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5주간 목요일]이 사람은 누구인가?” (루카 9,7-9)
다리우스 임금 제이년 여섯째 달 초하룻날, 주님의 집을 지으라는 주님의 말씀이 하까이 예언자를 통하여 내린다. (하까이 1,1-8)
1 다리우스 임금 제이년 여섯째 달 초하룻날, 주님의 말씀이 하까이 예언자를 통하여 스알티엘의 아들 즈루빠벨 유다 총독과 여호차닥의 아들 예수아 대사제에게 내렸다.
2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백성은 ‘주님의 집을 지을 때가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3 주님의 말씀이 하까이 예언자를 통하여 내렸다. 4 “주님의 집이 무너져 있는데, 너희가 지금 판벽으로 된 집에서 살 때냐?
5 ─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 너희가 살아온 길을 돌이켜 보아라. 6 씨앗을 많이 뿌려도 얼마 거두지 못하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으며 마셔도 만족하지 못하고 입어도 따뜻하지 않으며 품팔이꾼이 품삯을 받아도 구멍 난 주머니에 넣는 꼴이다.
7 ─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 너희가 살아온 길을 돌이켜 보아라. 8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집을 지어라. 그러면 나는 그 집을 기꺼이 여기고 그것으로 영광을 받으리라.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여,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하며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한다. (루카 9,7-9)
그때에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서 하신 7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더러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8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이다.
9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제1독서 (하까이 1,1-8)
주님의 집이 무너져 있는데, 너희가 지금 판벽으로 된 집에서 살 때냐?" (4)
하느님께서는 강조적 의미를 전달하는 수사 의문문을 사용하여
성전 재건을 중단하여 무너진 채로 내버려둔 선민 이스라엘의
영적 무관심과 나태함을 꼬집고 계신다.
즉 하느님께서는 무너진 성전과 번듯하게 서 있는,
판벽으로 된 이스라엘의 집을 비교하시면서,
그들이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이기적인 태도로
자신들만을 생각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계신 것이다.
하까이서 1장 4절의 표현은 주어가 강조된 형태이다.
여기서 '주님의 전이'가 원문에는 '이 전이'에 해당하는
'웨합바이트 핫제'(wehabbaith hazzeh)로 되어 있다.
이것은 서술어에 선행하여 강조되어 있으며, 이 표현 자체도 정관사 '헤'(he)와 더불어
지시 대명사(hazzeh; this)가 사용되어 특별히 부각되어 있다.
이러한 본문의 표현은 '결코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될 하느님의 집,
바로 그 성전이 이처럼 무너져 있는데'라는 뉘앙스를 전달한다고 본다.
여기서 '무너져 있는데'에 해당하는 '하레브'(hareb; remains a ruin; lies waste)는
가뭄으로 타버리거나 바싹 말라 아무런 생명력을 찾아볼 수 없는 상태,
철저히 파괴되어 인적마저 완전히 끊긴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이다(느헤2,17; 예레33,12).
포로 귀환 후 성전 재건 사업을 시작하였으나 적들의 방해 공작으로 인해
기초만 놓였기 때문에(에즈4,1-24; 4,12) 여전히 무너진 상태로 놓여 있다고 언급되는 것이다.
당시 여러 가지로 어려운 상황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성전 재건이야말로
신앙 공동체의 회복의 첫 걸음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이처럼 성전이 무너진 채로 남아 있었던 것은
그들의 신앙이 회복되지 못하고 무너진 상태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너희가 지금 판벽으로 된 집에서 살 때냐?'
원문은 '하에트 라켐 앗템 라쉐베트 뻬밧테켐 쎄푸님'(haeth lakem athem
lashebeth bebathekem sepunim; Is it a time for you yourselves
to be living in your paneled houses)이다.
직역하면 '너희들이 너희 자신들을 위해 지붕이 있는
반듯한 집들에서 살 때이냐?' 이다.
본문에서는 '너희들'이라는 표현이 거듭 사용되어 이스라엘 백성이 강조되고 있다.
즉 '라켐 앗템'(lakem athem)은 문자적으로 '너희들은 너희 자신들을 위해'라는 의미로서
주님 임재의 상징적 처소인 성전이 무너져 내버려져 있는 상황에서
좋은 집에 거주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부각시켜
그들의 이기적인 행태를 힘주어 책망하는 의미를 전달한다.
그리고 본절의 첫 단어인 '하에트'(haeth; Is it time)는 하까이서 1장 2절의
'때'(시기)에 해당하는 명사 '에트'(eth)와 동일한 단어이다.
이처럼 동일한 단어를 거듭 사용한 것은 성전이 무너진 채 방치된 상황에서
그것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동일한 시기에 자신들은
판벽으로 된 집, 즉 지붕과 벽이 완벽하게 구비된 집에 아무렇지도 않게 거주하는
당시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태가 얼마나 불신앙적이며, 얼마나 하느님을 향한
헌신과 봉헌과는 거리가 먼 것인지를 부각시키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러한 선민 이스라엘의 행태는 과거 자신은 향백나무 궁에 살면서
하느님의 궤는 천막 가운데 있음을 안타까워 한 다윗의 모습(2사무7,2)을 떠올리게 하며,
그들이 하느님께 대해 그리고 선민 공동체의 신앙적 재건에 대해
얼마나 무관심한 자들이었는지를 생생하게 부각시킨다.
한편 '판벽으로 된'에 해당하는 '쎄푸님'(sepunim)의 원형 '싸판'(sapan)은
빈 공간을 덮어서 가리는 행위를 의미하는 어원에서 유래한 단어이며,
본문에서는 지붕을 덮는 행위를 의미한다(1열왕6,9; 7,7; 예레22,14).
대다수의 영역본들은 이것을 지붕과 사방 벽을 모두 평평한 것으로
덮어 가린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로 번역했다(paneled; cieled).
당시 포로 귀환 후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기 거주하던 집들이,
완전히 파괴되어 비와 서리를 맞고 무너져 내버려져 있는
하느님의 성전의 모습과 현저한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서
그들이 얼마나 하느님을 향해 무관심하며 오직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삶을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현저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복음 (루카9,7-9)
그때에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더러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이다.
루카 복음 9장 1~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선택하신 열두 제자를 불러
갈릴래아 여러 고을로 파견하시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게 하신다.
열두 제자들이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어서
그들의 복음 선포는 많은 사람들의 주의와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리하여 그 당시 갈릴래아와 베레아를 통치하던 분봉왕 헤로데 안티파스
(B.C.4~A.D.39)에게 까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미치면서, 헤로데 안티파스
영주는 '죽은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인지도 모른다'는 풍문으로 인해
예수님을 한번 보고 싶어 한다.
여기서 '영주'에 해당하는 '테트라르케스'(tetrarches; tetrarch;
the fourth-chief)는 분봉왕으로서 4분 영주(고대 로마의 한 주(州)의
4분의 1을 다스린 영주)나 작은 나라의 왕을 말한다.
헤로데 대왕이 10명의 부인이 있어서 자신의 배다른 왕자들에게
이스라엘의통치 지역을 나누어 다스리게 한 것이다.
루카 복음 사가는 9장 7~9절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의 복음 선포가
왕궁 안에서나 여러 곳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면서 두루 퍼져
나갔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어한다.
동시에 그 당시 메시야 시대가 도래하면, 먼저 엘리야 예언자나
다른 예언자들 중의 한 분이 온다는 사상이 퍼져 있으므로,
세례자 요한이나 예수님께 대해서 이러한 소문이 퍼져 있었다고 본다.
그리고 헤로데 안티파스는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지 않았기에, 자신이 예전에
죽인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복 동기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라는 세례자 요한의 진언 때문에
그를 죽였으므로 예수님께 대한 여러 소문을 듣고 일말의 양심이 있어
불안해졌고, 그래서 더욱더 예수님을 확인하고 싶어했다고 본다.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헤로데의 불안은, 권력에 집착한 나머지 양심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진리를 외면하는 한 인간의 어리석음을 대변해 줍니다. 헤로데는 자신의 비행을 지적했던 세례자 요한을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걸림돌로 생각했으면서도 그를 함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헤로디아의 딸 앞에서 공언한 허세를 이용해 세례자 요한을 처형합니다. 헤로데는 진리 앞에서 양심의 가책과 두려움을 감추려고 했지만, 예수님의 등장은 그에게 또 다른 걸림돌이 되어 불안의 늪을 벗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성경에서 ‘죄’는 단순히 윤리적인 악행이나 법과 계명을 지키지 않는 무질서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죄의 본질은 나의 삶의 바탕이자 근거인 하느님을 잊고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신앙인이라면 하느님께서 선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모든 악행과 폭력으로부터 벗어나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라고 가르치신다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나의 행위와 생각들이 세상의 논리와 관점에서 정당화되고, 사람들 때문에 나도 어쩔 수 없다는 식의 합리화의 유혹에 빠질 때, 하느님의 말씀과 그분의 계명은 나에게 걸림돌이고 불안과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맙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진리에 눈을 감을 때 죄의 유혹과 불안감이 내 삶을 지배한다는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헤로데에게 예수님은 불편한 진리였습니다. 나를 숙명처럼 지배하고 있는 죄의 근원들을 벗어 버리지 못한다면, 비록 내가 세상에서 인정받고 부유함의 안락을 누린다 하더라도, 내 영혼의 참된 평화와 안식은 없습니다.
고해성사를 통해 우리가 죄를 씻을 수 있는 기회를 교회가 주는 것은, 하느님과 맺는 관계가 불안과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과 평화여야 한다는 점을 가르쳐 주기 위함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