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 29일
[성녀 마르타 기념일] 메시아(요한 11,19-27)
마르타 성녀는 라자로의 동생이자 마리아의 언니로서 예루살렘과 가까운 베타니아에서 살았다. 나흘이나 무덤에 묻혀 있던 라자로는 예수님의 기적으로 다시 살아난 인물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집에 머무르실 때 언니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으나, 동생 마리아는 가만히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루카 10,40)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루카 10,41-42). 주님의 이 말씀에 따라 마르타 성녀는 활동적인 신앙인의 모범으로, 마리아 성녀는 관상 생활의 모범으로 공경받고 있다.
요한 사도는,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신다고 한다. (1요한 4,7-16)
7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8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9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10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11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2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13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압니다. 14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합니다.
15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 16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죽은 오빠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며,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고 하신다. (요한 11,19-27)
그때에 19 많은 유다인이 마르타와 마리아를 그 오빠 일 때문에 위로하러 와 있었다. 20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다.
21 마르타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22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23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니, 24 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26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27 마르타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성녀 마르타 기념일 제1독서 (1요한4,7-16)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10)
'이렇습니다', '여기 있습니다'로 번역된 '엔 투토'(en tuto)는 어떤 장소를 가리키는 단어로서 사랑의 출처와 기원, 사랑의 본질에 대한 설명을 하기 위한 전치사구를 이끌고 있다.
사도 요한은 사랑의 기원과 출저가 하느님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랑의 본질이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란 사실을 말하고 있다.
즉 인간이 먼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사랑을 베푸셨는데, 그 사랑은 바로 우리 인간을 위해 독생성자를 대속의 제물로 보내신 사건을 통해 분명히 입증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 안에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의 기원이 된 하느님의 사랑은 세상에 나타난 사랑의 본질이요, 모든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모범이다(1요한4,11).
사도 요한은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을 표현하면서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는 부정적인 내용을 먼저 언급하고, 뒤에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라는 긍정적인 내용을 언급함으로써 긍정적인 내용을 강조하고 있다.
즉 사랑의 출발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구현된 하느님의 계획과 마음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을 향한 인간의 사랑은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지극히 작은 응답일 뿐임을 알 수 있다.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절의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는 말씀과, 로마서 5장 10절의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에 나타난 사상이 여기에 들어있다.
이제 '속죄제물'로 번역된 '힐라스몬'(hilasmon; as an atoning sacrifice; to be the propitiation)의 원형 '힐라스모스'(hilasmos)는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분리된 인간을 하느님과 화해하기 위한 목적으로 드려지는 제사를 말한다.
'속죄제물'에는 피의 희생이 필요하다. 이 피의 희생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구약시대에는 '양'이나 '염소'의 피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제사는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주지 못했으며 따라서 완전하고 영원한 제사가 드려지기 전까지 계속적으로 반복되어야 했다.
이러한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위한 온전한 속죄 제사를 계획하시고 속죄 제물을 준비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는 이렇게 죄인의 모든 죄를 속죄하셨을 뿐만 아니라 화해의 제물이 되셔서 하느님와 원수였던 자들을 그와 화해시켰던 것이다.
한편 그리스도의 속죄 제물에 대한 사도 요한의 이같은 진술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사실성과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을 간접적으로 경계한 표현이다.
역사의 예수를 믿음의 그리스도로 여기지 않던 자들을 향하여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설파하면서 속죄 제물로 바치신 십자가 구속 사업 속에 하느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속죄 제물로 보내신 사건과 그로 인한 우리의 죄에 대한 용서는 하느님의 사랑에 기인한 것이다.
성녀 마르타 기념일 복음(요한11,19~27)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25~26)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놀라운 이적은 요한 복음의 일곱 표적 가운데 마지막 표적이다. 예수님께서 생명의 주인되심을 보여줄 뿐 아니라 앞으로 있을 당신의 부활과 그리스도에 의해 얻게 될 모든 성도들의 부활과 영생을 미리 예표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라자로의 부활 사건은 많은 유다인이 예수님을 믿게 한 사건이며,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유다 종교 지도자들의 위기감을 고조시켜 예수님의 체포와 죽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요한 복음 12장 11절 이후 라자로와 그의 누이 마르타와 마리아가 성경에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공관복음에 라자로의 부활에 대한 기사가 없는 것은 공관 복음이 기록된 시기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A.D.70년 이전으로서 여전히 유다 지도자들의 서슬이 시퍼렇게 살아 있었고, 그들에 의해 생명의 위협을 느끼던 라자로 일행도 살아 있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라자로에 대한 기록을 생략했다고 본다.
'라자로'에 해당하는 '라자로스'(Lazaros)라는 이름의 뜻은 '하느님이 도우셨다'이며, 히브리어 '엘르아잘'(Ellazar)의 축소형으로서 그 당시 흔한 이름이다.
그는 현재 '라자로 동네'('엘 아자리예'; El Azarieh)로 불리는 곳, 예루살렘에서 3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촌이며 올리브산의 동쪽 경사면에 위치한 '베타니아'(Bethanias) 출신이다.
그는 중병에 걸렸다가 죽었는데, 예수님께서 가서 보시니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 벌써 나흘이나 지났다고 말한다. 여기서 '나흘'('텟사라스 헤메라스'; tessaras hemeras; four days)이라는 숫자를 밝히는 요한 복음사가의 의도를 알아야 한다.
유다인들의 민간 신앙에 있어서 죽은 자의 영혼이 사흘간은 그 시체를 떠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었고, 미쉬나에도 삼일 이내에 시신을 확인하고 그 기간 내에 장사를 지낼 것을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죽은 지 나흘이 되었다는 것은 이제는 영혼이 완전히 그를 떠난 상태여서 회생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최종적인 죽음의 사실을 묘사한 것이다.
이렇게 라자로의 죽음이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하느님께서 당신 영광을 드러내시고,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게 하기에 가장 적합한 환경이 조성이 된 것이다.
생명을 주관하시고 생명에 대한 절대권을 가지신 예수님께는 한 인간의 죽음이 죽음이 아니고 수면, 즉 잠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그 유명한 요한 복음 11장 25절의 너무나 중요한 말씀이 나온다.바로 모든 사람들이 갖는 부활과 생명의 원천이 어디 있는지를 밝히는 말씀이다.
요한 복음에서 자주 등장하는 '나는 ~이다'('에고 에이미'; Ego eimi; I am) 양식의 진술은 예수님의 자기 선언을 위한 독특한 양식이다. 이 선언을 통해 '말씀의 계시'가 '행위의 계시'를 앞선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을 미래에 일어날 사건으로 나타내시기를 거부하시고 자신 속에 있는 현재의 사실로 나타내신 것이다. 부활은 예수님 안에서는 언제나 미래가 아니라 현재의 일이다. 그것이 바로 라자로의 소생 사건이며, 얼마 후에 있을 예수님 자신의 부활 사건이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부활의 실체를 인류에게 보여 주신 계시이며, 죄의 결과요 사탄의 시기인 죽음의 권세를 완전히 패퇴시키고 정복하신 역사적 사건이었다. 따라서 예수님 안에 있는 성도에겐 죽음이 임금 노릇을 도무지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에고 에이미 헤 아나스타시스 카이 헤 조에'; ego eimi he anastasis kai he zoe;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라는 자기 선언은 예수님 당신 자신이 바로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느님이시라는 말이다.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본체이신 하느님으로서 모든 인간의 믿음과 예배의 대상이시며, 인간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그 부활의 생명을 부여받는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부활이요 생명이기 때문에 이루어질 수 있는 엄청난 일이 바로 요한 복음 11장 25절 후반절과 26절에 등장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에 해당하는 '호 피스튜온 에이스 에메'(ho pisteuon eis eme; He who believes in me)인데, 직역하면 '나를 계속하여 믿는 사람은'이다. 여기서 '피스튜온'(pisteuon)은 '피스튜오'(pisteuo)의 현재분사로서 현재 진행 중에 있는 사실 및 과거에서 시작되어 현재까지 계속되는 사실을 묘사한다.
'죽더라도 살고'에 해당하는 '칸 아포타네 제세타이'(kan apothane zesetai; he will live, even though he dies)이다. '칸'(kan)은 '카이 에안'(kai ean)의 준말로 '비록~일지라도'(even though)라는 뜻이다. '아포타네'(apothane)는 '아포트네스코'(apothnesko)의 부정(不定)과거 가정법으로 '비록 그가 죽을지라도'이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죽음은 '육체적 죽음'으로서 사람이면 아무도 피할 수 없는 것으로서 모든 사람이 받아들여야 하는 물리적 죽음을 말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당신을 믿기만 하면, 비록 육체적으로는 죽는다 할지라도 '영적 생명'이 그 안에 살아 있다고 선언하신다.
'살고'에 해당하는 '제세타이'(zesetai; he will live)는 '살아 있다','산다' 등을 뜻하는 '자오'(zao)의 미래 중간태로 '영적 생명'이 지속됨을 가리킨다.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에 해당하는 '우 메 아포타네 에이스 톤 아이오나' (u me apothane eis ton aiona; shall never die)에서 '우 메'(u me)는 이중 부정(否定)으로서 미래의 사건을 결정적으로 부정하는 역할을 하므로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혹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로 번역한다. 여기서 '아포타네'(apothane)가 나타내는 죽음은 육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다.
어느 성현 군자가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라 했으며, '부활이요 생명'(요한11,25)이라고 했는가!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없다.
어느 성현 군자가 죽어 빈 무덤을 가진 자가 누가 있는가! 예수님 만이 부활하셔서 예루살렘에 빈무덤을 가지고 있으며, 성모님 만이 몽소승천으로 육신이 무덤의 부패에 썩지 않고 영혼과 함께 부르심을 받아 피승천하셨다.
왜 그런가? 예수님만이 생명의 절대권을 가지신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부활을 통하여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새로운 존재 방식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시다. 육신은 비록 십자가상에서 죽으셨다 하더라도, 그 영혼과 천주성은 없어지지 않는 분이시다.
인류를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시키시기 위해 몸소 십자가상에서 제단이요, 제관이며 제물이 되시어 인류 구원 사업이라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다 이루신 다음에는 더 이상 육신으로 이 땅에서 천년만년 사실 이유가 없으신 것이다.
그래서 모든 세대, 모든 시간, 모든 장소의 사람들에게 주님이 되시려면 당신의 존재 양식을 새롭게 바꾸셔야 되는 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인 것이다.
<부활이며 생명이신 예수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5-2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라는 말씀은,
“나에게는 사람들을 부활시켜서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는
권한과 권능이 있다.” 라는 뜻인데,
부활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당신을 믿어야 한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부활의 은총을 얻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죽더라도 살고’ 라는 말은,
종말과 예수님의 재림 전에 죽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 종말과 재림을 맞이하게 되는 사람들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채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죽은 이들의 문제를 여러분도 알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죽은 이들을 그분과 함께 데려가실 것입니다.
...... 먼저 그리스도 안에 죽은 이들이 살아나고,
그다음으로, 그때까지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이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말로 서로 격려하십시오(1테살 4,13-18).”
(살아 있는 동안 종말과 재림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바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단, 자격을 인정받는 사람들만.)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한 사람은
최후의 심판 때의 두 번째 죽음을 겪지 않을 것이다.”로 해석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 죽음’을 묵시록 저자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죽은 이들이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어좌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책들이 펼쳐졌습니다.
또 다른 책 하나가 펼쳐졌는데, 그것은 생명의 책이었습니다.
죽은 이들은 책에 기록된 대로 자기들의 행실에 따라 심판을 받았습니다.
바다가 그 안에 있는 죽은 이들을 내놓고,
죽음과 저승도 그 안에 있는 죽은 이들을 내놓았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자기 행실에 따라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죽음과 저승이 불 못에 던져졌습니다. 이 불 못이 두 번째 죽음입니다.
생명의 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불 못에 던져졌습니다(묵시 20,12-15).”
(첫 번째 죽음은 일시적인 죽음이고 ‘긴 잠’일 뿐입니다.
최후의 심판 때에 겪는 두 번째 죽음은 영원한 소멸입니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라는 질문은,
“내가 모든 사람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있음을 믿느냐?”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요한 5,21).”
“아버지께서는 또 그가 사람의 아들이므로 심판을 하는 권한도 주셨다.
이 말에 놀라지 마라.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요한 5,27-29).”
그런데 예수님의 권한은 종말의 심판 때에만 행사되는 권한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는 기적을 일으키신 일이 몇 번 있는데,
그 일들은 예수님께서 원하시기만 하면 언제든지
당신의 권한을 행사하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을 듣고 마르타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요한 11,27).”
이 대답은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모든 사람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는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나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지금 바로 살려 주실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을 치워라.’ 하시니, 죽은 사람의 누이 마르타가
‘주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 하였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요한 11,39-40)”
(마르타는 예수님을 믿었지만,
죽은 라자로가 금방 다시 살아나는 것은 기대하지 않았고,
기대하지 않았으니 청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일은
마르타의 신앙고백에 대한 응답이 아닙니다.
그 일은 원래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계획하셨던 일입니다(요한 11,1-16).
(마르타의 신앙을 보시고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매일미사 책의 설명은 잘못된 설명입니다.)
또 죽은 라자로가 다시 살아난 일을 ‘부활’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라자로가 살아 있는 상태로 승천했다는 말도 없고,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도 아니니,
그는 그 뒤에 때가 되었을 때 다시 죽었을 것입니다.
(라자로가 다시 살아난 일은 부활이 아니라 수명이 조금 더 연장된 일이고,
사실상 병의 치유와 같은 일입니다.)
어떻든 예수님은 생명과 죽음을 모두 지배하시는 분이고,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거나 주지 않을 권한을 가지고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때는 바로 ‘지금’이라는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오늘 기념하는 마르타는 라자로의 동생이며 마리아 막달레나의 언니다.
집으로 찾아온 예수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다 잠깐 투정을 부리는 바람에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 한다고 (루카 10, 41) 예수님한테 약간의 핀잔을 받기도 했다.
그렇지만 마리아의 좋은 몫 (관상) 과 더불어 마르타의 몫 (활동) 도 훌륭하다.
아마도 마르타는 예수님의 그러한 충고 덕분에 자기 활동의 근원을 되돌아보게 되었을 것이다.
오늘 복음은 동생 라자로에 대한 사랑만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확고하고 반듯한
그녀의 믿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의 사랑과 믿음은 결국 죽은 라자로를 살렸다.
마르타는 복음의 이미지 때문인지 요리사와 가정주부의 주보성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음식을 만들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여러 가지 가정 일이 하찮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다가가는 좋은 길임을 알려준다.
자연과 농부, 여러 사람의 수고로 얻은 재료로 음식을 장만하여 생명을 살리는 일은
결코 하찮은 일이 아니다. 방 안을 깨끗이 하고 아름답게 꾸며 가정을 보다 편한 휴식과
사랑의 공간으로 꾸미는 일은 결코 하찮은 일이 아니다. 가정의 여러 일은 자연을 통해
우리를 부양하고 회복하고 치유해 주는 하느님의 일에 참여하는 고귀한 일이다.
그러나 현재 많은 주부가 가정 일을 하찮게 여기는 것 같다.
가정의 많은 일을 가사 도우미나 인스턴트식품에 맡기고, 자신은 파출부에게 줄 돈과
인스턴트식품 살 돈을 벌기 위해 더 고귀한 (?) 일을 찾아 나선다.
밖에서의 일이 자아를 실현하고 가족을 부양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기도 하지만,
단순히 돈을 더 벌기 위한 맞벌이라면 주객이 전도된 경우가 아닌가 생각된다.
- 이동훈 신부(원주교구 남천동 천주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