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21일 화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누가 내 어머니 (마태 12,46-50)
즈카르야 예언자는, “딸 시온아,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다시 선택하시리라고 한다. (즈카 2,14-17)
14 “딸 시온아,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15 그날에 많은 민족이 주님과 결합하여,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그때에 너는 만군의 주님께서 나를 너에게 보내셨음을 알게 되리라. 16 주님께서는 이 거룩한 땅에서 유다를 당신 몫으로 삼으시고, 예루살렘을 다시 선택하시리라. 17 모든 인간은 주님 앞에서 조용히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의 거룩한 처소에서 일어나셨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고 하시며,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하신다. (마태 12,46-50)
그때에 46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 47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48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49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50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제1독서 (즈카2,14-17)
"딸 시온아,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10)
즈카리야서 2장 10절 이하 13절에서는 주님께서 선민과 함께 할 것과 선민과 예루살렘의 회복 및 주님께서 임재할 것이 예언된다.
그 가운데 서두에 나오는 10절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징계가 다 끝나고, 그들과 하느님이 원래 처음 맺었던 계약의 상태로 되돌아 갈 것을 암시하는 예언이다.
여기서 '시온의 딸'로 번역된 '치욘 빠트'(tsiyon bath; o daughter of zion)는 구약의 관점에서는 예루살렘 성읍의 거주민들을 지칭하고, 신약의 관점에서는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한다.
많은 주석가들은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전해 준 메시지 안에(루카 ,28.30.31~33.49.54~55) 선민이 바빌론 유배로부터 귀환한 후에 예언자 즈카리야(즈카 2,14-15; 9,9-10), 스바니아(스바 3,14-17), 요엘(요엘 2,21-27)이 '시온의 딸' 즉 예루살렘과 온 이스라엘에게 선포한 신탁이 반영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런 사건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도시('시온의 딸'이라 불리우는 도시)는 약속의 땅에 거주하는 온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열정적으로 기뻐하라는 초대를 받는다.
그토록 기뻐해야 하는 동기는 유배의 어두운 시기 가 지난 후, 하느님께서 재건된 성전 안, 성도 한 가운데에 거처하러 다시 오신다는 사실에 있다.
두려움에 떨 이유가 전혀 없다. 실제로 주님께서 그들의 왕이고 구세주이시기 때문이다.
루카 복음사가는 실제로 마리아를 '시온의 딸'로 묘사하려 하였다. 복음사가의 눈에 동정녀 마리아는 자신의 인격안에 예루살렘과 온 이스라엘 백성을 종합한다.
온 이스라엘이 동정녀 마리아안에 총괄된다. 동정녀 마리아야말로 이스라엘을 가장 훌륭하게 나타낸다.
나자렛의 마리아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하신 약속들을 앞서 실현하셨다(루카1,49ㄱ.54-55참조).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이유 접속사 '키'(ki; for)로 시작하는 본문은 왜 시온의 딸이 노래하고 기뻐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 준다.
새 성경에 단순히 '정녕 내가'로 번역된 '힌니'(hinni)는 문자적으로 '보라 내가'라는 의미이며, 이 예언을 읽는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며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한 표현이다.
장차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들에게 오셔서 그들 가운데에 머무를 것이다.
'머무르리라'에 해당하는 '웨샤카느티'(weshakanthi; i will dwell)의 원형 '샤칸'(shakan)은 어원상 여행자가 장막을 쳐서 머무는 행위를 의미하는 단어이다(창세9,27; 탈출25,8; 여호18,1).
본문에서 이 단어는 단지 얼마 동안 임시적으로 머문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장막을 치시고,그들과 함께 거처할 것임을 나타낸다.
희랍어 구약 성경 번역본인 70인역(lxx)에서 이 단어는 '카타스케노소'(kataskenoso)로 번역되었는데, 이것은 장차 종말의 날에 도래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주 하느님께서 친히 장막을 치시고, 그의 구원받은 백성들과 거처하실 것을 예언하는 묵시록 21장 3절의 내용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본문의 예언이 종말론적 성취를 지향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때에 나는 어좌에서 울려오는 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묵시21,3)
한편 하느님께서 당신백성과 함께 거처하신다는 표현은 애초에 히브리 민족을 계약의 백성으로 삼으실 때 베푸셨던 계약의 본질적인 내용이기도 하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셔서 그들과 함께 거처하시고,그들은 주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 계약의 기본 내용이었다(탈출6,7; 레위 26,12).
하느님께서는 당신 계약의 효력을 결코 중단하거나 계약을 폐기하시는 법이 없다.
비록 바빌론에 의한 멸망과 성전의 파괴로 인해 그 계약의 중단되는 듯이 보였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다시 고향의 땅으로 돌아오게 하셨고,성전 역시 재건하게 하셨다.
그리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을 근거로 세워진 교회를 통해 계약의 백성의 흐름이 계속 이어지게 하셨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당신 계약의 백성들 가운데에 친히 임재하셔서 그들 가운데 장막을 치시고, 그들과 함께 머무를 것이다. 이러한 계약은 궁극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전한 성취를 보게 될 것이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이다. 성모님께서 원죄없이 잉태되실 때 가득했던 그 성령의 감도로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원래 자식이 없었는데,자식을 생명의 절대권을 가지신 하느님께서 점지해 주시면, 다시 바치겠다는 약속을 성모님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가 지키신 것이다.
세살이 되던 해에 성모님을 성전에 바쳤는데, 성모님께서는 그날 주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다시 자발적으로 되돌려 드리며 평생 동정 서약을 하신 것이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복음 (마태12,46-50)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50)
여기서 '실행하는 사람이'로 번역된 '포이에세 ~ 아우토스'(poiese ~autos; dose~the same)는 '실행하면, 바로 그 사람'이라는 의미로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바로 그 당사자가 예수님의 영적 가족이라는 사실을 강조해 주고 있다.
'포이에세'(poiese)의 원형 '포이에오'(poieo)는 어떠한 일을 적극적으로 행하거나 존재하는 물질을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인데, 여기서는 '내 아버지의 뜻'을 목적어로 취하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행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또한 여기서 '포이에오'(poieo)는 '~하는 자는 누구든지'를 뜻하는 '호스티스 안'(hostis an; whoever)과 함께 가정법으로 쓰여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만 하면 누구든지'라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영적 가족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바로 그 조건이 '하느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행하는 것'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하지만, 본 문맥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실행한 것은 그저 예수님의 말씀을 긍정하면서 묵묵히 듣고 있는 것뿐이었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행하는 것에는 눈에 보이는 행위 뿐만 아니라, 눈에 띄지 않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받아들이며 결단을 내리는 마음을 가지는 것까지도 포함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로마8,14~16)
<예수님의 참 가족>
“예수님께서 아직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46-50)”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와 가족이 찾아온 일을 계기로 삼아서
당신의 ‘참 가족’에 대해서 가르쳐 주십니다.
여기서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라는 말씀은,
“‘어떠한 사람이’ 나의 참 가족이냐?” 라는 질문이기도 하고,
“‘어떻게 해야’ 나의 참 가족이 될 수 있겠느냐?” 라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라는 말씀은,
“나의 어머니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뜻을 실행해야 나의 참 가족이 될 수 있다.”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되는 것은 곧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일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곧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되는 일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되는 방법은 곧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하느님 뜻의 실행’입니다.
야고보서 저자는 실천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합니다(야고 2,17).
‘죽은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실천 없는 믿음이란, 말로만 믿는다고 말하면서
삶으로는 신앙인답게 살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 ‘죽은 믿음’은 속에 생명력이 들어 있지 않은 씨앗과 같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은 씨앗이지만, 생명력이 없기 때문에 싹을 내지 못합니다.
싹을 내지 못하는 씨앗은 사이비 씨앗, 또는 가짜 씨앗이고 모조품입니다.
실천 없는 믿음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라는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에
생명력이 들어 있지 않은 씨앗처럼 사이비 믿음이고, 가짜 믿음입니다.
가짜 믿음으로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늘나라는 진짜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한다는 것인가?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한 14,15).”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은 ‘사랑의 계명’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이 말씀의 ‘제자’를 ‘가족’으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은 우리가 예수님의 참 가족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만일에 사랑이 없다면, 예수님의 가족이라는 것을 증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사랑은 신앙생활의 완성입니다.”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는데,
반대로 표현하면, “사랑이 없으면 신앙생활이 완성되지 못한다.”,
즉 “사랑이 없으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가 됩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될 수 없고,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요한1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녀도 사랑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실천하면,
그로써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1요한 5,1-3).”
‘믿음’과 ‘사랑’은 하나이고, 우리는 ‘믿음’과 ‘사랑’으로 한 가족이 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과 계명을 실행하는 것은 믿기 때문이고,
가족으로서 사랑하기 때문인데, 사랑해서 하는 일이니 힘겨운 일이 아닙니다.
(만일에 사랑 없이 의무감으로만 실천한다면,
몹시 힘들고 괴로운 강제 노동이 될 것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 뜻의 실행’에서도,
또 사랑 실천에서도 신앙인의 모범이 되시는 분입니다.
엘리사벳은 성모님을 만났을 때,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이라고 인사를 했는데(루카 1,45),
이 말은 성모님의 믿음뿐만 아니라, ‘하느님 뜻의 실행’도 찬양하는 말이고,
그 ‘실행’을 증언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엘리사벳은 성모님이 예수님의 탄생 예고를 믿음으로 응답함으로써 받아들였고,
이미 예수님을 잉태하셨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성모님은 당신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셨고,
온 생애를 다 바쳐서 헌신하셨습니다.
우리는 성모님이 두 번의 부르심을 받으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부르심은 예수님의 탄생 예고이고,
두 번째 부르심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한 19,26).” 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성모님께
당신의 교회를 맡기신 말씀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첫 번째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하신 것처럼
두 번째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도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응답하고 헌신하셨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 교회 공동체의 중심에 성모님이 계십니다.
“그들은 모두,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사도 1,14).”
성모님은 교회의 어머니로서 하느님 뜻을 실행하는 삶의 모범이 되어 주셨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오늘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행동을 하십니다. 모처럼 어머니와 친척 형제들이 찾아왔는데도,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라고 반문하신 다음,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성모님과 친척들을 무시하려는 의도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아니지요. 혈연관계를 부인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혈연보다도 더 중요한, 하느님과 새로운 관계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한 분이신 주님을 믿고 그분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신앙 공동체의 일원입니다. 우리는 모두 혈연만큼 강한, 신앙으로 굳게 맺어진 새로운 형제자매라 하겠습니다. 그런 만큼 우리가 저마다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실천하려면 서로 도와주고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아울러 오늘 묵상하고 싶은 점은, 세례를 받았다는 자체로 하느님 나라가 보장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행동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실천이 따르지 않은 채, 그저 입으로만 신앙을 고백하는 데 그친다면, 주님의 참된 자녀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며, 신앙으로 맺어진 새로운 형제자매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