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1주간 금요일] 열 처녀에 비유 (마태오 25,1-13)

2017. 9. 1. 오전 7: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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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1주간 금요일] 열 처녀에 비유 (마태오 25,1-13)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거룩하게 살라고 부르셨으니 거룩한 사람이 되라고 한다. ( 1테살 4,1-8)
1 형제 여러분, 우리는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당부하고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있는지 우리에게 배웠고, 또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욱더 그렇게 살아가십시오. 2 우리가 주 예수님의 권위로 여러분에게 지시해 준 것들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3 하느님의 뜻은 바로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곧 여러분이 불륜을 멀리하고, 4 저마다 자기 아내를 거룩하게 또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할 줄 아는 것입니다. 5 하느님을 모르는 이교인들처럼 색욕으로 아내를 대해서는 안 됩니다. 6 그리고 이러한 일로 형제에게 잘못을 저지르거나 그를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전에 말하고 또 엄숙히 경고한 바와 같이, 주님은 이 모든 일에 보복하시는 분이십니다.
7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더러움 속에서 살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살라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8 그러므로 이 사실을 무시하는 자는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는 하느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유하시며, 주인이 언제 올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니 준비하고 깨어 있으라고 하신다. (마태오 25,1-1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2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3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4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5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6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7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8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9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11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12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13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2012년 6월 29일 금요일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성베드로와 성바오로 사도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제1독서 (1테살4,1~8)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더러움 속에서 살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살라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무시하는 자는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는 하느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7~8)

테살로니카 전서 4장 7절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gar)로 문장이 시작된다. 이 '가르'(gar; for)테살로니카 1서 4장 3~6절 전체에 대한 이유를 나타낸다.

다시 말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음란(불륜)과 같은 성적 범죄에 자신을 방임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살라고 부르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부르신 목적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 때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그 뜻에 합당하게 살기 위해 애를 쓰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께서 불러내신 자들이다.

여기서 '부르셨기'에 해당하는 '에칼레센'(ekallesen)'부르다'(call)라는 의미를 지닌 '칼레오'(kalleo)의 부정(不定) 과거 능동태이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이미 과거에 능동적으로 부르셨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성적 음란과 여러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으로부터 특별히 몇몇을 구별하여 불러내셨다는 의미를 뜻한다.

이러한 부르심은 죄와 죽음에서 의로움과 생명에로의 부르심이요, 희망없는 삶에서 영원한 산 희망의 삶에로의 부르심이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당신의 원하신 뜻에 따라 세상에서 불러낸 자들의 모임이 바로 '엑클레시아'(ekkllesia)이다.

'엑클레시아'교회로 번역되지만, '밖으로'란 의미의 전치사 '에크'(ek)'부르다', '호출하다'란 의미의 동사 '칼레오'(kalleo)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밖으로 불러낸 자들의 모임' 이란 의미가 있다.

교회는 세상의 '더러움'(부정;不淨)을 떠나 새로운 거룩함의 세계로 들어온 성도들의 모임인 것이다.

테살로니카 1서 4장 7절에는 전치사가 두 개 쓰였는데, '더러움' 앞에 쓰인 '에피'(epi)'거룩' 앞에 쓰인 '엔'(en)이 그것이다. 전자는 '~의 기초 위에서' 라는 의미이고, 후자는 '~의 상태 안에서'라는 의미이다.

여기서는 이런 의미와 더불어 전치사 '에피'(epi)는 목적의 의미를 나타내며 (갈라5,13; 에페2,10), 전치사 '엔'(en)은 궁극적 지향의 의미를 나타낸다. 그리고 '더러움'으로 번역된 '아카타르시아'(akatharsia; uncleanness; impure)는 성적 더러움에만 국한되지 않고 하느님 대전에 행해지는 모든 종류의 부정을 가리킨다.

또한 '거룩'으로 번역된 '하기아스모'(hagiasmo; holiness)도 성적인 거룩한 순결만을 의미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모든 종류의 도덕적 거룩한 순결로서의 거룩을 가리킨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간택한 자들을 불러 그들을 세상으로부터 구별시킴으로써 모든 악에서 떠나게 하시며, 모든 면에서 그들을 거룩하게 하시고, 나아가 그러한 거룩의 상태 안에 항상 머물러 있게 하신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무시하는  자는~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는 하느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로 번역된 '토이가룬'(toigarun; therefore)특별한 강조로서의  결론을 도입하는 불변사이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인을 향한 하느님의 구체적인 뜻으로서 '성적 순결'에 대해 권면하는 테살로니카 1서 4장 3~8절 전체를 결론짓는 문장이다.

여기서 '무시하다'라는 의미로 번역된 '아테톤'(atheton)의 원형 '아테테오'(atheteo)는 원래 어떤 법규정이나 계약 등의 효력을 폐지하고 무효로 하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이다(갈라3,15; 히브10,28).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거부(거절)하다', '무시하다'라는 뜻으로 더 많이 쓰인다 (마르7,9; 루카7,30; 10,16; 1티모5,12).  여기서도 후자의 의미로 쓰였다. 그런데 무시하는 데 무엇을 무시한다는 것인지, 원문에는 '호 아테톤'(ho atheton)의  목적어가 없다.

한글 새 성경 '이 사실을 무시하는 자', 영어 성경'이 교훈을 저버리는 자'(he who rejects this instruction)'호 아테톤'을 번역했다.

말하자면, 성적인 더러움을 버리고 거룩한 순결을 포함한 모든 거룩함을 따라 살라는 이 교훈을 무시하는 자는 단순히 이것을 가르치는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무시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 바오로는 지금 이 교훈을 개인적 소견이나 권위에 따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그분의 권유를 힘입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사도 바오로가 당시에 이렇게 말하는 배경에는 영지주의자들이 테살로니카 교회에 침투해 들어와서, 성윤리에 대한 사도 바오로의 금욕적 교훈들을 잊어버리도록 유혹하고 희석시켰기 때문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성윤리에 대해 보다 너그러운 태도를 보이는 것은 하느님의 법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고 유혹했기에,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엄격한 교훈이 자신의 것이 아닌 하느님의 것임을 분명히 하기 위한 의도에서 테살로니카 1서 4장 8절을 기록하였다.

'성령을 주시는 하느님'

사도 바오로는 무시의  궁극적 대상인 '하느님'을 수식하는 문구, 즉 '여러분에게 (그의) 성령을 주시는'이라는 문구를 덧붙인다.

여기서 '주시는'으로 번역된 '디돈타'(didonta)는 '주다'라는 뜻을 지닌 '디도미'(didomi)의 현재 분사이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을 지속적으로 주시는 분이심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사도 바오로는 이런 표현을 통해, 성적 순결을 가르치는 사도 바오로의 이 교훈 (1테살4,3~8)을 경시하며 성적 범죄를 아무렇지도 않게 범하는 자들은 곧 그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을 무시하고 훼방하는 자들이며, 그분의 성령을 통해 거룩한 정결의 삶에로 부르시는 하느님을 무시하는 자라는 사실을 전달하고 있다.



[성서의 여인] 열처녀의 비유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복음 (마태25,1-13)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하고 대답하였다." (3~4.9)

마태오 복음 25장은 24장과 더불어 예수님께서 십자가 수난을 받으시기 사흘 전에 주신 올리브산에서의 말씀이 계속되는 부분으로서, 특히 도둑의 비유, 두 종의 비유인 충성된 종과 악한 종의 비유(마태24,42~51)와 더불어 종말을 대비하는 성도의 자세에 대해 교훈하는 세 가지 비유를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세 가지 비유란 '열 처녀의 비유', '탈란트의 비유', '양과 염소를 나누는 임금의 비유'를 말한다.

여기서 '천국은 마치 ~~에 비길 수 있다'는 것은 천국이 열 처녀에 비유되는 것이 아니라 열 처녀가 신랑을 맞이하는 상황에 비유되는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일반적으로 유다의 혼인 풍습신랑이 신부의 집에 들러 간단한 종교적 의식을 치른 후, 신부와 신부의 들러리들을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가 혼인 잔치를 벌이는 것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신랑의 집이 먼 경우에는 신부의 집에서 혼인 예식을 치루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본 장에 있어서의 혼인 잔치는 어느 곳에서 벌어졌는지 명확하지가 않다. 문맥의 흐름으로 보면, 혼인 잔치는 신부의 집에서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기름을 예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가 나중에 혼인 잔치에 들어갈 수 있도록 요청했을 때 그 요청을 거부한 사람이 신랑이었던 사실(11~12절)에 비추어 보면, 혼인 잔치는 신랑 집에서 베풀어졌다고 보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만일 혼인 잔치가 신부 집에서 신부 집에서 베풀어졌다면, 어리석은 다섯 처녀의 요청을 거부하는 주체가 신랑이 아닌 신부의 아비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혼인 잔치가 어디서 열렸는지 단정할 수 없다.

그리고 당시 유다 관습에 의하면, 혼례식은 보통 해가 진 이후에 시작되었다. 이때 신부의 들러리들은 신부의 집 문 밖에 나가서 등을 들고 있다가 신랑이 친구들과 함께 신부의 집에 당도하면 영접하였다.

그런데 신랑이 신부를 데리러 신부집에 가는 시간은 정확하게 정해지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신부의 들러리들은 신랑이 늦어질 것을 대비해서 등이 꺼지지 않도록 충분한 기름을 준비해야 했다.

특히 본문에서 신랑이 예측치 못한 시간에 온 것이 강조되는 것종말, 또는 모든 성도들의 신랑이 되시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에게 예비의 중요성을 일깨우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여기서 신부의 들러리인 열 처녀가 들고 나간 '등'으로 번역된 '람파다스'(lampadas)수지질의 소나무로 만든 횃불이나 등불, 또는 심지를 꽂아서 쓰는 속이 등근 접시나 기름병을 의미하는 명사 '람파스'(lampas)의 목적격 복수로서 '여러 개의 등'이다.

원문에는 이 단어 뒤에 새 성경이 번역하지 않은 단어 '헤아우톤'(heauton)이 있다. 이 '헤아우톤'(heauton)여성 3인칭 복수 소유격 재귀 대명사로서 '그녀들 자신들의'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열 처녀는 모두가 각자 자기 자신의 등을 들고 나갔다. 여기서 '나간 장소'가 신부의 집인지, 처녀 자신들의 집인지 정확하지 않으나 이것은 이 비유의 전개에서 크게 중요한 사항이 아니다.

본 비유에서 '신랑'으로 번역된 '뉨피우'(nymphiu)의 원형 '뉨피오스'(nymphios)라는 단어는 재림하실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다(11절). 따라서 비유에서 신랑되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성도는 신부가 아닌, 들러리 처녀 열 명이다.

당시 신부의 들러리는 신부의 친구들이 맡았으며, 들러리들이 드는 등불은 모두 열 개라고 한다. 유다인들은 이상적인 숫자, 완전 숫자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회당에서의 공식 집회도 열 명이 참석하지 않으면 열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 비유에서도 그러한 풍습에 따라 들러리 처녀들이 열 명으로 소개되고 있다.

이것은 영적인 측면에서 볼 때 신랑되시는 예수님의 재림은 열 처녀로 상징되는 '모든 성도'가 대비하고 준비해야 함을 교훈하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재림 앞에서 단 한명도 열 처녀와 같은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따라서 슬기로운 처녀가 아니면 어리석은 처녀에 해당하는 결과를 맞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어리석은'으로 번역된 '모라이'(morai; foolish)의 원형 '모로스'(moros)신중하지 못하고 예측 능력이나 지혜가 결여된 상태를 나타내는 형용사이며, '슬기로운'으로 번역된 '프로니모이'(phronimoi; wise) 신중하고 사려깊으며 분별력이 있는 상태를 나타내는 형용사이다.

그리고 여기서 쓰인 동사 '에산'(esan; were) 반복적인 상황을 묘사하는 미완료 과거 시제로서, 이것은 신부의 들러리 처녀들의 개인적인 성향이 항상 그러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결국 다섯 처녀들은 항상 신중하지 못하고 선견지명이 없는 자들로 살아왔기 때문에 신랑을 맞이하는 날에도 평소처럼 자신이 지니고 있는 성향을 그대로 자연스럽게 드러낸 것이며, 반대로 다른 다섯 처녀들도 평소의 삶의 자세가 사려깊고 분별력이 있으며 신중했기 때문에 그러한 태도가 신랑을 맞이하는 날에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던 것이다.

여기서의 교훈은 우리가 평소에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주님의 재림의 때에 어떠한 자들로 드러날 것인가가 판가름난다는 것이다.

이제 마태오 복음 25장 3절에는 열 처녀들이 왜 어리석고 슬기로운지를 구체적으로 사례를 들어 밝힌다.

등을 밝히기 위해서는 등은 물론 기름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이 늦어질 것을 대비해서 여분의 기름을 준비했던 반면에,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을 준비했을 뿐 여분의 기름은 준비하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서 '메트 헤아우톤'(meth heauton; with them)'그녀들 자신들과 함께' 또는 '그녀들 자신들 곁에'라는 뜻이다. 이것은 들러리 처녀들이 등을 밝힐 여분의 기름을 반드시 소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충고해 주는 표현이다.

그리고 '엘라이온'(elaion; oil)'올리브 나무'(olive tree)를 의미하는 '엘라이아'(elaia)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올리브 기름'을 뜻한다. 이 기름은 팔레스티나에서 나는 대표적인 산물로서 등불을 밝히고(2열왕4,10) 병을 치료하는데(루카10,34), 그리고 귀한 손님의 머리에 부어 예의를 시하는데(루카7,46) 사용되었다.

이 기름에 대해서 어떤 학자는 '믿음'을 상징한다고 보고, 어떤 학자는 믿음에 대응하는 '선행'이라고 주장한다. 또 어떤 학자는 기름이 성별 의식에 사용된 물질이라는 것과(즈카4,12) 성령이 기름으로 상징된다(루카4,18)는 사실에 근거해서 기름은 내면적 신앙의 모습'성령의 능력과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주장한다.

한편, 마태오 복음 25장 4절은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이 왜 슬기로운지를 보여 준다. 여기서 '그릇'으로 번역된 '앙게이오이스'(anggeiois; jars)의 원형 '앙게이온'(anggeion)플라스크와 같은 휴대용 병 말하는데,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이 늦게올 것을 대비하여 말고도 여분으로 플라스크 같은 병을 하나 더 준비하여 거기에 기름을 담아가는 준비성을 갖추었다.

그래서 설사 기름이 다하여 등불이 타다 꺼지더라도 여분의 기름으로 계속해서 등불을 타오르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 25장 5절에 '신랑이 늦어지자'라는 표현이 나온다. 주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 당신의 재림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늦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지체되는 이유는 한 사람이라도 더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베드로 2서 3장 9절이 이것에 대해 분명히 밝혀준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도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지연되는 주님의 재림은 사람들로 하여금 영적 긴장감을 느슨하게 만들어 방종에 흐르는 기회로 이용될 수 있음베드로 2서 3장 3절과 4절이 밝혀주고 있다.

"마지막 때에, 자기 욕망에 따라 사는 조롱꾼들이 나와서 여러분을 조롱하며, "그분의 재림에 관한 약속은 어떻게 되었소? 사실 조상들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도,  창조 이래 모든 것이 그대로 있지 않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 25장 7절에서 '우리 등이 꺼져 가니'라는 표현은 주님께서 오시는 역사의 깊은 밤중에 성령의 불길이 소멸해가는 사람이 적지 않음을 암시하는 내용이다.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1테살 5,19)

그리고 마태오 복음 25장 9절의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라는 표현은 슬기로운 처녀들이 기름을 나누어 주면 둘 다 등불을 켤 수 없을 것이기에 결코 나누어 줄 수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영적인 차원에서도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한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주님 오시는 순간에 자기의 것을 나누어 줄 수는 없다는 말로서 구원은 철저하게 개인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구원에 있어서 그 누구도 각자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으며, 모자란 기름을 러가는 역할도 그 누구가 대신 해줄 수 없는 것이다.


성도의 휴거 준비 - 열처녀 비유


열 처녀의 비유 

마태오복음의 '열 처녀의 비유'(마태 25,1-13)에서
'신랑'은 재림하실 예수님을 뜻하고, '열 처녀'는 그리스도인들을 뜻합니다.
열 처녀가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것은 신앙생활을 뜻합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라는 3절은 좀 더 내용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이 등만 준비하고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미리 준비한 기름이 떨어질 때를 대비하지 않았습니다.
뒤의 8절에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라고 되어 있는 것이 그것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느 정도 등을 켤 수 있는 기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신랑이 너무 늦게 왔기 때문에 기름이 모자라게 됩니다.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신랑이 너무 늦게 왔다.' 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만일에 그들이 예상했던 시각에 신랑이 왔더라면 기름이 모자라지 않았을 것이고,
기름을 사러 갈 일도 없었을 것이고,
혼인 잔치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정 시각보다 늦게 온 신랑이 잘못한 것인가?
이것은 실제 상황이 아니라 비유 말씀이기 때문에,
이야기 속의 상황이 나타내는 뜻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신랑이 언제 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일찍 올 수도 있고, 아주 늦게 올 수도 있습니다.
종말과 재림은 인간의 생각보다 훨씬 더 빨리 이루어질 수도 있고,
훨씬 더 늦게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8월 30일의 복음 말씀에 나오는 '못된 종'은
그가 예상했던 시간보다 주인이 너무 일찍 왔기 때문에
미처 대비하지 못하고 벌을 받았습니다.
8월 31일의 복음 말씀에 나오는 '어리석은 처녀들'은
자기들이 예상했던 시간보다 신랑이 너무 늦게 왔기 때문에
대비를 못하고 말았습니다.)
신랑의 도착 시간을 마음대로 예상했던 '어리석은 처녀들'의 모습에서
종말이 곧 온다면서 세상을 시끄럽게 만드는 종말론자들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휴거파 같은 종말론자들은 이상한 근거를 바탕으로 종말의 시간을 계산하고,
그 종말을 대비한다면서 소동을 피우다가,
아무런 일도 안 일어나고 지나가면 계산을 잘못했다고 하면서 다시 계산하거나,
아니면 아예 믿음을 잃어버리거나 합니다.

그들이 곧 닥치게 될 종말을 준비한다면서 하는 행동을 보면,
직업도 버리고 학업도 포기하고 가정도 버리고
한 자리에 모여서 단식기도를 하고 극기고행을 하고 ... 호들갑을 떱니다.
그래서 가족과 이웃에게 상처를 주고, 가정이 파탄 나고,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사랑을 거스르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기다린다면서도
예수님께서 그렇게 강조하셨던 사랑과 선행 실천은 하지 않고
자기 개인의 구원만 바라는 이기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그런데 사실 사도들도
처음에는 주님의 재림이 이렇게까지 늦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못하고
자기들이 살아 있는 동안 주님께서 재림하실 것이라고 기대하다가(1테살 4,15),
나중에 그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교회 초기부터 종말론자들은 늘 있었고,
곧 종말이 닥친다고 자기들 마음대로 예상하고 생업을 포기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테살로니카 2서 3장 11절에 언급된
'무질서하게 살아가면서 일은 하지 않고 남의 일에 참견만 하는 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인데,
곧 종말이 온다는 이유로 일은 하지 않고 남에게 폐만 끼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20세기 말에 그랬던 것처럼 옛날에도
한 세기가 끝나고 다음 세기로 넘어갈 때마다 종말론자들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또 큰 규모로 전염병이 퍼지거나 큰 전쟁이 벌어지거나
대규모 자연재해를 겪게 되면 종말의 재앙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지난 이천 년 동안 계속되었던 어리석은 모습들입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열 처녀의 비유'를 읽어보면,
신랑이 오기 전까지는
슬기로운 처녀들과 어리석은 처녀들 사이에 차이점이 별로 없습니다.

열 처녀 모두 똑같이 등을 준비했고, 그 등을 켰습니다.
등을 켜고 신랑을 기다리다가 졸게 되고 잠이 든 것도 똑같습니다.
준비한 기름의 양 외에는 차이점도 없고 구별도 되지 않습니다.

어쩌면 재림이 있기 전까지는
누가 구원을 받고 누가 구원을 못 받게 되는지를 구별하고 판단하는 일이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쉽게 판단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기름이(신앙생활이) 충분한 것인지,
아니면 모자란 것인지를 잘 살펴야 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이만하면 충분하다.' 라고 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오늘의 묵상

기다림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간절한 기다림과 두려운 기다림입니다. 내가 바라는 희망의 기다림에는 설렘과 기쁨이 있지만,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기다려야 할 때 불안과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예수님께서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의 비유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가 마주하게 될 하느님과의 만남을 늘 깨어 기다리지 않으면 그 만남 자체가 축복이 아니라 두려움이 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삶의 조건에서도 그리스도인이 다르게 살아야 할 점이 있다면, 그것은 매 순간 복음이 주는 희망과 기쁨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더러움 속에서 살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살라고 부르셨기 때문”이라고 강조합니다.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은 특별한 은총을 입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마주하는 속됨과 거룩함의 경계에서 양심의 소리를 듣고, 하느님께서 내 이웃들을 통해 보여 주시는 삶의 표징들을 잘 식별해 내는 지혜를 필요로 합니다. 마치 슬기로운 처녀들이 한밤중에 도착한 신랑을 맞으러 나가려고 기름을 잘 준비한 것처럼 말입니다.
‘슬기로움’과 ‘미련함’은 지식의 영역이 아닙니다. 신랑이 분명히 올 것이라는 믿음을 끝까지 간직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지혜의 언어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만날 ‘그 날과 그 시간’을 알지는 못하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언젠가 하느님을 마주할 그 날을 확신을 갖고 기다려야 합니다. 등불을 켤 기름을 갖추지 못하고 두려움과 불안에 떨며 안절부절못하는 어리석음이 아니라, 말씀을 간직하고, 깨어 성찰하며 이웃에게 봉사하는 지혜의 기름을 늘 간직하고 사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사순절 서른번째날 : 열처녀 비유 (2014년 4월8일 화요일)


죽음은 재방송이 없다

 

하늘나라를 어떻게 비길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혼인잔치의 비유로 말씀하셨다.

팔레스티나에서는 혼인을 할 때,

신랑이 신부의 집으로 갔고,

신부의 집에서 혼인을 했다.

그래서 신부 측에서는 열 명의 처녀들이 화려한 옷을 입고

신랑을 기다렸다.

그런데 신부 측에서는 신랑이 언제 올지 몰랐고,

때로는 한밤중에 오기도 했다.

 

신랑이 오면 신랑인 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하고 외쳤다.

그리고 신랑이 도착하면

신부 측은 혼인잔치를 언제라도 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혼인잔치의 또 다른 특징은 날이 어두워진 후에 거리에 나올 때에는

처녀들이 등불을 켜고 나와야 했다.

그리고 신랑이 일단 도착해서 문이 닫히면

나중에 오는 사람들은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없었다.

 

유다인들이 선민으로 선택받은 것은

무엇보다 인류구원을 위해 오시는 하느님의 아들을 먼저 영접하는데 있었다.

그러나 막상 때가 되어 그분이 오셨을 때

그들은 그분의 영접준비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어리석은 처녀들처럼

하늘나라에서 쫓겨나는 비극을 겪게 된 것이다.


혼인잔치의 비유는 우리에게 하시는 경고이기도 하다.

죽음을 준비하는 것을 미루고 방심하다가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면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젠가는 반드시 죽어 하느님께로 간다.

그러나 그 시간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기에 우리는 늘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

 

잘 산다는 것은 죽음을 잘 준비하는 것일 수도 있다.

죽은 후에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처녀들에게 기름을 나누어 줄 수 없듯이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에게 목숨을 빌려줄 수는 없다.

그러기에 죽음을 대비해 목숨 값을 준비해야한다.

죽음에는 재방송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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