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대림 제2주간 수요일] 내 멍에 (마태 11,28-30)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고 한다. (이사야 40,25-31)
25 “너희는 나를 누구와 비교하겠느냐? 나를 누구와 같다고 하겠느냐?” 거룩하신 분께서 말씀하신다. 26 너희는 눈을 높이 들고 보아라. 누가 저 별들을 창조하였느냐? 그 군대를 수대로 다 불러내시고, 그들 모두의 이름을 부르시는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능력이 크시고 권능이 막강하시어, 하나도 빠지는 일이 없다.
27 야곱아, 네가 어찌 이런 말을 하느냐?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 이렇게 이야기하느냐? “나의 길은 주님께 숨겨져 있고, 나의 권리는 나의 하느님께서 못 보신 채 없어져 버린다.” 28 너는 알지 않느냐? 너는 듣지 않았느냐? 주님은 영원하신 하느님, 땅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줄도 지칠 줄도 모르시고, 그분의 슬기는 헤아릴 길이 없다. 29 그분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
30 젊은이들도 피곤하여 지치고, 청년들도 비틀거리기 마련이지만, 31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
시편 103(102),1-2.3-4.8과 10(◎ 1ㄱ)
◎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 ◎
○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없애시는 분. 네 목숨을 구렁에서 구해 내시고, 자애와 자비의 관을 씌우시는 분. ◎
○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는 더디시나 자애는 넘치시네. 우리를 죄대로 다루지 않으시고, 우리의 잘못대로 갚지 않으시네. ◎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고 하시며,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고 하신다. (마태 11,28-3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대림 제2주간 수요일 제1독서 (이사40,25-31)
"너는 알지 않느냐? 너는 듣지 않았느냐? 주님은 영원하신 하느님, 땅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줄도 지칠 줄도 모르시고, 그분의 슬기는 헤아릴 길이 없다. (28) 그분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29) 젊은이들도 피곤하여 지치고, 청년들도 비틀거리기 마련이지만,(30)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 (31)
이사야서 40장 27절에서는 수난과 징계 가운데서 주님께 대한 절대 신앙이 흔들리는 선민을 향한 책망이 소개되었다. 이제 이사야서 40장 28절과 29절에서는 창조자이신 주님의 절대적인 능력과 은혜가 선포된다.
이사야서 40장 28절은 두 번 거듭되는 질문으로 시작된다. 이것은 이사야서 40장 21절 상반절과 동일한 질문이지만, 미완료가 아닌 완료 시제가 사용되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미 알고 있으며 들었다는 사실을 보다 더 강조한다.
여기서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하느님의 구원 능력을 믿지 못하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그들은 이미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고 있고, 그들은 그들 조상에게 역사하신 하느님의 권능을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며, 그들으르 증거된 율법의 말씀을 통해서도 하느님께서 얼마나 신실하시며 크신 권능을 소유하고 계신 분이신지를 이미 들었음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하느님의 사랑과 그분의 신실하심을 의심햇던 것을 향하여 이사야 예언자는 그만큼 그들을 휘감고 잇는 어두움의 잔재가 짙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그들을 향해 하느님의 영원하심, 그분의 전능하심, 신실하심과 한결같으심의 면모를 선포하며 다시금 하느님을 신뢰할 것을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 처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하느님께서는 두 가지 호칭으로 소개되고 있다. 서두에 나오는 '엘로헤'(ellohe)의 기본형 '엘로힘'(ellohim)은 하느님의 전능하심이나 창조주되심을 강조할 때, 그분의 능력의 크고 위대하심을 강조할 때 사용되는 호칭이다.
이어 제시되는 '예호와'(yehowa ;주님)은 구약에서 가장 빈번하게 사용된 신명(神名)으로 기본적으로는 '스스로 계신 분'이란 의미를 지니며, 구약에서는 하느님과 그 백성 사이의 계약 관계를 성실히 지키시는 하느님의 면모를 강조할 때 사용하는 호칭이다.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것은 지금 그들에게 권고의 말씀을 주시는 하느님을 향한 그들의 신앙을 회복시키기 위함이다.
그분은 이 피조 세계에 속하지 아니한 창조주로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동시에 지금도 그들과 맺은 계약을 잊지 아니하시고 당신의 계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돌보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이러한 하느님의 신명(神名)을 연이어 제시한 것은 하느님께서 전능하신 능력으로 당신의 백성과 맺은 계약을 잊지 아니하시고, 그들이 어디 있든 지키시며 보호하실 것이라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을 제시되는 '땅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라는 명칭은 주 하느님의 창조주 되심을 더욱 구체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다.
여기서 '땅끝까지'에 해당하는 '케초트 하아레츠'(qetsoth haarets ;the ends of the earth)의 '땅끝'이라는 표현은 하느님의 백성들이 원래 당하는 시련과 그로 말미암아 위축된 상태와 선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가장 끝에 있는 것, 극단에 있는 것조차도 창조하신 하느님의 전능을 상기시켜 준다.
이러한 명칭은 시련 가운데 위축당한 백성들에게 하느님께서 얼마나 크고 위대하신 분이신지를 알려주면서, 동시에 그들을 극단의 위기 가운데서도 구원하시고 새롭게 조성하실 수 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피곤한 줄도 지칠 줄도 모르고'
이사야서 40장 28절은 주 하느님께서 무한한 힘과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임을 드러낸다. 여기서 '피곤한'에 해당하는 '이아프'(iap ;tired), '지칠'에 해당하는 '이가 으'(igah ;weary)인데, 여기서 '이가으'의 원형 '야가으'(yagah)는 힘에 부치도록 심한 노동을 한 결과 기진맥진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께서는 혼자서 온 우주를 창조하셨지만 결코 기진맥진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를 능력의 말씀으로 붙들고 완전한 섭리로 움직이고 계시지만, 결코 피곤을 느끼시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과는 딜리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피곤함을 느끼지 않으시며, 그 능력에 있어서 무한한 분이신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자신이 피곤하고 지치고 위축되고 쇠약해지면, 하느님의 능력과 역사하심까지도 과소평가하고, 자신의 범주에서 판단하기 일쑤이다 (창세18,11-14 ;민수11,14 ;15,21-23).
따라서 이사야는 하느님의 이러한 면모를 강조하며, 그들이 피곤하고 지쳐도 하느님께서는 결코 피곤하시조 지치지도 않으시기에, 그들을 향한 구원을 포기하지 않고 온전히 성취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고취시키는 것이다.
'그분의 슬기는 헤아릴 길이 없다'
이 구절은 인간으로서는 하느님의 슬기가 어느 정도까지인지를 결코 파악할 수도 없으며, 헤아릴 수도 없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여기서 '헤아릴 길이 없다'에 해당하는 '엔 헤케르'(en heqer)에서 '엔'(en)의 원형 '아인'(ain)은 '존재하지 않다'는 의미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무'(無), '공허'를 의미한다.
그리고 '헤케르'(heqer)는 '측량하다'(1열왕7,47), '숫자를 헤아리다'(예레46,23)는 뜻의 동사 '하카르'(haqar)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속량함', '계산(계수)함' 등의 의미를 지닌다. 즉 이것은 '측량이 절대 불가능함'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느님의 슬기는 인간의 조사 범위를 뛰어넘는 명철함이다. 또한 인간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아무리 연구하고 깊이 생각한다 할지라도, 그 명철함의 한계를 발견해 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잠시 당신 백성을 외면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때에도,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스러운 일을 계획 가운데서 진행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본절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고난 가운데 있는 하느님의 백성들이 참으로 취해야 할 태도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하며, 또한 이러한 태도를 취하는 자들에게 주어질 축복이 무엇인지를 약속해 준다.
자신의 유한선을 깨닫고 하느님의 무한하심과 전능하심을 깨닫는 자들은 비록 고난 가운데 있더라도,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자신의 힘과 지혜를 의지하지 않고 하느님의 권능과 지혜를 의지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즉 그들은 자신의 무력함과 한계를 인정하며 하느님만이 진정으로 의지할 분이시며, 참되고 온전한 도움이시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하느님께 도움을 구하게 된다. 그렇게 살아가는 자는 하느님의 권능을 힘입으며 이 땅에서 더욱 더 능력있게 살아갈 수 있다.
'주님께 바라는 이들'에 해당하는 '웨코예'(weqoye)의 원형 '카와'(qawa)는 참을성있게 기다리는 것, 혹은 위를 쳐다보면서 대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어두운 밤이 빛(광명)을 바란다는 문맥(욥기3,7), 하루 종일 노동한 품군이 품삯을 바란다는 구절(욥기7,2), 고난 가운데서 주 하느님의 도우심을 대망한다는 구절 (시편25,5 ;39,8) 등에서 사용되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인생의 고난의 시기일지라도 광명의 아침을 가져다주실 주 하느님을 참을성있게 대망하는 자들은 결코 실망하지 않는다. 이런 사실은 '새 힘을 얻고'라는 표현에서 잘 드러난다.
여기에 해당하는 '야할리프 코아흐'(yahalipu koah)는 문자적으로 '그들은 힘을 움트게 할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얼었던 땅이 녹으면서 땅 속에서 새싹이 나오듯이 새 힘이 지속적으로 솟구쳐 오르며 강성해지게 되는 것을 생동감있게 묘사한 것이다.
본문의 동사 '야할리프'(yahalip)의 원형 '할라프'(hallap)는 나무에서 싹이 나는 것(욥기14,7), 땅에서 풀이 돋아나는 것(시편90,5)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사역 능동형 3인칭 복수로 사용되어 주님을 바라는(앙망하는) 자들에게 힘이 솟아나게 될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의미한다고 해서 금방 암울하고 고통스러운 환경 자체를 뒤바꾸시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를 의지하는 백성들에게 샘솟듯이 솟구치는 능력, 왕성하고 지속적인 생명력을 부여하신다.
그래서 하느님의 백성들은 그 힘을 의지하며 현실의 어두움에 주눅들지 않고, 오히려 그 어두움 가운데서도 빛의 삶을 살며, 더 나아가 보다 적극적으로 찬란한 새벽이 여명을 열어 젖히는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것이다.
대림 제2주간 수요일 복음(마태11,28~30)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28~30)
'고생하고'로 번역된 '코피온테스'(kopiontes)는 '육체적으로 피곤하고 지치다', '감정적으로 용기를 잃고 낙담하다'는 뜻을 가진 '코피아오'(kopiao)의 현재분사 2인칭 복수 호격이다.
희랍어에 있어서 분사형이 진행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것은 한 번 낙담하거나 지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계속 지치고 낙담 중에 있는 사람들아' 라는 뜻이다.
그리고 '짐을 진 너희는'으로 번역된 '페포르티스메노이'(pephortismenoi)는 '남에게 어떤 짐을 지우다'라는 뜻의 '포르티조'(photizo)의 현재 완료 수동 분사 2인칭 복수 호격이다. 그러니까 이들은 '누군가에 의해 무거운 짐이 지워진 자들'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지워진 짐은 무엇인가? 그 짐은 일차적으로 바리사인들과 율법학자들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요구한 무거운 율법적 관행들(마태23,4)이며, 더 나아가 '마귀들의 꾐에 넘어가 지은 죄의 짐'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란, 당시 로마의 압제 속에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치고 낙담한 사람들이며, 당시 종교적 관행이 요구한 율법의 짐과 마귀들의 꾐에 넘어가 지은 죄의 짐 사이에서 눌려 있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한편,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에서 '안식을 주겠다'에 해당하는 '아나파우소'(anapauso)는 '쉬게 하다','영적인 휴식을 주다', '안식하다'라는 뜻을 가진 '아나파우오'(anapauo)에서 유래했다.
특히 '아나파우오'에서 유래한 명사 '아나파우신'(anapausin)은 '쉼'이라는 뜻인데, '안식'과 동의어이다(히브리서3~4장).
그리고 '내가'에 해당하는 '카고'(kago)는 '카이'(kai; and)와 1인칭 대명사인 '에고'(ego)의 복합어로서, '그러면 내가'라는 뜻이다.
본문에서 인칭대명사를 사용한 것은 동작의 주체를 강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원어의 뉘앙스를 살리면,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오는 지치고 피곤한 죄인들에게 '쉼'을 주시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쉼'(안식)은 인간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인데, 현재적인 '쉼'도 의미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천국에서 누릴 영원한 '안식'을 의미한다(히브3,18~4,11; 묵시14,13).
한편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마태11,29)에서 '온유'로 번역된 '프라위스'(prays; gentle meek)은 '친절하고 너그러운 태도'를 가리킨다(마태5,5).
그리고 '겸손'으로 번역된 '타페이노스'(tapeinos; humble; lowly)는 높아짐과 반대인 '낮아짐'(야고1,10), 심지어 지위와 신분을 낮춘 '비천함' (2코린7,6), 혹은 자신을 일부러 낮추는 '겸허','겸비'(2코린10,1)를 나타낸다.
이것을 종합하여 반영하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오는 사람들을 향하여 친절하고 너그러운 마음가짐과 일부러 자신을 낮추는 겸허한 자세를 가졌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셨지만 고난받는 인자(人子)의 모습을 취하셨고 (이사42,2.3; 53,1.2), 모든 권세를 받으신 만왕의 왕이셨으나 동시에 종이 되어 오셨으며, 높은 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종으로서의 삶을 사셨다. 그리고 당신 제자들에게도 그런 삶을 요구하셨다(마르10,43.44).
예수님께서는 낮고 비천한 자리에서 지치고 피곤한 자들에게 '눈높이 교육'을 하기위해 자신을 낮추셨으며,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취하시고 비천한 자리로 내려오셨던 것이다.
'진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30)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gar; for)로 시작되는 본문은 '주님의 멍에를 메고 그에게 배우면 왜 마음에 안식(쉼)을 얻는지'에 대한 이유를 밝혀 주는 이유 부사절이다. 그 이유는 주님의 멍에가 편하고 그의 짐은 가볍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본문은 '내 멍에는 편하고'의 전반부와 '내 짐은 가볍다'의 후반부가 동의적 평행 대구로 나열된 형태인데, 둘은 본질적으로 같은 뜻이다.
여기서 '멍에'로 번역된 '쥐고스'(zygos; yoke)는 가축이 짐수레를 효과적으로 끌 수 있도록 목에 씌우는 것을 가리키며, '짐'에 해당하는 '포르티온'(phortion)은 주로 배에 싣는 무거운 짐(burden)을 가리키는데(사도27,10), 여기서는 둘 다 비유적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이 '짐'은 율법학자들을 비롯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백성들에게 지운 무거운 종교, 의식적 행위들을 가리킨다(마태23,4; 루카11,46). 또한 '멍에' 역시 유대주의자들이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까지 강요한 무거운 율법적 행위들을 가리킨다(사도15,10).
반면에 주님의 멍에와 짐은 유대주의자들이 구원의 방도로 지키고 가르쳐 온 613가지의 교훈 및 규칙과는 다르게, 주님 자신의 가르침의 핵심인 '사랑의 계명'을 비유하는 표현이다.
<희망>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여기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이라는 말씀은,
온갖
억압을 받으면서 자유와 평화를 잃어버린
인간들의
모습을 가리키는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좁은
뜻으로는 유대교의 율법들 때문에 허덕이는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가리키는 말씀으로 해석되기도 하는데,
넓은 뜻으로는 인간의 인생 자체를 가리키는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코헬렛’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코헬 1,2)”
“그렇다,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그 모든 노고와 노심으로 인간에게
남는 것이 무엇인가? 그의
나날은 근심이요 그의 일은 걱정이며 밤에도 그의 마음은 쉴 줄을 모르니 이
또한 허무이다(코헬 2,22-23).”
“자기의
노고로 먹고 마시며 스스로 행복을 느끼는 것보다 인간에게
더 좋은 것은 없다. 이
또한 하느님의 손에서 오는 것임을 나는 보았다.
그분을
떠나서 누가 먹을 수 있으며 누가 즐길 수 있으랴?
하느님께서는
당신 마음에 드는 인간에게 지혜와 지식과 즐거움을 내리시고 죄인에게는
모으고 쌓는 일을 주시어 결국
당신 마음에 드는 이에게 넘기도록 하신다.
이
또한 허무요 바람을 잡는 일이다(코헬 2,24-26).”
하느님 없이 사는 사람의 인생은 허무일 뿐이고, 의미 없는 짐이고 멍에일 뿐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만이
우리를 ‘허무’에서 벗어나게 해 주실 수 있고,
우리를
온갖 억압에서 해방시켜 주실 수 있음을 뜻합니다.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참된 자유와 평화와 행복을 주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라는 말씀은,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라는 말씀은, “나의 제자가 되어라.”,
즉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 되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멍에’ 라는 말은, 예수님의 복음과 계명 등을 가리키는,
일종의
반어법적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복음과 계명들과 가르침들은 결코 멍에가 아닙니다.
‘사랑’이고, 참된 안식을 얻기 위한 열쇠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9-10).”
‘사랑’이
멍에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예수님의 계명들도 멍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계명들을 실천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 자유, 생명, 평화, 안식을 얻기 위한 노력이고,
동시에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니까 기쁨으로 실천한다는 것입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라는 말씀도 반어법적 표현입니다.
이
말씀을 뜻에 따라서 다시 풀이하면,
“내
멍에는 너희의 멍에를 벗겨주는 ‘편안함’이고,
내
짐은 너희를 짐에서 해방시켜 주는 ‘가벼움’이다.”입니다.
즉
“나를 믿고 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을 실천하면,
너희는 멍에에서 벗어나서 편안해질 것이고, 짐에서 해방될 것이다.”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예수님의 ‘대속’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하면,
“내가
너희에게 편안함을 주기 위해서 너희의 멍에를 대신 메겠다.
너희를
짐에서 해방시켜 주기 위해서 너희의 짐을 내가 대신 지겠다.”로
풀이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덕분에 우리가 죄에서 구원되었고,
예수님의
죽음 덕분에 우리가 죽음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기 때문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을 실천하면,
바로
온갖 억압들과 고통들에서 해방되는가?
우리는
인생살이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해도 여전히 인생은 어렵고 힘든 것이 현실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나오는 가시덤불이 우리의 현실을 잘 나타냅니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마태 13,22).”
예수님의
가르침을 몰라서 숨이 막히는 것이 아니라,
알지만
인생살이의 어려움들이 너무 무거워서 숨이 막힙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베드로
1서 저자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받을 은총에
여러분의
모든 희망을 거십시오(1베드 1,13).”
무엇을
희망하느냐에 따라서 고난을 받아들이는 마음 자세가 달라집니다.
헛된
것에 희망을 두면 온갖 유혹과 고난에 무방비 상태가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것을 희망하는 사람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어도 굴하지 않고 나아가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로마 8,24).”
믿음도
필요하고 사랑도 필요한데,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희망입니다.
올바른 희망에서 올바른 신앙 여정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예수님께서 삶의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사람들을 초대하십니다.
그들이 짐을 내려놓고 쉬도록 부르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외면이나 내면의 짐을 지게 됩니다.
외면의 짐은 질병과 가난,
가족의 생계를 꾸리는 부담 등 외적인 결핍으로 생기지만
우리가 노력하면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내면의 짐은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성격의 차이,
마음의 황폐함과 강박감, 우울증 등
내적인 결핍으로 평생을 달고 다녀야 하는 어려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온유한 마음,
겸손한 마음이 인간의 멍에를 가볍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고통과 짐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그 짐의 강도는 달라집니다.
우리의 재산을 재벌과 같은 수준으로 놓고,
백세의 무병장수를 찾는다면 대다수의 사람은 매우 불행합니다.
우리 마음의 갈등과 고통을 이상 세계에 올려놓고 보면 우리는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게 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셨지만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우리는 평범한 일에도 감사하게 됩니다.
거룩한 신성을 감추시고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나 살아가신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
우리는 행복한 추억을 많이 갖게 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돌아가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우리는 삶의 고통과 십자가를 이겨 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지치지 않는 힘,
독수리처럼 하늘 높이 올라가는 생명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연약한 성녀 루치아 동정녀는 우리에게 그러한 삶을 보여 줍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St Lucy-LIPPI. Filippino. Panel.Museo dell’Opera del Duomo, Prato
축일;12월 13일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Santa Lucia Vergine e martire
St. Lucy of Syracuse
c.283 at Syracuse, Sicily -
stabbed in the throat c.304 at Syracuse, Sicily; her relics are honoured in churches throughout Europe
Canonized;Pre-Congregation
Lucia = luminosa, splendente, dal latino(luminous, dazzling)
Name Meaning;light; bringer of light (= Lucy)

성녀 루치아(304년)는 시실리의 시라쿠제에서 태어난 귀족의 딸이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신앙을 배워 익히며 자랐으나,
아기 때에 부친을 잃음으로써 곤경에 빠지기도 했지만
스스로 하느님께 동정 서원을 하고 이 사실을 비밀로 간직하며 성장하였다.
처음에는 어머니의 결혼 강요에 시달렸지만, 딸의 설득에 감복한 어머니가
성녀 아가다의 무덤에서 기도한 후에 딸에게 자유를 주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그녀의 청혼자가 집정관에게 고발했는데, 이때부터 성녀는 갖가지 고문에 시달렸다.
재판관이 그녀를 매음굴로 보냈으나 하느님께서 그녀를 요지부동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실패했고,
태워 죽이려 했으나 그것도 성공하지 못하자, 입 속에 칼을 찔러 무참히 살해하였다.
성녀 루치아는 4세기 이래 가장 빛나는 동정 순교자로 공경받으며,
눈병을 앓는 사람들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전설이 있다.
(성바오로딸수도회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