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4주간 월요일] 백인대장의 믿음 (루카 7,1-10)

2017. 9. 17. 오후 8:38:24

글자


 

[연중 제24주간 월요일] 백인대장의 믿음 (루카 7,1-10)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청과 기도와 전구와 감사를 드리라고 권고한다. ( 1티모 2,1-8)
사랑하는 그대여, 1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청과 기도와 전구와 감사를 드리라고 권고합니다. 2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여, 우리가 아주 신심 깊고 품위 있게, 평온하고 조용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
3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구원자이신 하느님께서 좋아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시는 일입니다. 4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5 하느님은 한 분이시고,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도 한 분이시니,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6 당신 자신을 모든 사람의 몸값으로 내어 주신 분이십니다. 이것이 제때에 드러난 증거입니다. 7 나는 이 증거의 선포자와 사도로, 다른 민족들에게 믿음과 진리를 가르치는 교사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나는 진실을 말할 뿐,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8 그러므로 나는 남자들이 성을 내거나 말다툼을 하는 일 없이, 어디에서나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 자격이 없으니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을 낫게 해 주십사고 청하는 백인대장에게 감탄하시며, 병들어 죽게 된 그의 종을 고쳐 주신다. (루카 7,1-10)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백성에게 들려주시던 말씀들을 모두 마치신 다음, 카파르나움에 들어가셨다.
2 마침 어떤 백인대장의 노예가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그는 주인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 3 이 백인대장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유다인의 원로들을 그분께 보내어, 와서 자기 노예를 살려 주십사고 청하였다.
4 이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이렇게 말하며 간곡히 청하였다. “그는 선생님께서 이 일을 해 주실 만한 사람입니다. 5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회당도 지어 주었습니다.” 6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가셨다.
그런데 백인대장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르셨을 때, 백인대장이 친구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아뢰었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7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8 사실 저는 상관 밑에 매인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9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에게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군중에게 돌아서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10 심부름 왔던 이들이 집에 돌아가 보니 노예는 이미 건강한 몸이 되어 있었다.


2017년 07월 01일 / 연중 제12주간 토요일 : 백인대장의 믿음

연중 제24주간 월요일 제1독서 (1티모2,1-8)


"그러므로 나는 남자들이 성을 내거나 말다툼을 하는 일 없이, 어디에서나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8)

티모테오 전서 2장 1-7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만인과 위정자를 위하여 중재 기도를 명령하며, 중재 기도를 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이어지는 티모테오 전서 2장 8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공적 예배때 남녀 성도의 품행창조원리에 근거한 남여 상호간의 기본 질서에 대해 권고하고 있다.

여기서 '그러므로'로 번역된 '운'(un; therefore)은 새로운 문장으로 내용을 전환된다는 것을 나타내는 문장 전환 접속사이다.

그리고 '바랍니다'로 번역된 '불로마이'(bullomai; i will; i want)'원하다', '소원하다', '열망하다' 라는 뜻을 지닌 단어인데, 여기서는 사도 바오로의 복음 선도자요 사도이며, 이방인의 스승으로서의 권위가 포함된 다소 권위적인 명령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여기서 사도 바오로는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권고하는 대상을 '남자'로 국한시키고 있다.  이것은 여자가 기도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지만 본절이 남자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것은 단지 회당에서 남자들이 기도를 인도했던 관례에 비추어 볼 경우에 그렇게 생소한 것은 아니다. 공적 예배때 원로(장로)들이 자연스럽게 기도 순서를 맡았던 교회의 역사적 사실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티모테오 전서 2장 8절 이하에서부터 교회의 질서를 염두에 두고 공적 예배 때 준수해야 할 규범에 대해 계속 권고하고 있다.

'성을 내거나 말다툼을 하는 일 없이,  어디에서나 거룩한 손을 들어'

사도 바오로는 당시 그리스도인 회중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어디서든지 남자들이 대표로 기도하는 것을 전제하고 본문의 권고를 주고 있다. 이들에게 특별히 요구되는 기도의 태도를 특별히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첫째, 성을 내거나 말다툼이 없어야 한다.

성 요한 금구는 "당신은 당신의 형제에게 불리한 기도를 드리고 있는가? 그러나 당신의 기도는 그에게 불리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에게 불리하게 된다. '그에게도 꼭 같은 벌을 내려주십시오. 그에게도 그와 같은 일이 있게 해 주십시오.  그를 쳐주십시오. 그에게 보복하여 주십시오'라고 경건하지 않은 말로 기도를 드리면, 당신은 하느님의 분노를 일으키도록 만드는 것이다" 라고 말해 여기서 말하는 분노의 기도가 어떠한 것인지를 잘 말해 준다.

'말다툼'으로 번역된 '디알로기스무'(diallogismu; doubting; disputing)는  본래 '대화하다'라는 뜻을 지닌 '디알로기조마이'(diallogizomai)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의논', '의아하게 생각'(루카5,22), '변론', '논쟁'(루카9,46)등의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기도 하며, '시비', '따지기'(필리2,14)와 같이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말하자면, '트집잡기 좋아하는 이들의 공연한 시비'를 말한다.

둘째, 이들은 거룩한 손을 들고 기도해야 한다.

기도에는 고개를 숙이고 하는 기도, 하늘을 향해 눈을 들고서 하는 기도, 무릎을 꿇고 하는 기도,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서 하는 기도 등 많은 자세가 있지만, 여기서는 보다 보편적인 기도 자세로서 일어나서 손을 들고 하는 기도를 말하고 있다.

사도 바오로가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손을 들고 하는 기도, 즉 기도의 외적 자세로서의 손의 위치가 아니라 '거룩한' 손을 들고 하는 기도, 즉 기도의 영적 태도에 관한 것이다.

'거룩한 손을 들어'로 번역된 '에파이론타스 호시우스 케이라스' (epairontas hosius cheiras; to lift up holy hands; lifting up holy hands)흠이 없고 정결한 생활을 하는 가운데 기도하라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거룩한'으로 번역된 '호시우스'(hosius; holy)는 일반적으로 '부정한 것과 단절된 상태'를 뜻하는데, 단적으로 말해 살인이나 간음, 도둑질 등과 같은 추악한 범죄에서 분리된 상태, 즉 '부당한 행위로 말미암아 더럽혀지지 않은 상태'를 지칭한다.

따라서 티모테오 전서 2장 8절은 만일 기도하는 자가 이러한 부정한 범죄로 자신을 더렵혔다면, 결코 공적 예배때에 대표로 기도해서는 안된다는 경고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시편24,3-4; 마태5,23-24).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랴?  누가 그분의 거룩한 곳에 설 수 있으랴?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옳지 않은 것에 정신을 쏟지 않는 이  거짓으로 맹세하지 않는 이라네."   (시편24,3-4)




<백인대장의 병든 종을 고치시다.>

 

“마침 어떤 백인대장의 노예가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그는 주인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

이 백인대장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유다인의 원로들을 그분께 보내어,

와서 자기 노예를 살려 주십사고 청하였다(루카 7,2-3).”

이 이야기에 나오는 ‘어떤 백인대장’이 로마인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백인대장이 직접 예수님께 오지 않고 유다인의 원로들을 보낸 것은,

이방인이 유대인을 대할 때의 예의를 갖춘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은 원래 이방인들과의 접촉을 꺼린다는 것을

그가 알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이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이렇게 말하며 간곡히 청하였다.

‘그는 선생님께서 이 일을 해 주실 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회당도 지어 주었습니다.’(루카 7,4-5)”

원로들은 백인대장이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의 간청을 거절하실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백인대장을 위해서 ‘간곡히’ 청합니다.

“그는 선생님께서 이 일을 해 주실 만한 사람입니다.” 라는 말은,

백인대장이 이방인이면서도 유대인과 같은 사람이라고 보증하는 말입니다.

“우리 민족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회당도 지어 주었습니다.” 라는 말은,

그가 유대교로 개종하거나 유대인으로 귀화한 것은 아니지만,

유대인들처럼 하느님을 믿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가셨다.

그런데 백인대장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르셨을 때,

백인대장이 친구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아뢰었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매인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루카 7,6-8)”

예수님께서 원로들의 말을 들으셨기 때문에 백인대장의 집으로 가신 것처럼

표현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예수님께서는 원로들이 부탁하지 않았어도

백인대장의 간청을 들어 주시려고 작정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백인대장은 처음에는 집으로 와 달라고 청했는데,

중간에 마음을 바꿔서 집으로 오시지 않아도 된다고 말합니다.

그는 왜 중간에 마음을 바꾸었을까?

이야기의 내용만으로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처음의 간청도 겸손한 모습이었는데, 아마도 그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동안

더욱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라는 말은,

당시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되는 것을 피하려고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지 않았던 관습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 백인대장은 유대인들의 그런 관습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자기가 이방인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 아니라,

“저는 하느님 앞에서 너무나도 부족한 인간입니다.” 라는 뜻으로,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는 말로 해석됩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라는 말은,

예수님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말씀만으로 병자를 고치실 수 있는 분이라고

믿는다는 뜻인데, 이 말은 또,

예수님은 ‘병’을 지배하시는 분이라고 믿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가 자신과 부하들과의 관계를 말한 것은, 자신의 믿음을 설명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이라는 것에게 명령을 하시는 분,

그래서 그 ‘병’이라는 것을 복종시키시는 분이라고 믿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은 권능을 가지고 계신 분,

사실상 하느님과 같은 분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소문만 듣고서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

혹시 누군가가 그에게 가서

예수님에 관해서 ‘증언’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때에는 아직은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은 분’이라고 믿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증언할 사람은 없었을 것이고,

그래서 결국 백인대장이 그런 믿음을 갖게 된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신앙고백의 경우에,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다.” 라는 말씀을 하셨는데(마태 16,17),

백인대장도 어떤 계시를 받았거나, 어떤 은총을 받았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특별히 그를 선택하셨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물론 그 자신도 은총을 받기에 합당한 준비를 갖추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에게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군중에게 돌아서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심부름 왔던 이들이 집에 돌아가 보니

노예는 이미 건강한 몸이 되어 있었다(루카 7,9-10).”

여기서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라는 말씀은,

백인대장이 처음으로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은 분이라고 믿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다.”가

이 이야기의 핵심 주제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백인대장의 종을 고쳐 주신 일이나,

백인대장의 겸손한 믿음 등은 모두 부수적인 이야기가 될 뿐입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어떤 백인대장을 통해서

당신의 신원을 계시하셨음을 전하는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백인대장이 이방인이었다는 사실도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그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믿어야 하는가?

예수님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 라는 숙제와도 같은 이야기가 됩니다.

궁극적인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이신 분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바로 그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도 혹시 우리는 예수님께 눈앞의 작은 소원만 빌고 있는 것은 아닌가?

 

송영진 모세 신부


믿음은 교리나 규범을 잘 알고 지키는 것만으로 생기지 않습니다. 믿음에는 인격적 신뢰가 중요합니다. 한 사람에 대한 확고한 신뢰, 그리고 그 신뢰가 자신의 삶을 지탱해 주고 있다는 체험이 있어야 믿음은 성장합니다.
오늘 예수님께 자기 노예의 치유를 청하는 백인대장의 모습 속에는 이러한 인격적 신뢰가 엿보입니다. 그는 이방인이었지만 더불어 사는 유다 민족에게 회당을 지어 주며 우호적인 태도로 유다인의 원로들의 신뢰를 얻습니다. 자신의 종마저 소중한 한 인격체로 받아들여 그의 고통을 치유해 주고 싶어 합니다.
이런 백인대장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기만 했을 뿐인데도, 예수님을 신뢰하고 ‘주님’으로 부릅니다. 그리고 친구를 보내어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을 전할 정도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백인대장의 믿음에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고 하시며 예수님마저도 감탄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신다는 확신을 이방인의 믿음에서 보셨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믿음에는 간절함과 확고함, 인내와 끈기가 필요합니다.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손길이 내 인생에 절실하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에게 믿음은 진정성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영성체할 때 바치는 이 백인대장의 청원을 일상의 삶에서도 매 순간 바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2016년 다해 연중 제24주간 월요일 - 백인대장의 믿음

연중 제24주간 월요일 복음 (루카 7,1-10)


 마침 어떤 백인대장의 노예가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그는 주인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 이 백인대장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유다인의 원로들을 그분께 보내어, 와서 자기 노예를 살려 주십사고 청하였다.(2-3)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마태8)


'저는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에 해당하는 '우크 에이미 히카노스'(ouk eimi hikanos; i am not worthy; i do not deserve to)에서 '히카노스'(hikanos)'가치 있는', '적합한', '알맞은'으로 번역할 수 있다.

마태오 복음 8장 7절에서 '유다인인 내가'라는 표현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이방인들의 집에 들어가거나 합석하지 않고 거리를 두어야 하는 유다인임을 밝히셨는데, 이것은 이방인인 백인대장의 믿음을 시험하신 거라고 볼 수 있다.

'유다인인 내가 굳이 너에게 가서 그를 고쳐야 하느냐?'의 질문에 대해, 이방인인 백인대장은 '저는 주님께서 저희 집에 들어오실 만한 가치조차도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자신을 낮추어 겸손하게 표현했다.

이것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거나 그들과 식사를 함께 하는 등의 교제를 금지하는 유다인의 관습을 잘 알고 있었던 이방인 백인대장의 사려깊은 배려이기도 하며, 또한 마태오 복음 15장 25절과 27절에서 가나안 여자가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먹게 해 달라는 겸손과 믿음의 모습과도 비슷한 것이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렇게 이방인 백인대장의 겸손하고 믿음있는 모습을 강조하여 마태오 복음의 독자인 유다계 크리스챤들에게 큰 믿음을 가질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그저'로 번역된 '모논'(monon; only)는 수식하는 문장의 의미를 제한하거나 분리하는 역할을 하는 부사로서 '단순히', '오직'이라는 뜻을 갖는다.

그리고 '말씀'에 해당하는 '로고'(logo; the word)'말씀'이라는 뜻의 '로고스'(logos)의 수단을 나타내는 여격 단수형이다. 따라서 이 구절을 직역하면 '다만 한 말씀으로 하옵소서'이다.

백인대장은 구약의 나아만 장군과 같은 이방인이면서도 주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고 병든 곳 위에 손을 흔들어 병을 고쳐 주기를 바라는(2열왕5,11) 주술적 요구를 하지 않았다.

이방인 백인대장이 바라는 것은 이방의 우상 숭배자들처럼 주문을 외거나 주술적 기원을 하는 행위가 아니었고, 스스로의 이름과 신적 권세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고침(치유; 나음)을 입으라'는 단 한마디의 말씀이었던 것이다.

이방인 백인대장은 주님의 한 '말씀'(logos) 자체에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믿은 참된 믿음의 소유자였던 것이다(루카4,26; 히브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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