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0주간 월요일]안식일 (루카 13,10-17)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며, 성령의 힘으로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친다고 한다. (로마 8,12-17)
12 형제 여러분, 우리는 육에 따라 살도록 육에 빚을 진 사람이 아닙니다. 13 여러분이 육에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14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15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16 그리고 이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17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셨다고 분개하는 군중에게,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며, 위선자들이라고 질책하신다. (루카 13,10-17)
10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어떤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다. 11 마침 그곳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가 있었다. 그는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가 없었다.
12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를 보시고 가까이 부르시어,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하시고, 13 그 여자에게 손을 얹으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즉시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14 그런데 회당장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분개하여 군중에게 말하였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15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16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17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그분의 적대자들은 모두 망신을 당하였다. 그러나 군중은 모두 그분께서 하신 그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하였다.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제1독서 (로마8,12-17)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마르14,36)
<진정 여러분이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그리고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갈라4,6)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는 것입니다>(로마8,15)
어째서 그리스어를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때까지 그들이 새겨듣는 복음서와 바올의 서간안에서
여전히 예수님의 모국어인 아람어 표현 '압바' 호칭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이 'Abba'호칭을 특별히 예수님께서 몸소 사용하신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유다인들의 기도문에서는, 당시 아람어를 쓰는 백성들 사이에서 아이들이
그들의 아버지를, 신뢰를 갖고 친숙하게 부르는 호칭, 오늘날 우리가 '사랑하는 아빠'라고
번역할 수 있는 'Abba'라는 호칭을 감히 사용하지 못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의 대화에서 당시의 언어 용법을 거슬러 가족들안에서
관습적으로 사용하였던 '압바', 즉 '사랑하는 아빠'를 사용하였다.
그렇다면, 루카복음이 전해 주는 '주님의 기도'에서 '아버지'(Pater)라는
그리스어의 단순한 호칭은 일종의 번역으로, 아람어의 가족적 신뢰를 드러내는
'Abba'라는 호칭의 의미를 가장 가깝게 드러내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가족적이고 신뢰성을 드러내는 호칭임에도 불구하고,
성부 하느님께 하느님의 위대함과 그 거룩함의 지위를 드러내는 예수님께서 칭하신 '압바'라는 호칭은,
그 거룩함을 모르는 사람이 부른다 하더라도, 그 의미가 감소되는 것이 아니다.
올리브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는 꾸준히 아빠에게 호소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데,
그것은 하느님께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예수님이 이미 믿고, 또 알고 있음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갈라디아 4,6과 로마 8,15에서도 아빠앞에서 자식의 특권(신뢰)를 강하게 보여주는 것이지,
그들간의 어떤 특별한 사랑만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이 지상에서의 아버지 상(像)이 예수님이 하느님과 맺으신 결속 관계를 위한 상징으로 비쳐졌다면,
우리는 아버지가 곧 주인이기도 한 팔레스타인 문화권의 가부장적 대가족 제도도 유념해야 하는 것이다.
창세기 9장에 노아와 그 아들들 (셈, 함, 야펫)의 이야기에서,
아버지는 자신의 치부를 덮어 준 셈과 야펫을 축복하고,
자신에게 잘못을 저지른 둘째 아들 함을 저주하며,
형 셈과 동생 야펫의 종이 되게 한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부르신 '압바' 호칭은 상징이 아니라,
상호 신뢰와 존중이 깔려있는,
피와 생명과 인격이 오고 가는 결속 관계를 드러낸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를 전수받은 사람들,
마르코 3,33 이하에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인 '형제들', '자매들',
예수님의 말씀안에서 종말의 때에 드러나실 하느님께 마음을 쏟는 자들,
예수님을 중심으로 작은 형태의 '추종하는 이들'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예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며' 그분에게 '신앙을 고백하는' 이들을 포괄하는,
보다 확장된 형태의 무리가 다 같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Abba 호칭은 그것을 부르는 사람들의 공동체 형성과 관련된 호칭이고,
교회를 구성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Abba를 부르는 사람들이 주님의 기도에서 '저희에게' '저희의' 라는 표현을 쓸때,
우리는 수평적으로 하느님을 한 아빠, 아버지로 고백하고 섬기는 한 자녀들이고,
한 가족이고, 한 공동체라는 말이다.
쉽게 이야기 하자.
우리 가족이 전부 믿음을 가진 가족이라면, 할아버지,할머니, 부모, 형제, 자매,
조카, 손자도 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른다.
나의 부모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으니, 자식인 나는 '하느님 할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는가?
성경을 믿고, 주님의 기도를 아는 타 종파 신자들도 똑같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른다.
그러면, 수평적으로는 우리 모두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더군다나,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은,
아버지의 신뢰를 받는 자녀로서의 특권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고,
자녀들은 아버지의 상속자이니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상속자임을 드러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아버지의 영광, 축복의 상속자인데,
그 영광과 축복을 누리려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로마8,17참조)
사도 바오로는 갈라디아 4,4-7과 로마 8,14-17 에서, 우리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고,
또 그렇게 이해할 수 있는 능력과 자유는, 우리가 받은 성령에게서 온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나에게서 성부 하느님은 진짜 아버지이신가? 어떤 마음으로 '아빠, 아버지' 호칭을 부르는가?
우리가 가정이나 직장, 본당이나 교구,수도 공동체에서 체험된, 좋지 않은 아버지 상이나 상처때문에,
하느님 아버지를 부를 때마다 어려움은 없는가?
하느님을 '아빠,아버지'라고 부르는 우리들은 같은 믿음의 자녀로서,
수평적으로 가족적 사랑이나 우애, 형제애를 서로 느끼는가?
서로 원수처럼 살고 미워하고 싫어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한 아버지라 부르는 같은 자녀라고 볼 수 있는가?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복음(루카13,10~17)
"마침 그곳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가 있었다.
그는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가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를 보시고 가까이 부르시어,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하시고, 그 여자에게 손을 얹으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즉시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하였다."(11~13)
루카 복음 13장 10절에서부터 17절까지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마귀가 들려
허리가 굽어진 병에 걸린 한 여자를 고쳐줌으로써 말미암아 야기된
안식일에 관한 논쟁이 소개되고 있다.
13장 11절에 '마침'으로 번역된 '카이 이두'(kai idu; and behold)에서
'이두'(idu; behold)라는 표현은 뒤따라 나오는 말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바로 '여자'라고 번역된 '귀네'(gyne; a woman)가 강조되는 것은
사탄한테 묶여(16절) 병중에서 고생하고 있는 이 여자의 불행한 처지를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또한 이것을 드러냄으로써 이후에 나타나는 회당장과의 안식일 논쟁에서(14~17절)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 불행한 이 여자에게 진정한 자유를 가져다주는
정당한 행위임을 독자들에게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여기서 '시달리는'으로 번역된 '아스테네이아'(astheneia; crippled; of infirmity)는
'병', '연약함'을 가리키는 '아스테네이아'(astheneia)의 소유격이다.
이 소유격은 '결과'를 가리키는 용법으로 사용되었는데, '마귀'를 가리키는
'프뉴마'(pneuma; a spirit)와 연관시켜 볼 때, 이 병은 마귀로
말미암은 것을 표현해 주고 있다.
16절에서는 이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사탄이 ~ 묶어 놓았는데'로 묘사해 주고 있다.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가 없었다'
'결과'를 가리키는 접속사 '카이'(kai)로 시작된 본문은 그 여자의
비정상적인 상태에 대한 여러 묘사가 모두 마귀들림으로
나타난 결과들임을 보여 주고 있다.
즉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가 없는 상태에 이른 것은
마귀들림(부마)으로 나타난 결과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 여자의 굽어진 상태를 표현하는 '슁큅투사'(syngkyptusa; bowed together;
bent over)의 기본형 '슁큅토'(syngkypto)는 '함께'라는 뜻의 전치사 '쉰'(syn)과
'몸을 구푸리다', '몸을 굽히다'는 뜻의 '큅토'(kypto)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몸을 완전히 구푸리다'는 뜻이다.
이 병은 아마도 척추염이나 다른 원인으로 말미암아 등뼈가 고부라져
허리를 펼 수 없는 곱사병을 말하는 것 같다.
한편, 원문에서는 '슁큅투사'(syngkyptusa) 앞에 과거에 계속적 사실을 가리키는
미완료 과거형인 '엔'(en; was)를 사용하여, 그 여자의 이러한 상태가
과거로부터 18년 동안이나 계속 되었음을 표현해 주고 있다.
또한 본절의 후반부에 '조금도 ~없는'이라는 관용구인 '에이스 토 판텔레스'
(eis to panteles; in no wise; (not) at all)를 첨가해서, 이 여자가
가지고 있는 병의 증세가 지속적이면서도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매우 심각한 것이었다는 것을 부각시켜 준다.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예수님께서는 병을 여자나 주변 사람들의 아무런 요청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여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능동적으로 병을 고쳐주시는 자비를 베푸셨다.
여기서 '풀려났다'에 해당하는 '아폴렐뤼사이'(apolelysai; you are loosed;
you are set free)는 '아폴뤼오'(apolyo) 동사의 완료형이다.
이 동사가 완료형으로 사용된 것은 그 여자가 18년 동안이나 계속해서
몸이 굽어진 상태를 가리키고 있는 11절의 미완료 과거 시제 '엔'(en; was)
동사와 대조를 이룬다.
말하자면, 이 여자가 예수님의 이러한 선포로 말미암아 18년 동안이나
계속된 마귀와 질병의 속박(병마)에서 완전한 자유를 맛본 것을
나타내기 위해 완료형 동사가 쓰인 것이다.
그리고 특히 예수님께서 이 여자의 치유를 가리킬 때 '치유'의 의미가 아닌
'자유'의 의미를 갖고 있는 '아폴뤼오'(apolyo)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아폴뤼오'(apolyo)는 '~로부터'라는 뜻의 전치사 '아포'(apo; from)와
'풀다'는 뜻의 동사 '뤼오'(lyo)가 결합된 합성어로서 '놓아주다', '해방하다'는 뜻이다.
이것은 마치 소나 나귀가 마구에서 자유를 얻는 것처럼, 마귀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주고 있는 표현이다.
12절은 14~16절에 나오는 예수님과 회당장과의 안식일 논쟁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참된 안식이란 마귀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것임을 드러내 주고 있다.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여기서 '찬양하였다'에 해당하는 '에독사젠'(edoksazen; glorified;
praised)은 '영광을 돌리다', '찬양하다'는 뜻의 '독사조'(doksazo) 동사의
미완료 과거형으로서, '그녀가 계속해서 영광을 돌리고 있었다'
또는 '찬미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원문은 이 동사가 계속적 사실을 가리키는 미완료 과거형으로 사용되어
'계속적으로 굽어져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11절의 '엔'(en; was)동사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계속적 고통'에서 '계속적 찬양'으로
상황이 완전히 바뀐 것을 묘사해 주면서 참된 안식이 무엇인지를
가리켜 주고 있다.
<등 굽은 여자를 안식일에 고쳐 주시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어떤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다.
마침 그곳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가 있었다.
그는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가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를 보시고 가까이 부르시어,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하시고, 그 여자에게 손을 얹으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즉시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루카 13,10-13).”
이 이야기에는 여자가 예수님께 치유를 간청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청하지 않았는데도 먼저 그 여자를 보셨고, 고쳐 주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자비’를 나타냅니다.
이 일에서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라는 말씀이 연상됩니다.
하느님(예수님)은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시고,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하느님(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것을 잘 받기 위해서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나의 상징으로 생각한다면,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는 구원받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인류를 상징하는 것으로,
그리고 예수님께서 여자를 고쳐 주신 일은
예수님 덕분에 우리가 해방과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모든 억압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구원자이신 분입니다.
“그런데 회당장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분개하여 군중에게 말하였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루카 13,14)”
회당장은 여자가 얻은 해방과 구원은 보지 않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만 보았고,
그날이 안식일이라는 것만 생각했습니다.
당시에 바리사이들도 목숨이 위험한 응급환자라면
안식일에도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응급환자가 아니라면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지금 이 이야기에 나오는 여자는 응급환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회당장은 치료를 하루 뒤로 미루어도 된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라는 회당장의 말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을 ‘생계를 위한 노동’으로 생각했음을 나타냅니다.
즉 이 말은, 환자가 아니라 의사를 겨냥해서 하는 말이고,
예수님께서 치료비를 받기 위해서 여자를 고쳐 주신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정말로 예수님께서 치료비를 받으려고 여자를 고쳐 주셨다면,
회당장이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닌 것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생계를 위한 노동’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주신 ‘하느님의 일’입니다.
사랑과 자비는 안식일보다 위에 있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 2,27).”
사랑 실천은 언제나 항상 해야 하는 일인데,
안식일에는 특히 더 많이 사랑 실천을 해야 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그분의 적대자들은 모두 망신을 당하였다.
그러나 군중은 모두 그분께서 하신 그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하였다(루카 13,15-17).”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도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면서도,
소나 나귀보다 더 귀한 사람을 해방시키는 일을 반대하고 있으니,
그들은 위선자들입니다.
(소와 나귀는 그들의 재산이지만, 그 여자는 그들과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을 지키고 관리하기 위해서는 안식일 규정을 안 지키면서,
자기들의 이익과 상관없는 일에 대해서는
안식일 규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그들은 위선자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 회당장을, 또는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신 것은,
그들을 망신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
즉 회개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이야기에 나오는 여자는 병마에 시달리는 병자였지만,
회당장과 바리사이들은 율법주의에 사로잡힌 자들,
즉 영혼이 병들어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도 참된 해방을 얻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꾸짖으신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사실 몸의 억압보다 영혼의 억압이 더 큰 억압입니다.
몸의 해방보다 영혼의 해방이 더 중요하고, 더 필요합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누군가를 꾸짖으시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그 말씀들은 모두 사람들을 회개시키기 위한 ‘사랑의 훈계’입니다.
좋은 예가 베드로 사도를 꾸짖으실 때 하신 말씀입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이 말씀은 베드로 사도에게 화가 나서 하신 말씀도 아니고,
그가 미워서 하신 말씀도 아니고, 그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가 ‘하느님의 일’만 생각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에
그에게 ‘사랑의 훈계’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신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바라셨기 때문에 그들을 꾸짖으신 것입니다.
잠언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들아, 주님의 교훈을 물리치지 말고, 그분의 훈계를 언짢게 여기지 마라.
아버지가 아끼는 아들을 꾸짖듯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꾸짖으신다(잠언 3,11-12).”
사랑이 없다면 꾸지람도 없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