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25일 월요일
[주님 성탄 대축일]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요한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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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예루살렘을 구원하셨다며, 기뻐하며 환성을 올리라고 한다. (이사 52,7-10)
7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 평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구나. “너의 하느님은 임금님이시다.” 하고 시온에게 말하는구나.
8 들어 보아라. 너의 파수꾼들이 목소리를 높인다. 다 함께 환성을 올린다. 주님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심을, 그들은 직접 눈으로 본다.
9 예루살렘의 폐허들아, 다 함께 기뻐하며 환성을 올려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예루살렘을 구원하셨다. 10 주님께서 모든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거룩한 팔을 걷어붙이시니, 땅끝들이 모두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히브리서의 저자는,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히브 1,1-6)
1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2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만물의 상속자로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통하여 온 세상을 만들기까지 하셨습니다. 3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그분께서 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4 그분께서는 천사들보다 뛰어난 이름을 상속받으시어, 그만큼 그들보다 위대하게 되셨습니다.
5 하느님께서 천사들 가운데 그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또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라.”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6 또 맏아드님을 저세상에 데리고 들어가실 때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천사들은 모두 그에게 경배하여라.”
요한 사도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고 한다. (요한 1,1-18)
1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2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3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6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7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8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10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12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13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15 요한은 그분을 증언하여 외쳤다. “그분은 내가 이렇게 말한 분이시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16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17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18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
예수 성탄 대축일 낮 미사 제1독서(이사52,7-10)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
평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구나.
"너의 하느님은 임금님이시다." 하고 시온에서 말하는구나." (7)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
문자적으로 '그 산들 위의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라는 의미가 된다.
발은 신체의 지체 중에서 아름답지 못한 부분으로 간주되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발이 아름답다고 표현되는 것은
그 발을 통해서 아름다운 하느님의 구원의 소식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특히 본문에서 '산'에 해당하는 '헤하림'(heharim; the mountains)은
복수로서 '그 산들'이라는 의미이므로, 여기서 그 발은
여러 봉우리의 산들 위에 서 있는 것이 된다.
그리고 '위에'로 번역된 '알'(al)은 전치사로서, 본문은 발이
산을 넘는 동작을 강조하기보다 산 위에 굳게 서 있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How beautiful upon the mountains are the feet of him' 의 뜻이다.
즉 원문은 복음 선포자가 높은 곳에 올라 거기에서
만방에 복음을 전하는 이미지를 전달한다.
이것은 이사야서 40장 9절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시온아 높은 산으로 올라가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루살렘아 너의 목소리를 한껏 높여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라. 유다의 성읍들에게
"너희의 하느님께서 여기에 계시다."하고 말하여라." 에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시온아 높은 산으로 올라가라'라고 한 표현과 유사하다.
그리고 본문은 궁극적으로 사탄의 세력에 포로된 자들에게
영적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복음 선포자들의 활동을
칭송하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본문을 인용한 사도 바오로의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로마10,15).
이사야서 52장 7절은 주님의 승리를 전달하는 전령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데,
앞선 이사야서 40장 9절과 41장 27절과 유사하게 되어 있다.
본절은 원문상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에 해당하는 구절이 맨 앞에 위치해 강조되고 있으며,
그 이하를 다섯 개의 분사 구문이 뒤따르는 형태로 되어 있다.
이 다섯 개의 분사는 모두 남성 단수로서, '발'에 해당하는
'라글레'(laglle; are the feet of)라는 단어를 수식하고 있다.
즉 그 발은 첫째, 기쁜 소식을 전하는 발이며 둘째, 평화를 선포하는 발이며
셋째, 기쁜 소식을 전하는 발이며 넷째, 구원을 선포하는 발이며
다섯째, 시온에서 '너의 하느님은 임금님이시다'
(너의 하느님이 통치하신다)라는 사실을 전하는 발이다.
먼저 '기쁜 소식을 전하는'에 해당하는 '메밧세르'(mebasser;
those who bring goods news)의 원형 '빠사르'(basar)는
주로 전쟁과 관련하여 전령이 승전 소식을 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2사무18,19.26.31).
여기에서는 일차적으로, 바빌론 압제하의 이스라엘 자손이 해방되어
곧 시온으로 귀환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는 것을 의미하며,
보다 근본적으로는 그리스도의 탄생과 관련된다.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실 때 천사는 베들레헴 근처의 목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라고 선언하였는데,
이것은 본문 내용과 깊은 관련을 가진다(루카2,10).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소식 가운데서
그리스도 탄생보다 더 기쁜 소식도 없다.
그 사건은 인류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죄와 영원한 죽음과
멸망의 문제를 해결하는 초석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다 확대하여 말하자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사업을 바탕으로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에 놓여진 인간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모습을 의미한다.
70인역(LXX)에서는 이 단어를 '복음을 전하다'는 의미를 갖는
희랍어 '유앙겔리조'(euangellizo)의 분사형으로 번역하여
이런 의미를 잘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평화를 선포하고'에서 '평화'에 해당하는 '샬롬'(shallom)은
기본적으로 더 이상 전쟁이 없는 상태를 의미할 뿐 아니라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완전한 영육간의 복지(well-being)의 상태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기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구나'
본절의 세번째 분사 구문인 '기쁜 소식을 전하며'에 해당하는
'메밧세르 토브'(mebasser tob)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으로 번역된
첫번째 분사 '메밧세르'(mebasser)의 내용을 강화하는 문장이다.
즉 '기쁜', '좋은', '선한', '아름다운'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토브'(tob)란 표현을 첨가해서 동일한 표현을 다시 반복하여
매우 기쁜 소식을 전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네번째 분사 구문인 '구원을 선포하는구나'라는 표현은
'복된 기쁜 소식'의 내용을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이것은 물론 일차적으로 바빌론의 압제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를 통한 죄와 죽음과 사탄에게서의 해방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해서 '구원을'에 해당하는 '예슈아'(yeshuah; salvation)가
주님의 이름 '예수'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다(마태1,21).
''너의 하느님은 임금님이시다'하고 시온에서 말하는구나'
여기서 '임금님이시다'에 해당하는 '말라크'(mallak; reigns)는
'통치하신다'는 뜻으로 왕의 지배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바빌론의 포로로서 잔혹한 바빌론의 군주에게 다스림을 받아왔는데,
이제 그 압제에서 벗어날 것이며,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친히 이스라엘 백성의 왕이 되어
이들을 다스리신다는 뜻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바빌론 유배의 근본 원인은
하느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는 불신앙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하느님께서 통치하신다는 본문은
가장 근원적인 측면에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완전히
회복하게 하심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본문은 보다 궁극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께서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게 되는
비참한 인생을 해방시켜서(로마5,14; 8,2) 하느님의 통치를 받는 백성과
가족(자녀)이 되게 하심(에페2,19)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예수 성탄 대축일 낮미사 복음(요한1,1~18)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14ㄱㄴ)
요한 복음 1장 14절부터 18절까지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강생(육화)의
신비를 통한 그리스도의 하느님 되심을 보여 준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교리 가운데 그리스도론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구절들은 요한 복음 1장 1절과 연결되어 사람이신 그리스도 안에
그분의 본질인 영원한 신성(神性)이 내재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요한 복음사가가 이처럼 강생(육화; incarnation)의 진리를 요한 복음
도입부에서부터 강조적으로 진술하는 방법을 택한 것은 당시의 영지주의적
(Gnostic) 경향을 반대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희랍인들에게 있어서는 하느님의 육신을 취할 수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으므로, 그들 사이에서는 가현설(假現說 ;docetism)이
큰 설득력을 얻고 있었다.
즉 그리스도는 실제로 사람이 되신 것이 아니라 다만 '사람인 것처럼'
보이고 행동하셨을 뿐 이라는 주장이다.
그리스의 현인들 중에는 초월적인 신을 현상 세계 가운데 포함시킨다는 것은
신성모독일 뿐 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러한 인본주의적 주장은 아직 확립된 교리를 갖지 못했던 초대 교회에
큰 위협적인 요소가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요한 복음사가는 이러한 주장에 대해 직설적으로 반박하는 내용을
본문과 같은 명제 형식을 통해 펼쳐나가고 있다.
한편 '사람'으로 번역된 '사륵스'(sarks; flesh)는 기본적으로 '살'을 뜻하지만,
'몸', '육신', '혈육을 가진 인간', '인간성'(human nature), '혈통',
'육체적 제한성', '이 세상 생활' 등 문맥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쓰인다.
'사륵스'(sarks)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빠샤르'(bashar)인데,
70인역(LXX)에서는 '빠샤르'의 절반 이상을 '사륵스'로 번역했다.
'빠샤르'의 기본적인 의미는 '사륵스'와 마찬가지로 살'(flesh),
즉 짐승의 근육 조직을 가리키지만, 나중에는 그 의미가 확대되어
사람의 몸이라든지 혈연 관계, 생명 그 자체등을 나타내는 데
폭넓게 쓰였고, 신적(神的)인 생명과 대조되는 '창조된 생명'
(Created life)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두 개의 단어들 속에 내포된 의미들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똑같은 혈육을 가진 인간이 되셨음과 그분에게도 육체적 제한성이
따랐음을 확인하게 된다.
피로를 느끼신 것(마르4,38), 시장함을 느끼신 것(마태21,18) 등은 그분에게도
우리와 같은 육체적 제한성이 따랐음을 보여 준다.
또한 라자로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마리아와 사람들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신 사실을 통해(요한11,35) 그분도 우리와 똑같이 연민과 사랑,
슬픔과 기쁨 등의 감정을 느끼셨음을 알 수 있다.
그분께서는 완전한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죄에 약하고 악에 기울여지기 쉬운 인간의 육체와 본성을 입고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우리 인간과 구별되는 분명한 점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그분에게는 죄가 없고, 죄를 지을 수 없다는 점이고(히브4,15),
둘째는 그분께서는 모든 일에 완전한 모범을 보이셨다는 점이다(요한13,15).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만이 우리를 모든 죄에서 구속하실 수 있으신 분이심과 동시에 그분을 통하여 새롭게 됨으로 말미암아 온전한 삶을 살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우리 가운데 사셨다'
원문은 '에스케노센 엔 헤민'(eskenosen en hemin; dwelt among us)인데,
직역하면 '그는 우리 가운데 천막을 치셨다'가 된다.
'사셨다'로 번역된 '에스케노센'(eskenosen)은 '천막을 세우다'
혹은 '천막에 살다'를 뜻하는 '스케노오'(skenoo)의 부정 과거이다.
요한 복음사가가 여기서 부정 과거형을 사용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로고스가 육체를 취하여 사시는 것은 일회적이며 일시적이라는 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같은 모양, 즉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머무신 기간은 짧았다.
시간적으로 보면 불과 33년 정도가 전부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성령을 통해 우리와 늘상 함께 계신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우리는 ~보았다'로 번역된 '에테아사메타'(etheasametha ; we have seen;
we behold)의 원형 '테아오마이'(theaomai)는 언제나 실제적인 육안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
즉 이 단어는 영이나 마음의 눈으로 보는 영적인 통찰에는 쓰이지 않는다.
요한 복음사가는 로고스가 현실적으로 인간의 몸을 입고서 세상에 오셨으므로,
육안으로 볼 수가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들이 본 것은 바로 인간 예수님 안에 내재된 신적(神的) 영광이었다.
하느님께서 그분을 이 세상에 육신을 입게 하여 보내신 것은
우매하고 무지한 백성들로 하여금 직접 눈으로 보고 믿게 하려는
사랑의 배려였다.
요한 복음 사가는 여기서 직접 예수님께서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눈으로 목격했다는 확고하고도 영속적인 증거를 하고 있으며,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신적인 영광과 위엄이 예수님께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예수님을 만나고도 이 영광을 깨닫지 못하거나 그분의 발 아래
승복하지 않는 이들은 다른 방법으로는 결코 하느님을 만날 수가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가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요
길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영광'으로 번역된 '독사'(doxa; the glory)란 무엇인가?
이 단어는 '영광'이라는 말 이외에도 '광휘', '광채', '위엄' 등
여러 의미들을 가지고 있다.
구약에서 이에 상응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카보드'(kabod)이다.
이것은 물건의 큰 무게나 엄청난 양을 언급하고, 종종 부와 재물, 중요하고
긍적적인 명성 등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하느님께 사용될 때에는
하느님께 합당한 영광스러운 속성을 나타낸다.
즉 히브리어 '카보드'(kabod)는 희랍어 '독사'(doxa)와 함께
하느님의 존재 양식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한편 하느님의 영광의 가시적 현상과 관련되어 유대인들이 귀중하게
쓰는 단어로는 '셰키나'(shekinah)가 있다.
이것은 히브리어 '샤칸'(shakan)에서 유래하여 '머물러 거주하는 것'을 의미하며,
사람들 가운데 하느님의 현존과 임재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우리는 구약에서 하느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나타나신 때를 여러 번 볼 수 있다.
광야에서 굶주림으로 원망하는 이스라엘에 만나와 메추라기를 약속하실 때(탈출16,10).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계약을 체결하러 갔을 때(탈출24,16), 모세가 만남의 천막을
세우는 일을 마쳤을 때에도 주님의 영광이 거기에 충만히 내렸으며(탈출40,34),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 봉헌할 때에도 그러했다(1열왕8,11).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영광이란 말이 바로 그분의 현존과 임재를 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바로 하느님의 현존과 임재를 보았던 것이다.
그는 사람이 되신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을 발견했던 것이다(요한10,30; 14,9).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4-5).”
예수님은 ‘생명’이신 분이고, ‘빛’이신 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의 빛’을 받게 되고 참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 가운데에는 예수님을 배척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믿지 못해서 그러는 사람도 있고, 믿기 싫어서 그러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기서 ‘깨닫지 못하였다.’는 ‘받아들이지 않았다.’로 번역을 바꿔야 합니다.)
1) 사람들 가운데에는 예수님의 겉모습만을 인간적으로 판단해서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말했을 때,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라는 말을 했습니다(요한 1,46).
그는 처음에는 예수님이 나자렛 출신이라는 것만 보았던 것입니다.
(그랬다가 예수님을 직접 만난 뒤에는 믿게 됩니다.)
2)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기 싫어서 안 믿었습니다.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마르 6,2-3).”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지혜와 기적을 인정하면서도
예수님이 가난한 목수라는 점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목수가 지혜로운 말씀을 하고 기적을 행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요한 7,27)”
이 말에는 두 가지 뜻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에게는 메시아다운 신비감이 없다. 그러니 메시아가 아니다.”
“우리는 예수의 출신과 직업과 가족 등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근거로 해서 생각해 보면, 예수를 메시아로 믿을 수 없다.”
자기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들의 자만심은 죄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자기들 마음대로 판단하고 배척했기 때문입니다.
3)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른 종교를 믿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고,
또는 어떤 사상에 빠져 있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보다 더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점은,
교회의 모습과 신앙인들의 모습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안 믿으려고 하는 경우입니다.
즉 그리스도교의 안 좋은 모습들을 보고 예수님을 싫어하는 경우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교회 탓이고, 신앙인들 탓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경우에 대해서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마태 5,13).”
교회 구실을 제대로 하지 않는 교회와 신앙인답지 않게 살고 있는 신앙인들은
‘제 맛을 잃은 소금’과 같습니다.
하느님께도 아무 쓸모가 없고, 세상 구원에도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그러니 버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요한 1,12-13).”
신앙인은 세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육에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로마 8,13-14).”
“그리고 이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로마 8,16-17).”
하느님의 자녀로서 구원과 생명이라는 은총을 상속 받으려면
세속적인 욕심과 욕망들을 버리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신앙인은 자기 욕망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받아 사는 사람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14).”
하느님이신 분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우리를 당신이 누리시는 영광 속으로 데리고 가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당신이 하느님으로서 누리고 계시는 영광을
신앙인들도 누리는 것, 즉 당신의 나라에서 당신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라는 말씀은,
“그들도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라는 복음서 저자의 고백은,
“그분이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체험했고, 믿게 되었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일은 예수님께서 바라신다고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신앙인들 자신들이 스스로 응답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바라셔서 세상에 오셨는데,
그 생명은 얻기를 희망하고 얻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 얻게 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한처음에 하느님 곁에 계셨던 말씀, 하느님이신 외아드님께서 우리의 시간과 역사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구약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들의 꿈이나 환시를 통하여 말씀하셨지만, 신적 계시의 완성이 이루어질 때가 되자, 외아드님을 통하여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외아드님께서는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만물을 지탱하는 능력의 말씀이십니다. 그 말씀이 우리 가운데 머무르시며 충만한 은총과 진리의 빛을 비추시고 계십니다.
우주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에 오신 예수님의 성탄은 구세사의 구심점을 이루고 있습니다. 성탄의 신비를 내다본 이사야 예언자는 감탄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 평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구나.” 구세주의 탄생으로 세상의 땅끝까지 하느님의 구원이 선포되고, 모든 민족들이 하느님을 찬양하는 은총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성탄의 기쁜 소식을 이웃에게 전하는 사도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아기 예수님께서는 죄악의 어둠을 비추시고 넘치는 생명의 은총을 주십니다. 빛이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허물을 말끔히 없애 주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마음에 사랑의 불을 환하게 밝히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의 살 안에 살아 계시고, 우리의 심장 안에서 숨 쉬고 계십니다. 우리는 외아드님의 영광을 전하는 일꾼, 생명의 빛을 내뿜는 신앙인이 되고, 이 땅에 성탄의 평화와 사랑이 강물처럼 넘쳐흐르도록 오늘 두 손을 모으게 됩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