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3주간 목요일]행복 (루카 1,39-45)

2017. 12. 21. 오전 6: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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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림 제3주간 목요일]행복 (루카 1,39-45)



아가의 연인은, 나의 연인이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온다고 노래한다. (아가 2,8-14)
8 내 연인의 소리!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오잖아요. 9 나의 연인은 노루나 젊은 사슴 같답니다. 보셔요, 그이가 우리 집 담장 앞에 서서, 창틈으로 기웃거리고, 창살 틈으로 들여다본답니다.
10 내 연인은 나에게 속삭이며 말했지요.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 11 자, 이제 겨울은 지나고 장마는 걷혔다오. 12 땅에는 꽃이 모습을 드러내고, 노래의 계절이 다가왔다오. 우리 땅에서는 멧비둘기 소리가 들려온다오. 13 무화과나무는 이른 열매를 맺어 가고, 포도나무 꽃송이들은 향기를 내뿜는다오.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 14 바위틈에 있는 나의 비둘기, 벼랑 속에 있는 나의 비둘기여! 그대의 모습을 보게 해 주오. 그대의 목소리를 듣게 해 주오. 그대의 목소리는 달콤하고, 그대의 모습은 어여쁘다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가 인사하자 엘리사벳은,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시다며,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셨으니 행복하시다고 한다. (루카 1,39-45)
39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대림 제3주간 목요일 제1독서(아가2,8-14)


오늘 날 성서학계에서는 언어학적 관찰에 힘입어 아가서가 바빌론 유배 이후

페르시아 시대에 나왔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그러나 본문에는 옛 히브리어 어법이나 표현도 산재해 있어서

언어학적 관찰만을 시대 측정의 표준으로 삼는 것은 무리이다.

 

아가는 남녀간의 사랑에 얽힌 감정들과 요소들을 표현한

다양한 시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현대 성서학계에서는 이 책에 드러난 소주제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갈망(1,2-4),    예찬(1,12-14),   회상(2,8-17),  육체적 매력의 묘사(4,1-7)

자랑(8,11-12)  놀림(2,14-15),   자아묘사(1,5-6)등

 

아가서 2장 8-17절은 여자의 회상이다.

여자는 창가에서 자기 애인이 찾아왔던 때를 회상하며

그가 다시 자기를 방문해 주기를 고대한다.

오늘 독서가 아가서 2,8-14이다. 

그리고 복음이 환희의 신비 2단인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이야기(루카1,39-45)이다.

 

일찍이 즈카르야가 주님의 성소 분향 제단 오른쪽에 발현한

주님의 천사로부터 세례자 요한의 탄생에 대한 말씀을 듣고(루카1,11-20),

그리고 그의 아내 엘리사벳의 잉태를 통하여 그 말씀의 실현을

체험한 것이 첫번째 주님과의 드러난 만남이었을 것이다.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 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주셨구나." (루카1,25)

 

이제, 오늘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수태한 동정 성모님의 아인카렘에 있는 사촌 언니

엘리사벳 집 방문은 첫번째 주님과의 만남을 회상하면서,

다시 한번 자신을 찾아오기를 바라고 그토록 고대하던 엘리사벳의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니까, 아가서에서 자기 애인이 다시 방문해 주기를 기다리는

여자가 바로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에 해당하고,

애인은 바로 성모님 배 안의 예수님(메시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었을 때, 그의 태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는 것은

배 안에서의 원죄의 사함을 받았다는 것이다.

구원을 가져다 주시는 도구 역할을 하시는 성모님으로 말미암아,

성모님 배 안의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의 원죄를 사해 주셨다는 것이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친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루카1,42ㄴ-45)

 

우리는 엘리사벳처럼 성령으로 충만하여 오시는 주님을 알아보자.

특히 어머니 성모님을 통해서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알아뵙고 구원을 체험하도록,

열심히 성모님의 믿음을 묵상하고 묵주의 기도를 통해 성모님의 중재와 전구를 청하자.

 

엘리사벳처럼 성령으로 충만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되나?

"~이 둘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들로,

   주님의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루카1,6)



<거품을 빼는 대림 시기>

 

  돌아보니 참으로 행복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수도생활 초년병 시절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작음’ 때문이었습니다.

‘낮음’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결핍’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지니고 있었던 것은 ‘있는 그대로의 나’,  딸랑 몸 하나 뿐인 ‘가난한 나’였습니다.

가장 밑바닥에 있다 보니 더 이상 내려갈 곳도 없었습니다.

가장 쫄병이기에 실수해도 괜찮았습니다.

낮은 곳에 있다 보니 넘어져도 그리 충격이 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리도 행복했었나 봅니다.

 

 요즘 들어서 자주 드는 생각이 한 가지 있습니다.

큰 사람이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입니다. 높이 올라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입니다.

큰 사람이 될수록, 높이 올라갈수록 섭섭함도 비례해서 커져갑니다.

사람들로부터 받게 되는 상처도 커져갑니다.

내려올 때의 충격을 생각하면 끔찍합니다.

 

  이 대림시기 우리는 복음서를 장식하는  인물들을 바라봐야겠습니다.

마리아와 요셉,  엘리사벳과 즈카르야,  세례자 요한...

 그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었던 한 가지 덕이 있었습니다.

 겸손의 덕입니다.

그들은 한결 같이 낮음을 추구했습니다.  자주 자신의 내면을 비워냈습니다.

그 빈자리를 주님의 성령으로 가득 채워나갔습니다.

그 결과 죽기까지 지속적으로 겸손의 덕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대림 시기는 우리 안에 잔뜩 들어있는 거품을 빼는 시기입니다.

우리를 부풀려보이게 만드는 헛바람을 빼는 시기입니다.

 

  언젠가 낚시 갔다가 복어 새끼 한 마리를 잡았습니다.

육지로 딸려 올라오자마자 그녀석이 보여준  행동은 참으로 특별했습니다.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의 몸을 부풀렸습니다.

나름대로 자신의 몸을 크게 보여 상대에게 위협을 주어

위기에서 탈출하려는 몸짓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게 있어 녀석의 그런 몸짓은 두려움은커녕 웃게 만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실 때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어깨에 잔뜩 힘을 준 우리들,

곧 내려갈 날이 얼마 남은지도 모르고 높은 곳에서 기고만장해있는 사람들,

영혼을 위한 투자는 안중에도 없으면서 겉멋만 잔뜩 든 사람들,

 엄청나게 자신을 부풀린 우리들을 바라보시는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바라보시고

쓴웃음을 짓고 계시지는 않을까요?

 

함께 살아가는 때로 안쓰럽고,  때로 대견스런 수련자 형제들을 바라봅니다.

세상의 젊은이들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수련소 입소 때 개인 소유 물품은 모두 압수당했습니다.

휴대폰도 없습니다.  하루의 일과는 팍팍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은 더 이상 행복할 없다는 표정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에게는 아무런 거품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 완전히 빈손으로 서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 서있기 때문입니다.

 

 남아있는 대림시기 우리 안에 들어있는 거품을 빼내면 좋겠습니다.

우리 어깨에 잔뜩 들어가 있는 힘을 좀 빼면 좋겠습니다.

본래 있는 그대로의 부족한 나,

모든 측면에서 결핍된 나의 모습으로 하느님께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낮아진 우리,  비워낸 우리,

바닥으로 내려 선 우리를 기쁜 얼굴로 찾아오실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다.> 


“그 무렵에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39-45)”


가브리엘 천사는 예수님의 탄생 예고를 할 때,

엘리사벳이 아들을 잉태했다는 소식을 마리아에게 전해 주었습니다(루카 1,36).

마리아는 그 소식을 듣고 바로 엘리사벳에게 간 것으로 생각되는데,

엘리사벳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축하하기 위해서,

그리고 엘리사벳의 출산을 도와주기 위해서 갔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겉으로 보이는 상황이고,

뒤에 나오는 ‘마리아의 노래’를 보면 세례자 요한에 대한 말은 없고,

하느님께서 메시아를 보내 주신 것에 대한 찬양만 있습니다.

또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대화를 보아도

엘리사벳이 세례자 요한을 잉태한 일이 아니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한 일에 대화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마리아가 엘리사벳에게 간 진짜 목적은,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라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예수님에 관한 기쁜 소식을 선포한 첫 번째 선교사가 됩니다.)


마리아의 인사말을 듣고 아기가 엘리사벳의 태 안에서 즐거워 뛰놀았다는 말에서

세례자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했던 말이 연상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하고

내가 말한 사실에 관하여, 너희 자신이 내 증인이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요한 3,28-29).”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첫 만남이기도 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기쁨은 메시아를 갈망하고 기다리던 사람들의 기쁨입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신음하면서 ‘생명의 빛’을 애타게 기다리던 인류를 대표해서

메시아 강생을 크게 기뻐했습니다.)


아마도 마리아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즉 천사가 전해 준 기쁜 소식과

자신의 응답과 메시아 잉태를 모두 엘리사벳에게 말했을 것입니다.

엘리사벳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마리아가 한 말들이 진실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라는 말은,

마리아가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가득히 받았다는 점에서,

또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아의 어머니가 되었다는 점에서

세상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된 분이라는 뜻입니다.

(‘여인들 가운데에서’는 사실상 ‘사람들 가운데에서’입니다.

‘복되다.’ 라는 말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라는 말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되었음을 찬양하는 말입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라는 말은,

메시아의 어머니께서 찾아오신 것에 대한 감사와 기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여기서 “내 주님의 어머니” 라는 말은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이 말은 마리아 태중의 아기가 ‘주님’이신 분이라고 믿는다는,

즉 ‘예수님은 메시아’ 라고 믿는다는 신앙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벳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고백한 첫 번째 인물입니다.

또 마리아는 메시아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주님의 어머니’입니다.

(이 말에서 ‘천주의 모친’이라는 호칭이 생겼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이라는 말은,

마리아의 믿음과 응답과 순종을 찬양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행복하십니다.’는 ‘복되십니다.’로 바꾸는 것이 적절합니다.)

앞에서 마리아를 복되신 분이라고 찬양한 말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에 초점을 맞춘 말이고,

지금 여기서 찬양하는 말은 마리아의 믿음에 초점을 맞춘 말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가브리엘 천사가 전해 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즉 메시아를 보내셔서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의지, 계획 등에 관한 말씀입니다.

마리아는 천사가 하는 말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고, 믿었고,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희망했고, 그래서 응답했고, 순종했습니다(루카 1,38).

(믿는다고 해도 응답하지 않는다면 믿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따라서 마리아는 믿음을 ‘삶’으로 실천하는 신앙생활의 모범이 되는 분입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단순히 두 어머니의 만남이 아니라,

구약시대와 신약시대가 연결되는 만남이고,

하느님께서 두 어머니에게 하신 일을 서로 확인하고 증언하는 만남이고,

세례자 요한이 하게 될 일을 미리 보여주는 만남이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사람들에게 증언하게 된 만남입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통해서 ‘기쁜 소식’을 선포했고,

엘리사벳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증언했습니다.

(그 자리에 두 어머니만 있었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즈카르야도 있었을 것이고, 다른 가족이나 친척들도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엘리사벳의 요한 잉태에 대한 기쁨은,

아기를 못 낳고 있다가 낳게 된 것에 대한

인간적인 기쁨이 많이 섞여 있는 기쁨입니다(루카 1,25).

그러나 마리아의 예수님 잉태에 대한 기쁨은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 인류가 드디어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성탄절을 세속의 명절처럼 지내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성탄절이 지극히 거룩한 날이라는 것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물론 마리아는 동정녀로서 아기를 잉태한 것에 대한 두려움과

메시아의 어머니로서 겪게 될 고난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구원의 기쁨’은,

그런 두려움을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큰 기쁨이었고,

마리아는 그 기쁨을 ‘마리아의 노래’를 통해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하느님께 충실하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은 남편에게 신의를 지키지 못하는 아내의 모습에 자주 비유됩니다.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아가의 구절들은 사랑에 빠진 남자와 여자의 심정을 나타내지만, 동시에 이러한 구절들은 사랑으로 일치되는 한 영혼과 그리스도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으로도 해석됩니다. “내 연인의 소리!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오잖아요.” 이 구절은 한 영혼을 구원하시러 찾아오시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감성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 자, 이제 겨울은 지나고 장마는 걷혔다오. 땅에는 꽃이 모습을 드러내고, 노래의 계절이 다가왔다오.” 이 구절은 구세주의 탄생을 앞둔 교회의 기쁨을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엘리사벳 성녀는 마리아의 방문을 받았을 때,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성녀의 태 안에 있는 아기, 세례자 요한이 성령으로 가득 차(루카 1,15), 성모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구세주를 알아보고 뛰놀았기 때문입니다. 둘의 만남은 구세주를 알아보고 맞이하는 영혼들의 기쁨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의 성탄이 가까워질수록 우리 마음은 하느님 사랑의 신비가 주는 희망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주님을 연인으로 맞이하는 설렘이 우리 안에 커진다면, 아기 예수님께 하느님 사랑의 노래를 불러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을 비우시고 낮은 곳으로 오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 안에 담는다면, 우리 마음은 이웃 사랑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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