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1주간 수요일] 회칠한 무덤 (마태오 23,27-32)
바오로 사도는, 테살로니카 신자들이 우리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 하느님께 감사드린다고 한다. (1테살로니카 2,9-13)
9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의 수고와 고생을 잘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10 우리가 신자 여러분에게 얼마나 경건하고 의롭게 또 흠 잡힐 데 없이 처신하였는지, 여러분이 증인이고 하느님께서도 증인이십니다.
11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는 아버지가 자녀들을 대하듯 여러분 하나하나를 대하면서, 12 당신의 나라와 영광으로 여러분을 부르시는 하느님께 합당하게 살아가라고 여러분에게 권고하고 격려하며 역설하였습니다.
13 우리는 또한 끊임없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이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신자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겉은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으로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다고 하신다. (마태오 23,27-32)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7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28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
29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30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31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32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제1독서(1테살2,9~13)
"우리는 또한 끊임없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이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신자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13)
테살로니카 1서 2장 13~16절은 테살로니카 1서 2장 1~12절까지 계속되어 온 사도 바오로의 테살로니카 복음 전파 활동에 대한 회상의 연속이다.
복음에 대한 테살로니카 신자들의 진실한 자세를 회고하며, 이에 대해 감사하는 내용에서 '끊임없이'라는 의미의 '아디알레입토스'(adialleiptos; without ceasing)와 '감사를 드립니다'라는 뜻의 '유카리스투멘'(eucharisteo)의 직설법 현재 동사>은 테살로니카 신자들로 인한 사도 바오로와 그의 동역자들의 감사가 잠시라도 끊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해 준다.
복음 전파자들에게 근심과 염려가 되었던 코린토 신자들(1코린4,18~21)과 달리복음 전파자들에게 감사의 제목이 되었던 테살로니카 신자들은 모든 시대의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요소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1테살1,3).히브리서 13장 17절에는 '지도자들의 말을 따르고 그들에게 복종하십시오. 그들은 하느님께 셈을 해 드려야 하는 이들로서 여러분의 영혼을 돌보아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탄식하는 일 없이 기쁘게 이 직무를 수행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들의 탄식은 여러분에게 손해가 됩니다.'라는 말씀이 있는데, 테살로니카 신자들은 복음 전파자들로 하여금 기쁜 마음으로 일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날마다 감사가 끊어지지 않게 했으니, 그들의 영혼은 영적으로 많은 유익을 덧입었던 것이다.
테살로니카 1서 2장 13절의 두번째 구절은 이유 접속사 '호티'(hoti)로 연결되는데, 사도 바오로와 그 동역자들이 테살로니카 신자들에 대해 하느님께 끊임없이 감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하느님의 봉사자들로부터 선포되고 가르쳐지는 말씀의 권위는 사람의 권위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권위이다.
하느님 대전에 겸손한 자들이라면, 이러한 하느님의 봉사자들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의당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게 마련이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봉사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원래 그대로, 때로는 상세히 해설하여 전하는 중개자들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들 자신도 자신이 전하는 말씀이 자기 것인 양 주장할 수 없고, 그 말씀을 받는 자들도 당연히 그 말씀을 사람의 말이 아닌 하느님께서 주신 말씀으로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에 그 말씀의 권위에 복종하여 하느님 나라와 영광에 참여할 수 있으며 (1테살2,12), 그 말씀이 자신 안에서 역사(役事)하시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한편, 여기서 '말씀'('로고스'; logos; the word)을 '받다'라는 의미로 번역된 단어가 두 개이다.
첫째는 '들을 때에'로 번역된 '파랄라본테스'(parallabontes; when you received)라는 부정 과거 분사이고, 둘째는 '받아들이지'로 번역된 '에덱사스테'(edeksasthe; you accepted it)라는 직설법 부정 과거 동사이다.
전자는 객관적이고 외부적인 수용을 뜻하고, 후자는 환영과 찬성을 동반하는 주관적이고 내적인 수용을 뜻한다.
즉 전자는 귀 있는 모든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듣는 현상을 말하는 것으로서 사람의 입에서부터 흘러 나온 말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들린다는 사실과 관련되며, 후자는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이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것으로서 사람에 따라 그 반응의 형태가 달라진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테살로니카 신자들은 사도 바오로 일행의 입에서 나온 복음을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 반드시 순종하고 지켜 행해야 할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사도 바오로가 전한 복음을 테살로니카 신자들이 사람의 말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 이유가 사도 바오로의 언변이 탁월하고 좌중을 압도하는 능력이 있어서였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코린토 2서 10장 10절에는 '그의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차지만, 직접 대하면 그는 몸이 약하고 말도 보잘것 없다.'라고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보더라도 테살로니카 신자들이 사도 바오로가 전한 복음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 것은 감동시키는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었기 때문이며, 사도 바오로가 개인적 사상이 아닌 하느님의 진리를 전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사실 그대로'로 번역된 '카토스 에스틴 알레토스'(kathos estin allethos; as it is in truth; as it actually is)는 직역하면 '그것은 진실로 그와 같다'이다.
이것은 '너희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은 것처럼, 하느님의 말씀은 참으로 하느님의 말씀이다'는 의미를 전달한다.
테살로니카 신자들은 사도들로부터 전파된 하느님의 말씀이 갖는 본질적 가치를 알고 있었으며, 또한 복음에 대해 그렇게 반응하는 것이 당연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 '신자 여러분 안에서'라는 표현은 '믿음의 형제들'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사도들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믿는 여러분들'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말씀이 아무리 객관적으로 능력이 있다 할지라도, 그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도대체 역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활동(역사)하고 있습니다'로 번역된 '에네르게이타이'(energeitai; is at work; effectually works)는 현재 직설법 동사인데, 여기서 현재 시제는 두 가지 의미를 나타낸다.
첫째로, 그리스어에서 직설법 현재형은 진리나 격언 및 변함없는 진리를 나타내는 '격언적 현재'(Proverbal Present)로 쓰인다는 점에서 이것은 변함없는 진리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즉 증거되는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 믿는 자들에게는 언제 어디서나 그 말씀이 역사하는 것은 불변의 진리라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영적 원리로 정해 놓으신 일이기 때문에, 이러한 조건만 충족되면 이 역사는 언제나 어디서나 일어나는 것이다.
둘째로, 그리스어에서 직설법 현재형은 과거에 시작되어 현재까지 계속되는 동작을 나타내는 '지속적 현재'(Durative Present) 용법으로 쓰인다는 점에서 테살로니카 신자들의 당시 영적인 삶에 그 역사가 나타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사도 바오로가 말씀을 전하던 때 뿐만 아니라, 본 서간을 쓰고 있는 현재에도 그와같은 역사가 믿는 이들 안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활동(역사)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원형 '에네르게오'(energeo)는 죽은 자의 영이 다른 사람 안에서 되살아나 '운동하다' (마태14,2) 또는 무법의 신비가 '작용하다'(2테살2,7)라는 의미로 사용된 동사이다. 즉 운동력있게 활동함으로써 능력을 발휘한다는 의미이다.
본절에서 이러한 활동의 주체는 '하느님의 말씀'인데, 이것은 즉각적으로 히브리서 4장 12절을 연상시킨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즉 하느님의 말씀이 믿는 이들 안에서 운동력있게 활동함으로써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생명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은 에제키엘 예언자도 체험한 바가 있다(에제37,1~14).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은 그것을 그분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의 심령에 역사하여 자신의 죄악된 실체와 직면하게 하며, 그로 인해 그 죄스런 생각과 본성을 변화시키고, 자신에게만 이기적으로 집중하던 관심을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 열게 하며, 그들의 삶 전체를 하느님께로 향하도록 바꾸어 놓는 것이다.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복음(마태23,27~32)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 (27~28)
마태오 복음 23장 27절과 28절은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대한 여섯번째 저주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유다인들이 부정하게 여겼던 무덤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무덤'으로 번역된 '타포이스'(taphois; tombs)의 원형 '타포스'(taphos)는 '매장하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 '탑토'(thapto)에서 유래한 명사이다. 원래는 '장례 의식'(funeral rites)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다가 후에는 '묘'(tomb)라는 의미로 널리 사용되었다.
유다의 무덤은 초기에 동굴 위주였으나 후기로 오면서 '토굴'(crypt) 위주로 바뀌었다. 그리고 '회칠한'으로 번역된 '케코네아메노이스'(kekoniamenois; whitewashed)의 원형 '코니아오'(koniao)는 '석회로 바르다', '회반죽을 바르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이다.
여기서는 수동태 완료 분사로 쓰여서 '석회질이 된'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타포이스 케코니아 메노이스'(taphois kekoniamenois)는 '석회질이 된 무덤들'이라는 의미이다.
유다인들은 유다력으로 아다르월(월력12월; 양력3월) 15일에 무덤을 회칠하는 관례를 가졌는데, 이것은 무덤을 잘 띄게 함으로써 거기를 지나가는 순례자들이 실수로 무덤을 밟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무덤에 몸이 닿은 이는 이레 동안 부정하게 되기 때문이다(민수19,16).
마태오 복음 23장 27절과 병행 구절인 루카 복음 11장 44절에 의하면, '너희는 불행하여라! 너희가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무덤인 줄은 알지 못한다' 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드러나지 않는'이라고 번역된 '아델라'(adela)라는 단어는 '숨겨져서 보이지 않는'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표현은 마태오 복음의 기록과는 다르다.
루카 복음사가는 일반 사람들이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더러운 내면의 세계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의미로 그들을 '드러나지 않는 무덤'이라고 했고, 마태오 복음사가는 마음 속은 온갖 부패한 것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깨끗한 '회칠한 무덤'처럼 깨끗한 체하는 그들의 이중적인 삶을 강조하기 위해 '회칠한 무덤'이라고 한 것이다.
한편, '같기'로 번역된 '파로모이아제테'(paramoiazete; you are like)는 '닮았다'는 의미를 지닌 원형 동사 '파로모이아조'(paromoiazo)의 복수 2인칭 현재형이다. 따라서 이것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회칠한 무덤을 닮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회칠한 무덤 같다'는 비유는 실제 내용물은 시체나 말라 비틀어진, 가득찬 뼈들과 진동하는 부패한 냄새인데, 겉포장은 희고 깨끗해 아름다우므로 겉과 속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이 회칠한 무덤을 닮았다는 것은 그들의 외적 행위는 깨끗하고 아름다워 보여도, 그들의 실상인 도덕적, 영적 상태는 썩어 냄새나는 것이라는 사실, 즉 위선의 극치를 가리키는 것이다(마르7,1~23참조).
'겉은 ~의인으로 보이지만'
'의인으로'로 번역된 '디카이오이'(dikaioi; righteous)의 원형 '디카이오스'(dikaios)는 '합법적인', '옳은', '의로운'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차디크'(tsadiq)에 해당하는 단어로서 '의로운', '하느님과 인간의 법을 준수하는'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보이지만'으로 번역된 '파이네스테'(phainesthe; appear)의 원형 '파이노' (phaino)는 '빛나게 하다', '비추다' 또는 '나타나다'를 뜻하는 동사로, 여기서는 복수 2인칭 수동태로 쓰였다. 이것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사람들에 의해 그렇게 보여진다는 뜻이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외적인 경건한 노력과 지나칠 정도로 엄격한 율법 준수의 모습을 보고서, 그들이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 의롭고 올바른 사람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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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칠한 무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마태 23,27-28).”
여기서 ‘회칠한 무덤’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설명하신 그대로
“겉은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한”
위선자들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에는, 겉과 속이 다르다는 뜻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죄짓게 한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민수기 19장에 있는 율법에 의하면, 무덤은 사람을 부정하게 만드는 물건입니다.
“들에 있다가, 칼에 맞아 죽은 이나 저절로 죽은 이,
또는 사람의 뼈나 무덤에 몸이 닿는 이는 모두 이레 동안 부정하게 된다.
이렇게 부정하게 된 이를 위해서,
속죄 제물이 타고 남은 재를 얼마쯤 그릇에 담고 그 위에 생수를 붓는다.
그런 다음, 정결한 사람이 우슬초를 가져다가 그 물을 찍어,
천막과 모든 기물과 그 안에 있던 이들에게 뿌린다.
뼈나 살해된 이나 저절로 죽은 이나
무덤에 몸이 닿은 이에게도 그렇게 한다(민수 19,16-18).”
“부정하게 된 사람이 자신을 정화하지 않으면, 그는 공동체에서 잘려 나가야 한다.
그가 주님의 성소를 부정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정화의 물을 자기 몸에 뿌리지 않아, 그는 부정하다(민수 19,20).”
남을 부정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즉 남을 죄짓게 만든다는 점에서
‘회칠한 무덤’ 같다고 꾸짖으시는 말씀은, 앞의 13절의 말씀과 뜻이 같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마태 23,13).”
(나의 ‘위선’은 나 혼자만의 죄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즉 ‘남을 죄짓게 하는 죄’를 짓는 일입니다.
이처럼 ‘위선’은 나 자신도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않는 일이 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못 들어가게 그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위선은 ‘큰 죄’가 됩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마태 23,29-32).”
이 말씀은, 겉으로는 예언자들을 공경하는 척 하지만,
실제 생활은 예언자들을 죽인 조상들과 다를 것이 없는
위선자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든다는 말을,
앞의 ‘회칠한 무덤’이라는 말에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위선자들이 죽은 예언자들과 의인들의 무덤을 만들고 꾸미는 행동 자체가
‘회칠한 무덤’과 같은 행동입니다.
마음속으로는 공경하지 않으면서 겉으로만 공경하는 척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를 원문대로 직역하면,
“너희 조상들이 남겨 놓은 것을 행함으로써 조상들의 죄를 완전히 채워라.”인데,
이 말씀의 뜻은, “나와 나의 제자들을 죽여서 너희의 죄를 가득 채워라.”입니다.
죄가 가득 차면 하느님의 심판과 벌이 내리게 됩니다(묵시 6,11).
그래서 이 말씀은, “하느님의 심판을 받고 싶다면,
나와 나의 제자들을 죽여라.” 라는 뜻이 됩니다.
반대로 표현하면, “하느님의 심판을 받고 싶지 않다면,
예언자들을 죽였던 너희 조상들과 같은 짓을 하지 마라.”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신 것은,
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서이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말씀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는 단순한 말씀이 아닙니다.
회개하라고 호소하시는 말씀입니다.
성경에 있는 ‘심판과 멸망을 예언하는’ 말씀들은,
단순히 미래의 일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심판과 멸망을 당하지 않도록 지금 회개하라는 호소입니다.)
우리는 위선자들을 꾸짖으시는 예수님의 말씀들을,
당시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으로만 생각하면 안 되고,
지금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옛날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같은 위선자가 아니다.
예언자들과 의인들을 박해한 적도 없다.”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말을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혹시 ‘회칠한 무덤’은 아닌지 반성해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저는 완벽하게 겉과 속이 똑같은 의인입니다.” 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가?
바오로 사도는 자기 자신에 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로마 7,22-24).”
“나는 죽음을 겪으시는 그분을 닮아, 그분과 그분 부활의 힘을 알고
그분 고난에 동참하는 법을 알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어떻게든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이미 그것을 얻은 것도 아니고 목적지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차지하려고 달려갈 따름입니다(필리 3,10-12ㄴ).”
여기서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라는 말은,
단순히 자기를 낮추는 겸손이 아니라, 인간 존재에 대한 고백입니다.
인간이란, 이성과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불쌍한 존재이고,
예수님께서 구원해 주시지 않으면, 또 그 은총에 응답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비참하게 끝날 수밖에 없는 존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는 위선자가 아니다.” 라는 자만심을 버려야 하고,
위선자가 되지 않도록 끝까지 노력해야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지적하시면서 그들이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 하고 거침없이 비난하십니다. 이렇게 섬뜩한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예언자들을 박해한 유다인들’에게 머지않아 죽임을 당할 것을 감지하셨기 때문입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바알 신을 숭배하는 예언자들을 대항하여 싸웠으므로 아합 왕과 이제벨 왕비에게 쫓겨 다녔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느님의 제단을 허물고 주님의 예언자들을 쳐 죽였습니다. 엘리야는 “이제 저 혼자 남았는데, 저들은 제 목숨마저 없애려고 저를 찾고 있습니다.”(1열왕 19,14) 하고 주님께 아룁니다. 여호야킴 왕궁의 사제들과 예언자들은 예레미야 예언자를 단죄하며 “이 사람은 이 도성을 거슬러 예언하였으니 그를 사형에 처해야 합니다.”(예레 26,11)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의 멸망으로 이방인에게 구원의 은총이 전해졌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의 수난과 죽음’을 통한 하느님의 심오한 구원 계획이 온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테살로니카 신자들의 믿음을 칭찬하며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그 말씀이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순응하여 구원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신앙인이 됩시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