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0주간 화요일]겨자씨 (루카 13,18-21)
바오로 사도는,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을 얻을 것이라고 한다. (로마 8,18-25)_
형제 여러분, 18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19 사실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20 피조물이 허무의 지배 아래 든 것은 자의가 아니라 그렇게 하신 분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21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22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23 그러나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
24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25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자라서 나무가 되는 겨자씨와 밀가루를 부풀어 오르게 하는 누룩에 비길 수 있다고 하신다. (루카 13,18-21)
그때에 18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 19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20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21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제1독서 (로마8,18-25)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합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8,18.22-25참조)
사도 바오로에게 고민은,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죄와 죽음에서 해방된
그리스도인들이 왜 삶의 고통과 덧없음을 체험하는가이다.
이에 대해 바오로는 종말론적 희망으로 대답을 한다.
지금은 아직 완성의 시간이 아니므로, 피조물도 인간도 모두 고통을 겪고 있다.
죄와 죽음의 효력이 아직도 세상을 지배하는 중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이 효력이 완전히 정지되고, 인간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자유와 영광을 누릴 날이 올 것이다(8,22-24).
"사람들 눈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들은 불멸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이 받는 고통은 후에 받을 축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이 당신 뜻에 맞는 사람들임을 인정하신 것이다.
도가니 속에서 금을 시험하듯이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을 번제물로 받아 들이셨다."(지혜3,4-6)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 같은
<대조의 비유>에도 잘 어울린다.
작은 것이 큰 것이 되는 것을 신약계에서는 <대조의 비유>라 한다.
하느님의 통치는 작게나마 이미 시작됐고, 장차 강력히 영향을 떨칠 것이며,
마침내 종말에 가서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뜻이다.
성서는 과학 교과서가 아니다.
통념에 따라 겨자씨를 가장 작은 씨앗이라 했을 뿐이지, 그보다 더 작은 씨앗이 많을 것이다.
겨자나무는 1.5 미터, 갈릴래아 호수 주변에는 3 미터까지 자란다.
씨앗이 무엇인가? 그것은 어떻게 싹트는가?
씨뿌리는 사람이 땅에다 온갖 씨앗을 뿌리면, 맨땅에 떨어진 마른 씨앗은 부패한다.
그 다음 하느님의 자비로운 보살핌과 전능의 힘이 그 큰 부패에서 그를 일으키시어
한 알맹이에서 여러 알맹이가 생기게 하면서 열매를 맺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희망에 의지하여, 당신의 약속에 충실하시고,
판단에서 의로우신 하느님께 우리 영혼이 매달려야만 한다.
우리는 어떤 시련과 고통속에서도 절망하거나 꿈을 접어서는 안된다.
작은 씨앗 안에서 큰 나무를 발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감각을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 안에 있는 잠재력이 금방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에 대한 우리의 지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통계가 알려 주는 숫자나 양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온전한 신앙은 어려운 박해 시기에 목숨을 바쳐 신앙을 지킨 순교자들의 피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을 교회의 역사가 증명합니다.
내가 이웃과 나누는 사랑도 말이나 선물이 주는 외적인 화려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어려운 시절 그 고통을 함께 나누는 내적인 교감에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겨자씨와 누룩에 비유하십니다.
지금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씨앗이지만, 하늘의 새들이 깃들만큼 크게 자랄 씨앗입니다.
보잘것없는 누룩이 밀가루 속에 들어가 온통 부풀어 오르는 그 가능성이 바로 하늘 나라의 출발입니다.
가능성은 희망입니다.
그리고 그 가능성과 희망은 외적인 조건이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늘 나라에 대한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이고, 이 희망은 나 자신을 온전히 투신하게 만들어 줍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의 희망으로 이미 시작되고, 우리의 투신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겨자씨, 누룩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루카 13,18-21)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는 우리에게 익숙한
"네 시작은 미약하였어도 네 나중 끝은 창대하리라(욥 8,7. 개역성경)."
라는 구절을 연상시키는데, 표현은 비슷하지만 뜻은 다릅니다.
(여기서 가톨릭 성경을 인용하지 않고 개신교 개역성경을 인용한 것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고,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가톨릭 성경은 "자네의 시작은 보잘것없었지만
자네의 앞날은 크게 번창할 것이네."로 번역했습니다.)
겨자씨의 비유는,
인간의 눈에는 하느님의 나라가 작고 보잘것없게 보여도
사실은 모든 민족을 품을 수 있는 나라라는 뜻이고,
누룩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의 강한 영향력으로 온 세상이 변화된다는 뜻입니다.
겨자씨나 누룩의 비유를
사도단이 처음에는 보잘것없었지만
나중에는 거대한 규모의 교회로 성장하게 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외형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기 때문에 아주 단순한 생각이고,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생각입니다.
그리고 흔히 사도들을 배운 것 없는 무식한 사람들,
사회적으로 보잘것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도 잘못된 생각입니다.
일부 그런 사도도 있었겠지만
사도들 가운데에는 율법학자 출신도 있었기 때문에
전체 사도를 다 무식하다고 할 수 없고,
사도들 가운데에는
당시의 대사제와 친분이 있었던 사람도 있었기 때문에(요한 18,15)
전체 사도가 다 사회적으로 보잘것없었던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경우에 어부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그를 무식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은데,
사도행전을 보면 그는 결코 무식하지 않습니다.
그가 성령을 받고 갑자기 유식해진 것도 아닙니다.
어부 출신이니까 무식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편견입니다.)
또 제자들의 수가 처음부터 적었던 것도 아닙니다.
처음에는 제자들이 군중을 이루었다고 할 정도로(루카 6,17) 많았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로 시작해야 한다.'가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는 씨를 심는 일과 같다.'입니다.
반드시 '아주 작은 씨'를 심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씨가 나중에 큰 나무로 자라게 되는가?' 라는 점입니다.
나중에 큰 나무로 자랄 수 있다면
지금 씨가 작든지 크든지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고,
씨를 심는 일 자체가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씨가 작은 것만 보지만 예수님은 큰 나무를 보십니다.
또 사람들은 누룩만 보지만 예수님은 빵을 보십니다.
사도들이 지금 못났든 잘났든 간에
예수님은 지금의 모습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위대한 선교사요 순교자가 되는 모습을 보십니다.
사무엘이 새로운 임금을 뽑으려고 '이사이' 라는 사람의 집에 갔을 때
이사이는 막내아들은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눈에는 막내아들은 너무 어린, 그냥 아이로만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 막내아들이 바로 '다윗'이었습니다(1사무 16,11-13).
사실 다윗은 어렸을 때부터
사자와 곰을 맨손으로 때려잡는 장사였는데(1사무 17,34-36),
가족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겨자씨의 비유로 돌아가서,
하느님께서는 모든 새들이 깃들일 수 있는 나무를 키우기 위해서
하나의 씨를 심으셨습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면 지금 그 나무는 얼마나 자랐을까?
아직은 완전히 자랐다고 할 수는 없고, 꾸준히 자라고 있는 과정입니다.
처음에는 박해를 받고 뿌리째 뽑힐지도 모르는 위기를 겪기도 했고,
중간에 병이 들어서 말라죽을 수도 있는 고비를 넘기기도 했지만,
그래도 성장을 멈추지 않고 계속 자라고 있는 중입니다.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각 개인의 신앙생활에 적용하면
지금의 믿음과 사랑과 희망과 기도와 실천들이
하나의 씨가 되고 누룩이 되어서 세상을 변화시키고
하느님 나라 건설에 중요한 이바지를 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잘났어도 겨자씨이고, 못났어도 겨자씨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