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9주간 금요일]하늘의 징조 (루카 12,54-59)

2017. 10. 27. 오전 5: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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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9주간 금요일]하늘의 징조 (루카 12,54-59)


바오로 사도는,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며,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고 한다. (로마 7,18-25ㄱ)
형제 여러분, 18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 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19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20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
21 여기에서 나는 법칙을 발견합니다.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22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23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24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고 하신다. (루카 12,54-59)
그때에 54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55 또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56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57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58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그러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 재판관은 너를 옥리에게 넘기고 옥리는 너를 감옥에 가둘 것이다.
59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사도 베드로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제1독서(로마서7,18~25ㄱ)

 

"형제 여러분,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 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18)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19)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20)  

 

로마서 7장 14~17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새롭게 거듭난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죄의 옛 습성에 젖어있는 인간의 실존적 모습을 토로했다.

 

이제 이어지는 로마서 7장 18~24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이 원하는 선을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는 자아의 모순된 상황을 직시하면서,

치열한 영적 싸움에서 항상 죄에 패하고 마는 스스로의 연약한 모습에 대한

내적 갈등을 깊이 탄식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 로마서 7장 18절은 선에 대한 간절한 바람은 있지만

실제로 바라는 선을 행할 수 없는 현실을 통하여 자신의 내면, 속,

곧 자기 육의 본성 속에는 선한 것이 전혀 없음을 인정하는 내용이 나온다.

 

여기서 '육','사르키'(sarki)의 원형 '사륵스'(sarx; flesh)는 로마서 7장 5절에 쓰인 용례와 같다.

인간의 육체 자체가 아니라 죄를 추구하고 행하는 타락한 본성을 말한다.

즉 윤리적으로 죄많은 인간의 본성, 죄에 의해 통제와 지휘를 받는 인간 본성을 말한다.

 

따라서 '육'이라고 표현되는 이와 같은 타락한 본성에 선이 머물 수 없으며,

그래서 육의 욕망을 따를 때 선을 행할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하다.

 

하느님의 거룩한 영으로서 새롭게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내주하시는

'성령'('프뉴마'; pneuma; 로마8,4)과 대조되는 개념을 말한다.

 

한편 사도 바오로는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이라는 표현으로써

자신 안에는 육으로 표현된 타락한 본성이 지향하는 것과 다른 원함이 있다고 말한다.

 

'원의'(원하는 것)의 주체는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다스리시는 자아이다.

여기서 '원의'로 번역된 '토 텔레인'(to thellein)'바라다','원하다','하고자 하다'는 의미를 지닌

'텔로'(thello)에 관사를 가진 현재 부정사로서 '계속해서 원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자신 안에 선을 행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자신이 바라는 그 선을 행하지 않는다는 점이 그를 고통스럽게 하였다.

그가 선한 것을 더 좋아하면서도  그것을 성취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직도 그 안에 그의 선택을 가로막는 그 무엇이 있다는 증거가 된다.

 

사도 바오로는 지금 자신이 선한 것을 기꺼이 행하려는 열망만 가지고 있을 뿐

그것을 실제로 행하는 과정에는 있지 못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본성은 근본적으로 악하며, 비록 성화(聖化) 가운데 있는 성도라고 하더라도

육의 욕망에 지배되어 온 타성으로 말미암아 선을 행함에 있어서는

의지적으로 나약한 모습을 띨 때가 많다는 것이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바라는 선은 행하지 못하고 오히려 바라지 않는 악을 행하는

모순을 로마서 7장 15절에 이어서 재차 토로하고 있다.

새롭게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모순된 행위에 대한

고민과 갈등이 그대로 드러나는 처절한 자기 고백이다.

 

성령으로 새롭게 거듭난 그의 본래의 의지는 선을 행하고 싶으나

새롭게 거듭난 이후에도 완전히 성화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여전히 남아 있는

타락한 본성에 이끌려 자신이 미워하고 싫어하는 죄를 계속 행하고 있었다.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마음의 바람과 실제로 자신에게서 나타나는 현실

사이의 괴리가 너무나 큼을 경험했던 것이다.

 

선을 원하고 악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성령으로 새롭게 거듭난 자아의 태도이다.

그러나 새롭게 거듭난 자라고 해서 타락한 인간 본성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사도 바오로는 그 육의 본성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원하지 않는 죄를

범하게 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악'으로 번역된 '카콘'(kakon)의 원형 '카코스'(kakos; the evil)

일반 그리스어에서 네 가지 의미를 나타내는데, 1)'무시해도 좋은', '부적당한'

2)'도덕적으로 나쁜','악한' 3) '연약한','가련한'4) '나쁜','해로운','불리한' 등이다.

그리스 사상에서 '악'이란 완전함이 결여된 것, 선의 결핍, 즉 불완전함으로 이해되었다.

 

그런데 사도 바오로에게 있어서 이러한 악이란 인간의 존재를 특징짓는 한 표현이다.

아담의 범죄 이후 타락한 모든  인간의 죄악된 본성은 행위로 나타나서

자신을 거룩하신 하느님과 분리시키고 심판 아래 있게 만든다.

 

인간은 비록 선을 바란다고 하더라도 연약한 육을 입고 이 세상에 살아가는 한

자신이 바라는 선 대신에 죄악된 본성이 바라는 악을 끊임없이 행함으로

생명이 아닌 죽음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자신의 힘으로 악을 정복하고자 하는 모든 희망은 좌절된다는 것이다.

 

'그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잡은 죄입니다'

 

이 구절은 보기에 따라서는 자신의 죄를 합리화시키며 죄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다소라도 덜고자 궁색하고 비겁한 변명을 늘어 놓는 것처럼 들릴 수 있지만

죄의 집요성과 우발적인 차원을 감안할 때 옳은 말인 것이다.

 

여기서 '아니라'로 번역된 부사 '우케티'(uketi; no more) '더 이상~아니'라는 뜻인데,

사도 바오로는 이 단어를 사용하여 선을 행하려는 성령으로 새로 거듭난 자신의 자아와

죄를 행하는 육의 욕망 사이의 이질성을 강조하였다.

 

사도 바오로는 성령을 따르지 않고 죄스런 타락한 본성을 따라 행할 때

악을 저지르게 된다는 것을 보다 적나라하게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다.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복음(루카12,54~59)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또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54ㄴ~57)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줄곧 말씀하시다가 이제는 그들과 더불어 군중들로 그 대상을

확대해서 팔레스티나의 지리적 조건에 따른 기후의 변화를 반영하여 말씀을 하신다. 

 

구름이 서쪽에서 일어나면 비가 오리라고 예측할 수 있었던 것은,

팔레스티나는 그 서쪽이 지중해와 접하고 있기 때문에

서쪽에서 오는 바람은 다습하게 되어 비를 뿌리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54절과 55절에서 '바람의 방향에 따른 준비'에 대한 말씀으로

예수님의 오심을 미리 준비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팔레스티나 남쪽에는 아라비아 사막이 있기 때문에

남쪽에서 바람이 불게 되면 사막의 뜨거운 바람을 몰고 오기 때문에 

팔레스티나는 몹시 더워지게 된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고 남풍이 불면 더울 것을 대비해서 미리 준비하였다.

 

이처럼 사람들은 천기를 분별하여 날씨에 대해서는 미리 대비할 줄 알았지만,

시대와 진리에 대한 분별에 있어서는 무관심하여 무지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그들의 영적 무지를 우회적으로 짚고 계신 것이다.

 

'위선자들아'

 

'위선자들'에 해당하는 '휘포크리타이'(hypokritai; hypocrites)

'휘포크리테스'(hypokrites)의 복수형이다.

'휘포크리테스'는 원래 '연기자' '무대 연출자'를 가리키는 말로서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 모습을 보이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위선'하늘과 땅의 기상은 분별한다고 하면서도

진정 알아야 할 이 시대의 다가올 심판은 깨닫지 못하는

실제적인 어리석음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여기서 '위선자들'이란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하느님의 뜻을 안다고 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이 시대'에 해당하는 '톤 카이론~투톤'(ton kairon~tuton; this time)

일차적으로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서 활동하던 시기'를 말한다.

 

왜냐하면, 루카 복음 12장 51~53절에서는 이미 예수님의 활동 시기로부터

'분열'을 가져다 주는 심판이 시작되었음을 말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 재림과 다가올 심판의

임박한 시기를 암시적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원문에서 '시대'에 해당하는 명사 '카이로스'(kairos; time)

일반적으로 시간의 순서를 가리키는 데도 사용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간의 순서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결정적인 시점'을 가리키기도 한다. 

 

'카이로스'사람의 운명과 관련해서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시점으로서

여기서는 '종말론적으로 임박한 하느님의 심판의 때'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이 시대'는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그 시대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다가올 심판을 준비해야 할 모든 시기'를 가리키는 것이다.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이 구절은 루카 복음 12장 58절과 관련해서 볼 때, 영원한 멸망에 빠지지 않고

자신을 구원하기 위하여 스스로 노력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으로서,

다가올 심판을 피하기 위하여 각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적하고 있다.

 

이것은 하느님 대전에 져야 할 개인의 책임은 각자 자기

스스로에게 있다는 '구원의 개별성'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오늘의 묵상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등 우리의 감각 기관을 통해서 세상을 파악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눈이나 귀를 통해 얻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그 이면에 더 깊은 배경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더 나아가 때로는 눈이나 귀가 우리를 속일 수도 있고, 반대로 우리가 온전히 우리의 선입견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착각하고 있음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사람들이 눈앞에 다가오는 하느님의 나라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십니다. 그들은 하느님 나라의 징표로 마치 불가사의한 기적과 같은 일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기적 가운데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지극히 일상적인 삶이 정상적으로 자리를 잡을 때 다가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대접받고 존중받는 세상, 저마다 열심히 일하면서 자신의 인격과 소명을 완성시킬 수 있는 세상, 사랑으로 서로의 부족한 면을 채워 주며 그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찾을 수 있는 소박한 세상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우리가 시대의 징표를 잘 읽어 내고 이를 복음의 빛으로 해석하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점점 발전해 가는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만들려면, 우리 세대가 가진 과제가 무엇인지를 알아내고 노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의 표징은 멀리 있지 않고 바로 우리의 오늘 안에 있습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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