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3주간 토요일] 나무 열매 (루카 6,43-49)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고, 그 가운데에서 자신이 첫째가는 죄인이라고 한다. (1티모테오 1,15-17)
사랑하는 그대여, 15 이 말은 확실하여 그대로 받아들일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죄인입니다. 16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먼저 나를 당신의 한없는 인내로 대해 주시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당신을 믿게 될 사람들에게 본보기로 삼고자 하신 것입니다.
17 영원한 임금이시며 불사불멸하시고 눈에 보이지 않으시며 한 분뿐이신 하느님께 영예와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예수님께서는, 나무는 열매를 보면 안다며, 내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자는 기초도 없이 맨땅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고 하신다. (루카 6,43-49)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3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44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따지 못하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거두어들이지 못한다.
45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46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 47 나에게 와서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실행하는 이가 어떤 사람과 같은지 너희에게 보여 주겠다. 48 그는 땅을 깊이 파서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홍수가 나서 강물이 집에 들이닥쳐도, 그 집은 잘 지어졌기 때문에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49 그러나 내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자는, 기초도 없이 맨땅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 강물이 들이닥치자 그 집은 곧 무너져 버렸다. 그 집은 완전히 허물어져 버렸다.”
연중 제23주간 토요일 제1독서(1티모1,15~17)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죄인입니다." (15ㄴㄷ)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과 사명이 죄인들의 구원인데, 자신이 바로 그 구원의 첫번째 대상인 가장 큰 죄인이라 고백한다.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없었을 때 저지른 예수님께 대한 모독과 박해와 학대에 대하여 자신은 예수님의 자비하심으로 용서받아야 할 첫번째 대죄인이라 고백한다.
자신이 저지른 과거를 생각하면 부끄럽기 한량없으나 이렇게 자랑하는 것은 자신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자비가 너무 큰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이고, 자신도 이런 엄청난 죄를 용서받고 주님의 복음의 도구가 되고 본보기가 되었으니, 다른 모든 죄인들도 믿음으로 구원과 영생을 얻도록 하느님 자비의 대열에 동참하기 위해 들어오라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자신을 '첫째가는 죄인', '죄인들의 우두머리(괴수)'라고 고백하는 사도 바오로의 겸손을 묵상하면 좋겠다.
아브라함도 소돔을 위해 기도할 때, 하느님 대전에 자신을 먼지와 재와 같다고 고백했다.'저는 비록 먼지와 재에 지나지 않는 몸이지만,주님께 감히 아룁니다.'(창세18,27)
요셉도 형들에게 버림받고 구덩이에 던져지고 이집트로 팔려가 포티파르의 집에서 종살이(창세37,12~36), 감옥에서 옥살이(창세39,1~23)하는 수모를 겪으며 땅바닥까지 내려갔다.
모세도 소명을 받기전(탈출3,7이하), 미디안 지방 이드로 장인 밑에서(탈출2,15이하) 자기식의 의(義)와 혈기를 버릴 수 있도록, 40년동안 양치는 목동 생활을 하게 되었다.
다윗도 목동에서 시작하고(1사무16,11; 17,34~39) 젊은 날을 바닥에서 보낸다. 그리고 시편22장 7절에서 '그러나 저는 인간이 아닌 구더기, 사람들의 우셋거리, 백성의 조롱거리'라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귀하게 쓰기 원하는 사람들을 먼저 쓰러지게 하고 철저하게 실패하게 한다.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보다는 무엇을 할 수 없는가를 배우게 한다. 자신이 얼마나 철저하게 무력한지, 하찮은 존재인지, 큰 죄인인지를 배우게 한다.
진정한 힘이란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가를 아는데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다. 겸손한 사람의 특징은 자신이 보잘 것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인정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왜 귀하게 쓰시는 사람들로 하여금 바닥을 거쳐가게 하시는가?
자신이 받은 모든 것이 놀라운 하느님의 특은이요, 무상의 선물임을 깨닫고 겸손하게 소명을 완수하게 함과 동시에 바닥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아둘람의 굴로 간다(1사무22,1~2). 거기서 곤경에 빠진 이들, 빚진 이들, 그 밖에 불만에 찬 사람들이 모여들어 400명 가량되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된다. 다윗이 바닥에서 이처럼 오랜 세월을 보내면서 그가 섬길 백성들의 실상을 알게 된다.
그런 까닭에 백성들과 소통할 수 있고,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으며, 그들의 아픔과 생각을 알기에 잘 섬길 수 있었다.
훌륭한 요리사가 되려면, 설거지부터 잘할 줄 알아야 한다. 자고로 스승에게 배우려면, 제자는 먼저 청소하고 밥하고 빨래하면서 가르침의 때를 기다려야 한다. 테니스 선수가 되려면, 시합을 참관하며 공줍는 훈련부터 해야 한다. 유도 선수로서 성공하려면, 쓰러지는 법(낙법)을 배워야, 즉 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의 육화의 신비에 대해서 필리피서 2장 6~9절에서 '겸손의 하강과 상승의 신비'로 묘사한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기 전에 먼저 상대방의 발을 닦아 주어야 하고, 먼저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몸소 표양으로 보여 주셨다(요한 13,1~20). 영성적으로 세족례와 성체성사의 정신과 십자가 사건은 동일한 사건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연중 제23주간 토요일 복음 (루카6,43-49)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45)
'마음'으로 번역된 '카르디아스'(kardias; heart)의 원형 '카르디아'(kardia)는 원래 동물의 몸 속에 있는 혈액 순환의 중심이 되는 기관, 즉 심장을 뜻하는 단어이다. 하지만 이 용어는 점차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생명의 자리와 중심으로 여겨졌던 '마음'을 가리키는 의미로 확장되었다.
여기서도 감정, 생각, 판단의 중심 자리를 지칭하는 의미로 쓰였으며, 이곳이 또한 말(언어)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또한 '넘치는 것'으로 번역된 '페릿슈마토스'(perisseumatos; abundance; overflow)의 원형 '페릿슈마'(perisseuma)는 '일정한 수나 양을 초과하고 넘는 것'을 묘사하는 동사 '페릿슈오'(perisseuo)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철철 넘칠 만큼 가득 차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니까 이 단어는 생각과 감정의 중심 자리인 마음에 어떠한 생각이 넘칠 만큼 가득차게 되면, 의도하지 않아도 무의식적으로 그러한 생각이 입을 통해 흘러나오게 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예를 들어,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대하여 베엘제불의 힘을 빌어 마귀를 쫓아낸다고 하면서 즉각적으로 신성모독적인 발언을 한 것은 그들이 평소에 그러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아무리 좋은 행동을 하더라도, 나쁘게만 보고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곳간'으로 번역된 '테사우루'(thesauru; treasure)의 원형 '테사우로스' (thesauros)는 명사이며, '물건들과 귀중한 것들을 모아 두고 보관하는 장소', 즉 '금고', '창고'의 의미와 '저장소에 보관된 귀중품 자체', 즉 '보물'이라는 의미가 있다. 여기서는 두 가지 의미가 다 적용된다.
여기서 '선한 곳간'이란 타고난 성품, 또는 오랜 시간을 거쳐 가꾸어 온 좋은 인격을 가리킨다. 사람은 자신이 가꾸어 온 마음의 보물이 어떠한 것이냐에 따라 그가 하는 말과 행위도 달라지는 것이다.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안다. 내 말을 실행하여라.>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따지 못하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거두어들이지 못한다(루카 6,43-44).”
이 말씀에서 ‘좋은 나무’는 진실한 사람,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고,
‘나쁜 나무’는 위선자입니다.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그 자신도 구원이라는 열매를 얻고,
다른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인도합니다.
위선자는 그 자신도 구원받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이 구원받는 것을 방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마태 23,27-28).”
‘회칠한 무덤’이 바로 ‘나쁜 나무’입니다.
그 자신도 부정하지만, 남을 부정 타게 만드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위선자들은 자기가 위선자라는 것을 모를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나의 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위선적인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우리는 그것을 깨닫지 못할 때가 많고,
자기 자신이 위선자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지금은 “나는 위선자가 아니다.” 라고 우겨도,
마지막 날에는 자신의 실체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 라는 말씀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따지 못하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거두어들이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지금 위선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경고 말씀입니다.
심판 때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지금 회개해야 하고, 지금 바로잡아야 합니다.
제대로 회개한다면 ‘나쁜 나무’도 ‘좋은 나무’로 변화될 수 있고,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루카 6,45).”
이 말씀은 ‘말’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선한 것’은 ‘선한 말’을 뜻하는데, 신앙을 증언하는 말,
남을 용서하는 말, 축복하는 말,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말 등입니다.
‘악한 것’은 ‘악한 말’을 뜻하는데, 남을 심판하고 단죄하는 말,
저주하는 말, 미움을 드러내는 말, 사랑을 거스르는 말 등입니다.
야고보서 저자는 ‘말’에 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이 혀로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미하기도 하고,
또 이 혀로 하느님과 비슷하게 창조된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같은 입에서 찬미와 저주가 나오는 것입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이래서는 안 됩니다(야고 3,9-10).”
신앙인은 항상 선한 마음으로 살아야 하고, 선한 말만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속마음과 다르게 입으로만 선한 말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위선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과 행실의 일치를 강조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루카 6,46)”
예수님을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뜻입니다.
(말만 잘하고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
남이 볼 때에는 실천하지만, 아무도 안 볼 때에는 안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위선자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일은 어렵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보이지 않는 모습을 알 수 없고,
눈에 보이는 모습만으로 판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위선자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한테는 엄격해도 자기 자신에게는 너그러울 때가 많고,
남의 변명은 안 받아주면서도
자기가 자신에게 하는 변명은 잘 받아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와서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실행하는 이가 어떤 사람과 같은지
너희에게 보여 주겠다. 그는 땅을 깊이 파서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홍수가 나서 강물이 집에 들이닥쳐도,
그 집은 잘 지어졌기 때문에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내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자는, 기초도 없이
맨땅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 강물이 들이닥치자 그 집은 곧 무너져 버렸다.
그 집은 완전히 허물어져 버렸다(루카 6,47-49).”
여기서 ‘홍수’는 박해, 환난, 시련 등을 뜻하기도 하고,
최후의 심판을 뜻하기도 합니다.
평상시에는 기초 없이 맨땅에 지은 집이라는 것이 표시가 나지 않아도,
홍수가 닥치면 힘없이 무너짐으로써 기초가 없었다는 것이 드러나는 것처럼,
아무 일 없이 평화스러울 때에는
모범적으로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보였던 사람도
어떤 위기가 닥치면 믿음이 흔들리거나 아예 믿음을 잃는 경우가 있습니다.
실제로 박해가 닥치기 전에는 누가 순교자가 될지, 누가 배교자가 될지 모릅니다.
성인 같다고 칭찬과 존경을 받던 사람이 배교자가 될 수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남을 판단하는 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반성하는 일입니다.
지금 자기가 무엇을 믿고, 무엇을 바라면서 살고 있는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아끼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늘 스스로 반성하고 점검해야 합니다.
‘믿음의 기초’는 예수님의 말씀이고, 또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칭찬하는 말에 취하면 안 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냉정하고 엄격해져야 합니다.)
심판 날이 되면 놀랄 일이 많을 것입니다.
성인품에 오를 줄 알았던 사람이 하늘나라 밖으로 쫓겨나는 것을 볼 수도 있고,
영 시원찮게 보였던 사람이 예수님의 영접을 받으면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선고가 예상과 달라서 깜짝 놀라는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