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2주간 화요일]길 잃은 양을 찾아서 (마태 18,12-14)

이사야 예언자는, 주 하느님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신다고 한다. (이사야 40,1-11)
1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 너희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 2 예루살렘에게 다정히 말하여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죗값이 치러졌으며, 자기의 모든 죄악에 대하여 주님 손에서 갑절의 벌을 받았다고 외쳐라.
3 한 소리가 외친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 4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 5 이에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리니, 모든 사람이 다 함께 그것을 보리라. 주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다.”
6 한 소리가 말한다. “외쳐라.” “무엇을 외쳐야 합니까?” 하고 내가 물었다. “모든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 7 주님의 입김이 그 위로 불어오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진정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
9 기쁜 소식을 전하는 시온아, 높은 산으로 올라가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루살렘아, 너의 목소리를 한껏 높여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라. 유다의 성읍들에게 “너희의 하느님께서 여기에 계시다.” 하고 말하여라.
10 보라, 주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 당신의 팔로 왕권을 행사하신다. 보라, 그분의 상급이 그분과 함께 오고, 그분의 보상이 그분 앞에 서서 온다. 11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
시편 96(95),1-2.3과 10ㄱㄷ.11-12.13(◎ 이사 40,10 참조)
◎ 보라, 우리 하느님이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
○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주님께 노래하여라, 온 세상아. 주님께 노래하여라, 그 이름 찬미하여라. 나날이 선포하여라, 그분의 구원을. ◎
○ 전하여라, 겨레들에게 그분의 영광을, 모든 민족들에게 그분의 기적을. 겨레들에게 말하여라. “주님은 임금이시다. 그분은 민족들을 올바르게 심판하신다.” ◎
○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여라. 바다와 그 안에 가득 찬 것들은 소리쳐라. 들과 그 안에 있는 것도 모두 기뻐 뛰고, 숲속의 나무들도 모두 환호하여라. ◎
○ 그분이 오신다. 주님 앞에서 환호하여라. 세상을 다스리러 그분이 오신다. 그분은 누리를 의롭게, 민족들을 진리로 다스리신다. ◎
예수님께서는,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고 하신다. (마태 18,12-1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2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13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대림 제2주간 화요일 제1독서(이사40,1~11)
이스라엘이 바빌론 유배를 간 이유는 야훼 유일신 신앙을 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졌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스라엘이 당신을 배신할 때,주변 이교 강대국(앗시리아,바빌로니아 등등)을 통해 전쟁을 일으키고, 나라 잃은 설움을 주거나 유배를 보낸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그들의 죄의 벌에 대한 (죗값; 갑절의 벌; 복역)을 치루고, 정신차리게 하며, 무엇이 중요한 일인지 깨닫게 한다.
오늘 이사 40.1-2를 보라.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너희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에게 다정히 말하여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죗값이 치러졌으며
자기의 모든 죄악에 대하여,
주님의 손에서 갑절의 벌을 받았다고 외쳐라."
여기서 '나의 백성'은 '예루살렘'으로 정의할 수 있다.
바빌론 유배지에 있는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 '복역의 때'가 끝났음을 외치라는 소명을 받는다.
이것이야말로 예루살렘의 지위의 변화를 묘사하는 것이다.
이 요새화된 성은 다윗의 전투시 군사적 중심지로 사용되었고, 그 이후로도 수없이 많은 전쟁을 위하여 사용되었다.
전쟁은 국가 존립을 위하여 필수 불가결한 부분이었다. 이스라엘(북)과 유다(남)는 더 이상 국가로 남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주변 이교 강대 제국에게로 넘어갔다.
그러나 이제 예루살렘은 자유롭게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자신의 새로운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제 이스라엘 40.3-11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과 삶의 터전과 공동체에 주님으로 찾아오시고, 통치하실 수 있도록, 주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길을 닦으라는 말씀이 선포된다.
성전 전승에 의하여 잘 알려진 야훼의 길은 시내산이나 에돔에서 나와(이사 34장; 63.1-6 참고) 사해 남쪽의 사막(=아라바)를 지나 동쪽으로부터 예루살렘에 이르는 길이다(diaspora가 거주하는 길).
이 선포의 핵심, 즉 이 좋은 소식을 전하는 이유는 야훼께서 다시 오셔서 예루살렘에 좌정하시겠다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왕의 행차를 준비하라고, 한 외침(소리)이 촉구하는 것이다.
이 말씀은 마르코복음1장 2~3절에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맞이할 마음 준비를 하도록 구약과 신약의 교량 역할을 하며, 예수님 앞에 오셔서 정지 작업을 하는 소명을 받은 예수님의 선구자이신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미리 보여준다.
"사막에 길을 곧게 내는 것, 골짜기를 모두 메우고, 산과 언덕을 낮게 하는 것, 거친 곳을 평지로, 험한 곳을 평야로 만드는 것"
이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한 정지작업은 높은 것을 깎아내리고, 골짜기는 메우는 작업이다.
하느님 위에 올라간 영적 교만은 겸손으로, 죄악과 분열과 열등감의 깊은 계곡은 회개를 통해 은총을 받을 그릇을 준비하는 것이다. 거칠고 험한 곳은 주님께 반항하고 대들고,제 마음대로 하던 마음인데, 그 폭력과 고집의 마음을 겸손과 온유의 마음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 작업이 끝나면 "주님의 영광" (이사40.5)이 드러나, 모든 사람이 그것을 다함께 보게 된다고 한다. 하느님 임재와 능력의 표징을 예루살렘에서 다시 볼 수 있고,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때, 주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 당신의 팔로 왕권을 행사하신다(40.9ㄹ-10ㄴ). 상급과 보상이 무상으로 내린다(10ㄷ).
"상급"과 "보상"은 승리한 전사가 집으로 가져오는 노획물과 공물을 표현하는 용어이다. 야훼 하느님의 예루살렘 귀환이 승리의 행사로 묘사된다.
그분은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양무리)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이스라엘 백성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어미 양들(지도자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이사40.11).
이 목자와 양무리에 대한 시구는 시편 23.1-3과 유사하다. 목자는 대개 "왕"을 위한 비유로 쓰인다. '그의 양무리, 어린 양, 암컷들'은 하느님의 백성을 넓은 의미로 묘사한 것이다.
유다의 성읍은 그들의 지도자들과 절대 다수의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간 후에, 수십 년동안 외면과 고통스런 상황으로 고난 받아온 사람들을 묘사한다. 예루살렘에로의 하느님의 귀환은 그들 모두, 특히 약한 자와 곤궁에 빠지고 궁핍한 자를 위한 목자의 외투 속 사랑을 가리킨다.
"젖먹이는 암컷들"은 "갓난 어린양들"과 함께 지내며 돌보는데, 양떼가 이동할 때마다 어린양들도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림 제2주간 화요일 복음(마태18,12~14)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12)
'길 잃은'에 해당하는 '프라노메논'(planomenon; which is gone astray; that wandered off)의 원형 '플라나오'(planao)는 '길을 잃다'(to go astray), '방황하다'(wander roam about)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방향을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헤매는 모습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실제로 양은 심한 근시이므로, 무리와 조금만 떨어져도 길을 잃고 헤매게 된다. 여기에 나오는 '길 잃은' 양도 무리로부터 떨어져 가야 할 길을 찾지 못해 애처롭게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또한 이 단어는 은유적으로 '속이다' '유혹하다', '꾀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이 단어는 수동형으로 쓰이고 있다.
따라서 마태오 복음 18장 12절은 자신의 잘못에 의해 길을 잃게 된 행위 뿐 아니라, 유혹당하여 진리로부터 벗어나 죄에 빠지게 된 상황까지도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않느냐?'에 해당하는 '우키'(ouchi)는 '아니다'(not)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부정어이다.
하지만 본문처럼 의문문에서 사용되면 당연히 그렇게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본문은 '반드시 그 한 마리를 위해 나머지를 버려두고 찾는다'라는 뜻이다.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산에 그냥 남겨 둔다는 것은 인간의 상식으로는 다소 이해되지 않지만, 이 비유는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맡겨진 자들에 대해서는 한 영혼이라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말하자면,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이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 더 소중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착한 목자되신 예수님께서는 길잃은 양 한 마리일지라도 크나큰 관심을 갖고 계신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되찾은 양의 비유>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2-14).”
우리는 ‘길 잃은 양’을 ‘남’이 아니라 ‘나’로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고,
바로 ‘나’를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 없이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들 가운데에는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목자이신 예수님의 양이 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양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은 목자의 우리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들어가기를 거부해서 안 들어가는 것이니
그들이 구원받지 못하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자기들이 선택한 일이고, 자기들 탓입니다.
자기는 ‘길 잃은 양’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이라는 목자가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고,
그들도 역시 목자의 구원과 보호를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41).”
자기가 ‘길 잃은 양’이라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 시작됩니다.
인정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찾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목자 없는 양이 되어서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믿고 있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더라도
자만하거나 방심하면 안 됩니다.
‘되찾은 양’으로 확정되는 것은 끝까지 가 봐야 압니다.
배반자 유다처럼 되지 않는다고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고 인정하고 예수님을 따른 신앙인들 가운데에
대표적인 인물은 베드로 사도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체험하자 그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깨달았고,
동시에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달았습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라는 말은,
진짜로 예수님께서 떠나 주시기를 바란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권능에 압도되어서 한 말입니다.
(이 말은 두려움, 경외심 등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라는 말은,
자신이 예수님 앞에서 얼마나 비천한 존재인지를 깨달았다는 고백입니다.
(“저는 주님의 구원이 절실하게 필요한 죄인일 뿐입니다.” 라는 뜻입니다.)
베드로 사도에게 이런 깨달음, 인정, 고백 등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시 응답할 수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루카 5,11).”
(이렇게 그는 ‘길 잃은 양’에서 ‘되찾은 양’으로 바뀌었는데,
예수님의 제자가 된 뒤에도 여러 번 왔다 갔다 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끝까지 방심하거나 자만하면 안 됩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에 나오는 ‘백 마리, 아흔아홉 마리’ 라는 말은,
특별한 뜻이 없고, 양을 되찾았을 때의 기쁨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라는 말씀은,
‘길 잃은 양’을 찾기를 바라는 목자의 애타는 심정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고,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라는 말씀은, 목자의 기쁨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내가’ 회개하지 않고, 불성실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나’ 때문에 몹시 안타까워하십니다.
(‘내가’ 길을 잃고 방황하다가 당신을 아예 떠나버리게 될까봐 걱정하십니다.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해서입니다.)
그랬다가 ‘내가’ 회개하고 당신께로 되돌아가면, 예수님은 크게 기뻐하십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그 기쁨이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루카 15,23-24).”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루카 15,32).”
‘내가’ 회개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을 떠나서 죽음을 향해서 가는 것입니다.
(사실상 죽어 있는 것입니다.)
‘회개’는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님께로 되돌아가는 일이기 때문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일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살리려고 당신의 목숨을 바치신 분입니다.
그래서 내가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을 떠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헛된 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되고,
그분께 큰 슬픔을 안겨 드리는 일이 됩니다.)
‘대림 시기’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면서,
회개와 속죄로써 예수님을 잘 맞이할 준비를 하는 시기입니다.
(재림하실 예수님을 기다리면서 준비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어디 먼 곳에 떨어져 계시다가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으로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예수님은 ‘길 잃은 양’인 ‘나를’ 언제나 항상 찾으시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쪽에서도’ 목자이신 예수님께 되돌아가려는 노력을,
또 예수님과 함께 살기 위한 노력을 언제나 항상 해야 합니다.
(회개와 속죄는 대림 시기에만 할 일이 아니라,
평소에 늘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모든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 이 구절은 인생의 허무함을 잘 말해 줍니다. 이 세상에서 몇 십 년 부귀영화를 누린다 하더라도 우리 인생은 결국 풀같이 말라 버리고 꽃처럼 시들어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겪은 칠팔십 년의 세월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말하기에는 무엇인가 빠진 듯합니다. “우리가 정성 들여 살았던 날마다의 시간들이 그저 허무 속으로 사라지는 것일 뿐입니까?” 하고 묻게 됩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 이 구절에는 삶의 허무함을 구원으로 이끄는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날마다 허무 속으로 사라지는 우리의 시간들이 하느님의 말씀 속에 머무르게 되면 그것들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가치를 얻게 됩니다.
양을 키우는 목동이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았을 때, 얻는 기쁨이 크다고 합니다. 길을 잃지 않은 다른 양들은 안전하고 풍성한 초원에서 은총의 풀을 뜯고 있어 걱정이 되지 않습니다.
안전한 양들은 하느님의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영혼들을 표상합니다. 길 잃은 양 한 마리는 구원이 위태로운 한 영혼을 표상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영혼이 구원받기를 바라십니다.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도 그의 영혼은 하느님의 구원을 받을 만큼 소중하고 존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음의 골짜기에서 방황할 때 우리를 찾아오시는 구세주의 사랑이 언제나 우리 가까이에 있음을 기억합시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구원의 빛은 매우 하찮고 허무한 일들 속에서 솟아납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