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3주간 목요일]예루살렘 멸망 예고 (루카 19,41-44)
배교를 강요하는 임금의 관리들을 죽인 마타티아스는, 율법에 대한 열정이 뜨거운 이들을 모아 광야로 내려가 자리를 잡는다. (마카 상 2,15-29)
그 무렵 15 배교를 강요하는 임금의 관리들이 모데인에서도 제물을 바치게 하려고 그 성읍으로 갔다. 16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이 그 관리들 편에 가담하였지만 마타티아스와 그 아들들은 한데 뭉쳤다.
17 그러자 임금의 관리들이 마타티아스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이 성읍의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존경을 받는 큰사람이며 아들들과 형제들에게도 지지를 받고 있소. 18 모든 민족들과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처럼, 당신도 앞장서서 왕명을 따르시오. 그러면 당신과 당신 아들들은 임금님의 벗이 될 뿐만 아니라, 은과 금과 많은 선물로 부귀를 누릴 것이오.”
19 그러나 마타티아스는 큰 소리로 대답하였다. “임금의 왕국에 사는 모든 민족들이 그에게 복종하여, 저마다 자기 조상들의 종교를 버리고 그의 명령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하더라도, 20 나와 내 아들들과 형제들은 우리 조상들의 계약을 따를 것이오.
21 우리가 율법과 규정을 저버리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소. 22 우리는 임금의 말을 따르지도 않고 우리의 종교에서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벗어나지 않겠소.”
23 그가 이 말을 마쳤을 때, 어떤 유다 남자가 나오더니 모든 이가 보는 앞에서 왕명에 따라 모데인 제단 위에서 희생 제물을 바치려고 하였다.
24 그것을 본 마타티아스는 열정이 타오르고 심장이 떨리고 의분이 치밀어 올랐다. 그는 달려가 제단 위에서 그자를 쳐 죽였다.
25 그때에 그는 제물을 바치라고 강요하는 임금의 신하도 죽이고 제단도 헐어 버렸다. 26 이렇게 그는 전에 피느하스가 살루의 아들 지므리에게 한 것처럼, 율법에 대한 열정을 드러냈다.
27 그러고 나서 마타티아스는 그 성읍에서 “율법에 대한 열정이 뜨겁고 계약을 지지하는 이는 모두 나를 따라나서시오.” 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28 그리고 그와 그의 아들들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성읍에 남겨 둔 채 산으로 달아났다.
29 그때에 정의와 공정을 추구하는 많은 이들이 광야로 내려가서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도성을 보고 우시며,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하시며, 도성의 멸망을 예고하신다. (루카 19,41-44)
그때에 4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42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43 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44 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제1독서 (1마카2,15-29)
마카베오기 상권은 1-2장이 입문이라고 이미 밝혔다.
입문은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그 후계자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에피파네스라는 신성모독적 별칭을 가진 안티오쿠스 4세의 박해(1장)와 이에 항거하는 마타티아스 사제와 그의 다섯 아들(요한,시몬,유다,엘아자르,요나탄)의 반란을 소개한다.
배교를 강요하는 임금의 관리들이, 성읍과 집안에서 존경받는 신분인 마타티아스의 배교 행위가
파급 효과를 가져올 수 있으므로, 왕명을 따라 모데인 제단 위에서 희생 제물을 바치라고 말한다.
그렇게 하면, 임금의 벗이 될 뿐 아니라 은과 금과 많은 선물로 부귀를 누리게 될 거라고 유혹한다(17-18절).
이에 대해 마타티아스는, 임금의 왕국에서 모두가 자기 조상들의 종교를 버리고 그의 명령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하더라도, 자신과 아들들과 형제들은 한데 뭉쳐서 이스라엘 조상들의 계약에 충실하고, 결코 율법과 규정을 저버리지 않겠다고 말한다(19-21절).
"우리는 임금의 말을 따르지도 않고, 우리의 종교에서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벗어나지 않겠소."(22절)
말하자면, 야훼 유일신 신앙을 따라 정도를 걷겠다고 의지를 드러낸다. 이교도의 것을 섞어서 절뚝거리는, 양다리 걸치는 혼합 종교를 만들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그런데 이때, 어떤 남자가 나와서 배교 행위로 이교도 제단 위에서 희생 제물을 바치려는 일을 보게 된다.
마타티아스는 하느님의 율법에 대한 열정이 타오르고,심장이 떨리고,
의분이 치밀어 올라 그를 쳐 죽이고, 이교도의 제단에 제물을 바치라고 강요하는
임금의 신하도 죽이고,제단도 헐어 버린다(25절).
마치 전에 피느하스가 살루의 아들 지므리에게 한 것처럼,
율법에 대한 열정을 드러낸 것이다(민수25,1-18).
"피느하스가 일어서서 법대로 다스리자 재앙이 멈추었으니
이것이 그에게 세세에 영원히 의로움으로 셈해졌다.'(시편106,30-31)
그러고 나서 마타티아스는 그 성읍에서 말한다. "율법에 대한 열정이 뜨겁고,계약을 지지하는 이는, 모두 나를 따라 나서시오."(27절)
예레 34장 18절에 나오지만, 유다인들은 A와 B가 계약(berit:베릿)을 맺을때(karat: 맺다-직역하면,자르다), 송아지를 한 마리 가져다가 반을 자르고(죽이고), 그 잘라진 틈으로 A와 B가 지나간다. 계약을 어기면, 그 송아지처럼, 죽임을 당한다는 것이다.
계약이란 피(생명)로 맺는 것이다. 물질적인 상행위로서의 contract 이 아니라 covenant 이다. 상호 신뢰와 존중을 바탕으로 피(생명/인격)를 나누는 교환 행위를 말한다.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이런 계약을 맺었다. 계약을 맺는 장면을 아무도 보지 못했으나, 피가 오고 간 것이다.
그리고 그 계약의 산물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 들어 있는 십계명이고 율법인 것이다. 우리가 계명과 율법을 어길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피(생명/목숨/인격)를 뿌려 계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계약의 당사자는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몸도 마음도 갈라서서는 안된다.
다른 생각을 해서도 안되고, 다른 짓을 해서도 안된다.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몸도 마음도 갈라서서는 안된다. 충성해야 한다.
신약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뿌려 맺은 새롭고 영원한 계약도 마찬가지다.
구약의 백성이 계약의 산물인 계명을 어겼을 경우, 육신도 죽고, 영혼도 구원받지 못했다. 그렇게 되면, 계명을 어긴 육을 가진 인간들이 모두 영육간에 죽어야 했기에, 구원받을 사람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죄없는 예수님이 아담으로부터 인류의 종말에 이르기 까지의 죄를 십자가에서 대속하셨다. 그로 말미암아 죄지은 인간들이 더 이상 육신이 죽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
동시에 죄로 말미암아 영혼이 죽고, 영혼 생명의 단절, 즉 은총이 끊어지지만, 다시 회복되는 길이 예수님의 십자가상 구속 성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고백성사를 통해 주어지고, 성체성사로 다시 일치와 성화의 길이 열리게 된다.
그래서 복음이다. 무상의 선물이다. 옛 계약(구약)과 새로운 계약(신약)이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롭고 영원한 계약의 선물인 성체안의 예수님을 모시기에 합당하고 순결하고 거룩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성전에서 말씀과 성체로 오시는 주님을 모실 때와 성전 밖에서의 삶이 일치하는가?
가정과 사회와 직장에서 어떻게 죄와 죄의 기회를 단호히 끊고 거부하며 말씀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마타티아스의 율법에 대한 열정, 계약을 지지하고 충성하는 모습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복음 (루카19,41-44)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41~42)
루카 복음 19장 41~44절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기사 중에 루카 복음에만 나오는 내용이다.
군중들이 예루살렘에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를 지닌 메시야 왕국이 세워질 것을 기대하며 흥분된 감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반대로 가까운 장래에 있을 예루살렘 멸망을 바라보고 우시며 애가를 부르신다.
루카 복음 19장 41절에는 '에클라우센 에프 아우텐'(eklausen ep auten; and wept over it)이 나온다.
'~에 대하여'라는 뜻을 지닌 전치사 '에피'(epi)의 축약형인 '에프'(ep)와 '예루살렘 도시'를 가리키는 여성형 지시 대명사 '아우텐'(auten)이 기록되어 있는데, 직역하면 '그를 위하여 우셨다'이다.
즉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 재앙을 정확히 내다보시고 이에 대해 슬퍼하셨던 것이다.
여기서 '우시며'에 해당하는 '에클라우센'(eklausen)의 원형 '클라이오'(klaio)는 '울다', '곡하다', '애곡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감정을 삭이며 소리 죽여 우는 내적 슬픔이 아니라 자신의 슬픈 감정을 밖으로 표출시키는 격렬한 비통을 드러낸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괴로움을 영혼의 부르짖음 같은 통곡으로 표현하셨다.
수많은 예언자들을 통해서, 그리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진리의 길을 걸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이것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마침내 그리스도를 핍박하여 십자가에 못박아 죽임으로써 멸망하게 될 운명에 처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죄악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인간 본성에 대한 메시아적 슬픔으로도 볼 수 있다.
한편, 루카 복음 17장 42절의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이란 무엇인가를 알아 보아야 한다.
여기서 '평화'로 번역된 '에이레넨'(eirenen)의 원형 '에이레네'(eirene)는 히브리어 '샬롬'(shalom)과 같은 뜻의 희랍어로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로부터 생기는 '구원'과 '충만한 은총' 및 '진정한 기쁨'을 의미한다.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에 해당하는 '타 프로스 에이레넨'(ta pros eirenen; what would bring you peace)에서, 전치사 '프로스'(pros)가 '~에 속한' (belong)이라는 의미가 있어서 문자적으로 '평화에 속해 있는 것들'로 번역이 가능하다.
이것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화해시키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수많은 말씀과 행적을 통해 당신 자신에게만 진정한 구원과 평화가 있음을 보여 주신 것들을 말한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였다면, 그들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고, 그로 말미암아 진정한 구원과 충만한 은총을 만끽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스라엘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끝으로 42절의 '감추어져 있다'에 해당하는 '에크뤼베'(ekrybe; it is hidden)는 부정과거 수동태인에, 과거 어느 시점에 감추어져 지금과는 관계없는 것이 아니라, 과거 어느 시점에 감추어졌을 뿐만 아니라 그 효력이 지금까지 남아 있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진리를 계속적으로 알지 못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 단어가 수동태로 쓰였는데, 하느님께서 죄악으로 말미암아 완고해진 그들의 지성을 어둡게 해서 예수님께 관한 일을 깨닫지 못하게 하셨음을 가리킨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며 우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9,41-44)
이 말씀은, 겉으로는 예루살렘이 회개하지 않아서 멸망하게 될 것을
예고하시면서 안타까워하시는 말씀으로 보이지만,
좀 더 깊이 들어가서 생각하면, 더 늦기 전에 회개하라는 호소이고,
당신이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라고 촉구하시는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한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가
일반적인 해석이긴 한데, 그 일을 하느님의 심판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아직 심판의 날이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표현을 조금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멸망을 당하면서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회개하지 않았다.”
사실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 당시에 예루살렘이 멸망하게 된 것은
로마제국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이라는 도시가 지구상에서 아주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하느님께서 직접 벌을 내리셨고,
두 도시는 이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아직은 소돔과 고모라 같은 운명을 겪지는 않았습니다.)
어떻든 예수님의 말씀은, 또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멸망 예언들은,
확정된 미래의 일에 대한 예언들이 아니라,
너무 늦기 전에 회개하라고 경고하는 말씀들입니다.
(“회개하지 않았으니 멸망한다.”가 아니라,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입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이라는 말씀은,
오늘이라도 회개하고 하느님의 평화를 얻으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오늘이라도’는 ‘너무 늦기 전에, 지금 당장’이고,
‘평화’는 하느님 나라, 구원, 영원한 생명 등을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미래가 확정되어 있다면 회개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확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회개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좋은 예가 요나서에 있는 니네베라는 도시입니다.
“요나는 그 성읍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하룻길을 걸은 다음 이렇게 외쳤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그러자 니네베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었다. 그들은 단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 옷을 입었다(요나 3,4-5).”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요나 3,10).”
겉으로만 보면 하느님께서 당신의 계획을 취소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취소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바라신 대로 된 일입니다.
요나는 니네베의 멸망만 선포했지만,
원래는 ‘회개하지 않으면’이라는 말이 더 있었을 것입니다.
“사십 일이 지나도록 회개하지 않으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하느님께서 요나에게 니네베의 멸망을 선포하라고 시키신 것은
그들을 회개시켜서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들의 멸망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에제 18,23)”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생각하고
그 죄악에서 돌아서면, 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에제 18,27-28).”
우리의 구원과 멸망은 지금 우리가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라는 말씀은,
‘구원의 길’을 보여주어도 보려고 하지 않고,
들려주어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인간들의 모습을 뜻합니다.
이 말씀에서 바오로 사도가 아테네에서 선교활동을 했을 때의 일이 연상됩니다.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의 몇몇 철학자도 바오로와 대담을 나누었는데,
어떤 이들은 ‘저 떠버리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바오로가 예수님과 부활에 관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고
‘이방 신들을 선전하는 사람인 것 같군.’ 하고 말하였다(사도 17,18).”
“죽은 이들의 부활에 관하여 듣고서, 어떤 이들은 비웃고
어떤 이들은 ‘그 점에 관해서는 다음에 다시 듣겠소.’ 하고 말하였다(사도 17,32).”
몇몇 사람이 새로 믿기는 했지만, 아테네에서의 바오로 사도의 선교활동은
사실상 실패였다고 말할 수 있는데,
아테네 사람들의 지적 수준이 떨어져서 실패한 것도 아니고,
바오로 사도가 설교를 못해서 그렇게 된 것도 아닙니다.
구원의 길을 알려주어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습니다.
“사실 아테네인들과 그곳에 머무르는 외국인들은 모두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이야기하고 듣는 일로만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이었다(사도 17,21).”
예수님의 말씀에서,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너를 구원하기 위해서 선포한 복음을 네가 거부했기 때문이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찾아오신 일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면 구원을 받게 되고, 거부하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곧 멸망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미 복음을 받아들여서 예수님을 믿고 있는 신앙인들도
방심하거나 자만심에 빠지면 안 됩니다.
우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나오는 가시덤불 같은 사람이 되지 않도록
언제나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살아가면서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숨이 막혀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다(루카 8,14).”
숨이 막힐 정도로 현세적인 일만 생각하고 있다면,
구원의 진리를 들어도 들리지 않고, 구원의 길을 보아도 보지 못합니다.
(전에 들었던 진리와 전에 보았던 길도 다 잊어버리게 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오늘 제1독서에서 마타티아스가 신앙을 지키려고 투쟁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시리아의 임금이 유다인들을 모질게 박해하자, 마타티아스를 중심으로 무력으로 대항할 것을 결의합니다.
그는 이교도 제단을 헐어 버리고 이교 신에게 희생 제물을 바치려던 배교자 유다인까지 죽여 버립니다. 그러고는 무리를 이끌고 산으로 달아나 저항 운동을 시작하지요.
마타티아스 사후, 그의 아들인 마카베오가 성전을 되찾고 하느님께 봉헌하면서, 모든 영광을 하느님께 돌립니다.
그러고는 하느님께 충실할 때만이 평화를 누리게 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시대의 징표를 정확히 보십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측하시고는 눈물을 흘리며 말씀하시지요.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70년경에 예루살렘은 로마군에 의해 함락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불타 폐허가 되고, 무수한 사람들이 학살당하지요.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충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시대의 징표를 읽어야 합니다.
지금은 무엇이 필요한 시기인지, 이 혼탁한 사회를 보시며 하느님께서는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지를 묵상해야 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환경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절박한 문제는 많기만 합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하느님의 뜻을 외면한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누구를 탓하기에 앞서 나부터 하느님의 뜻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