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1주간 목요일] ‘주님, 주님!’ (마태 7,21.24-27)
이사야 예언자는, 그날 유다 땅에서는, “우리에게는 견고한 성읍이 있네. 그분께서 우리를 보호하시려고 성벽과 보루를 세우셨네.” 하는 노래가 불리리라고 한다. (이사야 26,1-6)
그날 유다 땅에서는 이러한 노래가 불리리라.
“우리에게는 견고한 성읍이 있네. 그분께서 우리를 보호하시려고 성벽과 보루를 세우셨네. 2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겨레가 들어가게 너희는 성문들을 열어라. 3 한결같은 심성을 지닌 그들에게 당신께서 평화를, 평화를 베푸시니, 그들이 당신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4 너희는 길이길이 주님을 신뢰하여라. 주 하느님은 영원한 반석이시다. 5 그분께서는 높은 곳의 주민들을 낮추시고, 높은 도시를 헐어 버리셨으며, 그것을 땅바닥에다 헐어 버리시어 먼지 위로 내던지셨다.
6 발이 그것을 짓밟는다. 빈곤한 이들의 발이, 힘없는 이들의 발길이 그것을 짓밟는다.”
시편 118(117),1과 8-9.19-21.25-27ㄱㄴ(◎ 26ㄱ 참조)
◎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받으소서.
○ 주님은 좋으신 분, 찬송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사람을 믿기보다 주님께 피신함이 훨씬 낫다네. 제후들을 믿기보다 주님께 피신함이 훨씬 낫다네. ◎
○ 정의의 문을 열어라. 그리로 들어가 나는 주님을 찬송하리라. 이것은 주님의 문, 의인들이 들어가리라. 당신이 제게 응답하시고, 구원이 되어 주셨으니, 제가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
○ 주님, 구원을 베풀어 주소서. 주님, 번영을 이루어 주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오는 이는 복되어라. 우리는 주님의 집에서 너희에게 축복하노라. 주님은 하느님, 우리를 비추시네. ◎
예수님께서는, 나의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고 하신다. (마태 7,21.24-2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1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24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25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26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27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대림 제1주간 목요일 제1독서(이사26,1~6)
그날 유다 땅에서는 이러한 노래가 불리리라. "우리에게는 견고한 성읍이 있네. 그분께서 우리를 보호하시려고 성벽과 보루를 세우셨네.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겨레가 들어가게 너희는 성문들을 열어라. 한결같은 심성을 지닌 그들에게 당신께서 평화를,평화를 베푸시니, 그들이 당신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1~3)
주님의 최후의 심판과 메시아 왕국의 승리를 예언하는 이사야서 24~27장은 이사야의 소묵시록으로도 불리워진다.
이사야서 26장 1절이하 19절은 이러한 소묵시록의 일부로서 주님의 구원의 성에 입성하는 남부 유다의 찬양과 신앙 고백의 노래를 소개하고 있다.
그 가운데 26장 1절은 이러한 내용을 도입하는 서론으로서 종말의 날에 구원받은 남부 유다 백성들이 하느님의 구원하심을 찬양하게 되리라는 예언이다. 물론 여기서 남부 유다는 상징적으로 하느님께서 선택하시어 구원하신 백성들을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같은 본문의 서두에 나오는 '그날'에 해당하는 '빠이욤 하후'(baiyom hahu)는 이사야서 24장부터 27장까지 계속적으로 있는 표현으로서(이사24,21; 25,9; 26,1; 27,1.2.12), 이어지는 예언의 내용들이 미래의 어느 한 날에 반드시 발생할 것 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또한 이 표현은 주님께서 당신 계획 안에 어떤 시간을 정해 놓으시고, 그때 당신의 뜻을 수행하실 것을 암시한다.
그날은 악인들이 자신의 교만과 포악함으로서 연약한 자들을 더 이상 착취하고 핍박할 수 없게 되는 날이며, 세상에서 고난당하던 주님의 백성들이 완전한 구원을 받는 날이고, 주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온 천하에 드러내시며 모든 사람들로부터 진정한 임금으로서 인정을 받게 되는 날이다.
본절에서 이 날은 남부 유다 민족이 훗날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와 국가를 재건하는 날이라는 역사적 시간을 염두에 둔 것이기도 하지만, 보다 궁극적으로는 세상의 종말 이후 실현되는 주님의 영원한 날이라는 초월적 시간을 가리킨다.
그런 점에서 '유다 땅에서는'에 해당하는 '뻬에레츠 예후다'(beerets yehudah)는 팔레스티나의 유다 민족이 사는 땅을 가리키지만, 그것은 영적으로 장차 이루어질 하느님의 나라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견고한 성읍이 있네'
이사야서 26장 1절 이하 7절까지는 장차 구원의 성에 입성한 자들의 환희와 신앙을 선포하는 내용이다. 먼저 이들은 자신들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을 고백한다.
여기서 '우리'는 주 하느님의 신실한 백성들, 고난 중에서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견고히 지킨 성도들, 장차 올 세상에서 하느님의 완전한 구원의 은총으로 복락에 들어갈 자들을 의미한다.
또한 '견고한 성읍'에 해당하는 '이르 아즈'(ir az)는 인간의 견고한 성읍(이사25,2.12)과 대조되는 개념으로서 하느님께서 겸손한 성도들을 위해 건설하신 도성을 의미한다.
이 도성은 인간의 탐욕의 충족을 위해 건설된 성읍이 아니라 빈곤하고 가난하고 힘없고 의로운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해 세워진 성읍이다.
한편 묵시록에서는 이 성읍에 대해 매우 상세하게 예언하고 있다(묵시21,9~27).
혹자는 이 성읍이 남부 유다 백성이 바빌론의 포로에서 귀환한 이후에 새롭게 재건할 예루살렘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이 성읍은 느헤미야가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와 성벽을 재건한 예루살렘으로 볼 수 있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성문이 열려 있고 모든 의로운 자들이 들어가게 허락되었다는 사실(이사26,2)을 감안할 때, 이 성읍은 궁극적으로 종말론적인 의미를 지닌 것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묵시록에서 예루살렘 성의 문들이 열려있고, 종일토록 닫히지 않는다고 묘사되는 것에서도 확인된다(묵시21,25).
'그분께서 우리를 보호하시려고 성벽과 보루를 세우셨네'
원문은 '예슈아 아쉬트 호모트 와헬'(yeshuah ashyth homoth wahel)인데, 문자적으로는 '그가 구원을 성벽과 보루로 세우실 것이다' (God makes salvation its walls and bulwalks; he sets up salvation as walls and bulwalks)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이 성에 거주하는 주민을 보호하는 것이 돌이나 흙으로 지워진 건축물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의 능력임을 보여준다.
앞의 이사야서 25장 12절에서 제시된 모압의 높은 요새가 허물어진다는 사실과 대조를 이루며,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완전하게 보호하여 주심을 보여준다.
한편, '성벽'에 해당하는 '호모트'(homoth)의 기본형 '호마'(homah)는 '방어벽','벽으로 둘러싼 상태'를 의미하는 명사이며, '보루'에 해당하는 '와헬'(wahel)의 기본형 '힐'(hil)은 '벽','방어','참호','성채' 등을 의미하는 명사이다.
이처럼 유사한 의미의 단어를 연이어 사용한 것은 독자들에게 마치 겹겹이 쌓인 성벽을 연상케 해준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이것은 성벽의 견고함을 강조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너희는 성문들을 열어라'
본문은 명령형으로 되어 있으며, 여기에서 명령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 명령을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지적되어 있지는 않다. 중요한 사실은 주님께서 그날에 구원으로 건설하실, 그 견고한 성읍의 문이 반드시 열려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개념은 묵시록 21장 25절의 예언과 완전히 맥을 같이한다. 그리고 성읍의 문이 열려 있다는 사실은, 주님의 구원의 문이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오늘날은 본문의 예언이 실현되어 거의 모든 나라에 교회가 세워져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구원의 문이 활짝 열려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그 안으로 다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는 많으나 뽑힌 자는 적기 때문이며(마태22,14).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2테살3,2).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겨레가 들어가게'
'신의'에 해당하는 '에무님'(emunim)의 원형 '에문'(emun)은 원래 '진실하다', '확실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어원 '아만'(aman)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진리', '진실', '신실', 성실', '충성'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잠언13,17; 14,5; 20,6).
희랍어 구약 성경 번역본인 70인역(LXX)은 이것을 '진리'를 의미하는 희랍어 '알레테이아'(alletheia)로 번역하였다.
따라서 '에문'(emun) 곧 '신의'를 지키는 자들이란, 하느님의 신실성을 확신하는 가운데 하느님께 대한 자신의 신앙의 지조를 지키면서 언제나 진리 가운데 머무르는 자를 말한다.
그들은 여기서 '의로운 겨레'에 해당하는 '고이 찻디크'(goy tsadiq)로 소개되어 있는데, 이것은 직역하면 '의로운 이방인'이다. 여기서 '의롭다'는 개념, 즉 '찻디크'(tsadiq)는 인간이 자신의 행위로 성취하는 의(義)가 아니다.
여기서 이사야 예언자가 말하는 의로움은 하느님의 은혜를 겸손하게 받아들인 가운데, 하느님께서 진정한 구원자이신 것을 믿음으로 얻는 의로움이며, 하느님의 뜻을 받들면서 살아가는 삶의 열매를 수반하는 의로움이다(로마3,23.24).
한편, 그들은 '고이'(goy) 즉 '이방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단어는 혈통적 의미의 이스라엘 백성,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을 나타내는 명사 '암'(am)에 대칭되는 단어로서 하느님의 선택을 받지 못한 이방 민족을 지칭한다.
그러나 이런 그들이 장차 의롭게 될 것이며, 하느님의 구원의 성읍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이것은 구원의 문을 이방인들에게까지 활짝 열어 놓으신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따른 것이며, 복음 전파로 이방인에 대한 구원의 문이 열리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마태29,19.20).
'한결같은 심성을 지닌 그들에게 당신께서 평화를, 평화를 베푸시니'
'한결같은 심성을 지닌 자'에 해당하는 '예체르 싸무크'(yetser samuk)는 마음이 요동하지 않으며 언제나 일관되게 하느님만을 의지하는 자를 의미한다.
여기서 '심성'(심지)에 해당하는 '예체르'(yetser)는 '형성하다'라는 의미의 동사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마음에 형성된 계획, 의향, 목적 등을 의미한다(창세6,5; 신명31,21; 1역대28,9; 29,18).
심성이 한결같다는 것은 헛된 우상에게 눈을 돌리지 않고, 오직 하느님 만을 섬기는 것을 말하며 바다 물결처럼 이리저리 요동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는 어떠한 유혹과 시련에도 타협하거나 굴하지 않고, 오직 주 하느님만을 신실하게 의지하는 삶을 산다.
한편, 이사야 예언자는 이러한 사람에게 '평화'가 주어질 것임을 선언한다. '평화'를 의미하는 '샬롬'(shallom)은 본래 완전하고 온전하고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상태를 나타낸다.
주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최상의 복이 바로 이 '샬롬'인데, 그 축복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은 한결같은 심성을 가진 자, 심지가 견고한 자들이다.
이러한 평화는 오직 주 하느님의 영적 지배안에 철저히 머물러 있어야만 온전히 누릴 수 있으며,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해야만 경험할 수 있는 영적 차원의 복이다.
이런 축복 안에 있는 자들은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요동하지 않으며, 불안감과 두려움이 그를 사로잡지 못한다.
본문에서 이 단어가 두번이나 똑같은 형태로 반복되고 있는 것은, 여기서 주어지는 평화가 '완전한 평화'(complete peace)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대림 제1주간 목요일 복음(마태7,21.24~27)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21)
마태오 복음 7장 15~20절이 열매를 통한 거짓 예언자의 분별과 경계의 교훈이라면, 7장 21절부터 23절까지는 그리스도를 거짓으로 추종하는 자들에 대한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나에게'에 해당하는 '모이'(moi; to me)는 일인칭 대명사 단수 여격으로 '바로 나 자신에게'라는 뜻이다.
그리고 '주님'에 해당하는 '퀴리오스'(kyrios; Lord)는 단순히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호칭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하느님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자주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볼 때, 예수님은 창조주이시며 만물의 주인이시고, 구세주로서 고백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주님'이란 호칭을 두 번 거듭 사용한 것은 매우 큰 종교적인 열정을 표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주님께 대한 신앙 고백을 하고 열정으로 기도를 한다고 해도, 그것이 진정한 열정이 아닌 가식이나 위선, 이기적인 기도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고,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실천적인 신앙을 가져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교훈을 주고 계신다.
마태오 복음 7장 21절은 영어의 'not ~ but'의 용법과 같이, 전자를 부정하고 후자를 긍정하는 관용적 표현이다.
여기서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와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자를 대조시켜, 전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반면, 후자는 들어갈 수 있음을 강조한다.
여기서 '주님, 주님!'하는 자는 진정으로 주님을 바로 알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입술로만 고백하는 거짓된 신앙을 가진 자가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말씀하시고 있다.
<주님의 뜻을 실천하여라.>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마태 7,24-27).”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라는
말씀은, “입으로 신앙을 고백하더라도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라는 뜻입니다.
야고보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7).”
‘죽은 믿음’이라는 말은, ‘생명을 줄 수 없는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실천 없는 믿음으로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도 없으니, ‘죽은 믿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을 얻게 해 주지 못하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또는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천당 간다.” 라는 일부 종파의 주장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아무런 상관이 없고,
오히려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말입니다.)
“나의 이 말”이라는 말은, 좁게는 산상 설교의 가르침들을 가리키고,
넓게는 예수님의 모든 계명들과 가르침들을 가리키는데,
어떻게 해석하든지 간에, 사실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은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라 모두 다 행동으로 실천해야 할 행동 지침들입니다.
그래서 듣기만 하는 것은, 또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여기서 ‘비, 강물, 바람’은, 신앙인들이 겪는 환난과 박해로 해석할 수도 있고,
‘최후의 심판’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실천하는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튼튼한 기초 위에 전체적으로 잘 지어진 집과 같아서
환난과 박해가 닥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그 시련을 잘 극복합니다.
또 최후의 심판 날이 되어도 아무런 걱정 없이 심판에 임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실천 없는 믿음’, 즉 ‘죽은 믿음’은
기초도 없고 전체적으로 부실하게 지어진 집과 같아서
조금만 환난과 박해를 겪어도 금방 무너집니다.
또 최후의 심판 날에 믿음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심판에 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분께서는)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마태 3,12).”
‘알곡’은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고,
신앙과 생활이 하나가 되어 있는 충실한 신앙인입니다.
‘쭉정이’는 말씀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이고,
자기는 신앙인이라고 말하면서도 신앙생활은 하지 않는 빈껍데기 신앙인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신앙인으로 보여도 실제로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이 바로 ‘사이비’ 신앙인입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신앙생활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첫 번째가 ‘사랑 실천’입니다.
요한 1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음을 알게 되고,
또 그분 앞에서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1요한 3,16-19).”
예수님께서는 “너희를 사랑한다.”고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그렇게 행동으로 실행해야 진짜 사랑입니다.
‘회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군중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라는 말을 했습니다(루카 3,8).
이 말은, “말로만 회개하지 말고 행동으로 실천하는 회개를 하여라.” 라고
사람들을 꾸짖는 말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물었습니다(루카 3,10).
이 말은, ‘행동으로 실천하는 회개’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말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3,11).”
이 대답은, 사랑을 실천하라는 가르침인데, 아마도 세례자 요한이 보기에
당시 사람들에게 가장 부족했던 것은 ‘사랑’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회개’와 ‘사랑 실천’을 곧바로 연결시킨 것입니다.
(‘사랑 실천 없는 신앙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또 세리들과 군사들이 같은 질문을 하자,
세리들에게는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라고 대답했고,
군사들에게는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라고 대답했습니다(루카 3,12-14).
이 대답들은, “회개했다면 생활을 완전히 올바르게 변화시켜라.”,
또는 “말로만 회개하지 말고,
잘못된 삶을 올바르게 바로잡는 회개를 하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삶이 바뀌지 않는 것은,
즉 잘못된 삶을 고치지 않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회개’는 어떤 형식이 아니라, ‘삶의 근본적인 변화’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반석 위에 집 짓기’는 믿음을 기초로 우리 인생을 설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우리 삶을 전개할 때, 우리는 세상 풍파 가운데서도 굳건하게 서 있는 존재가 됩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이 세상 한가운데에서 실천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입니다.
‘모래 위에 집 짓기’는 불신을 기초로 우리의 인생을 설계하는 것입니다. 온갖 의심과 방황으로 우리의 삶을 펼칠 때, 우리는 모래알처럼 흩어지는 존재가 됩니다. 거짓과 위선으로 주님의 말씀을 외면하는 사람은 모래성을 쌓는 사람입니다.
슬기롭고 겸손한 사람은 고백합니다. “너희는 길이길이 주님을 신뢰하여라. 주 하느님은 영원한 반석이시다.” 자만하고 위선적인 사람은 어리석음에 탄식합니다. “그분께서는 높은 곳의 주민들을 낮추시고, 높은 도시를 헐어 버리셨다.”
자신이 높이 쌓은 교만과 위선의 탑이 허물어지기 때문입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자신의 내면을 성숙시킵니다. 그는 하느님과 완전히 일치하고자 합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핑계와 합리화로 거짓 자아를 키웁니다. 그는 점점 하느님과 멀어져 자신의 영혼을 황폐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암브로시오 성인을 본받아 이 대림 시기에 주님의 말씀을 사랑으로 실천합시다. 주님의 말씀을 귀로 듣고 외면하지 맙시다. 성인은 성경을 읽고 배우며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본보기를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성인은 이 세상 안에서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길, 평화와 자유의 사도가 되는 길을 보여 줍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