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5주간 월요일] 등불 (루카 8,16-18)

2017. 9. 24. 오후 4: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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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5주간 월요일] 등불  (루카 8,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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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온 나라에 어명을 내리고 칙서를 반포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하느님의 집을 짓게 하라고 한다. (에즈 1,1-6)
1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 제일년이었다. 주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그리하여 키루스는 온 나라에 어명을 내리고 칙서도 반포하였다.
2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이렇게 선포한다. 주 하늘의 하느님께서 세상의 모든 나라를 나에게 주셨다. 그리고 유다의 예루살렘에 당신을 위한 집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맡기셨다.
3 나는 너희 가운데 그분 백성에 속한 이들에게는 누구나 그들의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를 빈다. 이제 그들이 유다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집을 짓게 하여라. 그분은 예루살렘에 계시는 하느님이시다.
4 이 백성의 남은 자들이 머무르고 있는 모든 지방의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계시는 하느님의 집을 위한 자원 예물과 함께, 은과 금과 물품과 짐승으로 그들 모두를 후원하여라.”
5 그리하여 유다와 벤야민의 각 가문의 우두머리들과 사제들과 레위인들, 곧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곳에 계신 주님의 집을 짓도록 하느님께서 마음을 움직여 주신 이들이 모두 떠날 채비를 하였다.
6 그러자 이웃 사람들은 저마다 온갖 자원 예물 외에도, 은 기물과 금과 물품과 짐승, 그리고 값진 선물로 그들을 도와주었다.


예수님께서는, 등불은 등경 위에 놓아 빛을 보게 한다며,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라고 하신다. (루카 8,16-18)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16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17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
18 그러므로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예수님께서 주신 열 처녀의 비유(2)

연중 제 25주간 월요일독서(에즈라 1,1-6)

히브리 성경 전통에서는 에즈라와 느헤미야기는 저자의 이름을 따서 에즈라서로 불리며, 단일작품으로 여겨졌으며, 1세기에 간행된 히브리 성경에서 구분이 이루어졌다.

저자는 바빌론 유배 이후 한 세기 동안의 사건들을 보고한다. 작성연대는 어림잡아 키루스 칙령(bc539년경)부터 아그타크세르크세스 1세(bc464-424)말년 까지로 잡으면 된다.   최종 편집은 느헤미야의 공적 활동이 끝난 뒤인 bc400년경에 이루어졌다고 본다. 

에즈라.느헤미야기의 관심사는 세 가지이다. 성전 건립.예루살렘 도성 복구.하느님 백성의 쇄신이며, 이 세가지는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성전 건립과 예루살렘 도성 복구는 이스라엘의 외적 조건을 회복하는 것이다. 외적 조건을 아무리 완벽하게 회복하더라도, 진정한 내적 쇄신을 이루지 않으면, 이스라엘은 또 다시 정체성을 잃고, 이민족들 사이에서 방황하게 될 것이다.

에즈라와 느헤미야는 둘 다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성전 건립과 도성 복구와 더불어 그 옛날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자기네 조상들에게 내려주신 율법을 바탕으로 시나이 계약을 회복하고, 백성을 쇄신하는데 심혈을 기울인다.

바빌론 유배를 끝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과 도성을 재건하고, 새로운 계약 공동체로 다시 태어나게 된, 유배 이후의 시대를 '제 2의 이집트 탈출' 이라 부른다.

에즈라('도움'이란 뜻)서는 전반부(1-6장)과 후반부(7-10장)으로 나뉘는데, 전반부는 유배자들의 귀환과 성전의 건립 및 봉헌을 다루고, 후반부는 귀환자들의 쇄신을 다룬다. 

성전 건축을 명하는 공식 문서인 키루스 칙령은 세 번(1,2-4;,5,13-15;6,3-5)나오는데, 오늘 독서의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솔로몬이후 우상숭배와 계명 불이행으로 왕국 분열이 일어나고, 북부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의해 bc 722년에 멸망하고, 남부 유다는 신바빌로니아에 의해 bc 587년 멸망하고, 나라를 끌고 갈 만한 엘리트들이 유배를 간다. 

이제 때가 차서, 혼종혼과 더불어 야훼 유일신 신앙을 버리고 혼합종교에 빠진 유다는 성전건립을 통해 무너진 주님과의 관계 정립과 회복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작업이 유다 자체의 힘으로 가능한가? 그렇지 않다. 하느님 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하신 말씀과 약속은 반드시 이루신다. 그것도 생각지도 못한 적대국의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바로 유배로 끌려간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를 통해 이루어진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하느님께서는 하시고자 하시면 못하실 일이 없으시다. 적대국의 왕도, 원수도 주님 손에 들어 있고, 주님이 그들을 유다를 위한 당신 섭리의 도구로 쓰신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주님의 말씀이다.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이 있듯이 내 길은 너희  길 위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 위에 드높이 있다."(이사 55,8-9)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말씀과 일련의 역사하심을 깊이 묵상하면서 회개해야 하고, 주님 품으로 빨리 돌아와야 한다. 

"주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그리하여 키루스는 온 나라에 어명을 내리고 칙서를 선포하셨다."(1,1)


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요한복음 5장 35절) : 비유한 등대

연중 제25주간 월요일 복음 (루카8,16-18)


"그러므로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18)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루카8,4~15)와 등불의 비유의 결론으로서 예수님께서는 부익부 빈익빈의 경제 원리를 빗대어 말씀하시며, 복음을 듣고 실천하는 믿음의 자세를 촉구하신다. 

또한 이 말씀은 탈란트의 비유의 결론 부분에도(마태25,29), 미나의 비유의 결론에도(루카19,26), 그리고 본절과 병행 구절인 마르코 복음의 등불의 비유에도 등장한다(마르4,25).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가진 자''가진 것이 없는 자'를 비교하신다. 여기서 반복하여 나오는 '호스 안'(hos an)'~하는 자는 누구든지'(whosoever)라는 의미로서 '가진 자''가진 것이 없는 자'를 총칭하는 표현이다. 

그리고 여기서 '가진 자'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그것을 환영하고 잘 활용하여 실천하는 자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마치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이 풍성한 열매를 맺듯이(루카8,15) 계속적으로 삶의 더 많은 기쁨과 은총을 경험하게 된다. 

반면에 '가진 것이 없는 자'하느님의 말씀을 듣고서도, 그리고 그 말씀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도 그것을 경시하고 하찮게 여기며 실천하지 않는 자를 가리킨다. 

그런데 '가진 것이 없는 자'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함정은 자신들에게 분명히 없는데, '가진 줄'로 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향해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고 말씀하신다. 

마태오 복음 25장 29절마르코 복음 4장 25절, 그리고 루카 복음 19장 26절에는 빼앗기게 되는 대상이 모두 '가진 것','호 에케이'(ho echei)로 되어 있다. 루카 복음 8장 18절'~줄로 여기는'에 해당하는 '도케이'(dokei)가 없다. 

'도케이'(dokei)'사실은 그렇지 않는데 그러하다고 독단적으로 생각하거나 잘못 믿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루카 복음 8장 18절'(가진 것이) 없는 자'는 사실은 자신에게 없는 것을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는 실제로 가지고 있는 것이 없으므로 빼앗길 것도 없다. 

그런데 루카 복음사가8장 18절에서 그것조차도 빼앗길 것이라고 기록했다. 이것은, 사실은 없는데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가 결국 그 마음이 완고해지고 사악해져서 하느님의 은총과 구원의 길에서 더 멀어질 것이라는 의미를 가르쳐주는 것이다. 

그는 전에 이미 하느님께로부터 은총과 말씀을 깨닫는 통찰력, 그리고 풍성한 은사들을 받았지만, 그후 말씀에 부주의하고 말씀 듣기를 싫어하고, 순종하지 않는 삶을 사는 중에 그러한 것들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사실도 모른 채 자신 안에 그러한 것들이 여전히 남아 있는 줄 알고, 계속해서 하느님께서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 결국에는 하느님의 구원의 은혜에서조차 멀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본주의의 부조리요 모순인 경제적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가지고서, 복음에 대한 자세가 결국 내적(內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의 원인이 될 것임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요한복음 5장 35절) : 비유한 등대


<등불의 비유>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카 8,16-18).”

 

이 말씀은, 마태오복음의 산상설교에 있는

등불에 관한 가르침과 같은 가르침입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예수님은 ‘구원의 빛’이신 분입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

신앙인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빛을 받아서, 그 빛 속에서 사는 사람이고,

세상 사람들에게 그 빛을 비추어 주는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4).”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고, 신앙을 증언하고,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일들은 모두

신앙인 본연의 사명을 수행하는 일이고,

사람들을 위해서 ‘세상의 빛’이 되어 주는 일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를 ‘삶으로’ 증언하는 일,

선과 사랑을 모범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일 등도

‘세상의 빛’이 되는 일입니다.)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모두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도록 하여라.”인데,

이 말씀은, “자기가 받은 복음을 감추거나 가리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자기의 신앙을 감추지 마라.”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박해 받는 것이 무서워서 신앙인이 아닌 척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루카 12,9).”

이 말씀에서 바로 연상되는 일이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부인한 일입니다.

“베드로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루카 22,34).”

“어떤 하녀가 불 가에 앉은 베드로를 보고 그를 주의 깊게 살피면서 말하였다.

‘이이도 저 사람과 함께 있었어요.’ 그러자 베드로는

‘이 여자야, 나는 그 사람을 모르네.’ 하고 부인하였다(루카 22,56-57).”

베드로 사도는 세 번이나 자기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부인했습니다.

겁에 질려서 엉겁결에 한 말이지만, 그래도 어떻든 신앙인이 아닌 척 했습니다.

 

마음으로는 여전히 예수님을 믿고 있고,

또 예수님을 배반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또는 신앙인이 아닌 척 하는 것은,

예수님과 자신의 관계를 스스로 끊어버리는 일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주신 ‘빛’을 스스로 꺼버리는 일이 됩니다.

등불이 켜져 있더라도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등불 구실을 할 수 없고, 그래서 등불을 끄는 일과 같습니다.

박해 때에 박해자들은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예수를 안 믿겠다고

한 마디 말만 하면 살려주겠다.” 라고 신앙인들을 회유했습니다.

혹시라도 “믿음이 변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거짓말이라도 해서 풀려난 다음에

다시 신앙생활을 하면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순교자들이 목숨을 바친 것은 그런 요령을 부릴 줄 몰라서가 아니라,

빈말이라도 예수님을 안 믿는다는 말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라는 말씀은,

“적극적인 신앙생활로 세상 사람들을 비추는 빛이 되어라.” 라는 명령입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는,

“복음의 빛을 숨기지 말고 드러내라. 감추지 말고 널리 알려라.” 라는

명령으로 읽을 수도 있고,

“언젠가는 복음이 온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다.” 라는

예언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아도 예수님의 복음은 널리 전해질 것이고,

그래서 언젠가는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것입니다.

(다른 누군가가 복음을 전하는 일과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은 그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지 못합니다.

(신앙생활에 무임승차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새겨듣고, ‘삶’으로 실천하라는 뜻입니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라는 말씀은,

‘삶’으로 실천하는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하면서

‘세상의 빛’의 역할을 제대로 한 신앙인은,

더욱 밝은 등불이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즉 더 많은 은총을 받아서 구원을 향해 나아가게 될 것이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라는 말씀은,

등불 구실을 제대로 하지 않은 신앙인은,

처음에 받았던 ‘빛’을 잃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즉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사람들을 비추는 일도 하지 않은 신앙인은,

처음에 받았던 은총도 잃게 되고,

하느님 나라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는 ‘빼앗길 것이다.’ 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예수님께서 주셨던 것을 다시 빼앗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불성실한 신앙인들 자신들이 스스로 자신의 빛을 꺼버리는 것이고,

자기들이 받은 은총을 버리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부인함으로써 등불이 꺼질 수도 있는 위기를 겪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를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처럼 체질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루카 22,31-32).”

예수님께서 그를 위해서 기도하셨고, 그 자신도 진실하게 회개했고,

그래서 그의 등불은 원상 복구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더욱 밝은 등불이 되기를 바라시면서...)

 

송영진 모세 신부




오늘의 묵상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놓는 것이 상식입니다. 등불은 더 멀리 빛을 보내 어두움을 없애는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등불의 비유를 통해 우리 영혼을 비추시는 하느님의 영을 내 안의 어두움으로 가두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솔직히 우리가 품은 욕망의 어두움은 숨기고 싶고, 감추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내 영은 욕망의 죄를 감출수록 더 공허해지고, 버릴수록 맑아집니다. 하느님의 영은 헛된 욕심으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나를 집착에서 비우면서 빛나기 때문입니다.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는 예수님의 경고는 이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경종을 울립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을 저버린 죄악으로 바빌론 유배의 참담한 시기를 살았지만, 이방 민족인 페르시아의 임금 키루스를 통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할 수 있는 기회를 얻습니다. 배타적이고 민족주의로 옹색해진 유다인들의 마음을 창조주 하느님의 보편적인 자비의 마음으로 변화시킨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치 꿈꾸는 듯’ 주님께서 자신들에게 ‘큰일을 하셨다.’고 탄복하고,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고 찬미의 기도를 바칩니다.
이기심과 욕망을 벗어버리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듯이, 믿음도 나를 비우면 더 채워 주시는 하느님을 만나고자, 날마다 조금씩 내가 실천할 수 있는 ‘비움의 수행’을 통해 성장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무엇을 비울까 고민해 봅시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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