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7주간 월요일] 이웃 (루카 10,25-37)|

2017. 10. 9. 오전 4:5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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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7주간 월요일]  이웃 (루카 10,25-37)


요나 예언자는 주님의 명을 피하여 배를 타고 달아나다가 바다에 던져져 물고기 배 속에서 사흘 밤낮을 지내게 된다. (요나  1,1─2,1.11)
1 주님의 말씀이 아미타이의 아들 요나에게 내렸다. 2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 그 성읍을 거슬러 외쳐라. 그들의 죄악이 나에게까지 치솟아 올랐다.”
3 그러나 요나는 주님을 피하여 타르시스로 달아나려고 길을 나서 야포로 내려갔다. 마침 타르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 뱃삯을 치르고 배에 올랐다. 주님을 피하여 사람들과 함께 타르시스로 갈 셈이었다.
4 그러나 주님께서 바다 위로 큰 바람을 보내시니, 바다에 큰 폭풍이 일어 배가 거의 부서지게 되었다. 5 그러자 뱃사람들이 겁에 질려 저마다 자기 신에게 부르짖으면서, 배를 가볍게 하려고 안에 있는 짐들을 바다로 내던졌다. 그런데 배 밑창으로 내려간 요나는 드러누워 깊이 잠들어 있었다.
6 선장이 그에게 다가가 말하였다. “당신은 어찌 이렇게 깊이 잠들 수가 있소? 일어나서 당신 신에게 부르짖으시오. 행여나 그 신이 우리를 생각해 주어, 우리가 죽지 않을 수도 있지 않소?”
7 뱃사람들이 서로 말하였다. “자, 제비를 뽑아서 누구 때문에 이런 재앙이 우리에게 닥쳤는지 알아봅시다.” 그래서 제비를 뽑으니 요나가 뽑혔다.
8 그러자 그들이 요나에게 물었다.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이런 재앙이 닥쳤는지 말해 보시오. 당신은 무엇하는 사람이고 어디서 오는 길이오?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이며 어느 민족이오?”
9 요나는 그들에게, “나는 히브리 사람이오. 나는 바다와 뭍을 만드신 주 하늘의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오.”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러자 그 사람들은 더욱더 두려워하며, “당신은 어째서 이런 일을 하였소?” 하고 말하였다. 요나가 그들에게 사실을 털어놓아, 그가 주님을 피하여 달아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알게 되었던 것이다.
11 바다가 점점 더 거칠어지자 그들이 요나에게 물었다. “우리가 당신을 어떻게 해야 바다가 잔잔해지겠소?”
12 요나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를 들어 바다에 내던지시오. 그러면 바다가 잔잔해질 것이오. 이 큰 폭풍이 당신들에게 들이닥친 것이 나 때문이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소.”
13 사람들은 뭍으로 되돌아가려고 힘껏 노를 저었으나, 바다가 점점 더 거칠어져 어쩔 수가 없었다.
14 그러자 그들이 주님께 부르짖었다. “아, 주님! 이 사람의 목숨을 희생시킨다고 부디 저희를 멸하지는 마십시오. 주님, 당신께서는 뜻하신 대로 이 일을 하셨으니, 저희에게 살인죄를 지우지 말아 주십시오.”
15 그러고 나서 그들이 요나를 들어 바다에 내던지자, 성난 바다가 잔잔해졌다. 16 사람들은 주님을 더욱더 두려워하며 주님께 희생 제물을 바치고 서원을 하였다.
2,1 주님께서는 큰 물고기를 시켜 요나를 삼키게 하셨다. 요나는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그 물고기 배 속에 있었다. 11 주님께서는 그 물고기에게 분부하시어 요나를 육지에 뱉어 내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저의 이웃이냐고 묻는 율법 학자에게,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드시며, 너도 가서 그렇게 하라고 하신다. (루카 10,25-37)
때에 25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2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27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29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30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31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2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3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35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연중 제27주간 월요일 제1독서 (요나1,1-2. 1.11)


뱃사람들이 서로 말하였다.

"자, 제비를 뽑아서 누구 때문에 이런 재앙이 우리에게 닥쳤는지 알아봅시다."

그래서 제비를 뽑아서 요나가 뽑혔다."    (7)

 

선장은 배 밑창에 있던 요나 예언자를 갑판으로 데리고 올라왔을 것이다.

그렇게 하는 동안 요나가 주 하느님께 기도했을 것이라는 암시는 보이지 않는다.

요나는 어쩌면 당시 상황에서 기도하는 것까지 포기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주 하느님의 말씀을 어기고 그의 얼굴을 피하기 위해

타르시스로 도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배 갑판 위에 요나를 비롯하여 모든 승객들과 뱃사람들이 모였을 때,

그들은 위기 타개를 위한 방편으로 제비뽑기를 하자고 제안했다.

 

'자, 제비를 뽑아서'라고 번역된 '레쿠 웨납필라 고랄로트'

(leku wenapilla goralloth; Come, let us cast lots)는 문자적으로

"오라, 그래서 우리가 제비들을 던지자" 라는 의미이다.

 

그들은 누가 먼저라고 말할 것도 없이 서로 의기투합하여 제비를 뽑아

그 재앙이 누구때문인지를 살피자고 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로 번역된 '레쿠'(leku)'걷다', '가다'(또는 '오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동사 '알라크'(allak)의 2인칭 복수 명령형으로

'너희들은 오라'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제비뽑기를 위해 사람들을 각각 갑판 한 가운데로 모이게 하는 말이다.

 

고대 세계에서  제비 뽑는 일은 어떤 일을 결정하거나 미래를 점치거나

숨겨져 있는 원인을 발견하기 위해 사용하던 일반적 관행이었다.

 

당시 제비뽑기는 막대기나 돌 같은 것 위에 글자를 새겨 던지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파선 위기에 놓인 당시 사람들은 막대기에 각각 자신의 이름을 써놓고

그것들을 갑판에 던짐으로써 어떤 이름의 제비가 다른 모양으로 넘어지는지를

관찰함으로써 풍랑의 원인 제공자를 찾으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아무런 사심도 없이 던진 그 제비가 깊은 강에 빠져 있다가

선장의 꾸짖음에 깨어 아직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 있는 요나 예언자에게 당첨된 것이다.

이것은 제비뽑기의 전 과정을 하느님께서 주관하고 계셨음을 알게 한다.

 

비록 사람이 제비를 뽑지만 그 일을 결정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며,

하느님께서는 그 일을 통해 요나를 일깨워 당신의 명령에

궁극적으로 순종하도록 하신 것이다.

 

"제비는 옷 폭에 던져지지만 결정은 온전히 주님에게서만 온다."  (잠언16,33)

 

'누구때문에 이런 재앙이 우리에게 닥쳤는지 알아봅시다'

 

이 본문은 그들이 제비를 뽑기 원하는 이유를 보여준다.

그들은 자신들이 겪고 있던 그 위기를 '재앙'으로 표현한다.

 

이에 해당하는 '하라아'(harah; evil)의 원형 '라으'(lah)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는

모든 나쁜 것을 포괄하는 '악'(evil)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뱃사람들은 인간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악의 원인이

인간의 악에 있음을 인식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종교적 성향을 가진 인물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한 관념은 욥의 세 친구들에게서도 있었다(욥기4,7).

그러한 이해와 적용이 욥에게는 해당되지 아니했지만,

요나에게는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일이었다.

 

한편 이처럼 자신의 능력으로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위기의 상황에서

그 위기의 원인을 찾아보고자 제비를 뽑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나 문서화된 율법의 말씀이 없는 이방인들로서는

최선의 방법이었다고 할 수 있다(예레44,1-10참조).

 

'그래서 제비를 뽑으니 요나가 뽑혔다'

 

본문은 '와이얍필루 꼬랄로트 와이입폴 학고랄 알 요나'(weiyappiliu goralloth

weiyippol hagoral al yonah; They cast lost and the lot fell on Jonah)인데,

문자적으로 '그래서 그들은 제비들을 던졌고,그 제비가 요나에게 떨어졌다'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앞의 '제비'는 복수형으로 되어있는 반면

뒤의 '제비'는 단수형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뽑으니'와 '뽑혔다'에 해당하는 단어를 '와이얍필루'와

'와이압폴'의 원형 '나팔'(napal)은 어원상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지는 모습(fall down)을 나타내는 동사인데(탈출21,33; 여호6,20),

앞의 것은 3인칭 복수 사역 능동형으로 사용되고,

뒤의 것은 3인칭 단수 기본형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사람들이 막대기로 된 제비들을 던졌다는 사실

그 제비들 가운데 당첨되었음을 알리는 특정한 제비가

사람들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하느님의 주권에 의하여 요나에게 떨어졌음을 암시한다.

 

이로 인해서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요나가 풍랑의 원인 제공자임을 직감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특별한 섭리를 통해 당시 배에 탄

사람들이 던진 제비가 정확하게 요나에게 당첨되도록 역사하셨던 것이다.

 

인간의 의지가 조금도 관여되지 않은 제비뽑기로 인해

요나는 당시 재앙이 일어나게 한 원인자임이 밝혀졌고,

이것을 통해 요나는 자신의 범죄 사실을 시인하게 되었다.


오늘의 성화


 연중 제27주간 월요일 복음(루카10,25~37)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버렸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을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30~33)

 

루카 복음 10장 30~35절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삶이 올바르다고 확신하며 이웃이 자기 동족에 한정된다고

믿고 있는 어떤 율법 교사에게, 그의 생각이 틀렸고, 또한 그가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자기 아님을 드러내며, 또한 그에게 진정한 이웃이 누구인지를

가르치고자 착한 사마리아인과 강도 만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 주신다.

 

예루살렘은 해발 760m의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예수님 당대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하는 사제나 레위인들이 많이 살고 있던 예리코는 해면보다 250m 낮은 저지대이다.

 

두 지역간의 거리는 약 36km정도였으며, 길이 가파르고

길 옆에는 암석들도 많았으며 도둑들이 자주 출몰하였다.

 

루카 복음 10장 30절'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에 해당하는 '헤미타네'

(hemithane; half dead)'절반'을 뜻하는 '헤미'(hemi)'죽다'

뜻하는 '트네스코'(thnesko)가 합쳐서 만들어진 형용사로서,

강도 행각의 무시무시함을 보여주는 단어이다.

 

그래서 강도맞은 사람이 혼자 힘으로는 도무지 어쩔 수 없는 상태였음

보여 주면서, 이웃의 도움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상황을 더욱 부각시켜 준다.

 

마침 그때 백성들을 위해 성전에서 하느님께 희생 제물을 봉헌하는 임무를

지닌 사제가,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제의 의무 기간을 마치고 예리코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강도맞은 사람을 보게 된다.

 

그런데 그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에 해당하는 '안티파렐텐'(antiparelthen;

he passed by on the other side)'반대'의 뜻을 지닌 '안티'(anti)

'지나가다'라는 뜻을 지닌 '파레르코마이'(parerchomai)가 결합된 동사인

'안티파레르코마이'(antiparerchomai)의 부정과거형이다.

 

이것은 사제가 의도적으로 사고 현장을 우회하여 지나갔음을 명백하게 확인시켜 준다.

 

아마도 그는 자신도 강도를 만나게 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그 사람이 이미

죽었을것이라고 판단하여 시체를 만져 자신을 부정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율법 때문에 그렇게 헀을 것이다(레위21,1~3).

 

하지만 어떤 이유와도 상관없이, 강도만난 사람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려는

최소한도의 노력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 사제의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다.

 

그 사제는 절실히 도움이 요청되는 사람을 보고도 의도적으로 외면했으며,

백성의 종교 지도자로서 누구보다도 사랑의 실천에 모범이 되어야 할 사제

(민수18,1~32)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자연인으로서도 도무지 용납이 될 수 없는

비인간적인 행동을 한 것이다.

 

또한 레위인도 사제와 마찬가지로 하느님과 백성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성별된 지파의 사람이었는데(민수18,1~32), 사제보다는 지위가 낮았지만

유대의 종교 특권층이 속해 있어서 모든 사람들의 모범이 되어야 했다.

 

이들이야말로 레위기 19장 18절에 명시된 이웃 사랑의 계명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고, 더 잘 지켜야만 하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 레위인도 앞서 지나간 사제와 조금도 다르지 않게 강도 만나

죽어가는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은 채 외면하고 떠나가 버린다.

 

한편, 세번째로 등장하는 사마리아인은 예수님 당대 유대인들에 의해

거의 사람 취급을 못받았던 부류인데도 진정한 이웃이 되어 준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마리아인과 앞서 나온 사제와 레위인을 비교시킴으로써,

교만하고 완고하며 사악한 유대주의자들을 책망하고 계신 것이다.

 

루카 복음 10장 33절에서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에 해당하는 '에스플랑크니스테

(esplangchnisthe; he took pity on him; he had compassion on him)

원형 '스플랑크니조마이'(splangchnizomai)의 부정과거형이다.

 

신약 성경에서 12회 등장하는 이 단어는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자들에게

쏟아부어져야 할 인간의 기본적인 마음을 표현한다.

 

이 단어는 사제와 레위인도 강도만나 폭행당해 죽어가는 사람을

당연히 불쌍히 여겨 도와주어야 했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하지만 '가엾은 마음'어려움에 처한 상대방의 처지와 입장을 깊이 공감하고,

그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낄 수 있어야만 생길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사제와 레위인은 극도의 이기적인 모습을 보인 반면에,

사마리아인만이 비극에 처한 자를 가엾에 여기는 참된 사랑의 자비를 지녔던 것이다.

 

이야기의 역설과 아이러니는 유대인들이 보기에 이웃의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 멸시받던 '이방인'이 불행을 당한 '유대인'에게

진정한 이웃이 되어 주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당시 이웃을 한계짓고 구별짓는 배타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던

유대인들에게 진정한 이웃의 자세를 상기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사랑 실천>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루카 10,25)”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루카 10,26)”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루카 10,27).”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루카 10,28).”


 


이 대화의 예수님 말씀에는,


“너는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미 알고 있다.


그러니 그것을 나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다.


네가 알고 있는 것을 그대로 실천하여라.”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여기서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라는 말씀은,


“사랑을 실천하면 네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반대로 표현하면,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너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가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습니다.


‘간음하지 마라. 살인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탐내지 마라.’ 라는 계명이 있고


또 그 밖에도 다른 계명이 많이 있지만 그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이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에게 해로운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는 일입니다(로마 13,8-10.공동번역).”


(여기서 ‘율법’이라는 말은 ‘신앙생활’로 바꿔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신앙생활을 완성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사랑이 없으면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 없이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루카 10,29-34).”


 


여기서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라는 말을 원문대로 번역하면,


‘자기를 의롭게 하려고’인데, 이 말은 의로운 사람인 척 했다는 뜻입니다.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잘 실천하는


의로운 사람인 척 하면서, “이웃은 누구인가?”에 대해서


예수님과 논쟁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직접적인 답변을 하지 않으시고,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이웃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논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제, 레위인, 사마리아인을 언급하신 것은 의도적인 일입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모범적으로 사랑을 실천해야 할 성직자들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과 적대관계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강도당한 사람 입장에서는 사제와 레위인은 원래부터 이웃이고,


사마리아인은 이웃이 아니라 원수입니다.


그런데 원래 이웃이었던 자들은, 또 명색이 성직자들이라는 자들은


사랑 실천을 하지 않고 그냥 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과 원수 사이인 사마리아인은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그래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는,


원수를 사랑하는 일도 ‘이웃 사랑’에 포함된다는 가르침이 들어 있고,


이웃과 원수를 구분하지 말라는 가르침도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다음에


그 율법 교사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루카 10,36)”


이 말씀은, “누가 나의 이웃인지 묻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어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즉 “모든 사람이 다 이웃이니,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실천하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만일에 자기 마음대로 사람들을 ‘이웃’과 ‘이웃이 아닌 사람들’로 분류한 다음에


이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사랑을 실천하지 않고,


자기의 이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만 사랑을 실천한다면,


그것은 사랑 실천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어 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루카 6,32).”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예수님께서는 그 율법 교사에게


“그렇게 하여라.” 라는 말씀을 두 번이나 하셨습니다.


이것은 쓸데없는 논쟁은 그만두고 행동으로 실천하라는 가르침으로 해석됩니다.


요한 1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음을 알게 되고,


또 그분 앞에서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1요한 3,18-19).”


사랑이란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어 주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모든 사람이 다 이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해도,


행동으로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알고 있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라,


제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들어가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송영진 모세 신부



오늘의 묵상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율법 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논쟁을 시작합니다. 논쟁은 대개 가슴이 아닌 머리에서 시작하지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613개의 율법 조항 가운데 가장 큰 계명은 무엇인지 등 이른바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기지를 발휘하여 쏟아 내는 질문들입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가르쳐 줄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누가 나의 이웃인가?”라는 것입니다.
이웃은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가까움은 단순한 거리상의 문제를 넘어 나와의 혈연관계로, 그리고 친분으로 가까운 사람을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 시대 사람들의 사고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에게 이교도, 이방인, 사마리아인, 또는 나와 관계없는 아무나가 나의 이웃일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이러한 사고방식을 완전히 바꾸어 줍니다. 율법 교사가 적대시하고 철저히 무시했던 사마리아인에 관한 비유이지만, 그가 보여 준 행동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고귀한 사랑의 가치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마리아인은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위기에 빠진 이웃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내어 줍니다. 그에게 관심을 보여 주고, 시간을 내어 주며, 자상하게 그를 돌보아 줍니다.
“오늘 당신의 이웃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 “당신은 어떤 그리스도인입니까?”를 드러내 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율법 교사에게 하신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는 말씀이 그분의 가장 큰 계명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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