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3주간 토요일] 부활 (루카 20,2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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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오코스 임금은 죽음이 닥친 것을 느끼고는, 내가 예루살렘에 끼친 불행 때문에 나에게 불행이 닥쳤음을 깨달았다고 고백한다(1마카 6,1-13)
그 무렵 1 안티오코스 임금은 내륙의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다가, 페르시아에 있는 엘리마이스라는 성읍이 은과 금이 많기로 유명하다는 말을 들었다. 2 그 성읍의 신전은 무척 부유하였다. 거기에는 마케도니아 임금 필리포스의 아들로서 그리스의 첫 임금이 된 알렉산드로스가 남겨 놓은 금 방패와 가슴받이 갑옷과 무기도 있었다.
3 안티오코스는 그 성읍으로 가서 그곳을 점령하고 약탈하려 하였으나, 그 계획이 성읍 주민들에게 알려지는 바람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4 그들이 그와 맞서 싸우니 오히려 그가 달아나게 되었다. 그는 크게 실망하며 그곳을 떠나 바빌론으로 향하였다.
5 그런데 어떤 사람이 페르시아로 안티오코스를 찾아와서, 유다 땅으로 갔던 군대가 패배하였다고 보고하였다. 6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앞장서 나아갔던 리시아스가 유다인들 앞에서 패배하여 도망치고, 유다인들이 아군을 무찌르고 빼앗은 무기와 병사와 많은 전리품으로 더욱 강력해졌다는 것이다. 7 또 유다인들이 안티오코스가 예루살렘 제단 위에 세웠던 역겨운 것을 부수어 버리고, 성소 둘레에 전처럼 높은 성벽을 쌓았으며, 그의 성읍인 벳 추르에도 그렇게 하였다는 것이다.
8 이 말을 들은 임금은 깜짝 놀라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자기가 원하던 대로 일이 되지 않아 실망한 나머지 병이 들어 자리에 누웠다.
9 그는 계속되는 큰 실망 때문에 오랫동안 누워 있다가 마침내 죽음이 닥친 것을 느꼈다. 10 그래서 그는 자기 벗들을 모두 불러 놓고 말하였다.
“내 눈에서는 잠이 멀어지고 마음은 근심으로 무너져 내렸다네. 11 나는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네. ‘도대체 내가 이 무슨 역경에 빠졌단 말인가? 내가 이 무슨 물살에 휘말렸단 말인가? 권력을 떨칠 때에는 나도 쓸모 있고 사랑받는 사람이었는데 …….’
12 내가 예루살렘에 끼친 불행이 이제 생각나네. 그곳에 있는 금은 기물들을 다 빼앗았을뿐더러, 까닭 없이 유다 주민들을 없애 버리려고 군대를 보냈던 거야.
13 그 때문에 나에게 불행이 닥쳤음을 깨달았네. 이제 나는 큰 실망을 안고 이국땅에서 죽어 가네.”
예수님께서는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의 교묘한 물음에, 부활에 참여하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다고 하신다. (루카 20,27-40)
그때에 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28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9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30 그래서 둘째가, 31 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32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33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35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36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37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38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39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스승님, 잘 말씀하셨습니다.” 하였다. 40 사람들은 감히 그분께 더 이상 묻지 못하였다.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제1독서 (1마카6,1-13)
그래서 그는 자기 벗들을 모두 불러 놓고 말하였다. "내 눈에서는 잠이 멀어지고 마음은 근심으로 무너져 버렸다네. (10)
나는 마음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네. '도대체 내가 무슨 역경에 빠졌단 말인가? 내가 이 무슨 물살에 휘말렸단 말인가? 권력을 떨칠 때에는 나도 쓸모 있고 사랑받는 사람이었는데...' (11)
내가 예루살렘에 끼친 불행이 이제 생각나네. 그곳에 있는 금은 기물들을 다 빼앗았을뿐더러, 까닭없이 유다 주민들을 없애 버리려고 군대를 보냈던 거야. (12)
그 때문에 나에게 불행이 닥쳤음을 깨달았네. 이제 나는 큰 실망을 안고 이국땅에서 죽어 가네." (13)
마카베오 상권 5장 1절~7장 50절은 유다의 군사 지도력의 둘째 단계를 드러낸다.
이것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이 다윗이 한 것처럼(2사무8장,10장참조), 셀류코스와 동맹을 맺은 민족들과 다른 모든 원수와 싸우는 것이다.
그들은 남쪽의 이두메아(1마카5,3-5,68), 요르단 강 동쪽의 암몬과 길르앗(1마카5,6-13.24-51), 북쪽의 갈릴래아(1마카5,21-23), 해변의 평원 지대(1마카5,66-68)을 포함하여 모든 지역을 공격한다.
그들의 전투는 그 지역에서 과거에 유다인들에게 해를 끼친 데 대한 보복이나 유다인들에게 미래에 해를 끼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거하려는 것으로 제시된다.
유다와 그의 형제들은 그 공적으로 인해 유다인들 사이에서뿐 아니라 이민족들 사이에서도 큰 영예를 받지만, 그들과 별도로 군사 행동을 취하는 사람들은 패배한다.
마카베오 상권 5장 55~62절에서 요셉과 아자르야가 그렇게 하려고 했다가 크게 패배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한 사람들의 후손이 아니었기"(1마카5,62) 때문이다.
한편, 마카베오 상권 6장 1~17절은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 임금의 죽음을 다룬다.
이스라엘에 대한 박해로 악명이 높았고, 세상의 권세를 자랑하며 하느님을 모독하던 그는 유다의 군대가 승리하였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게 된다.
유다인들이 안티오코스가 예루살렘 제단 위에 세웠던 역겨운 것을 부수어 버리고, 성소 둘레에 전처럼 높은 성벽을 쌓았으며, 그의 성읍인 벳 추르에도 그렇게 하였다는 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은 것이다(1마카6,7-8ㄱ).
지금까지는 무소불이의 권한으로 자신이 원하던 대로 일이 되던 것이 이제 하나 둘 뜻대로 안되니까 실망에 실망을 거듭하여 우울증
안티오코스는 마카베오 상권 6장 10-13절에서 자기의 측근들을 불러 놓고, 자신에게 계속해서 불행이 닥치는 이유가 예루살렘 성전을 약탈하고 유다 주민들을 죽인 벌 때문이었다고 진단하면서 자신이 죽게 되는 사실을 설명한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측근 가운데 하나인 필리포스를 대리인으로 뽑아 그에게 온 왕국을 맡기고 죽는다.
하지만, 리시아스는 그가 죽은 것을 알고, 자신이 어릴 때부터 키워 온 안티오코스의 아들 어린 안티오쿠스 왕자를 인티오코스 5세(에우파로르) 임금으로 세우고, 어린 임금 안티오코스 5세의 후견인으로 자처하게 된다.
그러니까 유다인들에게 해를 끼치고 예루살렘 성전을 모독했던 안티오코스 4세의 뜻은 끝까지 이루어지지 않는다.
<부활 논쟁>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일곱 형제와 한 여자’의 이야기를 하면서 ‘부활 후의 삶’에 관해 질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루카 20,34-38).”
‘부활 후의 삶’은 ‘이승에서의 삶의 연장’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만일에 부활 후의 삶이 이승의 연장일 뿐이라면,
이 세상에서의 인간관계가 그대로 지속될 것이고,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복잡한 문제들도 반복될 것입니다.
채권 채무에 관한 문제들, 어떤 원한 같은 것들,
사랑하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했던 일들,
또 이 세상에서의 여러 가지 차별과 갈등과 대립들...
그렇다면 그곳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달갑지 않은 세상이 될 것이고,
심한 경우에는 부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도 생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억울한 일들을 당하면서 한 맺힌 인생을 살았는데,
저 세상에서도 그런 인생을 다시 살아야 한다면,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사람이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부활 후의 삶’은 ‘이승에서의 삶의 연장’이 아니라,
완전히 차원이 다른 ‘새로운 삶’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라는 말씀은,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지금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모든 욕망들과
애착들에서 벗어나서 살게 될 것이라는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곳에서는 갈등과 다툼과 대립 같은 것은 전혀 없을 것입니다.
미움은 일체 없고 사랑만 가득한 곳인데,
그 사랑은 개인의 욕망을 초월한 신적 사랑입니다.
이쪽 세상에서의 미움이나 분노나 원한은 모두 잊을 것이고,
서로 용서하고 화해할 것입니다.
(이쪽 세상에서의 인연을 다 잊어버려서 상대방이 누구인지
알아보지도 못하는 일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나 가족, 친지, 친구들에 대해서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겠지만, 나쁜 것들은 모두 잊어버리고
오직 좋은 것들만, 또는 오직 사랑만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부활 후의 하느님 나라에서의 일이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보속을 하고 있는 연옥에서는
자기의 죄들을 아주 세세하게 기억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쪽 세상에서 해결되지 못한 복잡한 문제가 있다면
저쪽 세상에서는 어떻게 되겠느냐는 사두가이들의 질문은,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부활 후의 세상은 그런 복잡한 문제들을 ‘초월’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고,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씀은,
죽음의 억압에서 해방되어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부활은 틀림없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하느님은 죽음이라는 것에게 당신의 자녀들을 빼앗기는 무능한 분이 아니라,
당신의 자녀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다.”입니다.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으로서, 죽음을 지배하시는 분이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분입니다.
(만일에 온갖 기적을 다 일으키면서도 죽음을 지배하지 못하는 신이라면,
그 신은 전능한 신이 아니고, 그런 신을 우리가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은 있다.”고 가르치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이 직접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써 부활이 있음을 몸소 증명하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고 끝나버린 예수님이 아니라,
부활하셔서 영원히 살아 계시는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하기를 희망하기 때문에,
또 예수님처럼 부활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표는 부활과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에서의 인생이
아무런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을 때부터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향한 여행이 시작되었는데,
사실상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의 완성은 종말의 하느님 나라에서의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의 인생도 소홀히 여길 수 없습니다.
내세만을 생각한다면서 지금의 인생을 함부로 막 살면 안 되고,
자기 마음대로 지금의 인생을 끝내도 안 됩니다.
지금의 인생을 충실하게 살아야 내세의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부활에 참여할 자격’을 얻기 위한 노력은 지금의 인생에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후에 이런 기도를 바치셨습니다.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저도 이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요한 17,15-18).”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지켜 주십사고 기도하신 것은,
제자들이(신앙인들이) 세상 속에서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지만,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또 세상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도 세상 속에서 살면서 일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지금의 인생도 내세의 인생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오늘 몇몇 사두가이들은 죽은 다음의 삶에 대해 예수님께 묻습니다.
일곱 형제가 차례로 한 여자를 아내로 삼았을 경우, 부활 때에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는 질문입니다.
부활을 믿는 바리사이들과 달리 사두가이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지요.
물론 당시 죽은 다음의 삶에 대해 많은 의견과 주장이 있었습니다.
‘죽은 다음에는 불사불멸의 형태가 된다.’ ‘육체가 부활하여 이 세상에서 산다.’ ‘심판을 받은 다음에 다른 곳에서 산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부활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이는 부활하면 빛과도 같은 영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을 뜻하지요.
언젠가 우리도 부활하면 지금과 같은 육신의 형태를 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육신의 부활입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통해 육신의 부활을 믿고 있지 않습니까?
육신의 부활이란 육신까지도 포함하여 인간의 전 존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육신 때문에 죄도 짓지만, 육신을 통해 선행도 많이 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육신의 부활이란 지상에서 육신을 통해 쌓은 행위들을 함께 지니고 부활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선행을 더욱 베풀며 영혼을 단련시켜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럼으로써 부활의 영광을 얻고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반영억신부의 복음 묵상![]()
언제나 생명을 주시는 분 연중 33주간 토요일 (루카20,27-40)
과거, 현재, 미래가 다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미래를 더 소중히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약속해 주신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과거에 묶여 삽니다. 미래가 없는 것처럼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미래에 잘못 집착해서 오늘을 인색하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과거를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미래를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면서 오늘을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약속된 미래가 오늘을 통해서 오기 때문에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오늘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미래가 없이 오늘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현실에 밝아 자기 잇속을 챙겼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되었습니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다”(1코린2,9)하며 약속된 부활의 삶을 확인시켜줍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당신이 몸소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우리에게도 새 생명에 대한 희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따라서 부활에 대한 희망 안에 있는 사람은 지금 여기서부터 부활의 생명을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활을 믿는 이에게는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닥치더라도 견디어 냅니다. 그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그분의 약속을 믿기에 현세적인 것보다도 영적인 것에 더 마음을 씁니다. 현세적인 것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약속된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가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희망하십시오. 그리고 씨를 뿌리십시오. 눈물로 씨 뿌리면 곡식 단 들고 올 제 춤추며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고 약속에 충실하신 하느님으로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그분께서 명령하시면 뜻하시는 바가 모두 이루어지고 아무도 그분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손길을 막지 못한다”(집회39,18)고 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그 약속을 믿고 사는 이에게 언제나 살아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산 사람들의 하느님이라는 말은 결국 깨어 있는 이에게 능력의 하느님으로 다가오신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지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다만 우리의 마음이 흔들비쭉일 뿐입니다. 이 시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으로 살아계신 하느님을 영접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하느님을 모시듯 하느님의 피조물들을 존중하고 배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