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3주간 금요일]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루카 1,46-56)

2017. 12. 22. 오전 8:15:29

글자


 

[대림 제3주간 금요일]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루카 1,46-56)

 


사무엘이 젖을 떼자 한나는 그 아이를 실로에 있는 주님의 집으로 데리고 가 엘리에게, 아이를 주님께 바치기로 하였다고 하고 주님께 예배를 드린다. (1사무 1,24-28)
그 무렵 사무엘이 24 젖을 떼자 한나는 그 아이를 데리고 올라갔다. 그는 삼 년 된 황소 한 마리에 밀가루 한 에파와 포도주를 채운 가죽 부대 하나를 싣고, 실로에 있는 주님의 집으로 아이를 데려갔다. 아이는 아직 나이가 어렸다. 25 사람들은 황소를 잡은 뒤 아이를 엘리에게 데리고 갔다.
26 한나가 엘리에게 말하였다. “나리! 나리께서 살아 계시는 것이 틀림없듯이, 제가 여기 나리 앞에 서서 주님께 기도하던 바로 그 여자입니다. 27 제가 기도한 것은 이 아이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드린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28 그래서 저도 아이를 주님께 바치기로 하였습니다. 이 아이는 평생을 주님께 바친 아이입니다.” 그런 다음 그들은 그곳에서 주님께 예배를 드렸다.


마리아는,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뛴다며 엘리사벳에게 화답한다. (루카 1,46-56)
그때에 46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47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48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49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50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51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52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53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54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55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56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대림제4주간 금요일 제1독서(1사무1,24-28)


사무엘 상권의 첫째 부분인 1-7장은, 이스라엘에 닥친 위기가 무엇이고 그 위기를 사무엘이 어떻게 해결하는가를 다룬다.

 이스라엘에 닥친 위기는 두 가지, 곧 지도자의 부재라는 내적 위기와 필리스티아인들의 침략이라는 외적 위기이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정신적 지도자는 실로의 사제 엘리였는데, 나이가 너무 많아 필리스티아인들의 침공을 막아내기는 고사하고, 집안 단속조차 제대로 할 수 없을 만큼 무능하였다.


 이스라엘은 에벤에제르의 전투에서, 실로에 모셔 두었던 주님의 궤(계약의 궤)를 필리스티아인들에게 뺏기고 엘리의 집안은 몰락하였다. 이스라엘 안에 주님의 현존을 확인해 줄 사제직과 계약의 궤가 한꺼번에 사라진 것이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위기를 극복할 우선적 대안으로 주변 민족들이 이미 오래 전에 받아들인 왕정의 도입 절실하게 요청하였다.

 땅을 확보한 이스라엘은 그 땅을 지켜줄 현실적 제도 찾고 있었다. 임금과 더불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줄 예언직도 중요한 직책으로 떠올랐다.   하느님의 말씀과 현존이 약해진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예언자들이, 외적의 침입과 정치, 경제, 사회적 혼란을 막기 위해서는 임금들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충족시켜 준 인물이 바로 사무엘이다.  오늘 독서는 자식이 없던 한나가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여 한 아이 즉 사무엘을 낳게 되었는데, 사무엘을 실로에 있는 주님의 집에 데리고 가서, 주님께 봉헌의 서약을 하는 내용이다.

 "한나가 엘리에게 말하였다. ~제가 기도한 것은 이 아이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제가 드린 청을 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아이를 주님께 바치기로 하였습니다.  이 아이는 평생을 주님께 바친 아이입니다. ~  그런 다음 그들은 그곳에서 주님께 예배를 드렸다." (1사무1,26-28참조)  한나가 기도의 응답으로 주신 아들을 주님의 것으로 되돌려 드리는 이야기이다.


 봉헌(dedication)은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거룩한 목적으로 쓰임받도록, 사람, 물건, 장소를 속된 것에서 분리시키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이것을 성별(聖別)이란 말로 쓴다.  하느님 편에서 그러한 목적으로 간택하여 쓰실 때에는 축성(consecration)이란 말을 쓴다.

 어쨌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이니, 하느님께 되돌려 드린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의 절대권 즉 주권을 인정해 드린다는 것이다.


 기도해서 얻은 아이인 사무엘의 존재, 생명, 성품, 탈렌트, 신앙, 시간등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것으로 돌려 드림으로써, 하느님의 축복과 놀라우신 간섭과 역사로 하느님의 뜻에 맞갖게 쓰임받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삶을 살기를 원하는 것이다.


 성경을 보면, 사무엘은 충실한 하느님의 도구요, 나지르인으로써 예언자적 역할을 종신토록 잘 수행한 것으로 나온다. 이 뒤에는 어머니의 봉헌과 신심이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외적 재화(물질, 돈, 토지), 내적 재화(신망애 삼덕과 성령의 은사등 초자연적 은혜) 우리 영혼, 육신, 심령, 가정과 사업체, 본당 공동체, 조국, 환경 등 하느님께 되돌려 드릴 것이 많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경제적 부채, 마음의 상처, 병고,원수등도 봉헌의 대상이 된다. 이런 것을 예수 성심 혹은 성모 성심께 봉헌 했을 때, 우리 구원과 성화를 위해,주님과 어머니께서 그것을 책임져 주시는 것이다.


 오늘 아기를 낳지 못하는 한나가 기도하여 얻은 자식인 사무엘을 봉헌하는 것은 예수님의 선구자 세례자 요한의 부모인 즈카리야, 엘리사벳의 성소와 더불어 구세주의 모친이신 성모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은 동정 수태를 예고하는 사건인 것이다.

 "Nothing is impossible with God."  하느님과 함께 하면, 아니 하느님께서 역사하시면 불가능이 없다는 교훈이 구세사 안에서 하나 하나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과연, 우리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우리 존재와 생명의 절대권(주권)을 가지신 하느님께 대한 신뢰가 있는지~~~

 그래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되돌려 드려서, 다시 하느님께로부터 우리의 구원과 성화를 위해 하느님 뜻에 맞게 모든 것이 새롭게 재편성 혹은 개편되고 싶은 마음은 없는지~~

 봉헌은 그러기에 세례성사때 한 서약의 갱신이요 연장이라 할 수 있다.  이 성탄 시기에 봉헌에 대해 깊이 묵상해 보자.



대림 제4주간 월요일 복음(루카1,46~56)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 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51~52) 

 

루카 복음 1장 51절의 '팔'로 번역된 '브라키오니'(brachioni; arm)는 단순히 신체의 한 부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히브리어 '야드'(yad)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능력을 상징하는 구약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신명26,8; 시편89,13).

그런데 여기서 이 단어는 '권능'으로 번역된 '크라토스'(kratos; mighty; trength)와 함께 사용되어 하느님의 크고 무한하신 힘과 능력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한편 '교만한 자들'에 해당하는 '휘페레파누스'(hyperephanus; the proud)는 '~위에', '~을 넘어서','~이상의' 등의 뜻을 가진 전치사 '휘페르'(hyper)와 '나타나다','자신을 나타내 보이다' 등의 의미를 가진 '파이노'(phaino)의 합성어에서 파생한 단어로 '하느님 앞에 자신을 지나치게 내보이는 자들',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들'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이다.


이것은 루카 복음 1장 50절의 '경외하는 이들'과 분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그 결과 또한 엄청난 차이를 가져온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에게는 그분의 자비가 대대로 미치지만, 반면에 그를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흩어지는' 심판이 따른다는 것이다.


'주님이신 그분께 맞서는 자들은 깨어진다'(1사무2,10)는 한나의 노래를 연상케 하는 루카 복음 1장 51절에서, 마리아는 현명하게도 교만한 자를 치시는 하느님의 성품을 정확히 깨닫고, 자신의 모습을 비천한 계집종의 위치에 놓음으로써 높고 위대하신 하느님의 능력을 찬양하고 있다.


루카 복음 1장 52절은 '가난한 이를 먼지에서 일으키시고 궁핍한 이를 거름 더미에서 일으키시어 귀인들과 한자리에 앉히시며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1사무2,8)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노래를 떠올리게 한다. 

이 문장은 분명한 대조를 이루는 단어로 구성되어 있는데, '통치자들'과 '비천한 이들', '끌어내리시고'와 높이셨으며'이다.


권세있는 자와 비천한 자에 대한 하느님의 공평하신 심판을 다루고 있는 이 구절은 이러한 단어들의 대조를 통해 하느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를 분명하게 나타내주고 있다.


여기서 '통치자들'로 번역된 '뒤나스타스'(dynastas; the rulers; the mighty)는 '주권자','통치자' 등을 의미하는 명사 '뒤나스테스'(dynastes)의 복수이므로 '권세있는 자들'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왕좌에서'로 번역된 '트로논'(thronon; their thrones; their seats)는 그 권세자들이 앉는 '옥좌들'(보좌들)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그들을 '끌어내리신다'는 것은 비록 세상 가운데서 권세있는 자들이라고 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그 마음에 합당하지 않은 자들을 얼마든지 그  보좌에서 내리칠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분임을 밝히는 것이다.


한편 '비천한 이들'로 번역된 '타페이누스'(tapeinus; the humble; them of low degree)는 '낮은 지위의','천한','겸손한'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형용사 '타페이노스'(tapeinos)의 복수형이므로 '비천한 자들'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이 단어는 앞의 '통치자들'과 대조를 이루며, 직접적으로는 세상에서 소외되고 낮은 지위에 있는 자들을 의미하지만, 영적으로는 하느님 앞에서 겸손한 자들을 가리킨다.  


결국 이러한 표현 속에서 하느님께서는 비록 그들이 세상 가운데서는 낮고 천한 자들일지라도, 당신 앞에서 겸손하며 당신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들을 높이시는 분임이 드러나고 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좀더 높은 지위와 권세와 명성을 차지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안달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하느님 대전에는 도무지 의미없는 일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먼저 하느님 대전에 자신의 한계와 분수와 피조성을 인정하는 겸손한 모습을 가지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들어 높이 쓰실 것이기 때문이다.



2014년 12월 22일 대림 제4주간 월요일 복음(루카1,46~56)

<마리아의 노래>


‘마리아의 노래’는 ‘마리아의 복음 선포’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로 메시아께서 하실 일들을 찬양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루카복음 4장에 있는 예수님의 복음 선포와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6-49ㄱ).”


이 구절들은 일차적으로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메시아의 어머니로 선택하신

일에 대하여 기뻐하고 감사드리면서 찬양하는 찬미가입니다.

넓은 뜻으로는, 이제 인류가 구원받게 되었음에 대한 찬양이기도 합니다.

“당신 종의 비천함”이라는 말은, 마리아가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는 말인데,

메시아께서 오시기 전의 인류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큰일’은 좁은 뜻으로는 마리아가 메시아의 어머니로 선택된 일을 뜻하고,

넓은 뜻으로는 인류가 구원받게 된 일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보면, 다음과 같이 시작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루카 4,18ㄱㄴ).”

이 말씀은,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로 삼으셨고,

그 권한을 주셨다는 선포이고 증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 1,49ㄴ-53).”

이 구절들은 하느님의 구원사업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면서 찬양하는 찬미가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라는 말은, “하느님만이 유일하신 하느님이고,

다른 잡신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거룩하신 분이고,

가장 높으신 분”이라는 찬양입니다.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메시아를 보내 주신 것은 인간들 쪽에 무슨 자격이 있어서도 아니고,

무슨 공로가 있어서도 아니고, 전적으로 하느님의 자비에 의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자비를 제대로 받으려면 하느님을 올바르게 경외해야 합니다.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라는

말은, 하느님의 자비를 구체적으로 표현한 찬양입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억압과 착취를 당하고 있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하느님의 왕정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묵시 22,5).

그리고 그 나라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는” 나라이고(묵시 21,4),

영원한 평화와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되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교만한 자들, 통치자들, 부유한 자들’이 당하게 될 일에 대한 말은,

단순히 그들이 심판과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예언은 아니고,

회개하고 구원받으라고 촉구하는 말입니다.

(‘기쁜 소식’은 비천한 이들과 굶주린 이들에게만 기쁨을 주는 소식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소식입니다.)

교만한 자들도 회개해서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 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통치자들도 회개해서 사람들을 참으로 섬기는 사람이 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부유한 자들도 회개해서 재물을 섬기던 삶을 버리고,

참으로 하느님만을 섬기게 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보면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ㄷ-19)”

메시아의 ‘구원’은 모든 억압과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된 자유와 해방을 주시는 분입니다.)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서 구원을 받을 자격을 갖춘 사람들은,

그 날이 오면 참된 자유와 참된 해방과 참된 안식을 얻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루카 1,54-55).”

하느님의 구원 사업은 처음부터 하느님의 섭리 안에 있었던 일입니다.

즉 하느님께서 인류의 상황에 대해서 관심이 없으시다가

마지못해서 자비를 베풀어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처음부터 계속 인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신 분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은 유대인들의 조상이 아니라, 신앙인들의 조상을 뜻합니다.

“너는 더 이상 아브람이라 불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 너의 이름은 아브라함이다.

내가 너를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창세 17,5).”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백성’을 뜻하는 말입니다.

‘자비’가 영원히 미칠 것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자비는 언제나 변함없고 영원하다는 뜻입니다.

(구원 사업이 완성되면 그 은혜로운 상태는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그런데 메시아의 구원은,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저절로(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 쪽에서도 구원받기를 희망해야 하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는

당신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육에 따라 살도록 육에 빚을 진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육에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로마 8,11-13).”


‘육에 따라’ 산다는 것은 믿음 없는 사람처럼 세속에 속한 것들에 연연하면서

집착하고 욕심 부리면서 사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멸망을 향해서 가는 것입니다.

성령의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인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세속적인 것들과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버리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2017년 12월 22일 나해 대림 제3주간 금요일


구세주의 어머니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의 만남은 성령께서 주도하신 것입니다. 엘리사벳의 외침을 들으신 성모 마리아께서는 성령 안에서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을 찬미하십니다. 성모님의 영혼과 마음은 온전히 하느님과 일치하여 기뻐 뛰놀고 계십니다. 사무엘 예언자의 어머니 한나가 그러하듯이, 성모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전능하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지니셨습니다.
한 영혼이 받은 은총이 크면 클수록 하느님의 위대하심은 더욱더 크게 드러납니다. 성모님께서는 ‘비천한 여종’이심을 고백하시며 하느님께 받은 크신 은혜를 찬미하십니다. 마음이 교만한 자와 권력에 기대는 자는 하느님의 크신 은총을 받을 수 없습니다. 신성을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지 않으시고 비천한 인간의 몸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겸손하고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십니다. 주님께서는 구원의 은총에 굶주리는 이들을 은혜로 채우시고, 세속의 부귀영화로 배불리는 자들을 내치십니다.
성모님께서는 거룩하신 하느님의 자비를 바라보시며 그분에 대한 경외심을 노래로 표현하십니다. 초월적인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 머물 수 없는 존재이시지만, 어두움에 빠져 죽어 가는 영혼들을 굽어보시고 은총을 베푸십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초월적인 세계에서 지상의 세계로 내려오는 은총이며, 그 지고함을 알아보시는 성모님께서는 경외심에 빠지시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믿음과 겸손과 경외심의 노래입니다. 성탄을 준비하며 우리 마음 안에 그러한 노래가 퍼지도록 믿음과 겸손과 경외심을 키웁시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매일말씀묵상

목록 전체보기 →
[주님 성탄 대축일]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요한 1,1-18)17.12.25조회 200[대림 제3주간 토요일] 요한 (루카 1,57-66)17.12.23조회 52[대림 제3주간 금요일]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루카 1,46-56)17.12.22조회 59[대림 제3주간 목요일]행복 (루카 1,39-45)17.12.21조회 55[대림 제3주간 수요일] 주님의 종 (루카 1,26-38)17.12.20조회 50[대림 제3주간 화요일]세례자 요한(루카 1,5-25)17.12.19조회 49[대림 제3주간 월요일]임마누엘 (마태 1,18-24)17.12.18조회 322[대림 제2주간 토요일] 엘리야 (마태 17,10-13)17.12.16조회 242[대림 제2주간 금요일] 먹보요 술꾼 (마태 11,16-19)17.12.15조회 52[대림 제2주간 목요일]세례자 요한에 관하여 (마태 11,11-15)17.12.14조회 48[대림 제2주간 수요일] 내 멍에 (마태 11,28-30)17.12.13조회 50[대림 제2주간 화요일]길 잃은 양을 찾아서 (마태 18,12-14)17.12.12조회 53[대림 제2주간 월요일]중풍 병자치유 (루카 5,17-26)17.12.11조회 158[대림 제1주간 토요일]거저 주어라 (마태 9,35─10,1.6-8)17.12.09조회 48[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주님의 종 (루카 1,26-38)17.12.08조회 55[대림 제1주간 목요일] ‘주님, 주님!’ (마태 7,21.24-27)17.12.07조회 48[대림 제1주간 수요일]빵 일곱 개와 일곱 바구니 (마태 15,29-37)17.12.06조회 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