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나를 따라라 (마태 9,9-13)
성 마태오 사도는 세리로 일하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도가 되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태 9,9). ‘마태오 복음서’를 쓴 마태오 복음사가가 전하는 증언의 핵심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바로 복음서가 서술하는 나자렛 예수님과 동일한 분이시라는 것”(주석 성경 ‘마태오 복음서 입문’ 참조)이다. 전승에 따르면, 마태오 사도는 에티오피아와 페르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였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라며, 성령께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라고 한다. (에페 4,1-7.11-13)
형제 여러분, 1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2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3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4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5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6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7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은혜의 양에 따라, 우리는 저마다 은총을 받았습니다.
11 그분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예언자로, 어떤 이들은 복음 선포자로, 어떤 이들은 목자나 교사로 세워 주셨습니다. 12 성도들이 직무를 수행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는 일을 하도록, 그들을 준비시키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3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있는 마태오를 제자로 부르시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는다고 비난하는 바리사이들에게,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신다. (마태 9,9-13)
그때에 9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0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11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2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13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제1독서 (에페4,1-7.11-13)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은혜의 양에 따라 우리는 저마다 은총을 받았습니다." (7)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서 4장 1-6절에서 교회 일치를 위한 권면과 교회 일치의 근거 및 당위성에 대해 제시함으로써 교회 공동체의 하나됨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전환의 접속사 '데'(de; but)가 사용된 에페소서 4장 7절 이후로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은총을 받은 교회 구성원들의 독특성을 말하며, 나아가 그들의 다양한 봉사의 직분으로써 하나된 교회의 일치와 성장을 위해 힘써야 한다는 사실을 말한다.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서 4장 7절에서 그리스도께서 교회 구성원 각 사람에게 분량에 따라 은총을 주셨음을 밝힌다.
여기서 '은총'으로 번역된 '헤 카리스'(he charis; grace)는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된 '죄의 용서'의 의미가 아니라, 성도에게 주어진 '봉사의 직분'을 가리킨다. 이 봉사의 직분은 선물로 주어진 것이므로 '은사'(charisma)라고도 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교회를 하나의 몸으로 부르시는데, 각 지체의 개성을 무시한 채 획일적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각 지체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셔서 각 은사를 통해(1코린7,7 ; 고유한 은사)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한 몸이 된 교회를 위해 효과적으로 봉사하게 하셨다(로마1,11).
에페소서 4장 7절을 새 성경은 능동태로 번역했지만, 원문은 수동태이다. 직역하면 '그러나 이 은총이 우리 각 사람에게 주어졌다'(But to each one of us grace was given)이다.
여기서 '은총'('헤 카리스'; he charis; grace)이 주어로 사용된 것은 은총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고, '주어졌다'('에도테'; edothe)라는 수동태로 쓰여진 것은 은사 분배자이신 그리스도의 시혜성(施惠性)을 드러낸다.
또한 이 시제는 부정 과거 시제인데, 이것은 은사의 분배가 이미 이루어졌으며, 이제 필요한 것은 인간 편에서 이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은혜의('테스 도레아스'; tes doreas; of the gift) 양에 따라'
이것은 성도 개개인에게 주어진 은총이 그리스도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분량에 따라 주어졌음을 말한다. 여기서 '양에 따라'에 해당하는 '카타 토 메트론'(kata to metron)은 '알맞게 측정된 것에 따라서'(according to the measure)라는 의미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인 교회 구성원들인 성도 각자에게 가장 알맞은 은사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측정하시고, 그에 적합한 봉사의 직분을 주신다는 것이다 (Christ apportioned it).
따라서 우리는 자신에게 주이진 은사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다른 사람의 은사를 무시하거나 자신의 은사만을 높여서는 안된다.
반대로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가 다른 사람이 잘 알아주지 않는 일과 연관되어 있다고 불평하거나 평가 절하해서도 안된다. 그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아시는 하느님께서(로마8,29) 나에게 가장 알맞은 은사를 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할 일은 그 은사를 자랑하거나 불만삼는 것이 아니라 그 은사로써 오직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교회와 지체를 위해 봉사하면 되는 것이다(에페4,12).
"그분께서는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예언자로, 어떤 이들은 복음 선포자로, 어떤 이들은 목자와 교사로 세우셨습니다." (11)
에페소서 4장 7-10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들에게 저마다 분량대로 은총을 베푸셨음을 말하였다.
이에 이어지는 에페소서 4장 11절과 12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은혜의 선물의 분량을 따라 각 지체에게 부여된 각 직분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공통의 목적을 갖는다는 사실을 말한다. 그리고 에페소서 4장 11절에는 초대 교회 당시 있었던 대표적인 직분들을 나열한다.
먼저 '사도'에 해당하는 '아포스톨루스'(apostolus)는 원형 '아포스톨로스'(apostolos)의 복수형이다. '아포스톨로스'는 '사명을 주어 자신의 대리자로 파견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아포스텔로'(apostello)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파견된 자'(使者)라는 문자적 의미를 지닌다.
예수님께서는 12제자를 부르시고 그들을 사도로 칭하였으며(루카6,13) 복음을 전하기 위해 보내셨다(마태10,1-8). 그런데 예수님의 사도가 되려면 세 가지 조건이 채워져야 한다.
첫째, 그리스도께로부터 직접 사명을 받은 사람이어야 한다(마태10,5; 갈라1,1).
둘째,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목격하고 이를 증거할 사명을 맡은 사람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목격증인) 이어야 한다(사도1,21.22).
셋째, 성령님의 특별한 영감을 받은 자이어야 한다(요한14,26).
이러한 조건이 모두 충족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공생활 동안에 먼저 부르신 열 두 제자 밖에 없다. 따라서 가장 좋은 의미로서의 사도는 이들로 제한되고 국한된다.
그런데 가리옷 사람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목매어 자살한 뒤에, 열한 사도는 그를 대신하여 마티아를 제비뽑아 빈 자리를 보충했다(사도1,15.16). 그리고 그 후에는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사도의 대열에 들어섰고(사도14,4; 갈라1,15-17) 주님의 동생이라고 여겨지는 야고보도 사도로 불리워졌다(갈라1,19).
다음으로 '예언자', 즉 '프로페타스'(prophetas)의 원형 '프로페테스'(prophetes)는 '~앞에'라는 의미의 전치사 '프로'(pro)와 '말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페미'(phemi)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문자적으로는 '미리 말하는 자'라는 뜻이다.
구약에서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주신 영감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며 장래의 일을 미리 말하는 역할을 하였다.
신약에서는 이 용어가 개별적으로 사용되기 보다는 '사도'라는 용어와 자주 함께 언급된 것을 보면(에페2,20; 3,5; 묵시18,20) 예언자의 역할은 사도의 그것과 유사했으며, 또한 두 직분은 초대 교회를 세우는 양대 기둥의 역할을 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사도의 메시지가 일반적이고 교리적이었다면, 예언자의 메시지는 실질적이었다는 점에서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구약의 예언자가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을 인도하는 일에서 주도권을 가진 자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면, 신약의 예언자는 사도들의 사목을 도와 교회내에서 '덕을 세우며 격려하고 위로하는' 역할을 하였다(1코린14,3).
신약 시대의 유명한 예언자로는 안티오키아 교회의 유다와 실라스(사도15,32) 등이 있었고, 이러한 예언자의 역할은 A.D. 2세기 경까지 이어졌다.
또한 '복음 선포자'는 선교사처럼 복음이 아직 전해지지 않은 곳에 가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여기에 해당하는 '유앙겔리스타스'(euanggellistas)의 원형 '유앙겔리스테스'(euanggellites)는 '복음을 전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유앙겔리조'(euanggellizo)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이것은 신약에서 단 세 번 밖에 사용되지 않았는데, 사도행전 21장 8절에는 필립포스에게, 그리고 티모테오 후서 4장 5절에는 티모테오에게 사용되었다.
한편, 사도(apostles), 예언자(prophetes), 복음 선포자(euanggelistes)는 원문에서 모두 복수형으로 사용되었다.
계속해서 교회 내의 다양한 봉사의 직무들이 소개되고 있는데, '목자'로 번역된 '포이메나스'(poimenas; pastors)의 원형 '포이멘'(poimen)은 본래 '보호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어근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양치는 목자', '가축지기'를 말한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나는 착한 목자이다'라고 하셨을 때에도 이 단어가 쓰였다(요한10,11). 같은 어근에서 파생된 '포임네'(poimne)가 '양떼'를 의미한다는 것(루카2,8; 1코린9,7)이 '포이멘'이 양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자임을 잘 나타낸다.
그 다음 '목자'를 바로 이어서 등장하는 '교사'를 가리키는 '디다스칼루스' (didaskalus; teachers)앞에 관사 '투스'(tus)가 없다는 점에서, '목자'와 '교사'를 동일한 직분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이 견해를 따르면 '목자'는 곧 '가르치는 자'(교사)라는 것이다. 코린토 전서 12장 28절에서 사도와 예언자 다음에 교사만 언급하는 점도 이 견해를 지지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목자'와 '교사'를 다른 직분으로 보는 경우에는 '목자'를 감독과 원로로 나뉘어서 교회를 다스리는 직분으로 보고, '교사'를 성경을 해석하고 그 내용을 가르쳐 영적으로 인도하는 직분으로 본다.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복음 (마태9,9-13)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12)
이 구절은 세리,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는 예수님의 행위를 비난하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께서 일침을 가하시는 대목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메시야이신 당신의 사명이 바로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는 이들을 불러 회개시키러 온 것임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건강한'에 해당하는 '휘기아이논테스'(hygiainontes; healthy; whole)는 '건전하다', '바르다', '참되다'는 뜻을 지닌 '휘기아이노'(hygiaino)의 현재 분사로서, 육체적으로 건강하다는 뉘앙스를 지니고 있지만, 그보다는 '도덕적, 윤리적으로 바르다'는 뉘앙스를 더 강하게 띄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말씀하시는 스스로 '건강한 이들'이란, 종교적, 윤리적으로 올바른 이들이 아니다.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스스로 올바르다고 자부하면서, 인간의 영적 악함을 깨끗하게 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불필요하다고 하며 거부하는 이들을 말한다.
이들은 바로 당시 직접적으로 예수님을 비방하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모두 지칭하며, 그 외에도 예수님을 필요하지 않다고 거부하는 영적으로 교만한 자들 모두를 포함한다.
그리고 '병든'에 해당하는 '카코스'(kakos; sick)도 육체적으로 병들고 허약한 것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악한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기에, '병든 이들'이라는 표현에도 '죄인들'이라는 뜻이 있다.
이들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정해 놓은 종교적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들로서, 하느님 대전에 진실로 구원자를 필요로 하여 자신의 죄에 대해 가슴을 치는 모든 이들을 가리킨다.
'의사'에 해당하는 '이아트루'(iatrou; a physician; a doctor)이신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들을 위해 오신 분이며, 마태오 복음에서 잔치에 초대되어 온 모든 죄인들도 그 중에 포함될 것이다.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하며, 예수님이 구원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죄인들은 예수님께 선택 받을 수 있지만,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처럼 계속해서 자신들의 의로움을 자랑하며 율법주의와 형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은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선택에서 영원히 제외될 것이다.
'회개시키러'로 번역된 '메타노이아'(metanoia)는 '마음을 고치다'라는 동사 '메타노에오'(metanoeo)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마음을 바꿈'이라는 뜻이다.
루카 복음 5장 31절에서 예수님께서 막연히 죄인들을 선택하신 것이 아님을, 루카 복음 5장 32절에서 죄인들을 선택한 목적을 분명하게 언급하시면서 밝히신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무가치함과 죄를 인식하고 참회하는 죄인들의 마음을 고쳐서 새롭게 만들기 위해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부정하게 여겨 접촉하는 것을 꺼리는 죄인들과 함께 친교를 나눔을 밝히신 것이다.
<마태오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태 9,9).”
예수님께서 마태오를 사도로 뽑으신 것은 그가 세리였기 때문이 아니라,
사도로 뽑힐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루카 6,12-13)”
(예수님의 제자가 열두 명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도로 뽑히지 않은 제자들 가운데에는
세속적인 기준으로 볼 때 과거 경력이 좋은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안 좋은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제자들 가운데에서
특별히 열두 명을 뽑아서 그들을 사도로 삼으셨는데,
그들의 출신지, 직업, 학력 같은 인간적인 배경은 보지 않으셨고,
사도로서 일할 때에 필요한 자격만 보셨습니다.
그 자격은 아마도 믿음, 열정, 헌신, 충성심, 인내심 등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 마태오의 직업이 세리였다는 것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도, 또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여기서 “나를 따라라.” 라는 말씀을,
신앙인으로 부르시는 말씀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이 말씀은 더욱더 마태오의 직업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고,
모든 사람을 부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마태 9,10).”
지금 이 식사는 마태오가 예수님을 위해서 베푼 잔치입니다.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함께 식탁에 앉았다(루카 5,29).”
(여기서 ‘레위’는 마태오 사도입니다.)
마태오는 자기를 불러 주신 예수님께 감사드리는 잔치를 베풀었는데,
그의 동료들 입장에서는 그를 보내는 송별식 잔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잔치에 참석한 많은 세리들은 마태오의 동료들입니다.
여기서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라는 말은,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세리들이 많이 와서”로 해석됩니다.
당시 유대 사회는 세리들을 죄인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입장에서는 세리들도 당신의 양들이었고,
하느님의 소중한 자녀들이었습니다.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마태 9,11)”
그 잔치를 목격한 바리사이들이 시비를 걸고 있는데, 그들이 한 말의 뜻은,
“세리들 같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을 보니
당신네 스승도 죄인이다.”입니다.
이 말에서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마태 11,18-19).”
바리사이들의 말은 예수님께서 세리들하고만 식사를 하신다는 비난이 아니라,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사람들과 어울리신다는 비난인데,
예수님이 정말로 예언자이고 스승이라면 그러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2-13)”
예수님 말씀을 간단하게 줄이면, “나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왔다.”입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니, 모든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여기서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이 병든 상태에 있기 때문에
내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왔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는 “내가 병든 이들을 만난다고 시비를 걸고 있는 너희는 건강하냐?”
라는 질문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 입장에서는 세리들만 병든 이들이 아니라 바리사이들도 병든 이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도 만나셨고,
바리사이들하고도 식사를 함께 하셨습니다(루카 11,37).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형식적인 신앙생활이 아니라,
너희가 서로 도와서 함께 구원을 받는 것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을 죄인이라고 낙인찍지 말고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동반자로서 서로 사랑을 실천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지금 바리사이들의 태도는 자기 눈 속에 들보가 있다는 것은 부정하면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문제 삼는 것과 같은 태도입니다(마태 7,1-5).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라는 말씀은,
‘죄인만’ 구원하려고 오셨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셨다는 뜻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다 똑같이 ‘구원받아야 할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 똑같이 예수님의 구원이 필요한 죄인들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에는 바리사이들도 죄인들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들, 또는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사람들을 만나신 것은
그들을 편애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차별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바리사이들의 경우에, 예수님께서 그들을 자주 꾸짖으신 것은
그들을 싫어하셨거나 미워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이 회개해서 구원받기를 바라셨습니다.)
(언젠가 때가 되어 우리가 하느님 앞에 서게 될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과거를 보지 않으시고 현재 상태만 보실 것이고,
참으로 회개하고 완전히 변화된 사람의 과거는 깨끗이 지워버리실 것입니다.
인간들은 자꾸 남의 과거를 들추어내서 말하지만,
하느님은 회개한 사람의 과거는 잊어버리시는 분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예수님의 부르심에는 우리와 다른 방식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볼 때 그의 출신 배경과 경력, 인맥과 학벌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속마음을 보시고, 그가 하느님 나라에 헌신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십니다. 자기 민족에게서 세금을 거두어 로마 제국에 바치는 세리의 직업은 유다인들에게 혐오와 비난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 세리를 제자로 부르시는 예수님의 속셈은 무엇이었을까요?
세상의 모든 필연은 우연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태오가 세리가 된 것은 숙명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먹고살 길을 찾는 방식들 가운데 우연한 순간 내 평생직장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신념에 따른 일이라고는 하지만, 대부분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는 것에 충실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세상의 잘못된 조직과 이념 때문에 희생되는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세리인 마태오의 직업은 이방 민족의 지배 속에서 하느님 백성의 지위를 잃은 이스라엘 백성의 처지와 모순을 알려 주는 상징적인 면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삶의 모순으로 닥친 죄의 현실을 치유하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각자의 능력이 비교되는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임을 강조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바오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