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마태 13,1-9)

2017. 7. 25. 오후 8:2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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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6일 수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마태 13,1-9)



요아킴 성인과 안나 성녀는 다윗 가문의 유다 지파에서 태어났다. 전승에 따르면,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 안나 성녀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었으나, 요아킴 성인이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한 뒤 하느님의 섭리로 마리아가 탄생하였다. 안나 성녀에 대한 공경은 6세기부터 동방 교회에서 시작되어 10세기에는 서방 교회에도 널리 퍼졌다. 요아킴 성인에 대한 공경은 훨씬 뒤에 이루어졌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가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을 하자, 주님께서는 메추라기와 양식을 내려 주신다. ( 탈출 16,1-5.9-15)
1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는 엘림을 떠나, 엘림과 시나이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렀다. 그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뒤, 둘째 달 보름이 되는 날이었다.
2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가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하였다.
3 이들에게 이스라엘 자손들이 말하였다. “아, 우리가 고기 냄비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그때, 이집트 땅에서 주님의 손에 죽었더라면! 그런데 당신들은 이 무리를 모조리 굶겨 죽이려고,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왔소?”
4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내가 하늘에서 너희에게 양식을 비처럼 내려 줄 터이니, 백성은 날마다 나가서 그날 먹을 만큼 모아들이게 하여라. 이렇게 하여 나는 이 백성이 나의 지시를 따르는지 따르지 않는지 시험해 보겠다. 5 엿샛날에는, 그날 거두어들인 것으로 음식을 장만해 보면, 날마다 모아들이던 것의 갑절이 될 것이다.”
9 모세가 아론에게 말하였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에게, ‘주님께서 너희의 불평을 들으셨으니, 그분 앞으로 가까이 오너라.’ 하고 말하십시오.” 10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에게 말하고 있을 때, 그들이 광야 쪽을 바라보니, 주님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났다.
11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이르셨다. 12 “나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불평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에게 이렇게 일러라. ‘너희가 저녁 어스름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양식을 배불리 먹을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내가 주 너희 하느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13 그날 저녁에 메추라기 떼가 날아와 진영을 덮었다. 그리고 아침에는 진영 둘레에 이슬이 내렸다. 14 이슬이 걷힌 뒤에 보니, 잘기가 땅에 내린 서리처럼 잔 알갱이들이 광야 위에 깔려 있는 것이었다.
15 이것을 보고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이게 무엇이냐?” 하고 서로 물었다.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주님께서 너희에게 먹으라고 주신 양식이다.”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시며, 길이나 돌밭,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와 달리,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를 맺었다고 하신다. (마태 13,1-9)
1 그날 예수님께서는 집에서 나와 호숫가에 앉으셨다. 2 그러자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물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4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5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6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7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8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9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제1독서 ( 탈출 16,1-5.9-15)

"이제 내가 하늘에서 너희에게 양식을 비처럼 내려줄 터이니,

 백성은 날마다 나가서 그날 먹을 만큼 모아들이게 하여라.

 이렇게 하여 나는 이 백성이 나의 지시를 따르는지 따르지 않는지 시험해 보겠다.

 엿샛날에는, 그날 거두어 들인 것으로 음식을 장만해 보면,

 날마다 모아들이던 것의 갑절이 될 것이다."  (4-5)

 

'이제 내가'로 번역된 '히느니'(hinni; Behold,I)는 '나를 보라,

내가 이제 중대한 일을 너희 앞에 보일 것이다' 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에 대해 하느님께서 이제 놀라운 방법으로 즉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기적을 통해 그들의 원망을 해결하시겠다는 하느님의 뜻이 담겨져 있다.

 

'비처럼 내려줄 터이니'로 번역된 '마므티르'(mamtir)는 '(비를)내리다'

(창세2,5; 이사5,6)라는 뜻을 지닌 동사 '마타르'(matar)의 강조 능동형 분사이다.

이처럼 행동의 계속을 나타내는 분사형이 사용됨으로 인해

'계속해서 (비를) 내릴 것이다'로 해석할 수 있다.

 

원문은 동사 자체에 '억수같이 쏟아지다'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어

하느님께서 양식을 계속적으로 그리고 풍성하게 공급하실 것을 나타내 주고 있다.

 

지금 주님께서 원수 이집트를 징벌하시고 그 백성들에게 권능의 은총을 베풀어 노예의 신분에서

구원해 내신 하느님의 손을 원망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배은망덕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그들이 요구하는 양식을 비처럼 충분히 내려 주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것은 그 백성에 대한 오래 참으심(예레15,15; 로마9,22; 2베드3,9)과 더불어

하느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자비로운 보살핌을 보여주는 것이다(느헤9,15; 시편78,24-25 ;

105,40; 요한6,31.32; 1코린10,3).

 

'날마다 나가서 그날 먹을 만큼 모아들이게'로 번역한 '웰라케투 떼바르 욤'

(wellaqetu debar yom)에서 '모으다', '거두다'로 번역된 '라케투'(laqetu)의

원형 '라카드'(laqat)는 '모으다'(gather)(창세31,46)라는 뜻으로

광야 지면에 흩어져 있는 만나를 모으라는 말이다.

 

그리고 '떼바르 욤'(debar yom)는 '일'(1열왕15,5), '것'(탈출9,4)등을 뜻하는 명사 '떼바르'(debar)

'낮'(창세8,22), ''(창세1,5)를 뜻하는 명사 '욤'(yom)이 함께 쓰여 '날의 것' 즉 '하루의 것'이라는 뜻이며,

이것은 곧 '하루 동안 먹을 분량의 양식'을 의미한다.

 

'시험해 보겠다'라고 번역된 '아낫쎈누'(anassennu; I may prove them)는 '시험하다'

(창세22,1; 1열왕10,1)라는 뜻을 지닌 '나싸'(nassa)의 강조 능동형 1인칭 단수 미완료형에

대명사 접미어가 불은 형태로 '내가 그를(그 백성을)시험할 것이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시험하다'로 번역되는 '나싸'는 '유혹하다'라는 의미보다는 '입증하다'(prove),

'검증하다'(test)라는 의미를 지니는 동사인데, 여기처럼 강조형으로 사용될 때는

대개 어려운 상황을 통해 그 대상의 진가를 입증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이 구절은 매일 하루 분량의 양식을 거두는 일이

그렇게 단순하고 쉽지만은 않은 일임을 암시한다.

 

이것은 양식을 거두는 노동이 힘들다는 뜻이 아니라

하루 분량 이상의 식량을 거두고자 하는 인간적인 욕심으로 인해서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더군다나 하루 분량을 거둔다 하더라도, 다음 날을 위해 그것은 남기거나(탈출16,19.20)

엿샛날에 안식일을 예비해서 이틀 분량을 거두지 못해서 안식일을 어기는(탈출16,27)

만나와 관련된 하느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못하여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입증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날 거두어 들인 것으로 음식을 장만해 보면'

 

'장만해 보면'으로 번역된 '웨헤키누'(wehekinu)는 '세우다'(잠언3,19), '견고케하다', '존속하다'

(시편89,37)란 뜻의 동사 '쿤'(kun)의 강조 능동형에 접속사 '와우'(wau)가 결합된 형태이다.

''이 이렇게 강조형으로 사용될 때는 '준비하다', '장만하다'(창세43,16; 시편147,8)라는 뜻을 지니게 된다.

 

이처럼 엿샛날(제 육일)에 거둔 것을 미리 장만해야 했던 이유는

그 다음 날이 안식일이므로 만나를 거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 안식일에 대한 규정이 율법으로 명문화되지는 않았지만,

6일간 천지창조를 마치시고 제 7일에 안식하신 하느님의

창조의 원리와 질서에 의해(창세2,1-3) 하느님의 경건한 백성들은

제 7일에 안식하는 규정을 지켜왔을 것이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출애굽하며 하느님 나라의 백성으로

공식 출발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일에 관한 규정을 가시화하고 계신 것이다.

 

이처럼 점진적으로 계시가 발전되면서 마침내 탈출기 20장 8-11절에서

안식일 규정이 십계명으로 성문화 된다.

 

'날마다 모아들이던 것의 갑절이 될 것이다'  (5)

 

'될 것이다'로 번역된 '웨하야'(wehaya; and it shall be)에서 '존재하다',

'있다'는 뜻의 동사 '하야'(haya)가 완료형으로 사용되어 비록 미래에 일어날 일이지만

틀림없이 갑절이 될 것을 강조한다.

 

그런데 이렇게 갑절이 되는 원인이 엿샛날에 거두는 양을 배로 늘렸기 때문인지

아니면 평상시와 다름없이 거두었는데 결과적으로 갑절의 양이 되었는지

탈출기 16장 5절의 원문상으로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엿샛날에 거둔 만나가 그 다음 날이 되어도 다른 때와는 달리

전혀 상하지 않는 기적이 일어난 것은 사실이며, 이러한 일의 배후에는

하느님의 초자연적 역사하심이 있었다.

 

"엿샛날에는 한 사람에 두 오메르씩, 양식을 갑절로 거두어들였다." (탈출16,22)

 

"그날 저녁에 메추라기 떼가 날아와 진영을 덮었다.

 그리고 아침에는 진영 둘레에 이슬이 내렸다.

 이슬이 걷힌 뒤에 보니, 잘기가 땅에 내린 서리처럼 잔 알갱이들이

 광야 위에 깔려 있는 것이었다.

 이것을 보고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이게 무엇이냐?" 하고 서로 물었다." (13-15)

 

200만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을 치고 있는 진영 위로 갑자기 올라오는

메추라기 떼의 모습은 장관을 이루었을 것이다.

더우기 그 메추라기 떼의 규모가 '진영 이쪽과 저쪽으로 하룻길되는 너비로 떨어뜨려,

땅 위에 두 암마 가량(약 90cm) 쌓이게 하며'(민수11,31) 엄청난 것이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광경에 압도되었을 것이다.

 

'메추라기'를 뜻하는 '셀라웨'(sellawe; the quail)는 짧은 날개와

작고 둥근 머리와 통통한 몸집을 가진 '꿩'과의 철새이다.

이 메추라기는 팔레스티나를 중심으로 봄에는 아프리카에서 떼를 지어 북쪽으로 날아왔다가

가을쯤 아바리아와 시리아 쪽으로 이동해 겨울에는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간다.

 

이 메추라기 떼가 이스라엘 진영에 내린 것은 단순히 철새 이동에 의한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고,

마치 이집트에 메뚜기 재앙을 몰고 오신 것처럼, 하느님 당신 자신의 초자연적 권능으로

바람을 불러 일으키시어 바다에서부터 메추라기를 몰아오신 것이다(민수11,31).

 

그런데 이 메추라기는 40년간 내렸던 만나(탈출16,35)와는 달리

1개월 동안만 내려졌다(민수11,21).

 

'진영 둘레에'로 번역된 '싸비브 람마하네'(sabib lammahane)

'그 진을 향하여 둘레에'라는 뜻이다.

 

'싸비브'(sabib)는 원래 '~둘레에'(round about)라는 뜻이고, '람마하네'는

'진'을 뜻하는 명사 '마하네'(mahane) '~쪽으로', '~을 향하여'라는 뜻의

전치사 '레'(le)가 결합한 것으로, 진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듯

이슬이 진 둘레에 내렸다는 말이다.

 

메추라기가 진 안에 덮인 것과는 달리만나가 이처럼 진 둘레에 내린 것

사람의 발에 밟혀서 쓸모없게 되는 것을 미리 방지하신 하느님의 세심한 배려가 있는 것이다.

또한 진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듯 내렸다는 것은 만나를 거둘 때

각 진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가깝고 편한 곳으로 갈 수 있도록 배려하신 것이다.

 

'잘기가 땅에 내린 서리처럼 잔 알갱이들이 광야 위에 깔려 있는 것'

 

본문은 모양과 빛깔과 맛 등 보다 구체적으로 만나를 묘사한

탈출기 16장 31절에 비해 외관적인 묘사에만 치중하고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를 생전 처음 보았기 때문이고,

또한 아직 그 맛을 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게 무엇이냐?' 라고 번역된 '만 후'(man hu; what is it?)에서

'만'은 '무엇이냐'(what)라는 뜻을 가진 말이고, '후'는 '이것이'(it is)라는 말이다.

구약 성경에서 유일하게 이곳에만 나오는 단어가 '만'(man)인데,

'만나'(manna)라는 명칭이 '만 후'(man hu)에서 유래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다(마태 13,3-4).”

‘길에 떨어진 씨’를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늘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에 뿌려진 씨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마태 13,19).”

여기서는 ‘악한 자’가 와서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고 표현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이 악마에게 ‘말씀’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악마의 말에 더 귀를 기울임으로써 스스로 ‘말씀’을 버립니다.

그리고 “길에 뿌려진 씨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라고 되어 있는데,

뜻을 생각하면 “‘길’은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스라엘 경우에, 하느님께서 처음에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셨을 때에는

그들은 분명히 ‘좋은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너무 쉽게 우상숭배에 빠졌고,

스스로 ‘좋은 땅’에서 ‘길’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바알들을 섬겨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질렀다.

그들은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이신 주님,

저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신 주님을 저버리고,

주위의 민족들이 섬기는 다른 신들을 따르고 경배하여, 주님의 화를 돋우었다.

...그들은 저희 조상들이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며 걸어온 길에서 빨리도 벗어났다.

그들은 조상들의 본을 따르지 않았다(판관 2,11-17).”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기에 가나안 원주민들이 섬기는 우상이

야훼 하느님보다 더 좋게 보였고, 그래서 바로 우상숭배에 빠졌는데,

그것은 악마에게 현혹되어서 하느님의 말씀을 버린 일이었습니다.

(빼앗긴 것이 아니라 버린 것입니다.)

 

우리도 언제든지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말에 귀를 기울이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현혹되어서 말씀을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탄도 빛의 천사로 위장합니다.

그러니 사탄의 일꾼들이 의로움의 일꾼처럼 위장한다 하여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2코린 11,14-15).”

아무리 듣기 좋은 말이라고 해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다른 말이라면 듣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마태 13,5-6).”

예수님께서는 ‘돌밭에 떨어진 씨’를 이렇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마태 13,20-21).”

여기서도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는

“‘돌밭’은 이러한 사람이다.”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는

“스스로 자기 안에 뿌리를 내리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서 오래가지 못한다.”입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는 않는 사람,

또는 말씀대로 살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이 그런 사람입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뒤에, 모세가 가나안 땅에 정찰대를 보냈을 때,

돌아온 정찰대원들은 가나안의 주민들이 너무 강해서 정복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백성들 사이에 큰 소동이 일어납니다.

“온 공동체가 소리 높여 아우성쳤다.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다.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이 모세와 아론에게 투덜거렸다.

온 공동체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차라리 이집트 땅에서 죽었더라면!

아니면 이 광야에서라도 죽어 버렸으면!

주님께서는 어쩌자고 우리를 이 땅으로 데려오셔서, 우리는 칼에 맞아 쓰러지고,

우리 아내와 어린것들은 노획물이 되게 하시는가?

차라리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이 더 낫지 않겠나?’

그러면서 서로 ‘우두머리를 하나 세워 이집트로 돌아가자.’

하고 말하였다(민수 14,1-4).”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계속 자기들을 지켜 주신다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다를 갈라서 건너가게 해 주시고,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함께 계시면서 계속 지켜주셨는데(민수 9장),

그런 놀라운 기적들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은총은 금방 잊어버리고, 눈앞의 위험만 두려워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에 뿌리가 없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항상 ‘말씀’을 자기 삶의 중심에 두고 살아야 하고,

날마다 ‘말씀’을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말씀의 힘’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마태 13,7).”

예수님께서는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를 이렇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마태 13,22).”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께서 내려주시는 ‘만나’를 날마다 먹으면서도

감사드리기는커녕 이렇게 불평했습니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여 줄까?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공짜로 먹던 생선이며,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이 생각나는구나.

이제 우리 기운은 떨어지는데, 보이는 것은 이 만나뿐,

아무것도 없구나(민수 11,4-6).”

받은 은총에 고마워하지는 않고, 끝없이 욕심만 부리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주님께 ‘일용할 양식’을 청합니다.

입으로는 그렇게 기도하면서, 실제로는 더 좋은 집, 더 좋은 차,

더 좋은 음식, 더 좋은 옷을 찾을 때가 많습니다.

‘일용할 양식’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감사기도를 바치지 않습니다.

마음속에 가시덤불 같은 욕심만 가득 들어 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오늘의 묵상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를 헤매며 온갖 시련을 겪게 됩니다. 그 첫 번째 시련이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배고픔의 고통이지요. 시련을 통해 계속 정화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하느님의 뜻을 깨닫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향해 불평합니다. “당신들은 이 무리를 모조리 굶겨 죽이려고,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왔소?” 극한 상황에 놓이자 그들과 함께 계시며 앞날을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을 잊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양식인 ‘만나’를 내려 주시지요. 만나를 주신 목적은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심을 일러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물질 자체에만 집착하고 맙니다. 돌밭과 같은 마음이지요. 그러니 하느님 말씀이 들리겠습니까?
오늘 복음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씨앗은 하느님 말씀이고, 씨앗이 뿌려진 곳은 우리의 마음이지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맺는 결실은, 말씀을 받아들이는 마음가짐 여하에 따라 천차만별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내 마음이 좋은 땅이 되어 풍성한 결실을 보려면 먼저 마음의 문을 하느님께 열어야 합니다. 그리고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지요. 나아가 받아들인 하느님의 말씀이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의 생활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깊게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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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6주간 금요일]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마태 13,18-23)17.07.28조회 76[연중 제16주간 목요일] 하늘 나라의 신비 (마태 13,10-17)17.07.27조회 101[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마태 13,1-9)17.07.25조회 231[성 대 야고보 사도 축일]첫째가 되려면 (마태 20,20-28)17.07.24조회 228[연중 제16주간 월요일] 요나의 표징 (마태 12,38-42)17.07.24조회 192[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라뿌니!” (요한 20,1-2.11-18)17.07.22조회 51[연중 제15주간 금요일]안식일의 주인 (마태 12,1-8)17.07.21조회 253[연중 제15주간 목요일]내 멍에를 메고 (마태 11,28-30)17.07.20조회 214[연중 제15주간 수요일] 철부지들 (마태 11,25-27)17.07.19조회 346[연중 제15주간 화요일] 회개(마태 11,20-24)17.07.18조회 342[연중 제15주간 월요일]칼 (마태 10,34─11,1)17.07.17조회 228[연중 제14주간 토요일]증언 (마태 10,24-33)17.07.15조회 422[연중 제14주간 금요일]아버지의 영 (마태 10,16-23)17.07.14조회 339[연중 제14주간 목요일] 평화를 빈다 (마태 10,7-15)17.07.13조회 334[연중 제14주간 수요일] 열두 제자 파견 (마태10,1-7)17.07.12조회 333[연중 제14주간 화요일]복음 선포 (마태 9,32-38)17.07.11조회 284[연중 제14주간 월요일]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태 9,18-26)17.07.10조회 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