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2주간 월요일]중풍 병자치유 (루카 5,17-26)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오시어 구원하시리니,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고 한다. (이사야 35,1-10)
1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2 수선화처럼 활짝 피고 즐거워 뛰며 환성을 올려라. 레바논의 영광과, 카르멜과 사론의 영화가 그곳에 내려, 그들이 주님의 영광을, 우리 하느님의 영화를 보리라.
3 너희는 맥 풀린 손에 힘을 불어넣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라. 4 마음이 불안한 이들에게 말하여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복수가 들이닥친다, 하느님의 보복이! 그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5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6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7 뜨겁게 타오르던 땅은 늪이 되고, 바싹 마른 땅은 샘터가 되며, 승냥이들이 살던 곳에는 풀 대신 갈대와 왕골이 자라리라.
8 그곳에 큰길이 생겨 ‘거룩한 길’이라 불리리니, 부정한 자는 그곳을 지나지 못하리라. 그분께서 그들을 위해 앞장서 가시니, 바보들도 길을 잃지 않으리라.
9 거기에는 사자도 없고 맹수도 들어서지 못하리라. 그런 것들을 볼 수 없으리라. 구원받은 이들만 그곳을 걸어가고, 10 주님께서 해방시키신 이들만 그리로 돌아오리라. 그들은 환호하며 시온에 들어서리니 끝없는 즐거움이 그들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
시편 85(84),9ㄱㄴㄷ과 10.11-12.13-14(◎ 이사 35,4ㄷㅂ 참조)
◎ 보라, 우리 하느님이 오시어 우리를 구원하시리라.
○ 하느님 말씀을 나는 듣고자 하노라. 당신 백성, 당신께 충실한 이에게 주님은 진정 평화를 말씀하신다. 그분을 경외하는 이에게 구원이 가까우니, 영광은 우리 땅에 머물리라. ◎
○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 ◎
○ 주님이 복을 베푸시어, 우리 땅이 열매를 내리라. 정의가 그분 앞을 걸어가고, 그분은 그 길로 나아가시리라. ◎
예수님께서는,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고, 평상에 누인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 보낸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에 걸린 이를 고쳐 주신다. (루카 5,17-26)
17 하루는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갈릴래아와 유다의 모든 마을과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도 앉아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힘으로 병을 고쳐 주기도 하셨다. 18 그때에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들여다 놓으려고 하였다. 19 그러나 군중 때문에 그를 안으로 들일 길이 없어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고, 평상에 누인 그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보냈다. 20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21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의아하게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22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23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24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에 걸린 이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25 그러자 그는 그들 앞에서 즉시 일어나 자기가 누워 있던 것을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26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두려움에 차서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하고 말하였다.
대림 제2주간 월요일 제1독서(이사35,1-10)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5~6ㄱ)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5)
본절부터 7절까지는, 종말에 선민 이스라엘의 땅에 넘칠 환희과 기쁨을 예고하는 35장 1-2절에 이어, 다시 하느님께서 가져오실 당신 백성들과 그들의 땅의 역동적 회복을 예언하는 부분이다.
이러한 역동적 구원은 부분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활에서 성취되었다.
특히 5절과 6절은 세례자 요한이 감옥에 갇힌 후, 예수께서 자신이 메시아되심을 입증하면서 답하신 말씀과 동일한 것이다(마르7,37 ; 루카7,22 ; 마태11,2-6). 즉 이것은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된 예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본문 서두에 제시된 '그때에' 에 해당하는 '아즈'(az ; then)는 일차적으로는 메시아 시대를 나타낸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이것은 주님께서 도래케 하시는, 온전한 회복의 나라,영원한 나라 즉 새 하늘과 새 땅을 통해 이루어질 그 나라로 귀결된다.
한편, 하느님께서 회복케 하시는 역사(役事)가 이루어질 날에 일어나게 될 사건으로 먼저 제시되는 것은 맹인의 눈이 밝아지는 것이다.
여기서 '열리고'에 해당하는 '티파카흐나'(thiphaqahna)는 '열다'의 의미를 지닌 '파카흐'(phaqah)의 수동형으로서, '열릴 것이다'는 의미가 된다.
이처럼 이 단어가 수동형으로 사용된 것은 그것이 저절로 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나타낸것이다.
즉 맹인의 눈이 열리는 역사가 전적으로 주 하느님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아울러 이것은 문자 그대로 맹인이 눈을 뜨고 보게 된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으며, 영적 어두움 속에서 멸망의 길을 걷던 자들이 진리의 빛을 보고, 생명의 길을 가게 된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
또한 이것은 하느님을 거역하던 백성에게 내려졌던 책벌이 풀리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이사6,10; 29,18). 그들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바로 보게 될 것이며,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참된 가치관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더 이상 무익한 이방의 강대국이나 헛된 이방의 우상이 아닌, 완전한 구원이신 주 하느님만을 의지하게 될 것이다.
한편, 이어지는 본절 후반부는 '눈먼 이의 눈' 에서 '귀먹은 이의 귀'로 바뀌었을 뿐,앞 부분과 동일한 의미를 전달하는 평행 대구 문장으로 풀이된다.
여기서는 청각기관인 '귀'란 표현이 사용되어,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도 않고 깨닫지도 못했던 자들이, 복음의 말씀을 통해 그 귀가 열리고 진리를 깨닫게 되는 역사가 이루어 진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떠뜨리리라.' (6ㄱ)
예수님은 벳자타 못 가에서 서른 여덟 해나 누워있던 병자를 치유하셔서 그로 하여금 걷게 하셨으며(요한 5,2-9),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의 '아름다운 문'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유해 그로 하여금 사슴처럼 뛰게 하였다.(사도 3,1-9)
이처럼 메시아 시대가 되면, 절름발이도 건강한 다리를 갖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영적으로 해석하면, 불완전한 신앙을 가졌던 자들이 신앙을 회복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알아들을 수 있고, 죄의 굴레에 얽매여 바르게 사는 데 있어 제한을 받던 자들이, 그 굴레를 떨쳐버림으로 인해, 진리의 길을 마음껏 활보한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란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활 중 갈릴리 지방에서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치유하셔서, 그로 하여금 말을 분명하게 하신 사건(마르코 복음 7,31-37)을 연상케 한다.
이것 역시도 영적인 의미를 지니는데, 과거에는 하느님을 찬양하지 못했던 자들이 하느님을 찬양하게 되며, 하느님의 진리를 침묵하던 자들이 입을 벌려 담대히 그 진리를 증거하는 자들이 된다는 것으로 알아 들을 수 있다.
한편, 앞의 5절의 경우는, 메시아의 활동으로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을 나타내는 동사 표현이 모두 수동형으로 사용되어,하느님의 주도적인 역사가 강조되었다. 그러나 본절의 경우, 발로 걷고 입으로 말하는 역사가 이루어진 것에 대해서는 강조 능동형과 능동형 동사가 사용되었다.
이것은 메시아 시대의 회복의 양상이 하느님의 주도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한 자들의 적극적인 순종과 증거를 통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날 것임을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가 들어있는 것이다.
좋은 이웃이 되어라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웃 사람끼리 서로 돕고 의좋게 지내는 모습이 멀리 있는 사촌보다 더 가까운 사이로 친하게 지낸다는 의미입니다. 살아가면서 이웃을 잘 만나는 것은 큰 복입니다. 그런데 이웃을 잘 만나 복을 누리려고 하는 사람은 많지만 이웃에게 복이 되어 주고자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누가 나의 이웃이 되어 주길 바라지 말고 내가 다른 사람의 이웃이 되어 복을 지어 줄 수 있는 마음이 커지기를 희망합니다.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들여다 놓으려고 했지만 사람들이 많아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붕으로 올라가 천정을 벗겨내고 환자를 예수님 앞 한 가운데로 내려 보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루카5,20)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육체적인 병을 낫게 해 달라고 간청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병과 허약함 뿐 아니라 그 속을 고쳐 주셨습니다. 인간은 겉모양을 보고 판단했지만 주님께서는 속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영혼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의 뿌리를 다스리시고 부족함을 충만하게 채워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능력의 말씀 한마디로 모든 것을 이루셨습니다. 명의는 원인을 치료하십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오셨고 말씀을 완성하시는 분이십니다. 중풍병자는 군중이라는 장벽과 지붕이라는 걸림돌을 넘어 예수님의 능력을 만났습니다. 위기는 기회입니다. 넘어야 할 산을 넘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중풍병자는 이웃을 잘 만났습니다. 그는 이웃이 있었기에 능력의 주님 앞에 설 수 있게 되었고 모두를 얻었습니다. 그야말로 잘 만난 이웃사촌이 복덩이 입니다. 중풍 병자의 믿음도 믿음이지만 이웃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치유해 주셨다는 것이 우리에게 큰 위로를 줍니다.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수고와 땀이 결코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웃의 믿음을 보고도 은총을 허락하시니 좋은 이웃을 만나는 것도, 좋은 이웃이 되어주는 것도 다 복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큰 복을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다는 것을 미심쩍어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즉시 그 마음을 아시고 중풍병자를 일으켜 세우는 능력을 드러내셔서 믿도록 해주셨습니다. 사람들은 놀라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두려움에 차서 신기한 일을 보았노라고 말했습니다. 이 일은 오늘도 믿는 이들 안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느 날 할머니 한 분이 “신부님 고맙습니다. 제가 성경에 맛들이게 되었습니다.”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어느 날, 몸이 많이 아픈데도 불구하고 미사참례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부님께 안수를 받으며‘저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십시오.’하고 기도했습니다. 저는 몸이 많이 아팠지만 아픈 것을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저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십시오.’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왔는데 그 때가 점심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저도 모르게 밥 대신 성경을 챙겼고 성경을 읽는데 말씀이 꿀같이 달았습니다. 전에는 이해가 되지 않던 말씀이 마음에 쏙쏙 들어왔습니다. 저는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성경을 읽게 되었고 저의 모습을 지켜보던 남편이 ‘대단한 학자가 났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 날 이후로 성경을 보지 않고는 못 견디게 되었습니다.”
신기한 일은 여전히 일어날 것이고 구원의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나만의 구원이 아니라 이웃의 구원을 위해 애쓰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 라파엘 사제
<중풍 병자를 고치시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갈릴래아와 유다의 모든 마을과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도 앉아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힘으로 병을 고쳐 주기도 하셨다.
그때에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들여다 놓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군중 때문에 그를 안으로 들일 길이 없어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고, 평상에 누인 그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 보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카 5,17-20)”
예수님께서는
‘말씀의 은총’을 통해서도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고,
‘치유의
은총’을 통해서도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몸이
건강한 사람들은 ‘말씀의 은총’으로, 병든 사람들은 ‘치유의 은총’으로
인도하셨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남자
몇이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일을 겉으로만 보면,
병을
고쳐 달라고 청한 것으로 보이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병자의 중풍은 고쳐 주시지 않고,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나는 너의 죄를 용서한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 아마도 중풍 병자 자신과 그를 데리고 온 사람들이
병의
치료보다 더 깊은 차원의 구원을 청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아니면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중풍을 고쳐 주는 일보다 죄를 용서하는 것이
더 급하고 중요한 일이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라는 말은, 그들에게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들의 청을 들어주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속마음을 꿰뚫어보셨고,
그들이
무엇을 청하는지 아셨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만일에
그들이 믿었기 때문에 병을 고쳐 주신 것으로 해석한다면,
안
믿었다면 안 고쳐 주셨을 것이라는 뜻이 될 수도 있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모르고, 그래서 안 믿고 있는 병자라고 해도,
병자의 딱한 사정만 보시고 병을 고쳐 주신 분입니다(요한 5,5-9).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의아하게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루카 5,21)”
앞의
17절에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힘으로 병을 고쳐 주기도 하셨다.”
라는
말이 있으니, 그 자리에 있었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시는 모습을 이미 보았고,
그래서
그들도 예수님의 ‘치유의 권능’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용서하는 일은 병을 고치는 일과는 완전히 성격이 다른 일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라는 예수님 말씀이
“나는
너의 죄를 용서한다.” 라는 뜻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낀 것입니다.
“나는
너의 죄를 용서한다.” 라는 말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입니다.
(하느님만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문은 정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은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생각은(또는 말은) 틀린 것입니다.
그들은
아직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 자리에 있었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병을 잘 고치는 예언자나 랍비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에 걸린 이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그러자
그는 그들 앞에서 즉시 일어나 자기가 누워 있던 것을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갔다(루카 5,22-25).”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어떤 병자를 고쳐 주셨다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당신이
어떤 분인지를 공개적으로 계시해 주신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라는 말씀은,
“나에
대해서 의심하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어느
쪽이 더 쉬우냐?” 라는 말씀은, “둘 다 어렵다.”,
즉
둘 다 하느님의 권능과 권한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당시에는
중풍은 하느님만이 고치실 수 있는 불치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유의 기적을 행하심으로써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계심을 보여 주십니다.
(당신이
하느님만의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 주심으로써
하느님만의 권한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입증하셨습니다.)
그런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더라도
예수님께서는
그 병자의 병을 고쳐 주셨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등장한 것은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설정한 상황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예수님은, 또는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병을
잘 고치는 예언자가 아니라, 병이라는 것을 지배하시는 하느님이시고,
우리에게
궁극적인 구원을 주시는 구세주이십니다.
(죄와
질병과 죽음 같은 온갖 억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는 분입니다.)
사실
병의 치유는 이 세상에서의 일이고, 몸의 일일 뿐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 ‘몸의 일’만 청하고, 그것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아주 부족한 신앙이 됩니다.
(이
세상에서의 일과 몸의 일을 청하는 것 자체가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
것만 청하고 영원한 것은 추구하지도 않고 청하지도 않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지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과 행복과 평화와 해방을 얻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송영진 모세 사제
중풍 병자를 들것에 싣고 예수님께 데리고 가는 친구들은 단순히 한 친구의 질병을 치유받게 하려고 나섰습니다. 그들은 지붕에 올라가 천장을 뚫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높이 평가하시고 중풍 병자를 낫게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의 이 장면은 함께 마음을 모아 기도하면 하느님 아버지께서 무엇이든 들어주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게 합니다(마태 18,19 참조).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치유하시면서,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실 때,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 앞에서 당신의 신적 권위를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질병과 불행은 원죄의 결과이며 진정한 치유는 죄의 용서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구세주의 탄생을 기다리는 우리의 마음은 사막에서 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과 같습니다. 구세주의 탄생으로 우리는 원죄가 빚어낸 온갖 불행과 죽음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구세주께서 머무르시면 우리의 마음은 수선화처럼 활짝 피고 즐겁게 기쁨의 환호성을 올리게 됩니다. 우리 마음에 구원의 단비가 내려 우리의 잘못과 죄악이 없어지면 우리 영혼에 기쁨의 꽃이 핍니다.
예수님의 성탄을 기다리며 완고한 우리 마음을 풀고 부드럽게 합시다. 우리 마음에 ‘거룩한 길’을 내기 위해 마땅한 준비를 합시다. 우리의 탄식과 슬픔이 사라지도록 우리 죄를 고백하고 주님께 용서받는 길을 마련하여야 하겠습니다.
(류한영 베드로 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