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7주간 토요일] 세례자 요한의 목 (마태 14,1-12)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 오십 년째 되는 해를 거룩한 해로 선언하고 모든 주민에게 해방을 선포하라며, 이 해가 너희의 희년이라고 하신다. (레위 25,1.8-17)
1 주님께서 시나이 산에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8 “너희는 안식년을 일곱 번, 곧 일곱 해를 일곱 번 헤아려라. 그러면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 마흔아홉 해가 된다. 9 그 일곱째 달 초열흘날 곧 속죄일에 나팔 소리를 크게 울려라. 너희가 사는 온 땅에 나팔 소리를 울려라.
10 너희는 이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한 해로 선언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의 희년이다.
너희는 저마다 제 소유지를 되찾고, 저마다 자기 씨족에게 돌아가야 한다. 11 이 오십 년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다. 너희는 씨를 뿌려서도 안 되고, 저절로 자란 곡식을 거두어서도 안 되며, 저절로 열린 포도를 따서도 안 된다.
12 이 해는 희년이다. 그것은 너희에게 거룩한 해다. 너희는 밭에서 그냥 나는 것만을 먹어야 한다.
13 이 희년에 너희는 저마다 제 소유지를 되찾아야 한다. 14 너희가 동족에게 무엇을 팔거나 동족의 손에서 무엇을 살 때, 서로 속여서는 안 된다. 15 너희는 희년에서 몇 해가 지났는지 헤아린 다음 너희 동족에게서 사고, 그는 소출을 거둘 햇수를 헤아린 다음 너희에게 팔아야 한다.
16 그 햇수가 많으면 값을 올리고, 햇수가 적으면 값을 내려야 한다. 그는 소출을 거둘 횟수를 너희에게 파는 것이다.
17 너희는 동족끼리 속여서는 안 된다. 너희는 너희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
헤로데는 자기 생일에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어 즐겁게 하자, 그가 청하는 대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게 한다. (마태 14,1-12)
1 그때에 헤로데 영주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2 시종들에게,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하고 말하였다.
3 헤로데는 자기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붙잡아 묶어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4 요한이 헤로데에게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기 때문이다.
5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그들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6 그런데 마침 헤로데가 생일을 맞이하자, 헤로디아의 딸이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추어 그를 즐겁게 해 주었다. 7 그래서 헤로데는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약속하였다.
8 그러자 소녀는 자기 어머니가 부추기는 대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9 임금은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어서 그렇게 해 주라고 명령하고, 10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11 그리고 그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게 하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가져갔다.
12 요한의 제자들은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장사 지내고,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제1독서 (레위25,1.8-17)
"너희는 안식년을 일곱 번, 곧 일곱 해를 일곱 번 헤아려라. 그러면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 마흔아홉 해가 된다.(8) 그 일곱째 달 초열흘날 곧 속죄일에 나팔 소리를 크게 울려라. 너희가 사는 온 땅에 나팔 소리를 울려라. (9) 너희는 이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한 해로 선언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의 희년이다." (10)
새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원문에는 '너를 위하여'(너에게)라는 뜻의 '레카'(leka)라는 말이 있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본문의 '너'는 모세를 지적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모세가 80세에 부르심을 받고 120세에 죽었으니, 처음 희년이 될 49년 후에는 모세가 살아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위기 25장 9절에서도 동일한 '너'가 희년에 나팔을 불어야 할 사람으로 소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본문의 '너'는 모세 뿐아니라 장차 가나안 땅에 거주하게 될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세대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여기서 '너'(ka)라는 단수 어미가 사용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집합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보아야 하며, 본질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 개개인이 그날의 연수를 세고 그 날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성경의 '일곱'은 거룩함과 온전함과 이러한 것들의 완성 및 기쁨을 상징하는 숫자이다. 더군다나 일곱의 일곱은 가장 거룩하고 완전한 상태를 표현하는 것이다. 이것이 희년이 가르쳐주는 상징적인 의미이다.
그리고 희년의 주기가 49년이므로 일찍 죽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든지 인생에 한번은 완전한 기쁨을 상징하는 희년을 맞이할 수 있기에, 이것은 바로 하느님의 은혜가 차별없이 골고루 미친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 일곱째 달 초열흘날 곧 속죄일에' (9)
레위기 25장 9절은 희년의 시작이 언제부터인지를 밝히고 있다. 희년은 제49년 7월 10일 즉 유다 종교력 디스리월 10일에 시작하였다. 디스리월 10월은 유다 민간력으로는 1월에 해당되며, 오늘날 태양력으로는 9,10월경이다.
희년의 시작일인 7월 10일은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는 대속죄일이었다 (레위16,29-34; 23,26-32). 이러한 속죄일은 대제사장이 모든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희생 제물을 바쳤고(레위23,27), 또한 이스라엘의 죄를 대신 진 아자젤 숫염소를 광야로 보내는 날이었다(레위16,6-10).
즉 이 날은 이러한 종교적인 행사를 통해 인간의 죄를 속죄함으로써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를 이루는 날이다. 이 날에 잃었던 상속(기업)이 회복되고, 종 되었던 자들이 해방되며, 빚진 자들의 부채가 탕감되고, 땅이 안식을 누리는 희년이 선포됨으로써, 하느님과의 진정한 화해를 기초로 해서 인간과 자연과의 화해까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나팔 소리를 크게 울려라. 너희가 사는 온 땅에 나팔 소리를 울려라'(9)
'너는 ~울려라'로 번역된 '하아바르타'(haabartha)는 '가로지르다'는 뜻의 '아바르'(abar)의 사역형 2인칭 동사로서 '너는 가로지르게 하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나팔'로 번역된 '쇼파르'(shopar)는 '뿔' 또는 '양의 뿔'을 가리키는 말이며, 여기서는 양의 뿔로 만든 나팔이란 뜻으로 쓰였다.
또한 '소리'로 번역된 '테루아'(theruah)는 '소리 높여 외치다'라는 뜻의 '루아으'(ruah)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기쁨의 외침', '부는 소리'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희년을 선포하는 자가 먼저 온 땅을 가로지르며 나팔 소리를 울리고(haabartha), 그를 뒤이어 온 백성이 따라서 나팔을 크게 불라(thaabiru; 타아비루)는 명령으로서, 하느님의 백성이 거주하는 모든 땅에 해방과 기쁨이 선포되어야 할 것을 거듭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10)
'너희 땅'으로 번역된 '빠아레츠 레콜'(baarets lekol)에서, '뻬아레츠'(baarets)를 직역하면 '그 땅'으로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상속(기업)으로 주신 가나안 땅을 말하고, '레콜'(lekol)은 '모든' 이라는 뜻이니, 가나안 땅 전부를 말한다.
또한 '해방'으로 번역된 '떼로르'(deror; liberty)는 그 어원이 '넘쳐흐르다', '빛을 발하다' 라는 뜻의 '따라르'(darar)로서 '자유로운 흐름'이란 뜻을 가진다. 원문대로 직역하면, '너희들은 그 땅에 사는 모든 자들을 위해 자유로운 흐름을 크게 외치라'이다.
여기서 '그 땅에 ~자유로운 흐름'은 경제적인 부채로 인해 제한된 땅에서 속박된 자로 살아야 하는 자들이 풀려나 자유롭게 자신의 땅과 가족에게로 돌아가게 되는 이동, 실질적인 자유를 의미한다.
'이 해는 너희의 희년이다'(10)
'희년'으로 번역된 '요벨'(yobel; a jubile)은 그 어원이나 의미를 쉽게 밝힐 수 없는 단어이다. 어떤 이는 여호수아서 6장 4절, 6절, 8절, 13절에 근거하여 '양각'(羊角; 양의 뿔)이라고 번역된 '하요벨림'(hayobellim)을 레위기 25장 10절의 '요벨'과 동일한 어근으로 보아 본문의 '요벨'을 '양의 뿔'이란 의미를 가진다고 보았다.
이런 견해는 레위기 25장 9절에 희년이 나팔을 크게 부는 것으로 시작되었다는 내용과 조화를 이룰 수 있으나, 레위기 25장 9절에 이미 '양의 뿔'이라는 '쇼파르'(shopar)가 사용되었으므로, 레위기의 '요벨'과 여호수아서의 '요벨'이 아무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분명한 것은 내용에 있어서 레위기의 '요벨'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처소로 회복될 수 있는 해' 라는 의미를 가지는 하나의 고유명사라는 것이다. 이와같이 '요벨'의 정확한 어근 추적이 어려우므로, 번역본들은 히브리어 '요벨'의 음을 그대로 빌려와서 표기했음을 알 수 있다.
영어 성경은 '요벨'의 음을 따서 '희년'을 '쥬빌리'(Jubilee)로, 독일어 성경은 '유벨야르'(Jubeljaar) 즉 '요벨의 해'로 표기했다. 그리고 이 어원을 기초로 해서 '환희', '경축'을 뜻하는 영어 단어들(jubilat; 환호하는, jubilate; 환호성을 울리다, jubalation; 기쁨)이 파생되었고, 한글 성경은 파생된 의미에 기초해서 이를 '희년'(禧年) 즉 '좋은 해'라는 의미로 번역했다.
그러니까 한글 성경의 번역은 '요벨'의 어원적 의미보다는 '요벨'의 해가 지니는 자유와 해방의 기쁨을 반영하는 신학적 번역인 것이다.
'너희는 저마다 제 소유지를 되찾고, 저마다 자기 씨족에게 돌아가야 한다'(10)
'너희는 ~돌아가야 한다'로 번역된 '샤브템'(shabthem)은 '돌다'는 뜻의 '슈브'(shub)의 2인칭 능동형 복수이다. 이것은 주인이 종되었던 자들을 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종되었던 자들이 스스로 자신이 속했던 곳에서 나오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즉 희년의 해는 자유로운 흐름이 허락된 해였으므로, 누구든지 주인의 의사를 묻지 않고도 자신의 본래의 것을 회복할 수 있었다.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복음(마태14,1~12)
그러자 소녀는 자기 어머니가 부추기는 대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 주십시오."하고 말하였다. 임금은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어서 그렇게 해주라고 명령하고,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게 하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가져갔다(8~11).
'소녀는 자기 어머니가 부추기는 대로'에서 '부추기는 대로'에 해당하는 '프로비바스테이사'(probibastheisa; being before instructed; prompted)는 '~앞에'라는 뜻을 지니는 전치사 '프로'(pro)와 '폭력을 사용하다', '강제로 들어가다' 등의 뜻을 지니는 '비아조'(biazo)가 결합되어 '앞으로 내세우다', '선동하다'라는 뜻을 지닌 '프로비바조'(probibazo)의 분사 수동형이다.
이것은 어린 살로메가 간교하고 사악하며 잔인한 어머니 헤로디아의 강압에 가까운 권유에 따라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리 가져다 주십시오'에서 '주십시오'에 해당하는 '도스'(dos; give)는 부정 과거 명령형이다.
희랍어에서 부정 과거 명령형은 반복되는 동작이 아니라 단 한번에 이루어지는 결정적인 동작을 요구할 때 쓰인다. 또한 '이리'라는 뜻의 부사 '호데'(hode; here)가 사용되어 바로 잔치가 벌어진 그 장소에서 이 일이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살로메는 헤로데 안티파스가 다른 변명을 하지 못하도록 세례자 요한의 즉각적인 처형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임금은 괴로웠지만'에서 '임금'('호 바실류스'; ho basileus; the king)이라는 말이 세례자 요한의 순교 기사가 수록된 마태오 복음 14장 1~12절 가운데서 여기만 나온다.
1절에서 그의 신분을 나타내는 '분봉왕'('테트라아스케스'; tetraarches; tetarach)이라는 표현이 한 번 나온 후, 계속 '헤로데'(Herodes)란 이름이 나오다가 본문에서 '분봉왕'이 아니라 '임금','왕'이라는 직함이 등장하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의 처형 결정의 기로에 놓인 이러한 시점에서 특별히 '임금'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임금으로서의 자질을 갖추지 못한 자가 임금으로서의 권한만을 행사하는 데 대한 조롱과 고발의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괴로웠지만'에 해당하는 '뤼페테이스'(lypetheis; was sorry; was distressed)의 원형 '뤼페오'(lypeo)는 여기서 수동형으로 쓰였는데, 이럴 경우 '슬퍼하다', '마음이 상하다', '고민스럽다' 등의 다양한 뜻을 지닌다.
당시 헤로데 안티파스는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의로운 이를 죽여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죄책감이 들고 마음이 상했을 것이고, 또한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 세례자 요한을 처형한 뒤에 있을지도 모르는 소요 사태에 대하여 고민도 하는 혼란 가운데 휩싸여 있었을 것이다.
원문 성경에는 '맹세'에 해당하는 '투스 호르쿠스'(tous horkoos; the oath's sake; of his oaths)가 복수형으로 나와 있어서 헤로데 안티파스가 그 자리에서 여러 차례 맹세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맹세를 되돌릴 수가 없었다.
당시 그 자리에 앉았던 사람들은 병행 구절인 마르코 복음 6장 21절에 의하면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이었다.
자신의 그릇된 맹세와 다른 사람의 이목 때문에 불의(不義)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세례자 요한의 처형을 명령한 이러한 행동에는 헤로데 안티파스의 비열함이 잘 나타난다.
한편, '소녀'에 해당하는 '코라시오'(korasio; girl; damsel)의 원형 '코라시온'(korasion)은 '처녀'를 뜻하는 '코레'(kore)의 지소어(指小語)로서 '작은 소녀'라는 뜻을 가지며 다소 경멸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전승에 따르면 이 소녀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평화'를 뜻하는 '샬롬'(shalom)에서 파생한 '살로메'이며, 당시 나이는 15세 정도였다고 한다. 그녀의 이름은 '평화'였으나 그녀는 전혀 평화에는 기여하지 못하고, 하느님의 정의를 외치던 위대한 예언자를 죽게 함으로써 역사에서 악녀로 길이 기억되고 있다.
특히 마태오 복음 14장 11절을 보면, 죄와 쾌락에 눈이 어두워 실로 주어서는 안되고 받아서는 안 되는 것을 태연스럽게 주고 받는 비극의 역사가 연출되고 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
복음서 저자는 헤로데에 관해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그들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마태 14,5).”
여기서 “군중이 두려웠다.” 라는 말은,
군중이 폭동을 일으킬까봐 두려워했다는 뜻입니다.
당시에 헤로데는 로마제국의 식민지 일부를 다스리는 영주일 뿐이었습니다.
만일에 폭동이 일어나면 로마 황제는 그 책임을 헤로데에게 물을 것이고,
헤로데는 영주 자리에서 쫓겨날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군중이 두려웠다.” 라는 말은,
사실은 자기의 권력을 잃을까봐 두려워했다는 뜻이 되기도 하고,
로마 황제를 두려워했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말은, 하느님은 두려워하지 않고,
세속의 권력만 두려워했다는 뜻도 됩니다.
(또 이 말에는, 군중에 대한 요한의 영향력을 두려워했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헤로데는 요한이 군중을 선동하면,
자기의 권력에 위협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 같고,
그래서 요한을 죽였을 것입니다.
단순히 자기를 비판하는 말이 듣기 싫다는 이유만으로 죽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헤로데는 처음에는 군중의 폭동이 두려워서 요한을 죽이지 않았는데,
그랬다가 결국 요한을 죽인 것은,
군중이 폭동을 일으킬 것 같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실제로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헤로데가 요한을 죽인 일에 대해서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헤로데가 요한을 죽인 것은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니,
그는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은 느끼지도 않았습니다.
따라서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마태 14,2).” 라고 말한 것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기 때문도 아니고,
하느님의 심판을 두려워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냥 호기심에서 한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헤로데는 요한을 죽인 일에 대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에
나중에 예수님도 죽이려고 했습니다(루카 13,31).
또 예수님과 헤로데가 만나는 장면을 보면,
헤로데라는 사람이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헤로데는 예수님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오래전부터 그분을 보고 싶어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일으키시는 어떤 표징이라도 보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헤로데가 이것저것 물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그 곁에 서서 예수님을 신랄하게 고소하였다.
헤로데도 자기 군사들과 함께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한 다음,
화려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다.
전에는 서로 원수로 지내던 헤로데와 빌라도가
바로 그날에 서로 친구가 되었다(루카 23,8-12).”
헤로데가 표징을 보기를 기대한 것은 불순한 호기심 때문입니다.
군사들과 함께 예수님을 조롱하는 헤로데의 모습은,
그가 얼마나 저열한 인간이었는지를 잘 나타냅니다.
(아마도 그에게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라는 것이 아예 없었을 것입니다.
오직 세속의 권력과 부귀영화만이 그의 종교요, 신앙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헤로데가 태어날 때부터 악한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를 꾸짖은 것은 그를 회개시키기 위해서이고,
그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헤로데 같은 사람도 회개시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는 지금 죄 속에서 살고 있더라도
완전히 구제불능의 인간이라고 단죄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진짜로 악한 사람도 제대로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헤로데는 회개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요한을 죽인 것은 회개하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는 세속의 권력과 부귀영화를 최고의 가치로 생각했고,
그래서 자기가 받으려고 노력했다면 받을 수도 있었을 구원을 거부하고,
스스로 멸망을 선택했습니다.
헤로데가 요한을 죽이는 장면에 나오는
‘손님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르코복음을 보면 그 ‘손님들’은,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마르 6,21).
그들은 헤로데가 하느님의 예언자를 죽이라고 명령할 때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아마도 그 일에 찬성을 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속으로는 반대하지만 권력이 무서워서 침묵을 지킨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그 일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떻든 헤로데가 요한을 죽일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악행이 벌어지는 것을 구경만 했으니
그들은 모두 살인죄의 공범들입니다.
(“나는 아무 일도 안 했으니 공범이 아니다.” 라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악이 행해질 때 아무 일도 안 하고 방관하는 것은,
사실상 그 악에 동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도 악한 일이 됩니다.)
오늘날에도 헤로데 같은 자들이 있고,
그런 자들이 하는 일에 동조하는 자들도 많습니다.
(정치권력과 재물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면서 인권이나 정의 등은 무시하는 자들,
나중에 심판 받게 된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탐욕과 이기심을 버리지 않는 자들과 동조 세력들...)
악한 일인 줄 알면서도 악한 일을 행하는 자들과 동조자들과 방관자들은
반드시 하느님의 심판대에 서게 될 것입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다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13,41-42).”
송영진 모세 신부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정의를 선포하려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비윤리적인 삶을 살고 있는 헤로데 임금에게 바른말을 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헤로데의 비정상적인 아내 헤로디아는 세례자 요한을 미워하였습니다. 헤로데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헤로디아는 자신의 지위를 위태롭게 하는 요한에게 증오심을 가졌습니다.
오늘 복음의 사건에서 우리는 악한 계략과 의인의 희생을 바라보게 됩니다. 헤로디아의 악한 계략으로 세례자 요한이 순교의 피를 흘리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인간의 악한 계략과 요한의 죽음을 통하여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미리 보여 주셨습니다. 대사제와 원로들은 자신들의 권위와 기득권을 지키려고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죽일 계략을 꾸밉니다. 빌라도는 유다 지도자들의 계략과 군중들의 폭동을 두려워하여 예수님께 사형 선고를 내립니다.
인간의 악한 계략과 의인의 희생은 오늘날에도 지속됩니다. 한 사람의 죄는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며 그 죗값은 후대에까지 이어집니다. 죄의 악순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끊을 수 있습니다. 헤로데는 자신이 죽였던 요한이 되살아날까봐 두려워하였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영혼은 하느님의 심판 앞에 두려워 떨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회개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가담한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자신의 삶을 주님 안에서 되돌아보지 않으면, 우리 역시 악한 계략의 동조자로 전락합니다. 그래서 하루를 마감하기 전에 ‘반성 기도’와 ‘통회 기도’를 하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올여름 들어 가장 강력한 폭염이 전국을 강타했습니다.
여주시 흥천면 기온은 39.4℃, 서울도 35℃까지 기온이 올랐습니다.
높은 습도에 강렬한 햇살이 가세하면서 도심은 펄펄 끓었습니다.
가마솥더위라는 말이 어울리는 날씨였습니다.
영동과 경북 북부를 제외한 전국에 폭염특보가 확대됐습니다.
특히 올여름 들어 가장 많은 지역에 폭염경보가 발령된 상탭니다.
경기도 여주시 흥천면 기온이 전국에서 가장 높은 39.4도까지 올랐습니다.
밀양과 합천이 38도를 넘었고 광주 36.9도, 대구 36.5도, 서울도 34.8℃를 기록했습니다.
전국 곳곳에서 지역 최고 기온이 경신되는 등 올여름 들어 가장 더운 날씨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