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9주간 수요일] 형제가 죄를 짓거든 (마태 18,15-20)
주님의 종 모세가 주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바라보며 모압 땅에서 죽자, 이스라엘 자손들은 삼십 일 동안 모세를 생각하며 애곡한다. (신명 34,1-12)
그 무렵 1 모세가 모압 평야에서 예리코 맞은쪽에 있는 느보 산 피스가 꼭대기에 올라가자, 주님께서 그에게 온 땅을 보여 주셨다. 단까지 이르는 길앗, 2 온 납탈리, 에프라임과 므나쎄의 땅, 서쪽 바다까지 이르는 유다의 온 땅, 3 네겝, 그리고 초아르까지 이르는 평야 지역, 곧 야자나무 성읍 예리코 골짜기를 보여 주셨다.
4 그리고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저것이 내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너의 후손에게 저 땅을 주겠다.’ 하고 맹세한 땅이다. 이렇게 네 눈으로 저 땅을 바라보게는 해 주지만, 네가 그곳으로 건너가지는 못한다.”
5 주님의 종 모세는 주님의 말씀대로 그곳 모압 땅에서 죽었다. 6 그분께서 그를 모압 땅 벳 프오르 맞은쪽 골짜기에 묻히게 하셨는데, 오늘날까지 아무도 그가 묻힌 곳을 알지 못한다.
7 모세는 죽을 때에 나이가 백스무 살이었으나, 눈이 어둡지 않았고 기력도 없지 않았다. 8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압 평야에서 삼십 일 동안 모세를 생각하며 애곡하였다. 그런 뒤에 모세를 애도하는 애곡 기간이 끝났다.
9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여호수아는 지혜의 영으로 가득 찼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의 말을 들으며,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실천하였다.
10 이스라엘에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주님께서 얼굴을 마주 보고 사귀시던 사람이다. 11 주님께서 그를 보내시어, 이집트 땅에서 파라오와 그의 모든 신하와 온 나라에 일으키게 하신 그 모든 표징과 기적을 보아서도 그러하고, 12 모세가 온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이룬 그 모든 위업과 그 모든 놀라운 대업을 보아서도 그러하다.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죄를 지으면 타이르고 말을 듣지 않으면 교회에 알리라며,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기라고 하신다. (마태 18,15-2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5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16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17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19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제1독서(신명34,1~12)
'모세는 죽을 때에 나이가 백스무살이었으나, 눈이 어둡지 않고 기력도 없지 않았다.'(7)
'기력도'로 번역된 '레호'(leho)의 기본형 '레아흐'(leah)는 '신선함'이라는 뜻으로서 여기만 나오는 단어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이 단어에서 파생된 다른 형용사로 '라흐'(lah)가 나오는데, 이것은 과일의 신선함이나 즙이 많은 상태(민수6,3)를 묘사하며, 자라나는 나무 혹은 금방 베어 아직 싱싱함을 유지하는 나무에 대해서는 '푸른'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창세30,17; 에제17,24).
그리고 '없지', '쇠하지'로 번역된 '나쓰'(nas)는 '없어지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그의 기력도 없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육체가 나이에 비해 여전히 건강을 유지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전쟁의 출전을 가리키는 '더 이상 나다닐 수가 없게 되었다'(신명31,2)라는 모세의 말과 신명기 34장 7절의 표현은 상충되지 않는다.
신명기 34장 7절의 의미는 그가 죽기 전까지 젊은이 같은 건강을 유지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까지 모든 신체의 기능이 성한 가운데서도 자신의 죽음을 담대하게 맞이했다는 뜻이다.
한편 모세가 죽은 나이인 120세는 하느님께서 노아의 홍수 후에 인간의 수명으로 말씀하신 120년의 기간을 다 산 나이였다(창세6,3).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여호수아는 지혜의 영으로 가득찼다.'(9)
성경 원문은 한글 성경의 번역 순서와 다르게 본절이 '여호수아'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이것은 지금까지 모세가 가지고 있던 지도자의 권위가 이제 여호수아에게 옮겨졌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의 이름을 강조하는 문장 구조이다.
그리고 여기서 '지혜의 영'으로 번역된 '루아흐 호크마'(ruah hokma; the spirit of wisdom)는 하느님께서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자들에게 부어주시는 은사를 일컫는 말이다(탈출28,3).
즉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안수'에 해당하는 '싸마크'(samak; '안수하였다'; had laid his hands on)라는 공식적인 의식을 통해 여호수아가 모세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외적으로 선포했을 뿐 아니라 내적으로 여호수아에게 민족을 이끌어 갈 지도력과 지혜의 은사를 부어 주신 것이다.
더군다나 '가득찼다'로 번역된 '말레'(malle; was filled with; was full of)는 '충만했다'는 뜻인데, 이 '말레'(malle)는 완료형이므로 이미 지도자의 권위가 그에게 옮겨졌음이 확실하게 나타나 있다.
이렇게 하여 모세를 중심으로 한 파란만장했던 출애굽 시대는 일단락되고, 후계자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한 가나안 정복의 새로운 시대가 펼쳐지게 되었다.
'이스라엘에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10)
신명기 18장 15절에는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 가운데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모세의 말이 나온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장차 모세와 견줄 수 없는 완전한 예언자이신 메시야를 이 땅에 보내실 것을 예언한 내용이다.
그런 반면에 신명기 34장 10절의 말씀은 예언자 자체가 다시는 나오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언자들이 나오지만 모세에 견줄만한 탁월한 예언자는 나오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예언자로서 모세의 탁월함을 강조하는 구절이다.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복음(마태18,15~2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18)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으로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19)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20)
마태오 복음 18장 15~17절에서 형제의 죄에 대한 3단계 처리책에 대해 논했는데, 그 마지막 단계가 교회의 권면이었다. 따라서 교회의 공식적인 권면에 대해 합당한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교회에서 추방하는 징계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하여 불가피한 조치이지만, 이 일은 교회 차원에서만 행해지고, 실로 신중하게 시행되어야 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마태오 복음 18장 18~20절에서 교회의 징계 권한에 대한 합법성을 부여하심과 동시에 기도가 선행되어야 하고 사려깊게 시행할 것을 교훈하신 것이다.
마태오 복음 18장 18절은 동사가 복수 2인칭으로 쓰였다는 점만 빼고는, 마태오 복음 16장 19절과 동일하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교회에 주어진 권위를 나타낸다.
이렇게 볼 때 본문의 '매고 푸는 것'은 교회 구성원의 죄에 대한 징계 권한의 시행을 의미하는 것이 명백하다.
한편, 마태오 복음 18장 19절에 대해서 한글 새 성경은 번역하지 않았지만, 원문에는 '만일'로 번역될 수 있는 '에안'(ean; if)이 문장 서두에 기록되어 있어서, 합심하여 청하는 상황이 충족되기만 하면, 청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의미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 '무엇이든'에 해당하는 '페리 판토스 프라그마토스'(peri pantos pragmatos; about anything)에서 '프라그마토스'(pragmatos)의 원형 '프라그마'(pragma)는 '일', '사건', '과업' 뿐만 아니라 법정에서 다루어지는 '소송', '논쟁'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음을 모아'에 해당하는 '쉼포네소신'(symphonesosin; agree)의 원형 '쉼포네오'(symphoneo)는 영어에서 '교향곡'이라는 뜻을 지니는 '심포니'(symphony)의 어원을 이루는 말로서, 서로 뜻을 같이 하여 조화를 이루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19절의 '프라그마토스'(pragmatos)는 본 단락이 교회의 징계 권한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징계 권한'으로 해석될 수 있다.
특히 여기서 '쉼포네오'(symphoneo)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은 징계 권한이 개인적이거나 주관적이거나 혹은 극단적으로 이루어져서는 안되며, 두 사람 이상의 합치된 의견과 한 마음으로 청하는 기도가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전제될 때, 비로소 교회의 징계 권한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권위있게 시행될 수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20)
본절은 교회의 구심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여야 함을 보여 주는 결정적인 구절이다.
여기서 '두 사람이나 세 사람'에 해당하는 '뒤오 에 트레이스'(dyo e treis; two or three)는 소수의 사람을 가리키는 관용적인 표현이다.
그리고 '모이다'는 의미로 번역된 '쉬네그메노이'(synegmenoi; come together; gather together)의 원형 '쉬나고'(synago)는 '~와 함께'라는 뜻의 전치사 '쉰' (syn)과 '오다', '가다'라는 뜻이 있는 동사 '아고'(ago)가 결합된 합성어로서 '함께 모이다'는 의미가 있다.
유다인들이 율법을 배우고 하느님께 예배하기 위해 모이는 집회소인 '회당'을 가리키는 '쉬나고게'(synagoge)가 바로 이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그러니까 '쉬나고'(synago)는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한 마음으로 모이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모이는 지향점은 바로 '예수의 이름'이다.
'내 이름으로'로 번역된 '에이스 토 에몬 오노마'(eis to emon onoma; in my name)에서 '~안으로'(into)라는 뜻의 방향을 나타내는 전치사 '에이스'(eis)가 쓰였는데, 이 '에이스'(eis)가 때로는 위치를 나타내는 전치사 '엔'(en; in)의 대용어로도 쓰이는데, 여기서는 방향과 위치 두 가지 의미가 동시에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믿는 이들은 예수님의 이름 안으로 함께 나아가야 하고, 예수님의 이름 안에 머물러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마태오 복음 18장 20절은 교회의 지향점과 구심점이 예수님의 이름임을 잘 보여준다.
한편,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에서 '나도 ~있다'에 해당하는 '에이미'(eimi; I am)는 영어의 be 동사에 해당하는 희랍어의 현재형이다.
두 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일 때, 예수님께서도 그들 가운데에 있을 것이라는 약속이 일반적인 진리나 습관적인 행동을 나타내는 현재형으로 쓰인 것은,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하겠다는 뜻이다.
이 약속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주신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는 약속의 말씀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마태28,20).
예수님께서는 이 약속에 따라 오늘날에도 믿는 이들 가운데 영으로 현존하셔서 그들과 더불어 인격적으로 친교하고 계신다.
그런데 이 구절이 교회가 시행하는 '징계 권한'의 문맥에서 나온다는 점에서 믿는 이들의 일치된 뜻에 의한 교회의 '징계 권한'이 하느님의 인준을 받는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형제가 죄를 지으면 깨우쳐 주어라.>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마태 18,15-17).”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이라는 말에서,
‘너에게’ 라는 말은 빼야 한다는 것이 대다수 학자들의 의견입니다.
말씀의 전체 뜻을 생각하면, 이 말씀은 개인 사이의 잘못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와 관련된 죄에 대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후대의 필사자 가운데 누군가가
뒤의 21절을 보고 ‘너에게’ 라는 말을 써넣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루카복음 17장 3절ㄴ을 보면,
‘너에게’ 라는 말이 없습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라는 말씀은,
죄를 지은 형제가 회개할 수 있도록 타이르되
처음부터 형제의 죄를 공공연히 드러내지는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라는 말씀에는,
‘죄를 지은 형제’는 ‘잃은 형제’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죄를 지은 사람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죄를 짓는 것은 예수님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일이고,
교회 공동체에서도 떨어져 나가는 일, 즉 ‘잃은 양’이 되는 일인데,
‘되찾은 양’이 되려면 회개를 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됩니다.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한 사람의 충고만으로 죄를 지은 형제를 회개시키기 어렵다면
여러 사람의 형제애로 더 많이 노력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사실 혼자서 가면, 자기 혼자만의 의견을 말하게 되고,
혹시라도 그 의견에 조금이라도 편견이나 나쁜 고정관념 같은 것이 섞여 있다면,
회개시키기는커녕 반발만 불러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이 말씀은 여러 사람이 몰려가서 그 형제를 압박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형제를 타이르는 일은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와 베드로 사도 사이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케파가 안티오키아에 왔을 때 나는 그를 정면으로 반대하였습니다.
그가 단죄 받을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오기 전에는 다른 민족들과 함께 음식을 먹더니,
그들이 오자 할례 받은 자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몸을 사리며
다른 민족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나머지 유다인들도 그와 함께 위선을 저지르고,
바르나바까지도 그들과 함께 위선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에 따라 올바른 길을 걷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케파에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유다인이면서도 유다인으로 살지 않고 이민족처럼 살면서,
어떻게 이민족들에게는 유다인처럼 살라고
강요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갈라 2,11-14)”
(어떤 잘못된 일을 보았을 때, 그 일을 한 사람이 사도라 하더라도
그것을 지적하고 꾸짖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좋은 모범을 남겼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 사도의 반응이 언급되어 있지 않은 것은, 아마도 그가
바오로 사도의 비난을 겸손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죄를 지은 형제를 타이를 때, 명심해야 할 예수님 말씀이 있습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마태 7,1-5).”
형제를 타이를 때, 마치 심판하는 것처럼 하면 안 됩니다.
같은 죄인의 입장에서, 함께 회개하자고 호소하는 형제애 실천이 되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베드로 사도를 비난한 일 경우에,
그 일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꾸짖은 일도 아니고,
의인이 죄인을 꾸짖은 일도 아닙니다.
같은 사도로서 형제애를 실천한 일입니다.)
이 상황에 대해서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형제가 와서 나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타이를 때,
“회개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나 잘해라.” 라는 반응을 보이면 안 됩니다.
그런 태도는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위선자들의 교만입니다.
나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회개의 시작입니다.
참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형제의 충고를 겸손하게 받아들입니다.
(형제가 나에게 베푸는 사랑을 거부하는 것도 죄를 짓는 일입니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라는 말씀은,
두 번째 충고도 거부한다면 교회의 공적인 판단에 맡기라는 가르침입니다.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라는 말씀은, “교회의 공적인 권고도 거부한다면 파문하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를 파문하는 것은 회개시키기 위한 마지막 수단입니다.
영구적으로 쫓아내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파문당한 죄인도 회개하면 다시 교회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요한1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형제가 죄를 짓는 것을 볼 때에 그것이 죽을죄가 아니면,
그를 위하여 청하십시오. 하느님께서 그에게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1요한 5,16).”
여기서 말하는 ‘죽을죄’는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죄”,
또는 “용서받기를 거부하는 죄”로 해석됩니다.
예수님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는” 분입니다(마태 12,20).
예수님께서 포기하지 않으시니, 우리는 형제에 대해서도,
또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포기하면 안 됩니다.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누구든지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압 땅에서 죽었습니다. 그가 죽기 전에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도록 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지혜의 영이 가득 차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끌게 됩니다.
신약의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의 공동체가 아니라 은총의 공동체입니다. 잘못한 이웃을 단죄하지 않고 사랑으로 이끄는 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죄를 지은 사람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회복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자기 잘못을 뉘우치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분노하지 말고 상대방이 변화될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로부터 죄를 용서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았기에 신적 지혜와 온유로 이웃을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카인이 질투심에 아벨을 죽였을 때, 시치미를 떼며 아우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변명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은 탓을 하와에게 돌렸습니다. 그러한 변명을 이해하고 눈감고 있을 수 있는 이유는 어디에서 오겠습니까?
교회는 매정한 종이 아니라 자비로운 종의 모습으로 움직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보여 주는 성사입니다. 교회의 결정에 따른다는 것은 진리에 충실하고 은총 안에 머물고 있다는 뜻입니다. 신앙인은 진실을 이야기하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람입니다. 우리 각자는 이웃의 잘못에 너그러운 ‘화해의 사도’가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