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6주간 금요일]회개 (루카 10,13-16)

2017. 10. 6. 오전 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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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6주간 금요일]회개 (루카 10,13-16)


바룩 예언자는, 우리는 주 우리 하느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르며, 저마다 제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대로 살아왔다고 고백한다. ( 바룩 1,15ㄴ-22)
15 주 우리 하느님께는 의로움이 있지만, 우리 얼굴에는 오늘 이처럼 부끄러움이 있을 뿐입니다.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주민들, 16 우리 임금들과 우리 고관들과 우리 사제들, 우리 예언자들과 우리 조상들에게도 부끄러움이 있을 뿐입니다.
17 우리는 주님 앞에서 죄를 짓고, 18 그분을 거역하였으며, 우리에게 내리신 주님의 명령에 따라 걸으라는 주 우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19 주님께서 우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신 날부터 이날까지 우리는 주 우리 하느님을 거역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을 예사로 여겼습니다. 20 주님께서 우리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시려고 우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시던 날, 당신 종 모세를 통하여 경고하신 재앙과 저주가 오늘 이처럼 우리에게 내렸습니다.
21 사실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보내 주신 예언자들의 온갖 말씀을 거슬러, 주 우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22 우리는 다른 신들을 섬기고 주 우리 하느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르며, 저마다 제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대로 살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코라진과 벳사이다 고을을 향해 불행하다고 선포하시며, 카파르나움도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라고 하신다. (루카 10,13-16)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3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14 그러니 심판 때에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15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16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바룩서 prophetia baruch

 예레미야 예언자의 말씀을 받아 쓰고 있는 바룩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제1독서(바룩1,15ㄴ~22)

  

히브리어 성경에 없는 바룩서는 칠십인역(lxx)그리스어 성경을 통해서 전해졌다.

히에로니무스(hieronymus)는 유다인들이 읽지도 않고,

가지고 있지도 않다는 이유에서 바룩서를 라틴어로 옮기지 않았다.


히브리어로 '바룩'은 '축복받은 자'라는 뜻이다.

제6장의 예레미야의 편지를 빼고는, 이 책의 저자로 알려진 바룩은

유다 왕궁의 서기관이며, 동시에 예례미야의 비서 겸 제자요 친구로서

예언자의 삶과 신탁을 후대에 전해 준 중요한 인물이다.


저자와 저작 연대와 집필 장소에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는 서문의 정보가

신빙성이 없어서 바룩서의 저자는 바룩의 이름을 빌려 쓴 차명 작품으로 본다.


작중연대는 바빌론 유배 기간(기원전 582년경)이지만,

주요 부분의 저작연대는 이르면 유배 이후 시대부터

늦으면 헬레니즘 시대(기원전 200-60년)까지 폭넓게 생각한다.


집필장소도, 바룩서의 원문이 히브리어로 쓰였고,

그 내용이 바빌론 포로들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공동체에 대한 권고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팔레스티나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바룩서는 다섯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1장 1~14절은 도입부로서 저자나 저술 장소와 시기, 저술 상황을 밝힌다.

둘째, 1장 15절~3장 8절로 유배자들의 기도이다.

세째, 3장 9절~4장 4절은 지혜와 율법에 관한 성찰이다.

네째, 4장 5절~5장 9절은 유배의 신학적 반성과 회복에 대한 희망이다.

다섯째, 6장의 예례미야 편지는 예례미야가 바빌론으로 유배살이를 하러

떠나는 포로들에게 써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


오늘 독서 1장 15ㄴ-22절은 바로 둘째 부분에 해당되는

산문으로 된 유배자들의 참회 기도이다.


저자는 여기서 신명기 신학을 전개한다.

곧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를 돌아보며 반성하고(1,15-2,12),

주님의 자비를 간절히 청한다(2,13-3,8).


과거에 대한 반성은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에 중점을 두고,

간절한 청원은 현재 바빌론 유배 상황에 촛점을 둔다.


이스라엘은 과거 이집트 탈출 시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반역을 일삼았다.

그 결과 모세를 통하여 주님께서 경고하신

재앙과 저주(신명기27-30장)가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재앙의 근원은 하느님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잘못이다.


하느님께서는 자애롭고 공정한 분이시다.

그분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해방시키시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그곳에서 하느님 대신 그 땅의 잡신들을 섬기고

그분의 뜻을 거역하며 살았다.


주님께서는 예언자들을 시켜 경고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그 경고를 듣지 않아 결국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였다.

 

바룩서 1장 19절에 언급되고 있는 "이스라엘은 젊은 시절부터 죄인이었고

불충했다.'는 표현은 예언 설교의 주제이며, 참회 기도의 요소이다

(에제16장,20장,23장; 느헤9장; 시편78장;시편106장 등).


애가에서처럼 제 자식의 살을 먹는 끔찍한 상황을 언급한다

(2,3; 신명28,53-54참조).


이스라엘은 이제 공정하신 하느님 앞에서 아무것도 요구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그분의 자애에 매달릴 뿐이다(3,1-2).


이같은 신명기적 신학사상과 관련하여

바룩서의 저자는 세 가지 점을 부각시킨다.


첫째, 유배의 진정한 의미이다.

유배는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이름과 계약을 다시 기억하고, 자신들의 죄악에서

유일한 하느님이신 주님께로 돌아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둘째, 토라(모세오경)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스라엘이 죽음의 길에 들어선 것은, 하느님께서 조상들에게 주신 지혜의 샘이요,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인 토라를 저버린 탓이다.

바룩서는 토라를 소유한 이는 다른 지혜가 필요없다고 말한다.


세째, 바룩서의 저자도 애가의 저자처럼 예루살렘을 여성으로 인격화한다.

다만 애가는 시온(예루살렘)을 딸로 표현한 데 반해, 바룩은 홀어미를 표현한다.

이 홀어미는 모든 것을 빼앗기고, 심지어 자식들마저 낯선 땅으로 떠나 보내고,

지금 큰 슬픔에 잠겨 있는데, 바룩서 저자는 하느님께서 그들을 낯선 땅에서 돌려보내시리라고, 절망에 빠진 홀어미를 위로할 뿐만 아니라 그를 들어 올리시고,

정의와 평화와 거룩함의 새로운 소명을 주실 것이라 선언한다(5,3-5).


"주 우리 하느님께는 의로움이 있지만, 우리 얼굴에는

오늘 이처럼 부끄러움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죄를 짓고, 그 분을 거역했으며,

우리에게 내리신 주님의 명령에 따라 걸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주 우리 하느님을 거역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을 예사로 여겼습니다.


당신 종 모세를 통하여 경고하신 재앙과 저주가

오늘 이처럼 우리에게 내렸습니다.


우리에게 보내주신 예언자들의 온갖 말씀을 거슬러~

저마다 제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대로 살아왔습니다."

(바룩 1,15ㄴ-22참조)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복음(루카10, 13~16)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심판 때에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13~14)

 

'코라진'(chorazin)'나무가 많은 곳'이란 뜻으로 오늘날 발견되는 유적에 의하면

당시에 상당히 중요한 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코라진'은 예수님의 초기 활동 지역이었던 '카파르나움'

(capernaum)에서 약 3km 이내에 인접한 도시였다.

 

현재는 '텔 흄'(tel hum)으로부터 동부쪽으로 5km정도 거리에 있는

'케라제'(kerazeh)일 것으로 추측한다.

 

또한 '벳사이다'(bethsaida)'어획 장소'(고기잡는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갈릴리 호수 동북쪽 연안에 위치한 조용한 성읍이었다.

원래 명칭은 '벳사이다 율리아스'(bethsaida julias)로서, 헤로데 필리보 임금이

건설하여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스를 기념하는 뜻에서 그렇게 붙여졌다.

 

이곳은 시몬 베드로, 안드레아, 필리보의 고향이기도 했다(요한1,44; 12,21).

특히 벳사이다는 예수님께서 눈먼 소경의 눈을 뜨게 하였던 곳이었다(마르8,22).

 

하지만 루카 복음에 있어서 예수님께서 벳사이다에게 불행 선언을 하신

가장 큰 이유의 배경에는 루카 복음 9장 10~17절의 기사가 자리잡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거기에서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해 주시며 필요한 이들에게는

병을 고쳐 주셨으며(루카9,11), 또한 황량한 빈 들에서 먹을 것이 없는 군중들에게

'오병이어'로 남자 장정만도 오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먹이시는 전대미문의

놀라운 기적을 베푸셨다(루카9,13~17).

 

이것을 볼 때, 갈릴리 지방의 주요 도시였던 코라진과 벳사이다는 예수님께서

많은 권능과 기적을 베푸신 활동의 주요 무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그곳 사람들은 믿음에는 보잘 것 없어 예수님의 복음을

수용하지 못했던 것이다.

 

'불행하여라, 너'에 해당하는 '우아이 소이'(uai soi; woe to you)에서

'우아이'(uai)엄숙한 경고고통, 분노 그리고 동정심 내지 연민

감정이 서려 있는 탄식을 표현하는 의성적 감탄사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불행을 선포하신 것이 단순히 심판과

보복만의 선언이 아니고, 불신앙에 대한 책망 속에는 그들을 향한

동정과 연민의 안타까운 심정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한편, 고대 페니키아의 도시였던 티로시돈은 당시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다.

 

이곳은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갈릴리 지방과 인접해 있어서

예수님께서 이곳을 방문하신 적이 있었는데(마태15,21; 마르7,24.31),

예수님께서 이 도시들을 언급하신 것은 코라진과 벳사이다의

완고하고 사악함을 더 구체적으로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구약적인 배경에서 '티로와 시돈'하느님의 심판 선고를 받은

사악한 이방 도시였다(이사23장; 에제26~28장; 요엘4,4~8).

 

'티로와 시돈'은 갈릴리 북방에 있는 페니키아의 항구 도시로서

'티로'는 b.c.2750 년경에, 그리고 '시돈'은 b.c. 1400년 이전에 건설되었다.

 

매우 오랜 역사를 지닌 이 두 도시는 번영과 쾌락과 이교도의 도시로서 유명하며,

하느님을 거역하고 하느님의 백성을 억압한 결과(아모1,9; 요엘 4,4~6)

하느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았다(이사23장; 에제26~28장) 

 

그런데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티로와 시돈'보다 갈릴리의 도시들이

더 사악하고 완고한 곳이라고 선언하시고 있는 것이다.

 

'티로'(tyro)'바위'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티로'라는 지명을 거론하시면서 '코라진과 벳사이다' 사람들이

바위보다도 더 마음이 굳어지고 사악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마치 비가 와도 조금도 물이 스며들지 않는 바위처럼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자루옷'으로 번역된 '삭코'(sakko; sackcloth)

낙타의 짧은 털과 같은 거친 직물로 만든 옷이며, 흔히 슬픔과

탄식을 표현할 때 맨 살 위에 바로 입었다(2사무3,31; 1열왕21,27).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서적인 회한(悔恨)을 표현하기 위해

'재'(먼지; ash)를 머리 위에 끼얹거나(애가2,10), 잿더미 위에 앉거나(요나3,6),

재 위에 드러 눕기도 하고(에스테르4,3), 그 위에 뒹굴기도 하였다(미카1,10).

 

이렇게 구약에서 회개의 행위를 표현할 때 관용적으로 쓰던 표현을 사용해서

이방인들 '티로와 시돈' 사람들보다도 더 완고하고 사악한

'코라진과 벳사이다' 사람들의 상태를 효과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제 루카 복음 10장 14절에서 '심판 때에'에 해당하는 '엔 테 크리세이'

(en te krisei; at the judgment)라는 말로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심판관으로 재림하셔서(사도17,31; 2베드2,9) 죄악에 대하여 엄격히 심판하시지만,

허락되었던 특혜와 특권을 감안하셔서 더 많이 받은 그 책임을 저버린 자들에게

더 큰 심판을 하신다는 것을 드러내신다.

 

이것은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12,48ㄴ)는 영적 원리에 의한 것이다.

 

성경 속에 나오는 도시는 나 자신과 내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에 적용하면 된다.

 

인간이 회개할 때까지 끝까지 참고 기다리시며 인간의 자유 의지를

존중해 주시는 인격적인 주님 대전에 언제까지 회개하지 않고

고집을 부릴 수 있겠는지에 대해 깊이 성찰해야 한다.

 

동시에 더 많은 은총과 현세적 축복과 영적 혜택을 입은 사람이

그것을 거부했을 때에는 더 큰 내세의 심판과 형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에 대해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12,48ㄴ)의 영적 원리에 의한 것이다.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심판 때에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루카 10,13-14).”



이 말씀에서 코라진과 벳사이다는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들을 보았으면서도


믿지 않고 회개하지도 않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여기서 ‘기적들’은 넓은 뜻으로 ‘하느님의 은총’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코라진과 벳사이다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 누렸으면서도


믿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는 사람들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이것은 그대로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에게도 적용됩니다.


신앙인들은 비신자들보다 더 많은 은총을 누리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만일에 신앙인답게 살지 않고, 비신자들과 다르지 않게 산다면,


심판 때에 비신자들보다 더 엄한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7-48).”


(십계명을 알면서도 죄를 지은 사람은 모르고 죄를 지은 사람보다


더 엄한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십계명을 몰랐다고 해도 죄는 죄이고, 죄에 따라서 벌을 받겠지만,


몰랐던 부분에 대해서는 정상참작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티로와 시돈은 예수님의 기적들을 체험할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


또는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을 뜻합니다.


(복음을 전해 듣고서도 거부한 사람들이 아니라,


들을 기회 자체가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누구나 다 죄라고 알고 있는 그런 죄를 지은 것에 대해서는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을 몰라도, 또 십계명을 몰라도,


누구나 다 살인죄가 큰 죄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살인죄를 지은 사람은 심판 때에 그 죄에 대해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티로와 시돈을 언급하신 것은 그들을 칭찬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그들의 죄가 코라진과 벳사이다보다 작다는 뜻도 아닙니다.


이미 하느님을 알고 있고, 믿고 있으면서도,


또 예수님의 복음을 들었고, 많은 은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살지 않는 사람들의 죄가 크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티로와 시돈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루카 10,15).”



카파르나움은 예수님의 활동 중심지였기 때문에


다른 마을보다 더 많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더 많이 예수님의 기적들을 목격했습니다.


따라서 카파르나움은 자만심에 빠져 있는 사람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남들보다 더 예수님과 가까운 사이라고 잘난 체 하는 사람들,


또는 남들보다 더 충실한 신앙인이라고 자만하는 사람들...)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라는 말씀의 뜻은,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이고,


사람들의 ‘자만심’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는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입니다.



이 말씀에서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집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하고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루카 13,25-27).”


주님 앞에서 먹고 마실 기회가 많았다고 해도,


또 주님께서 길거리에서 가르치시는 것을 많이 보았다고 해도,


그것을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에 겉으로 보이는 종교 활동은 열심히 하고, 많이 하지만,


내적인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안 한 것입니다.


기도회에 열심히 참석하는 것과 실제로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은 다릅니다.


미사 전례를 구경하는 것과 미사에 참례하는 것은 다릅니다.


만일에 성당에서 예수님을 만나지 않고 사람들과 어울리기만 했다면?


그러면 아무리 성당을 열심히 다녀도 그것은 신앙생활을 한 것이 아닙니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루카 10,16).”



이 말씀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활동할 수 있는 권한을


제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심판을 경고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이, 또는 교회가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사실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는 것이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보내신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은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것이고,


스스로 멸망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선택한 일이니 구원받지 못해도 누구를 원망할 수 없습니다.


(이 말씀에는, 제자들은, 또는 교회는 예수님의 복음만을,


또 하느님의 말씀만을 선포해야 한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복음과 하느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말을 하면 안 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오늘의 묵상

우리 인간이 하느님 앞에 서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 “우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있을 뿐입니다.” 인간들 사이에서는 자신의 잘못을 감추거나 합리화할 수 있지만, 내 양심의 거울을 비추고 계시는 하느님 앞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고, 온전히 자신의 부족한 면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한 자신의 허물을 그대로 고백하고 용서를 청할 수 있는 것이 하느님 백성이 가진 특권이고 기쁨입니다. 아무리 큰 죄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새로운 회개의 삶을 살아간다면, 주님께서는 늘 아무 조건 없이 용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눈앞에 금방 보이는 죄와 허물보다 더 큰 잘못은, 자신의 죄를 알아채지 못하거나, 알고서도 그것을 덮어 버리고 뉘우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을 기만하고 모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코라진과 벳사이다, 그리고 카파르나움도 바로 이러한 교만, 곧 하느님에 대한 교만의 죄 때문에 예수님께 심한 질책을 받고 있습니다. 반대로 예루살렘이 칼데아인들에게 점령당하여 불탄 지 5년이 지난 뒤 쓰인 바룩의 참회서는, 이스라엘의 죄를 고백하고 있지만, 가난한 마음으로 하느님 앞에 온전히 자신을 고백하는 신앙인의 참아름다움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세상이 보여 주는 성공과 화려함은 세상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는 진실함과 하늘 나라의 영광은, 비록 죄가 크고 허물이 많지만, 자신의 영혼을 솔직하게 들여다보고 겸손하게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소박한 영혼에게 돌아갑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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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7주간 월요일] 이웃 (루카 10,25-37)|17.10.09조회 65[연중 제26주간 토요일]일흔두 제자 (루카 10,17-24)17.10.07조회 299[연중 제26주간 금요일]회개 (루카 10,13-16)17.10.06조회 342[연중 제26주간 목요일] 파견 (루카 10,1-12)17.10.05조회 90[연중 제26주간 화요일]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 (루카 9,51-56)17.10.03조회 267[수호천사 기념일] 그들의 천사들이 (마태18,1-5.10)17.10.02조회 421[연중 제25주간 토요일]사람의 아들 (루카 9,43ㄴ-45)17.09.30조회 50[성 미카엘, 성 가브리엘, 성 라파엘 대천사 축일] (요한 1,47-51)17.09.29조회 203[연중 제25주간 목요일]이 사람은 누구인가?” (루카 9,7-9)17.09.28조회 285[연중 제25주간 수요일]열두 제자 파견(루카 9,1-6)17.09.26조회 316연중 제25주간 화요일] 참 가족 (루카 8,19-21)17.09.26조회 265[연중 제25주간 월요일] 등불 (루카 8,16-18)17.09.24조회 52[연중 제24주간 토요일]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루카 8,4-15)17.09.23조회 50[연중 제24주간 금요일] 일곱 마귀 (루카 8,1-3)17.09.22조회 101[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나를 따라라 (마태 9,9-13)17.09.21조회 299[연중 제24주간 수요일] 먹보요 술꾼 (루카 7,31-35)17.09.20조회 327[연중 제24주간 화요일]일어나라 (루카 7,11-17)17.09.19조회 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