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3주간 화요일]세례자 요한(루카 1,5-25)

단 씨족에 속한 마노아의 아내는 임신할 수 없는 몸이었는데, 모태에서부터 하느님께 바쳐진 나지르인이 될 아기를 낳고 그 이름을 삼손이라 한다. (판관 13,2-7.24-25)
그 무렵 2 초르아 출신으로 단 씨족에 속한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마노아였다. 그의 아내는 임신할 수 없는 몸이어서 자식을 낳지 못하였다. 3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그 여자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보라, 너는 임신할 수 없는 몸이어서 자식을 낳지 못하였지만, 이제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4 그러니 앞으로 조심하여 포도주도 독주도 마시지 말고, 부정한 것은 아무것도 먹지 마라. 5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기의 머리에 면도칼을 대어서는 안 된다. 그 아이는 모태에서부터 이미 하느님께 바쳐진 나지르인이 될 것이다. 그가 이스라엘을 필리스티아인들의 손에서 구원해 내기 시작할 것이다.”
6 그러자 그 여자가 남편에게 가서 말하였다. “하느님의 사람이 나에게 오셨는데, 그 모습이 하느님 천사의 모습 같아서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셨는지 묻지도 못하였고, 그분도 당신 이름을 알려 주지 않으셨습니다.
7 그런데 그분이 나에게, ‘보라, 너는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포도주도 독주도 마시지 말고, 부정한 것은 아무것도 먹지 마라. 그 아이는 모태에서부터 죽는 날까지 하느님께 바쳐진 나지르인이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24 그 여자는 아들을 낳고 이름을 삼손이라 하였다. 아이는 자라나고 주님께서는 그에게 복을 내려 주셨다. 25 그가 초르아와 에스타올 사이에 자리 잡은 ‘단의 진영’에 있을 때, 주님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즈카르야 사제의 아내 엘리사벳은 나이가 많은 여자였는데, 천사가 나타나 세례자 요한을 낳을 것이라고 한다. (루카 1,5-25)
5 유다 임금 헤로데 시대에 아비야 조에 속한 사제로서 즈카르야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으로서 이름은 엘리사벳이었다. 6 이 둘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들로,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7 그런데 그들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엘리사벳이 아이를 못낳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둘 다 나이가 많았다.
8 즈카르야가 자기 조 차례가 되어 하느님 앞에서 사제 직무를 수행할 때의 일이다. 9 사제직의 관례에 따라 제비를 뽑았는데, 그가 주님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기로 결정되었다. 10 그가 분향하는 동안에 밖에서는 온 백성의 무리가 기도하고 있었다.
11 그때에 주님의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나타나 분향 제단 오른쪽에 섰다. 12 즈카르야는 그 모습을 보고 놀라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13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14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 15 그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포도주도 독주도 마시지 않고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찰 것이다.
16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17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
18 즈카르야가 천사에게,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하고 말하자, 19 천사가 그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하느님을 모시는 가브리엘인데, 너에게 이야기하여 이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파견되었다. 20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
21 한편 즈카르야를 기다리던 백성은 그가 성소 안에서 너무 지체하므로 이상하게 여겼다. 22 그런데 그가 밖으로 나와서 말도 하지 못하자, 사람들은 그가 성소 안에서 어떤 환시를 보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몸짓만 할 뿐 줄곧 벙어리로 지냈다. 23 그러다가 봉직 기간이 차자 집으로 돌아갔다.
24 그 뒤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였다. 엘리사벳은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내며 이렇게 말하였다. 25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
대림 제3주간 화요일 제1독서(판관 13,2-7.24-25)
"이제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조심하여 포도주도 독주도 마시지 말고, 부정한 것은 아무것도 먹지 마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기의 머리에 면도칼을 대어서는 안된다. 그 아이는 모태에서부터 이미 하느님께 바쳐진 나지르인이 될 것이다. 그가 이스라엘을 필리스티아인들의 손에서 구원해 내기 시작할 것이다." (4~5)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잉태하여'로 번역된 '웨하리트'(weharith)는 접속사 '와우'(wau)와 '잉태하다', '임신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하라'(harah)의 변형 '하리트'(harith)가 결합된 형태이다. '하라'(harah)란 동사는 한 생명이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는 출생 과정이 시작되었음을 묘사하는 단어이다.
구약에서는 이러한 잉태 사실을 생략하고 아이를 낳는 것만을 묘사하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서 특별히 잉태 사실까지 언급하는 것은 이 잉태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은총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다. 한편,'낳을 것이다'로 번역된 '웨얄라드트'(weyalladth)의 기본형은 '얄라드'(yallad) 동사이다.
여기서 저자는 출생 과정의 시초를 묘사하는 동사 '하라'(harah)와 그 과정의 종료를 묘사하는 동사 '얄라드'(yallad)를 대조시켜 앞으로 있게 될 상황의 대반전을 극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즉 본문의 주님의 사자가 전하는 예언은 잉태의 근원이 완전히 뿌리채 뽑힌 절망적인 상태를 뒤집어서 정상적인 잉태와 출산의 과정을 통해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인 것이다.
'앞으로 조심하여'
'조심하여'로 번역된 '힛샤메리'(hischameri)는 직역하면 '너는 조심하라'(beware)이다. '힛샤메리'(hischameri)는 계약이나 율법 등을 '지키다', 소중한 것을 '보호하다' 라는 뜻을 가진 동사 '샤마르'(shamar)의 단순 재귀 명령형 여성 2인칭 단수로서, 그녀에게 말씀하시는 지시 사항을 유념하여 반드시 준수하라는 것이다.
마노아의 아내에게서 태어나게 될 아들은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께로부터 구별된 '나지르인'이었다(판관13,5). 따라서 마노아의 아내는 자신이 비록 나지르인이 아니었지만, 나지르인으로 태어날 아기의 거룩함과 성별됨을 위하여 그리고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사용되는 도구로서 나지르인이 지켜야 할 모든 법과 의무(민수6,2~21)를 주의하여 반드시 지키도록 하라고 요구받고 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계약과 무조건적인 은총의 축복 아래 있는 신약의 백성들도 하느님께로부터 하느님의 말씀과 명령에 주의하라는 '샤마르'(schamar)를 요구받게 된다.
왜냐하면, 이것이 구원의 축복을 계속 누리는 길이며, 우리를 구원하신 하느님의 거룩한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길이 되기 때문이다.
'포도주도 독주로'
'포도주'를 의미하는'야인'(yain)은 '거품이 일어나다'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는데, 포도가 발효될 때 일어나는 현상을 반영한 단어이다. 포도주는 사제들이 성전을 의미하는 만남의 천막에 들어갈 때도 마시는 것이 금지되었다(레위10,9).
그리고 '독주'로 번역된 '셰카르'(shekar)는 '(술)취하다'라는 뜻의 동사 '샤카르'(shakar)에서 파생되어 문자적으로 '취하는 것'이란 명사로서 술의 기능을 반영한 단어이다.
'독주'라는 번역에 반영된 것처럼,'셰카르'는 증류 가공 단계를 거쳐서 알콜의 순도가 높아진 '독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리로 만든 맥주와 다른 곡물이나 과일로 만든 모든 알콜 음료를 의미한다.
구약에서는 '셰카르'에 취한 몇 가지 사례가 있다 (1사무25,36; 1열왕16,9; 20,16; 이사28,7). 그리고 '셰카르'가 구약 성경에 등장할 때에는 흔히 포도주(아인)와 함께 기록되어 가장 보편적인 술인 포도주와 더불어 기타 모든 알콜성 음료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였다(레위10,9; 신명14,26; 미카2,11).
'마시지 말고 먹지 마라'
본문은 이중 명령문인데, 특이한 것은 금지 명령어로 모두 '알'(al)이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히브리어에서 부정어 '알'(al)이 동사의 미완료형과 함께 쓰이면 일시적 금지를 나타내는데, 본문이 바로 이와같이 쓰인 것이다.
따라서 마노아의 아내는 포도주, 독주 그리고 부정한 것을 평생 동안 금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 기간 동안만 금하면 되었다. 즉 나지르인으로 선택된 아들을 잉태하는 순간부터 출산하는 기간까지만,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않고, 부정한 것을 먹지 않으면 되었던 것이다.
반면에 판관기 13장 5절에서 나오는 그녀가 낳게 될 아기의 머리에 면도칼을 대지 말라는 명령에 대해서는, 본절과는 달리 영원한 금지를 나타내는 절대 부정어 '로'(lo)가 쓰였다. 이것은 나지르인으로 태어날 그 아들이, 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결코 머리를 잘라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정한 것은 아무 것도'
'부정한 것'으로 번역된 '타메'(tame)는 '불결하다', '더렵혀지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타메'(tame)에서 파생하여 '불결한','부정한'이라는 뜻을 갖게 된 형용사이다.
동사 '타메'는 구약 율법에서 전반적으로 기피해야 할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레위기 11~17장의 정결 유지법이나 레위기 18~27장의 실제적 성결 유지법에는 모든 관심이 '타메'에서 벗어나는 것에 모아져 있다.
이러한 부정에 관한 법령들은 이스라엘을 다른 민족들과 구별해 주며, 부정한 죄와 함께 공존할 수 없는 하느님의 거룩함을 그의 백성들에게도 요구하는 실물 교훈과 모형(히브8,5; 10,1)으로서의 의미를 지녔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도 특별히 하느님께 바쳐진 나지르인은 이러한 부정한 것으로부터 구별되는 삶에 가장 중요한 관심을 두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먹지도 만지지도 못하게 규정하신 모든 부정한 것, 즉 부정한 물고기와 새와 짐승들(레위11장), 그리고 시체 (민수6,6; 19,11; 레위21,11)를 나지르인에게 접하지 못하게 규제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민수6장).
한편, '아무 것도'로 번역된 '콜'(kol)은 '모든'(all)을 의미하는 명사로서 마노아의 아내가 하느님의 율법에 규정된 부정한 것 중, 단 하나라도 먹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나지르인은 아니지만 나지르인을 잉태한 자에게까지, 자신을 철저하게 성별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그 자신이 하느님의 도구됨을 깨닫고, 태어난 나지르인 자녀를 위하여 스스로 가다듬는 삶을 살 것을 교훈하기 위해서이다.
'머리에 면도칼을 대어서는 안된다'
'면도칼'로 번역된 '우모라'(umorah)는 접속사 '와우'(wau)와 '면도칼'이라는 뜻을 가진 명사 '모라'(morah)가 결합된 것이다.
'대어서는'으로 번역된 '야알레'(yaalleh)는 '올라가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알라'(alla)의 미완료형이다. 직역하면, '그리고 면도칼이 (그의 머리 위에)올라가게 하지 말라'이다.
히브리어 문법에서 금지 명령은 동사의 미완료형에 부정어 '로'(lo)나 '알'(al)을 사용하여 표현하는데, '로'(lo)를 사용하면 '절대적이고 영원한 금지'를 나타내는 반면에, '알'(al)을 사용하면 '일시적인 금지'를 나타낸다.
본문에서는 미완료형에 '계속적인 금지'를 나타내는 부정어 '로'(lo)를 사용하여 표현하였으므로, 머리에 면도칼이 올라가는 것, 곧 머리카락 자르는 것을 그의 평생동안 계속적으로 금지하라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삼손은 필리스티아 제후들의 금전 공세에 넘어간 들릴라에게 자신의 비밀을 누설함으로써 머리털을 밀리우게 되고(판관16,17~19), 결국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되고 만다.
'모태에서부터'
'모태'로 번역된 '합바텐'(habbaten)은 정관사 '하'(ha)와 '자궁','배'라는 뜻을 가진 '뻬텐'(beten)이 결합된 형태이다.
그리고 '~에서부터'로 번역된 '민'(min)은 '~으로부터'(from)이라는 출발 지점을 나타내는 전치사이다. 따라서 본문은 '그 태로부터'라는 의미이다.
새 성경은 출산 순간의 뉘앙스를 주지만, 원문 성경의 표현은 여인의 자궁에서 정자와 난자가 수정하는 순간을 의미한다. 삼손은 자궁 안에서의 수정 순간부터 하느님께 바쳐진 나지르인이 되는 것이며, 따라서 마노아의 아내는 삼손을 임신하는 순간부터 나지르인 자녀를 잉태한 어머니로서 그녀 자신의 몸을 구별해야 하는 것이다.
한편, 구약에서 '뻬텐'(beten)은 인간의 생명이 생성되는 시초를 가리키는데, 하느님께서는 자궁에서 생명이 잉태하는 순간부터 그 생명을 보호하시고 감독하는 분이심을(시편71,6; 이사49,1) 묘사하는 데 사용된 단어이다.
그런 맥락에서 본문은 탄생 이전에 생명이 생성되는 장소에서부터 하느님께서는 그 아이를 나지르인으로 인정하셨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그의 생명이 전적으로 하느님께로 말미암았고, 또한 태어난 이후의 나지르인으로서의 삶도 온전히 하느님께 달려 있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마노아의 아내는 생명을 잉태한 그 순간부터 주님의 사자가 명하는 모든 규정들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
율법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 중에 어떤 사람이 일정 기간 동안 나지르인으로 서원하면, 서원한 봉헌 기간 내내 머리를 깎을 수 없었다(민수6,5). 다시금 일반인의 신분으로 돌아갔을 때 머리를 깎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삼손이나 사무엘처럼(1사무1,11) 출생이전부터 나지르인으로 구별된 자는 일평생 동안 머리털을 밀 수 없었다. 왜냐하면 죽을 때까지 '영원한 나지르인'으로 지내야 했기 때문이다.
'나지르인이 될 것이다'
'~이 될 것이다'로 번역된 '키'(ki)는 앞 문장에 대한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로서 '왜냐하면 ~이기 때문이다'라는 의미이다.
태어날 아이의 머리에 면도칼을 대서는 안될 이유는 바로 그 아이가 하느님께 바쳐진 나지르인이기 때문이다.
한편, '나지르인'으로 번역된 '네지르'(nezir)는 '구별하다','바치다', '거룩하게 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나자르'(nazar)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성별된 사람'을 가리킨다. 이러한 원어의 의미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나지르인'은 하느님께 전적으로 봉헌하기로 특별한 서원을 한 사람이다.
따라서 특별히 하느님께 봉헌한 나지르인에게는 그 삶 가운데 보통 사람과는 구별된 그 무엇이 요구되었고, 나지르인에게 주어진 이러한 규정은 율법에 자세히 나타나고 있다(민수6,1~21).
이러한 나지르인의 규정은 구원사적 관점에서 볼 때, 하느님 대전에 이방인과 구별되는 계약 백성의 규정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로마12,1.2).
그리고 더 나아가서 하느님 아버지 대전에 온전한 봉헌으로 섬기는 삶을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기능도 가진다.
한편, 나지르인은 유기(有期)와 종신(終身) 두 종류가 있다. 실제적으로 구약에 기록된 종신 나지르인은 삼손과 사무엘 뿐이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종신 나지르인이 된 자들이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지니지만, 삼손의 경우는 하느님께서 친히 나지르인으로 바칠 것을 지시하였던 반면(판관13,5.7), 사무엘의 경우는 부모가 자식을 나지르인으로 바치겠다고 서원하였다는(1사무1,11) 점에서 차이점을 지닌다.
또한 이 둘 중에서 사무엘은 평생을 나지르인으로 살아 세상과 구별되어 하느님께 충성으로 헌신했지만, 삼손은 정결치 못한 세속적인 삶을 살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하느님께 생명까지 봉헌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스라엘을 ~ 구원해 내기 시작할 것이다'
'구원해 내기'라고 번역한 '레호쉬아'(lehoshia)는 '~를 하여', '~하는 것을'이라는 뜻을 가진 전치사 '레'(le)와 '구원받다','구출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야샤'(yascha)의 사역형 부정사 연계형 '호쉬야' (hoschia)가 결합된 형태로서, '구원하는 것을'이라는 의미이다.
동사 '야샤'(yascha)는 구약의 군사적, 정치적인 측면에서부터 시작하여 궁극적으로 신약의 영적인 측면에 이르기까지, 구세사의 맥을 형성하는 의미를 가진 대단히 중요한 단어이다.
구약에서의 고통은 주로 군사적, 정치적, 개인적인 적대자와 자연적인 재해들로부터 왔다.
그런데 이러한 고통 가운데서 구원받는다(야샤)는 것은 고통받는 자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 이외의 다른 외부의 힘의 도움을 받아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모든 고통의 현장으로부터 인간을 온전히 구원해 주시는 이는 궁극적으로 주님 한 분 뿐이시다.
이와같은 구약의 이스라엘을 향한 외적이며 육체적인 구원이 신약에서는 영적인 구원의 개념으로 발전 확대되는데, 주로 죄의 용서 및 사탄의 권세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로마8,1~2; 에페2,4~5).
본문이 '구원해 내기 시작할 것이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삼손의 탄생 자체가 필리스티아로부터 완전한 구원을 가져와 주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시작과 단초가 될 것임을 의미한다.
즉 이스라엘이 필리스티아의 압제로부터 완전히 구원받는 것은 삼손에 의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대림 제3주간 화요일 복음(루카1,5-25)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 (20) 그는 사람들에게 몸짓만 할 뿐 줄곧 벙어리로 지냈다." (22)
루카 복음 1장 20절의 '너는 ~되어'로 번역된 '에세'(ese; yo shall be)는 '~이다', '되다'라는 뜻의 '에이미'(eimi) 동사의 미래형으로서 '네가 될 것이다' 라는 뜻이며, 단순 미래가 아니라 말하는 이의 의지를 담고 있다
그리고 '벙어리가'로 번역된 '시오폰'(siopon; dumb)은 '말하는 능력을 잃어버리다'라는 뜻의 '시오파오'(siopao)의 분사형으로서 말하지 못하는 상태가 한동안 지속될 것을 의미한다.
한편 즈카르야가 말하는 능력을 잃어버리는 것은 본절에 부연 설명된 것처럼, 천사의 기쁜 소식에 대한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벌이기도 했고, 주어진 계시를 적당한 때까지 다른 사람들로부터 감추는 방법이기도 했다 (다니8,26; 2,4.9; 묵시10,4).
또한 앞으로 이루어질 일에 대한 확실성을 보증하는 징표이기도 했다 (창세15,9~21; 판관6,36~40; 2열왕20,8~11).
즈카르야는 가브리엘 천사의 예언(루카1,20)이 끝나기가 무섭게 말문이 닫혀 일시적인 벙어리가 되었다. 그래서 아들이 태어날 때까지 몸짓으로 의사소통을 해야 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사람들에게 몸짓만 할 뿐'으로 번역된 '엔 디아뉴온'(en dianeuon; kept making signs; beckoned)은 미완료 과거 동사와 현재 부사가 나란히 쓰인 형태로서 '고개를 끄덕이며 표시하고 있었다' 또는 '몸의 일부를 가지고 표시를 나타내고 있다'라는 뜻으로 그런 상태가 지속되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러한 행동은 예식의 마지막 순서로서 사제가 선포해야 할 축복을 하지 못하는 즈카르야가 백성들에게 벙어리가 된 자초지종을 여러 몸짓으로 알리기 위해 애쓰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한편 '벙어리'로 번역된 '코포스'(kophos; speechless; unable to speak)는 '귀머거리'라는 뜻도 가진다(루카7,22). 루카 복음 1장 62절을 참조해 볼 때 즈카르야는 벙어리인 동시에 귀머거리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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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즈카르야>
“즈카르야가
천사에게,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하고 말하자,
천사가
그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하느님을 모시는 가브리엘인데,
너에게
이야기하여 이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파견되었다.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루카 1,18-20)”
아마도
즈카르야는 아들을 달라고 오랫동안 기도했던 것 같습니다(루카 1,13).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난 일은 그 기도에 대한 응답입니다.
그런데도
즈카르야는 천사의 말을 안 믿었고, 그래서 기뻐하지 않습니다.
즈카르야가
천사의 말을 못 믿은 것은
그
자신과 엘리사벳의 나이가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
일에서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야기가 바로 연상됩니다.
하느님께서
이사악 탄생을 예고하셨을 때, 그들은 그 말씀을 안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웃으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나이
백 살 된 자에게서 아이가 태어난다고?
그리고
아흔 살이 된 사라가 아이를 낳을 수 있단 말인가?’(창세 17,17)”
“사라는 속으로 웃으면서 말하였다. ‘이렇게 늙어 버린 나에게
무슨
육정이 일어나랴? 내 주인도 이미 늙은 몸인데.’(창세 18,12)”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어서 믿지 못하는 것을 죄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으로 상식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입니다.)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라는 즈카르야의 말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제가 무엇으로 그것에 관해 알 수 있겠습니까?”인데,
이
말은 “아무런 표징도 없이 제가 그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라는
뜻이고,
믿을 수 있도록 표징을 보여 달라는 요청입니다.
표징을
요구했다는 점에서 판관 기드온의 일이 연상됩니다.
천사가 기드온에게 나타나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라는 하느님 말씀을 전하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참으로
저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신다면,
저와 이 말씀을 하시는 분이 당신이시라는 표징을 보여 주십시오(판관 6,17).”
그때 천사는 기드온을 꾸짖지 않고 그가 요구한 대로 표징을 보여 주었습니다.
따라서
즈카르야가 말을 못하게 된 것은,
기드온의
경우처럼 그의 믿음을 도와주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표징’을 주신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즈카르야는 ‘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은총’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왜 그런 방식으로 표징을 주셨을까?
그것은
아마도 천사의 말 가운데에 들어 있는 ‘기쁜 소식’이라는 말과
서로
연관된 일일 것입니다.
천사는
‘기쁜 소식’을 ‘말’로 전했고, 즈카르야는 그 소식을 귀로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사람들에게 그 소식을 ‘말’로 전해야 하는데,
믿지
못했기 때문에 전할 수가 없습니다.
(즉 ‘기쁜 소식’은 그 소식을 믿는 사람만이 전할 수 있다는 것.)
또는
세례자 요한이 하게 될 일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에게 회개를 선포하는 일과
메시아를
증언하는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증언과 선포는 주로 ‘말’로 하게 되는데, 그것도 역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또는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상황을 나타내는 상징일 수도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메시아를 갈망하고 기다리면서도
메시아에
대해서 공공연하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로마제국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메시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반역죄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이 등장하게 되면
사람들은 메시아에 대해서 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 라는 말을,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는 이 일에 대해서 말하지 마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즈카르야의
간절한 청원에 대한 응답으로 그에게는 미리 알려 주지만,
사람들은
아직 믿을 준비가 안 되어 있기 때문에,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는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는 명령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도 침묵을 지키라고 명령하신 적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나병이 가셨다.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에게 분부하시고,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대로 네가 깨끗해진 것에 대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하셨다(루카 5,13-14).”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다(루카 9,20-21).”
신앙의
증언과 선포는 말하는 사람 쪽에서는 믿음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고,
듣는 쪽에서는 믿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일입니다.
즈카르야가 말을 못하게 된 일을 바오로 사도의 경우와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신자들을
체포하려고 다마스쿠스로 가던 ‘박해자 사울’은
예수님을
만난 직후에 앞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손을 잡고 다마스쿠스로 데려갔다.
사울은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였는데,
그동안
그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사도 9,8-9).”
박해자
사울이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한 일은,
교회를
박해한 것에 대한 ‘벌’은 아니고,
진리를 외면하면서 살았던 지난날의 삶에 대한 참회를 상징하는 일로 해석됩니다.
사울은 예수님께서 보내신 하나니아스라는 사람의 안수 기도를 받은 뒤에
다시 보게 되는데, 그것은 이제 그가 진리를 온전히 볼 수 있게 되었고,
믿게 되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즈카르야의
경우에도 말을 못하고 지내는 기간 동안에
자신의
내면을 더욱 깊이 성찰하게 되었을 것이고,
회개하면서
메시아를 맞이할 준비를 했을 것입니다.
그랬다가
세례자 요한의 할례식 날에 다시 말을 하게 되는데(루카 1,64),
말을 못하던 그가 다시 말할 수 있게 된 일도 의미심장한 ‘표징’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즈카르야는 아비야 조에 속한 사제였습니다. 그의 아내 엘리사벳은 아론의 자손으로 특출한 사제 가문에 속하였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가문에서 후손이 태어나지 않는 것은 더욱 수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유다인에게 출산은 하느님의 축복이었기 때문에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은 버림받은 사람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엘리사벳은 사라, 마노아의 아내, 한나처럼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낮추어졌으나, 하느님의 자비와 권능으로 높임을 받은 사람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즈카르야는 주님의 성소에서 분향하던 중에 가브리엘 천사를 만나 놀라움과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신적 체험에 따른 두려움은 중립적이어서 그것을 체험하는 사람은 믿음과 불신의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천사는 즈카르야에게 아들을 갖게 될 것이며 그 이름을 요한으로 정하도록 지시합니다. 그토록 바라던 아들이었지만 그는 두려움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천사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즈카르야는 자신의 아들이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차고,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녀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믿지 못합니다.
늙은 나이의 즈카르야는 그 아들을 갖게 될 것이라는 천사의 메시지를 믿지 못하여 벙어리가 됩니다. 그는 자신의 능력과 판단에 갇혀 하느님께 마음을 열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능력과 판단에 자신을 맡기지 않으면 영적 벙어리가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업적을 전할 확신이 없어 그분의 자비를 선포하지 못합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