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1주간 토요일]거저 주어라 (마태 9,35─10,1.6-8)
이사야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주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에 사는 시온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들으시는 대로 응답하시리라고 한다. (이사야 30,19-21.23-26)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9 “예루살렘에 사는 너희 시온 백성아, 너희는 다시 울지 않아도 되리라. 네가 부르짖으면 그분께서 반드시 너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들으시는 대로 너희에게 응답하시리라.
20 비록 주님께서 너희에게 곤경의 빵과 고난의 물을 주시지만, 너의 스승이신 그분께서는 더 이상 숨어 계시지 않으리니, 너희 눈이 너희의 스승을 뵙게 되리라. 21 그리고 너희가 오른쪽으로 돌거나 왼쪽으로 돌 때, 뒤에서 ‘이것이 바른길이니 이리로 가거라.’ 하시는 말씀을 너희 귀로 듣게 되리라.
23 그분께서 너희가 밭에 뿌린 씨앗을 위하여 비를 내리시니, 밭에서 나는 곡식이 여물고 기름지리라. 그날에 너희의 가축은 넓은 초원에서 풀을 뜯고, 24 밭일을 하는 소와 나귀는, 삽과 거름대로 까불러 간을 맞춘 사료를 먹으리라.
25 큰 살육이 일어나는 날, 탑들이 무너질 때 높은 산 위마다, 솟아오른 언덕 위마다, 물이 흐르는 도랑들이 생기리라. 26 또 주님께서 당신 백성의 상처를 싸매 주시고, 당신의 매를 맞아 터진 곳을 낫게 해 주시는 날, 달빛은 햇빛처럼 되고 햇빛은 일곱 배나 밝아져, 이레 동안의 빛을 한데 모은 듯하리라.”
시편 147(146―147),1ㄴㄷ-2.3-4.5-6(◎ 이사 30,18 참조)
◎ 주님을 기다리는 이는 모두 행복하여라!
○ 우리 하느님을 찬송하니 좋기도 하여라. 마땅한 찬양을 드리니 즐겁기도 하여라. 주님은 예루살렘을 세우시고, 흩어진 이스라엘을 모으시네. ◎
○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고치시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 주시네. 별들의 수를 정하시고, 낱낱이 그 이름 지어 주시네. ◎
○ 우리 주님은 위대하시고 권능이 넘치시네. 그 지혜는 헤아릴 길 없네. 주님은 가난한 이를 일으키시고, 악인을 땅바닥까지 낮추시네. ◎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보내시며,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라고 분부하신다. (마태 9,35─10,1.6-8)
그때에 35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36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37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38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10,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이 제자들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6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7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8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대림 제1주간 토요일 제1독서 (이사30,19-21. 23-26)
"비록 주님께서 너희에게 곤경의 빵과 고난의 물을 주시지만, 너의 스승이신 그분께서는 더 이상 숨어 계시지 않으리니, 너희 눈이 너희의 스승을 뵙게 되리라.(20)
또 주님께서 당신 백성의 상처를 싸매 주시고, 당신의 매를 맞아 터진 곳을 낫게 해주시는 날, 달빛은 햇빛처럼 되고 햇빛은 일곱 배나 밝아져, 이레 동안의 빛을 한데 모은 듯 하리라." (26)
이사야서 30장 18절, 19절에서는 징계중에 있는 남부 유다 백성들을 위하여 하느님께서 기다리신다는 것과 응답하여 주실 것임이 약속되었다.
이제 이사야서 30장 20절 이하 22절에서는 이러한 남부 유다 백성들에게 계시의 회복과 더불어 신앙의 회복이 이루어질 것이 예언된다.
먼저 이사야서 30장 20절과 21절은 이러한 계시의 회복이 스승들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 선언된다. 그 가운데 서두에 나오는 이사야서 30장 20절은 남부 유다 백성들이 이방의 공격으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할 것임을 암시하는 예언이다.
이것을 나타내는 '곤경의 빵과 고난의 물'에 해당하는 '레헴 차르 우마임 라하츠'(lehem tsar umaim lahats; the bread of adversity and the water of affliction)은 문자적으로 빵, 곤경 그리고 물, 고난이라는 의미이다.
원문에는 소유격을 나타내는 연계형이 사용되지 않았고, 빵과 곤경이 동격으로 그리고 물과 고난이 동격으로 표기되어 있다. 따라서 '곤경의 빵과 고난의 물'이라는 형태로 이해해야 본문의 앞뒤가 맞게된다.
빵을 먹되 곤경 가운데서 먹는 빵, 물을 마시되 고난가운데서 마시는 물은 사실상 곤경과 고난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너의 스승이신 그분께서는 더 이상 숨어 계시지 않으리니, 너희 눈이 너희의 스승을 뵙게 되리라'
본문은 주님께서 남부 유다 백성들에게 육체적인 고통은 주시지만, 영적인 은혜는 거두어 가시지 않겠다는 사실을 예언하고 있다. 하느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보다 중요한 것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육체적으로 어려울 때에 이러한 영적 은혜마저 사라진다면, 그들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 없을 것이다. 그들이 고난의 때에도 견뎌낼 수 있는 것은 그들에게 스승이 남아 있어서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며 밝은 내일을 가르쳐 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본절에 나타나는 백성들이 비록 고난을 당하지만, 마음이 겸손하여 주 하느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백성들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들은 이사야 예언자 당시 주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남부 유다의 정치 지도자들이나 백성들과는 다른 경건한 사람들이다.
한편 여기서 '너의 스승'에 해당하는 '모레카'(moreka)는 '스승'(교사)을 의미하는 단수 명사 '모레'(moreh)에 2인칭 소유격 접미어가 결합된 형태로서 '너의 스승'(your teacher)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어떤 영역본에서는 '스승'에 해당하는 영어를 대문자로 표기하여 이 '스승'이 주 하느님이심을 명확히 했고, 어떤 영역본에서는 '스승'에 해당하는 영어를 복수형으로 번역하여(your teachers) 본문의 '스승'이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예언자들임을 나타내었다.
하지만 이 두 가지의 번역이 어느 것은 틀리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모레카'가 문자적으로 '너의 스승'이며, 이것은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지칭하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백성들을 지도하시고 교훈하실 때 직접 하시지 않고 그의 예언자들을 통해 하시기 때문에, 동시에 '너의 스승들'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같은 측면에서 본문은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보내셔서 당신을 경외하는 자들을 교훈하실 것임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대리인으로서 백성들의 영적 스승이 되는 것이다.
한편 남부 유다 백성들의 눈이 그들의 스승을 뵙게 된다는 것은 그들이 실제로 하느님을 뵙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계속해서 자신들을 지도하시며, 하느님의 대리자인 예언자들을 보내 주신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한다는 뜻이다.
예언자들은 그들 가까이에서 그들을 지도하며, 하느님의 뜻을 그들에게 매우 분명하게 가르칠 것이다.
이것은 이것을 듣는 남부 유다 백성들도 영안(靈眼)이 밝아져 하느님의 모든 뜻을 분명하게 깨닫고 순종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또 주님께서 당신 백성의 상처를 싸매 주시고, 당신의 매를 맞아 터진 곳을 낫게 해주시는 날, 달빛은 햇빛처럼 되고 햇빛은 일곱 배나 밝아져, 이레 동안의 빛을 한데 모은 듯 하리라.'(26)
여기서는 치유와 빛의 개념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강조되고 있다. 이 두 개념은 모두 주 하느님의 축복을 상징한다.
여기서 상처가 난 '당신 백성', 즉 '암모'(ammo; his people)는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하느님의 모든 영적인 백성을 의미한다. 다만, 이사야 예언자가 당시의 남부 유다 백성들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모든 백성들, 즉 미래의 교회 시대에 하느님의 백성이 될 모든 이방인들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그들이 받을 '상처', 즉 '셰베르'(sheber; the breach of; the bruises of)는 본래 깨뜨려 부수어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 '샤바르'(shabar)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깨짐','부숴짐'을 의미한다(레위21,19; 잠언17,19).
이것은 하느님의 백성들이 세상에 살면서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주님 대전에 받은 징벌 뿐 아니라, 신앙 때문에 세상에서 당할 박해와 환난을 모두 포함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종말의 날에 그들의 모든 상처를 싸매주시며 치유해 주실 것이다.
또한 본절 후반부의 '당신의 매를 맞아 터진 곳'에 해당하는 '우마하츠 막카토'(umahats makkatho; the wounds he imflicted)는 징벌을 당하고 환난을 당해 난 자리, 즉 육체적, 정신적 상처를 포괄하는 표현이다.
여기서 하느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고치실 것을 약속하신다.
여기 '낫게'에 해당하는 '이르파'(irpha; heals)의 원형 '라파'(rapha)는 일반적인 치료와 회복의 의미로도 사용되지만, 사람의 힘만으로 치료될 수 없는 질병이나 재앙이 내릴 때, 하느님께서 개입하셔서 치유하시는 것을 나타낼 때 종종 사용된다(창세20,17; 탈출15,26).
이 단어에는 '용서'의 의미까지 함축되어 있으며(이사19,22; 53,5; 59,18), 이같은 하느님의 치유의 역사가 이루어졌을 때에는 다시는 아픔이나 눈물도 상처도 없는 완전한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는 것이다.
끝으로, 본문은 주님께서 치유해 주시는 은총이 내리는 그날에 생겨날 놀라운 일이 예언되는데, 그것은 하늘의 대표적인 광명체인 달과 해의 빛의 광도가 더 커질 것임을 지적한다. '달빛은 햇빛처럼 되고'의 뜻은 밤이 소멸될 것이라는 사실을 연상하게 한다.
이것은 영적인 의미로 해석할 때, 진리의 빛이 과거에는 달빛처럼 희미했으나 이제는 해와 같이 밝고 찬란하여 누구나,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 진리 안에서 거닐 수 밖에 없음을 나타낸다.
아울러 '햇빛은 일곱 배나 밝아져'의 뜻은, 히브리어에서 '일곱'(7)은 완전수로서 완벽함을 상징하므로, 햇빛이 더 이상 더 밝아질 수 없을 만큼 완전하게 밝아진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레 동안의 빛을 한데 모은 듯하리라'는 것은 하루의 빛이 일곱 번 더해지는 정도의 밝은 빛을 의미하며, 이것 역시 완전한 빛을 상징한다.
이러한 것들은 영적인 이스라엘이 회복될 때 진리의 빛이 찬란하게 비추신다는 사실과 더불어, 주 하느님께서 친히 이러한 완전한 빛이 되심으로써, 해와 달의 비추임이 필요없는 상태가 될 것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묵시21,23).
이것은 결국 종말의 날, 어두움의 세력인 악(惡)이 완전히 소멸되고, 오로지 빛과 진리만이 지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온전히 성취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
대림 제1주간 토요일 복음 (마태9,35-10,1.5ㄱ. 6-8)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36)
여기서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에 해당하는 '에스플랑크니스테'(esplangchnisthe; he was moved with compassion)는 '~을 불쌍히 여겨 마음이 움직이다'라는 뜻이다. 우리 말로는 '보기에 답답하고 딱해 걱정하고 안쓰럽게 여기다'이다.
이것은 단순히 감상적인 느낌만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고, 죄와 질병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겪고 있는 인간들을 향해서, 인간들을 지으셨고 또한 구원하러 오신 하느님의 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은 단순히 감정상의 측은함이나 연민의 정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어떤 구체적인 행동을 불러일으키는 데까지 나아간다.
마태오 복음 9장 36절의 후반부는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군중들을 보고 가엾게 여기신 이유가 나온다.
이것은 구약의 즈카르야서 10장 2절의 '사람들은 양 떼처럼 방황하고 목자가 없어 고통을 당한다'는 구절과 비슷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목자없는 양'의 이미지로 묘사하는 것은 신약의 여기뿐만 아니라 구약의 민수기 27장 17절, 역대기 2권 18장 16절, 열왕기 1권 22장 17절 등에서도 발견되는 드물지 않은 표현이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적인 결핍 상태에 있었고,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할 구심점도 없었다.
이런 차원에서 하느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인간을 포함하는 온 우주의 갈망을 충족시키는 것이며, 방황하는 인간들을 바른 길로 구원할 약속된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의 이미지가 영적인 목자의 이미지를 통해 표현되고 있다.

<목자 없는 양들처럼>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마태 9,35-36).”
‘복음’,
즉 ‘기쁜 소식’은 우리가 구원과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소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기쁜 소식을 선포하시면서,
구원과
생명을 얻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과 허약한 이들을 고쳐 주신 일은,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신 일입니다.
병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치유의 은총은 곧 복음 선포입니다.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말씀’으로 복음이 선포되지만,
병자들에게는 ‘치유’를 통해서 복음이 선포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 주신 이유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가엾은
마음’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 또는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바로
‘사랑’과 ‘자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사람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다는 말은,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전체 인류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레미야서에
다음과 같이 목자들을 꾸짖으시는 하느님 말씀이 나옵니다.
“불행하여라, 내 목장의 양떼를 파멸시키고 흩어 버린 목자들! 주님의 말씀이다.
-
그러므로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내
백성을 돌보는 목자들을 두고 말씀하신다. -
너희는
내 양떼를 흩어 버리고 몰아냈으며 그들을 보살피지 않았다.
이제 내가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벌하겠다. 주님의 말씀이다(예레 23,1-2).”
에제키엘서에도
목자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불행하여라, 자기들만 먹는 이스라엘의 목자들!
양떼를
먹이는 것이 목자가 아니냐? 그런데 너희는 젖을 짜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으면서, 양떼는 먹이지 않는다.
너희는
약한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고 아픈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부러진
양을 싸매 주지 않고 흩어진 양을 도로 데려오지도,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폭력과 강압으로 다스렸다(에제 34,2-4).”
목자로서
백성들을 보살펴야 할 종교 지도자들이 목자 구실을 하기는커녕
강도들처럼
백성들을 착취하고 억압하기만 했으니,
백성들은 목자 없는 양들과 같은 처지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종교 지도자들을 이렇게 꾸짖으셨습니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2,38-40).”
사실
부패한 종교 권력은 세속의 독재 권력보다 더 나쁩니다.
하느님을 내세우면서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렸다는 말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면,
그들
자신들이 참 목자이신 하느님을 충실하게 섬기지 않았기 때문에,
또는
하느님이 아닌 것들을 섬겼기 때문에
목자
없는 양들처럼 되어버렸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하느님을
섬기는 생활을 하면서도, 즉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지 못하면, 목자 없는 양들 같은 모습이 되어버립니다.
야고보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해가
떠서 뜨겁게 내리쬐면,
풀은
마르고 꽃은 져서 그 아름다운 모습이 없어져 버립니다.
이와 같이 부자도 자기 일에만 골몰하다가 시들어 버릴 것입니다(야고 1,11).”
여기서
‘부자’ 라는 말은, 부유한 사람들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재물을
섬기는 사람들을 모두 가리키는 말입니다.
‘자기 일에만 골몰하다가’ 라는 말은, ‘재물에 대해서 집착하다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도 가엾게 여기셨고,
그들이
올바르게 하느님을 섬길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
전에는
재물을 추구하면서 목자 없는 양처럼 살았더라도,
지금 회개하고 목자의 뒤를 잘 따르면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목자
없는 양들’을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메시아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의 인류의 상태를 뜻하는 말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이 말은,
‘참 목자가 누구인지 몰라서 방황하는 양들’이라는 뜻이 됩니다.
바오로
사도의 설교를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대단한 종교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돌아다니며 여러분의 예배소들을 살펴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겨진 제단도 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알지도 못하고 숭배하는 그 대상을
내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려고 합니다(사도 17,22-23).”
그리스도교
신앙인은 자신에게 생명을 주는 참 목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고,
참
목자만을 따라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눈팔거나 딴 생각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목자가
누구인지 몰라서 방황하는 것은 불쌍한 것이지만,
알면서도 다른 길로 빠지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이고, 죄를 짓는 일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이사야 예언자는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 받을 은총에 대하여 말합니다. “너희는 다시 울지 않아도 되리라. 네가 부르짖으면 그분께서 반드시 너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들으시는 대로 너희에게 응답하시리라.” 예수님께서 여러 마을과 회당을 다니시면서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실 때 이 예언은 이루어집니다.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 주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위로의 표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파견하시어 그 표지를 보여 주시며 하늘 나라를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의 복음을 전하도록 우리를 각자의 삶의 자리에 파견하십니다. 병자와 가난한 이, 힘없는 이들에게 위로가 되도록 우리를 파견하십니다. 세상의 어두운 구석을 은총의 빛으로 비추도록 우리를 파견하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 안에서 예수님의 사도직을 수행하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착한 목자’이신 구세주의 자비로운 마음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아파하는 사람과 함께 아파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늘 나라로 가는 길에서 헤매고 있는 영혼들을 보살필 때, 우리는 그분의 협조자가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갈구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영적 추수를 하고 있을 때, 우리는 하늘 나라의 일꾼이 됩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