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9주간 목요일]용서하라(마태 18,21─19,1)

주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계약 궤를 앞세우고 요르단을 건너라고 하시며, 온 이스라엘이 마른땅을 밟고 강을 건너게 하신다. (여호 3,7-10ㄱㄴㄹ.11.13-17)
그 무렵 7 주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내가 온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너를 높여 주기 시작하겠다. 그러면 내가 모세와 함께 있어 준 것처럼 너와도 함께 있어 준다는 것을 그들이 알게 될 것이다.
8 너는 계약 궤를 멘 사제들에게, ‘요르단 강 물가에 다다르거든 그 요르단 강에 들어가 서 있어라.’ 하고 명령하여라.”
9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였다. “이리 가까이 와서 주 너희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라.” 10 여호수아가 말을 계속하였다. “이제 일어날 이 일로써, 살아 계신 하느님께서 너희 가운데에 계시면서, 가나안족을 너희 앞에서 반드시 쫓아내시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11 자, 온 땅의 주인이신 분의 계약 궤가 너희 앞에 서서 요르단을 건널 것이다. 13 온 땅의 주인이신 주님의 궤를 멘 사제들의 발바닥이 요르단 강 물에 닿으면, 위에서 내려오던 요르단 강 물이 끊어져 둑처럼 멈추어 설 것이다.”
14 백성이 요르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천막에서 떠날 때에, 계약 궤를 멘 사제들이 백성 앞에 섰다.
15 드디어 궤를 멘 이들이 요르단에 다다랐다. 수확기 내내 강 언덕까지 물이 차 있었는데, 궤를 멘 사제들이 요르단 강 물가에 발을 담그자, 16 위에서 내려오던 물이 멈추어 섰다. 아주 멀리 차르탄 곁에 있는 성읍 아담에 둑이 생겨, 아라바 바다, 곧 ‘소금 바다’로 내려가던 물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다. 그래서 백성은 예리코 맞은쪽으로 건너갔다.
17 주님의 계약 궤를 멘 사제들이 요르단 강 한복판 마른땅에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동안, 온 이스라엘이 마른땅을 밟고 건너서, 마침내 온 겨레가 다 건너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죄를 지으면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며, 빚을 탕감받은 악한 종의 비유를 드시고는,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라고 하신다. (마태 18,21─19,1)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3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19,1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들을 마치시고 갈릴래아를 떠나, 요르단 건너편 유다 지방으로 가셨다.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제1독서(여호3,7~10ㄱㄴㄹ.11.13~17)
"이제 일어날 이 일로써, 살아계신 하느님께서 너희 가운데에 계시면서, 가나안족을 너희 앞에서 반드시 쫓아내시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자, 온 땅의 주인이신 분의 계약 궤가 너희 앞에 서서 요르단을 건널 것이다. 온 땅의 주인이신 주님의 궤를 멘 사제들의 발바닥이 요르단 강 물에 닿으면, 위에서 내려 오던 요르단 강 물이 끊어져 둑처럼 멈추어 설 것이다." (10.11.13)
여호수아는 '주님은 구원이시다'는 뜻이다. 희랍어의 '예수스' 즉 '예수'와 같은 말이다. 여호수아기는 모세가 죽은 다음부터 여호수아가 죽어 묻히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한 무리의 노예 집단은 모세라는 출중한 지도자의 인도을 받아 시련의 땅 시나이 반도를 거치면서 그 수가 엄청나게 불어났고, 종교 제도와 행정 체제를 나름대로 갖춘 민족 공동체이자 예배공동체로 발전했다.
이로써 성조들에게 하신 하느님의 약속 가운데 '후손의 번성'이 실현되었고, 이제는 그들이 차지할 땅에 대한 약속이 실현될 차례이다.
여호수아기는 모세오경 다음에 나오는 첫번째 책으로 오경과 연결되는 부분이 많고, 특히 신명기의 신학 사상이 그대로 반영된다. 신명기에서 그토록 중요시한 시나이 계약은 여호수아기에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계약에 대한 충성은 하느님의 축복을 얻기 위한 선결 조건이다.
이집트 탈출 사건을 이집트 파라오 라메세스 2세 치세(B.C.1304~1238년)때 일어난 것으로 보면, 여호수아기에 나오는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떠나온지 40년이 지난 다음인, 기원전 1250~1200년 사이가 될 것이다.
반유목민들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비옥한 땅에 정착하는 일, 소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의 정착은 그냥 그곳에 들어감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쟁과 정복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스라엘은 소규모의 국지적 전투와 더불어 강력한 도시 국가들과는 평화 조약을 맺어가며 약속된 땅에 서서히 진입해 들어간다.
민병대 수준의 이스라엘 병력으로서는 튼튼한 요새와 왕정 제도를 갖춘 가나안의 도시 왕국들을 공략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기에 때로는 엄청난 살육이 자행된 가나안 점령은 야훼 하느님의 적극적인 지원과 비호 아래 이루어진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알아야 한다. 여호수아기의 저작 연대가 바빌론 유배(B.C.578~539)가 끝날 즈음이니, 실제 여호수아기의 내용이 전개된 시기와는 거의 600여 년이 차이가 난다.
남부 유다와 그 수도 예루살렘의 함락을 목격하고 남의 나라 땅에 사로잡혀 와서 살던 유다인들은 민족적 대재앙 앞에서 깊은 반성을 한다.
하느님께서 왜 우리 백성을 치셨을까? 그것은 주님과의 계약을 저버리고 가나안의 우상숭배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런 잘못을 저지르게 되었는가? 그것은 가나안들과 혼인하고 그들의 풍습과 문화와 종교를 받아 들였기 때문이다.
이제 유배가 풀려 가나안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면, 다시는 이런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가나안의 모든 것과 철저히 단절해야 하겠다는 깨달음이 생긴 것이다. 이런 신학적 명제가 여호수아기 저자로 하여금 가나안으로 들어가서 거기에 속한 모든 것을 완전히 파괴하고 없애버리는 것으로 묘사했다고 본다.
이런 입문적 개요를 가지고, 오늘부터 제1독서에 읽혀지는 여호수아기를 묵상하자.
구약성경을 소홀히 하는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출애굽 이후 모세의 지팡에 의해 홍해가 갈라진 사건은 알면서도, 가나안에 들어가기전 사제들이 멘 계약궤에 의해 요르단강이 갈라져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마른 땅을 밟고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간 것엔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 것 같다.
오늘 독서의 여호수아기 3장 9절과 11절을 보면, 온 땅의 주인이신 분의 계약 궤가 이스라엘로 하여금 요르단강을 건너게 한 사건이 바로 앞으로 가나안 땅에서 일어날 일, 즉 가나안족을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쫓아낼 일의 징조라는 것이다. 계약 궤를 통한 요르단 도강 사건을 보고, 앞으로의 가나안 정복을 믿으라는 것이다.
오늘은 여호수아기 3장 11절의 '온 땅의 주인이신 분의 계약 궤'가 눈에 많이 들어 온다.
'계약 궤'가 무엇인가? '만남의 천막'안의 '지성소'안에 있는 하느님 '현존'과 '임재'와 '함께하심'의 자리가 아닌가?
히브리서 9장 4절에 나오는 대로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과 '만나가 들어있는 금항아리'와
'싹이 트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은 아론의 감복숭아 나무 가지'가 들어있는 것이 '계약 궤'가 아닌가?
바로 '말씀'과 '성체성사'와 '사제직'(성사은총)이 이 땅에서 살아계신 주님을 체험하는 구체적인 방법임을 알려주는 게 '계약 궤'가 아닌가?
'계약 궤'안의 주님이, 그위에서 거룹(케루빔)들 사이에서 현존하시는 주님께서 직접 요르단강의 장애를 뚫었듯이 가나안을 정복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다 알듯이, '이집트 노예생활'은 '세례받기전 죄악과 어둠과 사탄의 노예생활', '홍해사건'은 '세례성사', '광야 40년'은 '세속과 마귀와 육신과 싸우는 지상의 순례생활', '요르단강'은 '죽음', '가나안땅'은 '천국'을 예표하고 상징하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죽음의 요르단강을 건너 천국의 가나안 복지로 들어갈려면, '계약 궤'와 '계약 궤'를 멘 사제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말씀과 노자(路資) 성체와 고백성사와 병자 성사의 은총을 사제를 통해 받아야 천국에 갈 수 있다.
동시에 '계약 궤'는 '성모 마리아'를 의미하고 '감실'(tabernacle)을 의미하니, 예수님의 십자가상 유언 말씀대로 사도 요한에게 성모님을 어머니로 주셨듯이 (요한19,26) 어머니를 통해 가장 빠른 방법으로 예수님을 모시고, 천국으로 갈 수 있다는 메세지를 담고 있다.
성모 마리아께 우리 자신을 봉헌하고, 철저히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사신 성모 마리아의 성덕을 본받으며, 묵주의 기도로 강력한 성모 마리아의 전구와 중재를 받을 때, 우리는 가장 완벽하고 안전하게 예수님을 모시고 천국으로 갈 수 있다.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복음(마태18,21~19,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1~22)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에 해당하는 '아페소'(apheso; I forgive)의 원형 '아피에미'(aphiemi)는 '~으로부터'라는 분리를 나타내는 전치사 '아포'(apo)와 '보내다', '가게 하다'는 뜻을 지니는 동사 '히에미'(hiemi)의 합성어에서 유래하여 일차적으로는 '보내 버리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희랍어에서 이 단어는 다양하게 사용되는데, 아내와의 인연을 끊어버린다는 뜻에서 '이혼하다'는 용례로 사용되었고(1코린7,11), 또한 숨이 완전히 떠나 버린다는 의미에서 '죽는다'는 용례로 사용되며(마태27,50), 그리고 채권자로서 권리를 완전히 포기한다는 의미에서 '탕감하다'는 용례로도 사용된다(마태18,30).
그러니까 '아피에미'(aphiemi)라는 단어는 원래의 상태에서 완전히 떠나 다른 상태로 가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 본문에서도 이 단어는 상대가 자신에 대하여 잘못을 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 잘못에 더 이상 개의치 않고 잘못을 하지 않았을 때와 똑같이 대한다는 의미로 쓰였으며, 이것은 형벌을 유보하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용서하는 것을 가리킨다.
한편, '일곱 번'에 해당하는 '헵타키스'(heptakis; seven times)는 이에 상응하는 히브리어 '셰바'(sheba)와 마찬가지로, 동 문화권에서는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하느님께서는 제7일에 천지 창조를 완성하신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숫자는 '완전'을 의미한다. 그리고 제7일은 거룩한 안식일이며, 제7년은 거룩한 안식년으로 지켜졌던 규정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숫자는 '거룩'을 뜻한다.
뿐만 아니라 대속죄일에 피를 일곱 번 뿌린 사실과(레위16,11이하) 관련해 볼 때, 이 숫자는 죄 용서의 상징적 의미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 당시 랍비들은 자신에게 잘못한 자에 대해 세 번 용서해 주는 것을 대단한 관용으로 평가했으며, 이것을 실천하도록 가르쳤다.
따라서 베드로는 이보다 훨씬 더 큰 관용의 자세를 보이기 위해 히브리인에게 큰 의미를 지니는 숫자인 '7'을 염두에 두고, 일곱 번이나 용서하면 충분하지 않겠느냐는 의도를 가지고 예수님께 말씀드렸다고 볼 수 있다.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일흔 일곱 번'에 해당하는 '헵도메콘타키스 헵타'(hebdomekontakis hepta; seventy -seven times)에서 '헵도메콘타키스(hebdomekontakis; seventy times)는 '70'을 의미하며, '헵타'(hepta)는 '7'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두 숫자가 합쳐진 이 표현은 해석상 다소 문제가 있다. 이것을 '490'(70×7)으로도 볼 수 있고, '77'(70+7)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의미에 있어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
예수님께서는 무한한 용서를 나타내기 위한 상징적 용도로 '헵도메콘타키스 헵타'라는 표현을 사용했기 때문에, '490'이나 '77'이라는 특정한 숫자의 크기에 의미가 있지 않다.
베드로는 충분하지 않겠느냐는 의미로 '7'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끝없이 용서해야 한다는 의미로 '70'과 '7'이란 숫자를 겹쳐서 사용한 것이다.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고 용서하여라. 매정한 종의 비유>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1-22)”
베드로 사도의 질문을 이렇게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 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받을 수 있습니까?
일곱 번까지 받을 수 있습니까?”
그러면 예수님의 답변은 이렇게 될 것입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받을 수 있다.
단 진심으로 회개하는 경우에만.”
(이 답변은, “용서받으려면 회개하여라.”가 아니고,
“이미 주어진 용서의 은총이 자기 것이 되게 하려면 회개하여라.”입니다.
주님의 용서가 먼저입니다.
우리의 회개는 주님께서 주신 용서를 잘 받아들이기 위한 일입니다.)
우리는 남을 용서하는 일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자기가 용서받는 일에 대해서는 생각을 안 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세례 받기 전에 지은 죄는 세례성사를 통해서 용서받고,
세례 받은 뒤에 지은 죄는 고해성사를 통해서 용서받습니다.
한 번 세례성사를 받았다고 해서 고해성사가 필요 없는 것도 아니고,
한 번 고해성사를 보았다고 해서 평생 고해성사를 볼 필요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늘 죄 속에서 살고 있고, 끊임없이 회개해야 하고,
계속해서 용서의 은총을 청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형제를 용서하는 일은, 내가 받은 용서의 은총을 나누어 주는 일입니다.
(내가 그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용서를
그와 나누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한계를 두지 않고 계속해서 나에게 용서의 은총을 주십니다.
그러니 나도 형제에게 그렇게 그 은총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말은 쉽지만,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습관적으로 죄를 짓고, 습관적으로 회개하는 경우에,
그 회개를 진정한 회개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또 내가 죄를 몇 번을 짓든지 간에 주님께서는 계속 용서하실 것이라고 믿고,
계속 죄를 짓는다면, 그것은 주님을 모독하는 죄까지 더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참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나쁜 습관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형제를 용서해야 하는 경우에도, 우선 먼저 그 형제가
나쁜 습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부터 해야 할 것입니다.
‘매정한 종의 비유’는 우리가 형제를 용서해야 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입니다.
(또는, 우리가 용서받지 못하는 경우에 대한 설명이기도 합니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마태 18,32-33)”
자기가 받은 은총을 형제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다면, 받은 은총을 잃게 됩니다.
(주님께서 도로 빼앗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용서의 은총뿐만 아니라 모든 은총에 다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런데 비유의 내용을 보면, 주인이 탕감해 준 부채는 ‘만 탈렌트’이고,
동료의 빚은 ‘백 데나리온’으로 되어 있습니다.
만 탈렌트는 육천만 데나리온입니다.
(당시에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용서의 은총은 상상을 초월한 엄청난 일이고,
우리가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용서는 아주 작은 일이라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렇지만 이 내용에 대해서 별로 실감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총은 작게만 느껴지고,
이웃에게 베풀어야 할 것들은 크게만 느껴지고...
그래서 우리가 우선 먼저 할 일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이
얼마나 크고 풍성한지를 묵상하면서 감사드리는 일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에서 이웃을 용서하는 너그러운 마음이 생기는 법입니다.
(실제로 “나는 하느님에게서 받은 것이 별로 없다.
그런데도 왜 이웃에게 베풀기만 해야 하는가?” 라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받은 것이 없다고 생각하니까 나누어 줄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감사드리는 마음’은 신앙생활의 기본자세입니다.
받은 은혜에 대해서 감사드리지는 않고 항상 청하기만 하는 신앙생활은,
이기적인 기복신앙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큽니다.)
비유에 들어 있는 이야기 순서를 바꿔서,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은 일이 먼저 있었고,
그 다음에 임금에게 가서 자비를 청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매정한 종의 비유’는 우리가 용서받지 못하는 경우에 대한 설명이 됩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35).”
이 말씀은,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는지 안 하는지 하느님께서 지켜보시다가,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면 하느님도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실 때 이미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풍성한 은총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에페 1,7).”
그런데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한 번 하신 일은 취소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라는 말씀은,
이미 주셨던 용서의 은총을 취소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그 은총에서 떠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웃을 용서하지 않는 것은,
내가 받은 용서의 은총을 스스로 버리는 일과 같다는 것.)
이 말을 반대로 표현하면, “이웃을 용서하는 일은,
내가 받은 용서의 은총을 더욱 확실하게 나의 것으로 삼는 일이 되고,
더욱 확실하게 그 은총 속에서 사는 일이 된다.” 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웃을 용서하는 일은 곧 나 자신을 위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모세가 홍해를 건널 때, 물이 갈라져 이스라엘 백성이 무사히 이집트를 탈출하였습니다. 또한 여호수아가 요르단 강을 건널 때, 계약의 궤를 맨 사제들이 강에 들어서자 강물이 둑처럼 되어서 멈추어 섰고, 이스라엘 백성이 놀라워하며 강을 건넜습니다. 엘리사 예언자가 스승 엘리야의 외투로 요르단 강물을 치니 물이 양쪽으로 갈라졌습니다. 이렇게 요르단 강물은 하느님의 보호와 사랑, 하느님의 능력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표지가 되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요르단 강에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며 회개와 용서의 삶을 살도록 이끌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며 ‘물과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나 하느님을 섬기는 자녀들의 은총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세례로 우리의 모든 원죄와 본죄를 용서받은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은총을 체험한 자녀들의 삶은 용서와 자비의 삶이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무자비한 종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남의 잘못을 단죄하고 용서하지 않으며 남을 괴롭혔습니까?
우리는 하느님께 무한한 사랑의 빚을 지고 있으므로 남의 잘못과 죄를 무한히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지상에서 용서하는 행위의 숫자는 무한대입니다. 남을 헐뜯고 단죄하는 일들로 우리가 연옥에서 갚아야 할 빚은 더 늘어납니다. 우리가 세례의 은총을 기억하며 남의 잘못을 용서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합니다. 자비로운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주님의 칭찬을 받게 됩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험한 세상을 건너는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그것은 조건 없는 용서와 사랑입니다. 영어로 용서를 나타내는 말은 ‘Forgive’입니다. For는 ‘위하여’라는 전치사이고, Give는 ‘주다.’라는 동사입니다. 용서는 ‘위하여 준다.’는 뜻의 합성어입니다. 목적어는 없습니다. 우리는 목적어를 다양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첫째, 나를 위하여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어쩌면 용서해야하는 실질적인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분노가 가득차면 내가 힘들고 너무 괴롭기 때문입니다. 한국인들에게 있는 ‘화병’도 어쩌면 용서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용서하지 않고 무관심한 태도를 보여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용서는 나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말을 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둘째, 상대방을 위해서 줄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수오지심’이 있습니다. 이는 부끄러움을 아는 것입니다. 용서 받지 못한 사람도 가슴에 ‘한’이 맺히기 마련입니다. 많은 것을 가졌어도, 삶이 풍족해져도 자신의 잘못 때문에 깊은 잠을 자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백성사는 이런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갖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이름으로 용서를 주는 것입니다.
셋째, 하느님을 위해서 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잘못을 해도 뉘우치면 우리를 용서해 주십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면 하느님께서는 기뻐하시고, 우리가 범한 더 큰 잘못도 기쁜 마음으로 용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합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용서하지 못해서 잠을 못 이루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용서받지 못해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이런 표어가 있었습니다. ‘자수하여 광명 찾자!’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용서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자!’
조재형가브리엘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