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3주간 월요일]임마누엘 (마태 1,18-24)
예레미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시리니, 그의 시대에 유다가 구원을 받고, 이스라엘이 안전하게 살리라고 한다. (예레 23,5-8)
5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6 그의 시대에 유다가 구원을 받고, 이스라엘이 안전하게 살리라.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고 부르리라.
7 그러므로 이제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때에는 사람들이 더 이상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살아 계신 주님을 두고 맹세한다.” 하지 않고, 8 그 대신 “이스라엘 집안의 후손들을 북쪽 땅에서, 그리고 당신께서 쫓아 보내셨던 모든 나라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살아 계신 주님을 두고 맹세한다.” 할 것이다. 그때에 그들은 자기 고향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시편 72(71),1-2.12-13.18-19ㄱㄴ(◎ 7ㄴㄷ 참조)
◎ 주님, 이 시대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
○ 하느님, 당신의 공정을 임금에게, 당신의 정의를 임금의 아들에게 베푸소서. 그가 당신 백성을 정의로, 가련한 이들을 공정으로 다스리게 하소서. ◎
○ 그는 하소연하는 불쌍한 이를, 도와줄 사람 없는 가련한 이를 구원하나이다. 약한 이, 불쌍한 이에게 동정을 베풀고, 불쌍한 이들의 목숨을 살려 주나이다. ◎
○ 주 하느님,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찬미받으시리라. 그분 홀로 기적들을 일으키신다. 영광스러운 그 이름 영원히 찬미받으시리라. 그 영광 온 누리에 가득하리라. ◎
요셉은 꿈에 천사가 나타나, 마리아의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라고 하자, 그대로 한다. (마태 1,18-24)
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20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22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23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24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대림 제3주간 월요일 제1독서(예레23,5-8)
남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게 될 심판의 원인과 결과를 강조한 12개의 단편 예언이
수록된 예레미야서 제2장~25장 중에서, 예레미야서 23장 1절부터 8절까지는
아홉번째 예언에 속한다.
즉 남부 유다의 왕가에 대한 예언이 수록된 예레미야서 21장 1절~23장 8절의
마지막 단락을 이루고 있다.
앞선 에레미야서 21장, 22장에서는 치드키야, 살룸(여호아하스),여호야킴, 콘야(여호야킨 혹은 여콘야)등 남부 유다 왕국 마지막 통치기의 인물들이 직접 거명되는데, 이들의 죄악상과 더불어 그들 각각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가 제시되었다.
그리고 그 심판의 메시지는 각각의 왕들 개인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과 남부 유다 왕국과 유다 백성들 모두에 대한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특별히 마지막 부분에는 여호야킴의 아들 콘야의 자손들 가운데에서 남부 유다를
다스릴 왕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예언되었다(예레22,30).
이 콘야 왕은 당시 남부 유다 백성들에게 다윗의 계보를 잇는 정통성있는 왕으로
여겨졌으므로, 이같은 메세지는 남부 유다 왕국에 아무런 희망을 찾아볼 수 없다는
매우 절망적인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남부 유다 왕가에 대한 예언을 마무리하는 예레미야서 23장 1절 이하
8절에서는 분위기가 완전히 전환되어 남부 유다 백성들에게 매우 희망적인
메시지가 전달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예레미야서 21장, 22장과 달리 예레미야서 23장에서는 남부 유다 백성이
이제까지 백성들을 잘못 인도한 여러 유다 왕들과 공동 운명체로서 다루어지지 않는다.
심판은 유다 민중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한 각각의 왕들에게 주어질 것이며(1~2절),
포로로 잡혀간 선민들은 귀환하게 되고,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왕을 세워주실 것이라고
예언된다(3~4절).
그리고 이어지는 예레미야서 23장 5,6절 단락에서는 이 새로운 왕에 대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예레미야서 23장 7,8절 단락에서는 장차 도래할 포로민의
귀환과 남부 유다 왕국의 회복을 확증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인간의 패역부도와 죄악에도 불구하고 주도적인 권한으로 역사하시고 자비와 은총으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면모를 드러내 보여주며,
보다 거시적인 구원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모든 성도들의 참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예표하고 있다고 하겠다.
'내 목장의 양 떼를 파멸시키고 흩어버린 목자들!'
본문은 하느님의 저주와 심판의 대상을 밝히고 있다.
이것을 나타내는 '목자들'에 해당하는 '로임'(roim)은 '목자'라는 의미를 가진
'라아'(raah)의 복수형이다.
즉 '목자들'이라는 의미로서 남부 유다 말기의 왕들, 특별히 에레미야서 21장, 22장에서 언급된 네 명의 왕들과 더불어 예레미야 예언자 당대의 왕국 관료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한 국가의 왕을 '목자'로 나타내는 것은 고대 근동에서 드문일은 아니었다.
특별히 목축업과 상당히 많은 권력을 가진 이스라엘 백성에게 '목자'라는 단어는
보호와 인도와 돌봄의 이미지를 피부로 느낄 수 있게 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자신이 치는 가축과 동고동락하면서 그들을 잘 돌보는 역할을 하는 목자의
이미지는 하느님의 양 떼를 불행의 길로 인도한 남부 유다의 왕들과 대조되면서
그들이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목자들이 저주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이유인 목자들의 행태가 두 가지 동사로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각각 '파멸시키고'와 '흩어버린'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이 중에서 '파멸시키고'에 해당하는 '메압베딤'(meabbedim)의 원형 '아바드'
(abad)는 '죽다', '사라지다'라는 의미이며, 본문에서처럼 강조형으로 쓰일 경우
'죽게 하다', '멸망케 하다'라는 사역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흩어버린'에 해당하는 '우메피침'(umephitsim)은 '푸츠'(phuts)의 사역형으로서 '널리 흩어 보내다', '몰아내다', '쫓아내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전쟁에 패하여 뿔뿔이 흩어지는 것(2열왕 25,5)과 더불어 이방 땅으로
포로로 끌려가는 것(느헤1,8)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결국 이 동사는 남부 유다 왕국의 왕들이 패전으로 인한 백성들의 죽음과 남부 유다
왕국의 멸망 및 남부 유다 백성들의 바빌론 유배의 원인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왕들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 평가와 대조적으로 남부 유다 백성들을 상징하는
'양 떼'에 대해서는 '내 목장의'라는 표현으로 수식하고 있다.
여기서 사용된 1인칭 접미어 즉 '나의 소유'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표현은 남부 유다 백성들이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특별한 백성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5ㄷ)
본문은 하느님께서 남부 유다에 새로운 왕을 세우실 것이라는 사실을 은유적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사용된 '싹'에 해당하는 '체마흐'(tsemah)는 나무 줄기나 땅에서 새롭게
돋아나는 싹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이사야서에서 두 번 사용되었는데(이사4,2; 61,11), 특히 이사야서 4장 2절의 문맥에서 본문의 예언과 동일하게 장차 하느님의 나라를 이끄실 메시아를 지칭하는데 사용되었다.
또한 즈카리야서 3장 8절과 6장 12절에서도 이 용어의 사용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것은 이 표현이 이상적인 왕 메시아를 나타내는 전문 용어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이처림 메시아께서 한 싹으로 나신다는 비유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는 이전의 왕들과 전혀 다른 왕이 될 것이라는 사실과, 또 하나는 남부 유다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느님의 주도적인 능력에 의해 새로운 왕이 나타나실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이다.
사실 남부 유다 왕조의 역사는 패역부도한 인간의 본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역사로서 인간 왕에게는 어떤 기대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한 여호야킨이 끝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바빌론 땅에서 그 삶을 마무리하고, 그나마 왕으로 세워진 치드키야 마저 바빌론으로 끌려갔을 때, 다윗 왕조는 완전히 끝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왕조가 완전히 끊어져 버린 것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과거에 있었던 패역부도한 이런 왕들의 흐름을 끊고, 새 역사를 창조해 나갈 진정한 왕을 세워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와 관련해 세례자 요한의 부친 즈카리야는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다윗 집안에 일어날 메시아의 탄생을 예언한다(루카1,69.78.79).
대림 제3주간 월요일 복음(마태1,18-24)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19)
마태오 복음 1장 19절의 '의로운 사람'으로 번역된 '디카이오스'(dikaios;
a righteous man; a just man)는 '의로운', '정직한, '하느님과 인간의
법률을 준수하는' 등의 뜻을 지닌 형용사이다.
이것은 요셉이 구약에 나타난 하느님의 율법을 쫓아 경건하게 살아가는 사람
이라는 것과 부정한 것은 용납하지 않는, 곧은 성격의 소유자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래서 그는 마리아의 잉태 소식을 접하고는 혼외관계로 인해서 잉태한 것으로
인식하고, 그녀와의 정혼 관계를 끊으려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율법대로 마리아를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며 처벌하지
않으려 했던 이유는 아마도 마리아를 향한 그의 사랑이 깊었기 때문이며,
그의 성품 자체가 온유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메'(me; not)는 부정을 나타내는 부정 부사이며, '텔론'(thelon; willing)은
'자발적으로 ~할 의향을 갖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 '텔로'(thelo)의
능동태 현재 분사형이다.
따라서 '싶지 않았으므로'로 번역된 '메 텔론'(me thelon)은 마리아의 요청에
의해서가 아니고, 요셉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서 그녀의 임신 사실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않기로 결심한 사실을 보여 준다.
또한 '마리아의 일을'로 번역된 '아우텐'(auten)은 남성 3인칭 단수 대명사
'아우토스'(autos)의 여성형 목적격 단수이므로 '그녀를'(her)이라는 뜻이다.
즉 원문으로 볼 때, 요셉은 혼외 임신이라는 잘못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엄청난 일을 범한 것으로 추정되는 마리아에 관심을 두었음이
잘 드러나고 있다.
한편, '드러내고'라는 의미로 번역된 '데이그마티사이'(deigmatisai; to make
a public example)는 원형 '데이그마티죠'(deigmatizo)의 부정사형인데,
'데이그마티조'(deigmatizo)는 '본보기'(an example), 특히 '경고의
의미에서의 본보기'를 보여 주는 것을 나타내는 동사로서 '본보기를 만들어
앞에 내놓다', 또는 '공적으로 불명예를 주기 위해 폭로하다'는 의미이다.
본문은 요셉이 하느님의 율법대로 경건하게 살아가는 의로운 사람임을 소개하며,
자기가 정혼한 마리아의 임신이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을 그가
마리아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할지라도, 그러한 초자연적인 일을 경험한 일이
없음으로 인해 마리아의 임신을 혼외 관계로 여길 수밖에 없었던 그가
얼마나 상심하며 고민했을지를 엿보게 한다.
결국 고민끝에 요셉은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지만, 마리아를 깊이 아끼고
사랑한 까닭에, 당시 그런 죄목이라면 마리아의 부정을 공개적으로 폭로하여
모욕을 주고 돌에 맞아 죽게 하는 것이 관례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그렇게
하지 않으려는 강한 결심을 했던 것이다.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여기서 '마리아와'로 번역된 '아우텐'(auten)은 '그녀를'이라는 목적격 인칭 대명사이다.
그리고 '남모르게'로 번역된 '라트라'(lathra; privily; quietly)는 '비밀히'
(secretly)라는 의미를 지닌 부사로서,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알리지 않고
조용히 마리아와의 관계를 처리하기로 한 요셉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한편 '파혼하기로'로 번역된 '에불레테 ~ 아폴뤼사이'(ebulethe ~apolysai;
had in mind to divorce)에서 '에불레테'(ebulethe)는 소원하고 바라는 것,
즉 의도적으로 어떤 일을 수행하고자 하는 주어의 단호한 의지를 나타내는
동사 '불로마이'(bulomai)의 직설법 부정 과거 수동태이다.
여기서는 '불로마이'(bulomai)가 수동이 아닌 능동의 의미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아폴뤼사이'(apolysai)는 원형 '아폴뤼오'(apolyo)의 부정사
부정 과거 능동태형인데, '아폴뤼오'(apolyo)의 기본적인 의미는
노예, 죄인 등 구속된 사람을 자유롭게 놓아 보내는 것을 나타낸다.
이 단어는 신약에서 대부분 이런 의미로 쓰였으며, 그 외 모임을 해산하거나,
선교사를 파견하거나, 사람을 떠나 보내거나, 아내를 버리는 것,
즉 이혼하는 것 등의 의미로 쓰였다.
여기서는 이혼, 즉 정혼 상태를 깨뜨리는 것을 의미하므로, '에불레테
~ 아폴뤼사이'는 '파혼하여 떠나 보낼 것을 결심했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 과정과 결과를 이미 알고 있고,
모든
일이 하느님의 계획대로 된 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이 잘 만들어진 각본대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해서, 또 마리아와 요셉이 위대한 성인들이라고 해서
당연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일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하신 일들과
마리아와
요셉의 응답과 순종을 찬양하는 것은 마땅하고 옳은 일이지만,
하느님이시니까,
또 위대한 성인들이니까, 라고만 생각하고 그친다면,
그것은
찬양하고 공경하는 태도가 아니라,
남의 일을 구경하면서 감탄하는 구경꾼의 태도가 될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신 일들의 위대함은 그 일들의 결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온갖
난관을 극복하는 과정에도 있습니다.
또
성인들은 원래 성인이었던 분들이 아니라,
어렵고 힘든 처지에서도 끊임없이 노력하고 또 노력해서 성인이 된 분들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노력’을 본받아야 하고 공경해야 합니다.
(결과만 보지 말고 과정을 먼저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마태 1,18-19).”
아마도 마리아는 예수님을 잉태하자마자
곧바로
요셉에게 그 사실을 알렸을 것입니다.
여기서
‘드러났다.’ 라는 말은 저절로 드러났다는 뜻이 아니라,
요셉이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마리아가
알려 주었으니까 요셉이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의로운
사람’이라는 말은 원래는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자비로운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요셉은
율법보다는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었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요셉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 2,27).”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한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라는 말은,
“마리아를 보호하고 싶었으므로” 라는 뜻입니다.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라는 말은,
요셉이
마리아의 잉태 사실을 감추려고 했다는 뜻이 아니라,
파혼
사실을 감추려고 했다는 뜻입니다.
어차피
때가 되면 잉태 사실은 사람들에게 알려질 일입니다.
그러나
파혼 사실을 감추면,
사람들은
태어난 아기를 요셉의 아기로만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마리아와 아기는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 1,20-21)”
여기서
‘두려워하지 말고’ 라는 천사의 말은,
요셉이
두려움, 고민, 고통 등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아마도
요셉은 파혼해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면서,
많이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하느님께 묻는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기도하고 또 기도했을 것입니다.
천사가
나타난 것은 그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요셉의 응답만 생각하는데, 하느님의 응답도 중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천사를 나중에 보내셨을까?
처음부터
보내셔서 미리 알려 주셨다면 더 좋았지 않았을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응답하기를 바라신다.”
(당신의
명령에 우리가 수동적으로 복종하는 것을 강요하시지 않고,
스스로
선택하고 결단하고 응답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이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시간이 필요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천사가
요셉에게 한 말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잉태는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고, 잉태된 아기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다.
그
아기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이시다.
아기의
이름은 예수다.
요셉은
마리아의 남편이 되고 아기의 아버지가 되어서
마리아와
아기를 보호해야 한다.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니고, ‘계시’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천사는 다음과 같이 물었을 것입니다.
“너는 이 모든 일을 받아들이겠느냐?”
분명히
요셉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만일에 요셉이 거부했더라도 그것은 일반적인 의미의 ‘죄’는 아닙니다.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동참하기를 거부한다는 점에서는 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천사를
만난 뒤에 요셉은 즉시 행동했을까?
그랬을 수도 있지만, 아마도 또다시 기도하고 또 기도했을 것입니다.
천사의
말을 믿는다고 해도
행동으로
실천하기에는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뒤에 이사야서의 예언이 인용되어 있는 것은,
어쩌면 요셉이 기도와 성경 묵상을 했음을 암시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즉 이사야서에 있는 ‘임마누엘 예언’을 읽고서 천사의 말을 확신하게 되었고,
힘과 용기를 얻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천사의
말 가운데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라는 말도
요셉의
결단을 도와주는 중요한 작용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에는 요셉 자신도 포함됩니다.
즉
요셉은 자기 자신이 죄에서 구원받기 위해서도
하느님 뜻에 순종하겠다고 결심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예레미야는 ‘유다를 구원하는 주님’을 하느님께서 보내 주실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는 임금이 오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예언은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하고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알려줄 때 다윗 가문 안에서 구체화됩니다.
‘정의로운 주님’을 돌볼 사람으로 의로운 요셉이 간택되었습니다. 다윗의 후손으로서 구세주의 양아버지가 된 요셉 성인은 슬기롭게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님을 보호하였습니다. 그는 베들레헴에서 일어난 어린 아기들의 살육을 피해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을 이집트로 피신시켰고, 나자렛의 산골에 은거하며 구세주를 양육하였습니다. 요셉 성인은 자신이 한 일을 인정받으려 하지 않고 묵묵히 하느님의 인도를 따랐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천사가 전하는 말씀을 알아듣고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실천하였습니다.
요셉 성인은 인간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자신의 사명을 받아들인 사람이었습니다. 성가정을 지키려다 생긴 모든 고난과 어려움을 아무 불평 없이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요셉 성인은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지 않고 동정녀의 잉태를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영적 아름다움과 가치를 알아본 선견자입니다. 그는 하늘 나라의 모든 보물을 관리하고 우리에게 나누어 주는 구세주의 양아버지입니다. ‘성 요셉, 이 대림 시기에 당신 덕행의 보물을 저희에게 풍성히 나누어 주십시오!’
(류한영 베드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