드디어 시나이 광야에 다다릅니다. 그동안 겪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지요. 그들에게 주님께서 다가오십니다. 곧 주님께서 먼저 시나이 산 위로, 그 산봉우리로 내려오신 다음, 모세를 그리로 부르신 것입니다. 모세는 오늘 산봉우리로 부르심을 받기까지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이끌었으며, 그동안 얼마나 많은 오해와 모략을 받았습니까?
또한, 우리가 생각할 점은 항상 주님께서 인간을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먼저 찾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간을 찾아오시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우리는 늘 그분의 도구가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이 말씀은 인간은 자신의 능력에 만족하지 말고, 그 능력을 더욱 개발해야 한다는 뜻이지요. 또한, 세상은 점점 빠르게 변화되어 가는데 이에 적응하지 않고 과거의 모습에만 연연한다면, 이 역시 올바른 자세는 아닐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지요.
자신의 앞에 주어지는 시련을 하나둘 극복해 나가면, 마침내 튼튼한 신앙인이 되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영광을 얻게 되지만, 눈앞의 시련에 좌절하고 만다면 그 결과는 어떠하겠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미래를 향해 실천적인 행동을 해야만 합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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