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공현 전 목요일]메시아 (요한 1,35-42)

2018. 1. 4. 오전 6:4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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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공현 전 목요일]메시아 (요한 1,35-42)


요한 사도는, 의로운 일을 실천하지 않는 자는 모두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 아니며,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도 그렇다고 한다. (1요한 3,7-10)
7 자녀 여러분, 아무에게도 속지 마십시오. 의로운 일을 실천하는 이는  그분께서 의로우신 것처럼 의로운 사람입니다.
8 죄를 저지르는 자는 악마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악마는 처음부터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마가 한 일을 없애 버리시려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9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저지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씨가 그 사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느님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10 하느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녀는 이렇게 뚜렷이 드러납니다. 의로운 일을 실천하지 않는 자는 모두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도 그렇습니다.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는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한다. (요한 1,35-42)
그때에 35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다가, 36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7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38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하고 물으시자, 그들이“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스승님’이라는 말이다.
3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와서 보아라.”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41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번역하면‘그리스도’이다.
42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는‘베드로’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주님 공현 전 목요일 제1독서 (1요한3,7-10)


"죄를 저지르는 자는 악마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악마는 처음부터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마가 한 일을 없애 버리시려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3,8)

 

 요한은 요한1서 3장 1-3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입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성도의 신분과 이러한 성도는 미래의 영광을 희망하며, 

현재 주님을 본받는 순결한 삶을 살아야 함을 역설하였다.

 

이어서 요한은 요한1서 3장 4절부터 12절까지 하느님의 자녀는 불법을 행치않고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강력하게 강조함으로써, 

앞 단락의 내용을 한 걸음 더 진전시킨다.

 

여기서 요한의 논리는 그분 안에 죄가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안에 머무르는 자는 논리적으로 죄를 범치 않는다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죄를 멸하기 위해 오셨기 때문에 그분 안에 머무르는 자는 

죄에 대하여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악마는 끊임없이 성도들을 유혹하여 죄를 짓도록 부추긴다.

그리고 이 유혹에 빠지는 자는 악마에게 속하게 된다.

그러나 하느님의 씨를 소유한 자는 이러한 유혹에서 승리하여

지속적으로 하느님 안에 머무를 수 있게 된다(1요한3,9).

죄에 대하여 승리하는 자는 바로 하느님께 속한 사람인 것이다.


한편 요한은 요한1서 3장 4절에서 죄를 지으면서도

그것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았던 이단들을 염두에 두고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자행하는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선언한다.

 

여기서 '불법'으로 번역된 '아노미안'(anomian) 원형 '아노미아'(anomia)

'율법'에 해당하는 명사 '노모스'(nomos) 부정 불변사 '아'(a)를 접두시켜,

문자적으로 '율법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데, 

성경에서는 주로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에 대한 불순종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원어적 의미로 볼 때, '불법을 자행하다'라는 말은, 

 하느님의 율법을 파괴하는 자라는 말이다.

진리와 교리를 왜곡하여 분명히 하느님을 거스르는 범죄를 행하면서도 

자신의 행위들을 합리화시키며, 자신의 잘못된 사상과 주장을 가지고 

성도들을 속였던 당시 영지주의 이단들을 향하여

요한은 이러한 그들의 행위야말로 하느님께서 인간의 삶의 기준으로 주신 율법을

파괴하는 불법임을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

 

요한은 요한1서 3장 4절에서 "죄를 저지르는 자는 모두 불법을 자행하는 자입니다.

죄는 곧 불법입니다." 라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밝히며, 

죄와 불법은 별개의 것이 아닌 하나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요한은 불변하는 진리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현재형 시제를 구사하여 

'죄= 불법'은 결코 변경시킬 수 없는 진리임을 증거하고 있다.

요한이 이 사실을 강조하는 것은 당시 교회안에 신은 영적 세계에만 관심을 가지며

악한 물질로 구성된 육체의 죄에는 관여치 않는 것으로 보고,

죄와 불법의 관계를 부정하는 영지주의 이단들이 득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죄가 하느님의 율법을 깨는 불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오류에 빠져있었다.

 

죄로 번역된 '하마르티아'(hamartia) '과녁에서 빗나가는 것'이란 

문자적 의미를 가지며, 실제로는 하느님께서 전하신 법으로부터 벗어나는 

모든 행위와 상태를 말하고, '불법'으로 번역된 '아노미아'(anomia) 

'법이 없는 상태' 즉 하느님의 법을 깨뜨리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요한1서 3장 4절은 하느님께로부터 달아나 인간 본성대로 살아가는 것이

 하느님의 법을 위반하는 삶임을 규정하는 의미를 지닌다.

요한은 이러한 죄의 개념과 특성을 요한1서 3장 5절이하에서는

그리스도와 악마를 대조하여 잘 설명하고 있다.

 

요한은 5-7절에서 그리스도안에 머무는 자는 

죄에 탐닉하지 않게 된다는 사실에 대해 밝힌다.

그리고 8-10절에서는 악마에게 속한 자와 하느님께 속한 자를 상호 대조시켜,

전자는 죄를 범하지만 후자는 죄는 범하지 않는다고 밝힘으로써

하느님의 자녀된 성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죄를 저지르는 자는 악마에게 속한 사람입니다'(8)

 본절은 '의로움을 실천하는 이'에 대하여 묘사한 7절 하반절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의로움을 실천하는 이는 그리스도께서 의로우신 것처럼 의로운 반면,

죄를 짓는 자는 악마에게 속하여 죄를 짓는 다는 사실을 비교하여,

성도는 의로움을 실천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부각시키는 것이다.

 

사실 죄를 저지르는 자는 악마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다.

'속한'에 해당하는 '에크 ~에스틴'(ek ~estin) 현재시제로,

앞으로 속하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현재 '속해 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에크'(ek) 기원,출생 뜻하는 전치사로서,

범죄하는 자들이 악마에게 속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모든 죄의 기원이 악마임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악마는 바로 죄의 아비로서 태초부터 범죄한 자이다.

 

성도의 의로운 행위는 자신의 소속과 기원이 하느님께 있음을 보여주고,

불의한 행위로 범죄하는 자는 자신의 소속과 기원이 

악마(ho diabolos;호 디아볼로스;the devil)에게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악마는 처음부터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이유 접속사 '호티'(hoti)로 시작하는 본문은 죄를 짓는 자가

왜 악마에게 속하였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는 문장이다.

요한은 그 이유를 악마가 '처음부터' 범죄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처음'으로 번역된 '아르케스'(arches)의 원형 '아르케'(arche)

어떤 일의 시점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천지의 시작을 가리키는 '태초'와

어떤 일련의 과정의 처음 시점을 가리키는 '시작', '처음'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본절에서는 다른 어떤 수식어도 없이 '아르케스'(arches)를 단독으로 사용하여,

모든 것의 시작 시점인 '태초'를 가리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인간이 창조되기 전에 벌써 영계에 교만하여 타락한 악마가 있었고,

이들에 의해서 범죄는 먼저 선행되었으며,

이들에 의해서 인간의 타락이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악마는 모든 인간 범죄의 근원이 되고, 

현재 죄를 범하는 모든 자들의 아비가 되어(요한8,44) 

세상의 어두움을 주관하고 있다(에페2,2 ;6,12).

 

 '그래서 악마가 한 일을 없애 버리시려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본절에서 '일을'로 번역된 '에르가'(erga) 원형 '에르곤'(ergon)

'행위', '행실', '역사'라는 뜻이다.

여기서는 복수형으로 사용되어 악마가 여러 측면에서

하느님을 대적하는 범죄를 일삼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악마의 일들을 하나로 요약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뜻에 대항하여 범죄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런 악을 없애 버리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없애 버리시려고'로 번역된 '뤼세'(lyse)의 원형 '뤼오'(lyo)

보통 '풀다', '놓아주다' 의 의미로 사용되지만,

'파괴하다', '헐어 버리다', '폐하다' 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가정법 부정 과거 능동태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어 악마의 일을 파괴하시되,

매우 적극적으로 완전하게 파괴하심을 보여준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저지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씨가 그 사람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3,9ㄱ)

 

여기서 '~에게서'에 해당하는 전치사 '에크'(ek) 기원의 의미를 나타낸다.

또한 '태어난'에 해당하는'게겐네메노스'(gegennemenos) 

원형 '겐나오'(gennao)는 출생을 의미하는 동사이며,본문에서는 완료분사로 쓰였다.

 

따라서 본문은 하느님을 기원으로 하여 출생한 자를 지칭하며,

인간의 육체적 출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거듭난(새로난) 것을 말한다.

 

요한 복음 3장 3-8절, 야고보서 1장 18절

그리고 베드로 전서 1장 23절 등에도 

죄인의 거듭남(새로남)에 대한 진술들이 나오는데, 

이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말하는 진리는 죄인의 영적 거듭남(새로남) 

자신의 의지, 소망, 힘 혹은 교육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위로부터 주시는 은총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하느님의 주도적 권세와 능동적 역사하심으로 죄인의 거듭남(새로남)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계시 진리의 일관된 주장이다.

 

그렇게 해서 새롭게 출생한 자 과거 타락한 본성의 자아가 추구해 온 것들에 

등을 돌리고 하느님을 따라 그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쫓아 살아가게 된다.

 

 '하느님의 씨'

 '씨'로 번역된 '스페르마'(sperma)는 '씨앗'을 의미한다.

요한에 의하면, 하느님의 씨가 하느님께로부터 난 성도들 안에 있어

그들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게 한다고 설명한다. 

많은 학자들은 그 씨를 '말씀'과 '성령'이라고 주장한다.

 

먼저 '말씀'이라는 주장의 근거는 베드로 전서 1장 23절 

야고보서 1장 18절의 진술에 있다.

베드로는 성도의 거듭남(새로남)에 대해서 말하면서 '썩어 없어지지 않는 씨앗'

 살아계시며 영원히 머물러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났다고 말하며,

야고보 진리의 말씀으로 낳았다고 말한다.

이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만이 거듭남(새로남)의 체험을 할 수 있다.

 

요한은 바로 생명력을 배태하고 있는 '씨'란 이미지를 

거듭난 새 생명의 이미지와 연결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거듭난(새로난) 자는 결국 죄에 대하여 승리한다는 점에서

하느님의 말씀은 죄에 대한 승리와도 연결된다.

 

하느님의 말씀이 성도안에 머무를 때,죄를 이기고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1요한1,10; 2,5.14).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삶은 한마디로 거듭난(새로난) 자 안에 머물고 있는

하느님의 말씀과 동행하는 삶이다.

 

둘째,'성령'이라는 주장의 근거는 요한 복음 3장 5-8절에 있다.

예수께서는 니코데모와의 대화에서 거듭남(새로남)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성도가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사실을 밝히셨다.

 

바오로 역시 하느님의 자녀들은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다 말하였다(로마8,14).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성도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살아가게 됨으로써,

삶에서 육의 욕망을 이루지 않고, 성령의 열매들을 맺게 된다(갈라5,16-23).




  주님 공현 전 목요일 복음(요한1,35-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39)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들인 안드레아와 요한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와서 보아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유대의 랍비들이 교훈을 할 때에 자주 사용하고, 탈무드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어투로서 권위있는 이가 제자를 부를 때 사용하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상투적 어법 이상의 뜻이 들어 있다.


'와서 보아라'에 해당하는 '에르케스테 카이 옵세스테'(erchesthe kai opsesthe;

come and see; come and you will see)에서 우리는 두 동사의 시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와서'로 번역된 '에르케스테'(erchesthe; come)는 원형 '에르코마이'

(erchomai)의 현재 명령형이다.

희랍어에서 명령법은 명령이나 금지만을 나타내지 않고 요청을 나타내거나(마태6,12),

명령인 동시에 허락 혹은 찬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예수님께서 안드레아와 요한에게 '에르케스테'(erchesthe)라고 하신 것은

명령인 동시에 그들의 요청에 대한 허락이기도 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든지 당신을 찾는 이들을 피해서 숨지 않으시며,

당신에게로 오는 이들을 거절하지도 않으신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지금 곧 오라'는 뜻으로 현재 명령형을 사용하신 것이다.


또한 '보아라'로 번역된 '옵세스테'(opsesthe; see)'호라오'(horao)의 미래형이다.

희랍어에서 미래 시제는 미래에 있어서의 계속적 동작이나 반복적 동작을 나타낸다.

그리고 '호라오'(horao)가 단순히 '보다'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경험하다'(experience)'심리적으로나 영적으로 지각하다'(perceive)라는 뜻으로도 쓰인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 대답이 가지고 있는 뜻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이 당신 안에 있는 영적 생명과 위대한 권능의 비밀을

알고싶어 했음을 아시고, 그들이 예수님께 나아오기만 하면 앞으로 계속적으로

원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나아오는 사람이 경험하게 될 풍성한 영적 축복

'호라오'(horao)라는 단어에 담아서 전달하신 것이다.


이제 예수님의 허락이 떨어지자 두 사람은 즉시 그분께서 계신 곳으로 가서

그날 예수님과 함꼐 거기서 묵었다.

'그분과 함께 묵었다'에 해당하는 '카이 파르 아우토 에메이난'(kai par auto

emeinan; and abode with him; and spent with him)에서, 전치사 '파라'

<para; 모음 앞에서는 '파르'(par)>가 여기처럼 여격을 지배하게 되면

공간적 접근성을 나타내어 '곁에'(by), '가까이'(near), '함께'(with)라는 뜻이 된다.


여기서는 그들이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집에서 충분한 소통을 하여 시간을

보냈다는 의미로 쓰였다.

당시 예수님께서 누구의 집에 머무르고 계셨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안드레아와

요한이 추구한 것은 화려한 궁궐에서의 연회와 같은 속된 것들이 아니었기에,

그분께서 계신 곳이 아무리 보잘것 없어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언제든지 예수님과 함께 머물거나(stayed) 함께 시간을 보내는(spent that day)

사람만이 제자로서의 도리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의 길을 발견하게 된다

(요한15,1-5; 필리4,13).


예수님에게서 물질적인 부나 화려함, 명예나 권력 같은 것들을 기대하는 사람들은

십자가 고난의 길을 추구하시는 그분과 함께 머물 수가 없다.

사도 바오로처럼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죽어야만(갈라2,20) 그분께서 어디에

계시든지 기꺼이 함께 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한편 여기에 나오는 '오후 네시쯤'은 유대 시간 계산법을 따른 것이고,

로마 시간 계산법을 따르면 오전10시를 가리킨다.

요한 복음사가는 이날 예수님을 만난 것이 자신들의 인생을 변화시킨

중요한 사건이었기에, 그 시간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첫 제자들>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만 보면,

예수님께서 어부들을 보시자마자 제자로 부르셨고,

어부들은 부르심을 받자마자 예수님을 따라간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루카복음과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부르시기 전에 예수님과 어부들의 만남이 있었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제자로 부르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몇 달의 간격이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는 이야기 앞에

시몬의 장모를 고쳐 주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가셨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청하였다(루카 4,38).”

예수님께서는 시몬 베드로의 집을 숙소로 사용하셨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제자가 되기 전부터 예수님의 설교를 들었고,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세례자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했고,

그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요한 1,35-37).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요한 1,38-39).”

이 일은 아마도 ‘요르단 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있었던 일일 텐데(요한 1,28),

예수님의 숙소가 어디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무엇을 찾느냐?” 라는 예수님 말씀은, “나에게서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또는 “너희가 인생에서 갈망하는 것이 무엇이냐?”로 해석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똑같은 것처럼 보여도,

예수님에게서 받기를 원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영혼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원하는 것은 올바른 희망입니다.

그러나 만일에 세속의 부귀영화 같은 것을 원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희망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지 않을 것을 희망하고 있다면, 그것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라는 제자들의 질문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고 싶다는 소망을 말한 것입니다.

이 소망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소망이기도 합니다.

그 당시에 그들의 믿음이 어떤 단계에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또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36).” 라는 세례자 요한의 말을

어느 정도나 이해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어떻든 그들은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복을 받기를 바라고서

예수님을 따라간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물고기를 잡아서 먹고사는 인생보다 더 높은 차원의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다는 소망을 품고 있었을 것입니다.)


“와서 보아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가 되고 싶다는 그들의 소망을 받아주시는 말씀이지만,

그들을 제자로 부르시는 말씀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나의 제자가 되고 싶다면 우선 먼저 나의 삶을 보아라.

그리고 나와 함께 살아보아라.”로 해석됩니다.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한다면 예수님처럼 살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선 먼저 예수님의 삶을 볼 필요가 있었고,

미리 함께 지낼 필요가 있었습니다.

(나중에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라.” 라고 부르셨을 때,

그들이 즉시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를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준비 과정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른 일은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본격적으로 따르기 전에 일종의 수련 과정,

또는 준비 과정 같은 단계를 거쳤고,

충분히 심사숙고한 뒤에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사람의 속을 꿰뚫어보시는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 쪽에서 생각하면 이런 단계는 필요 없는데,

제자들 쪽에서는 꼭 필요한 과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루카 14,28-30).”

예수님과 제자들의 만남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일 사이의 시간은,

제자들 입장에서는 “탑을 세우는 공사를 마칠 수 있는지”

먼저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배반자 유다도 그런 준비 과정을 거친 다음에 부르심을 받았을 텐데,

그는 끝까지 가지 못했습니다.

유다는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마칠 자신이 없으면 시작도 하지 마라.” 라는 말씀이 아니라,

“시작하기 전에 잘 준비하고, 한 번 시작했으면 전력을 다해서

끝까지 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라.” 라는 말씀입니다.

‘전력을 다하는 노력’에는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사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도와주셔야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 말씀 바로 앞에,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 라는 말씀이 있는데,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당신을 따라갈 때,

그것을 그냥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라,

그 십자가를 함께 짊어지시는 분, 때로는 당신이 대신 짊어지시는 분입니다.

(신앙생활은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 하는 생활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도움을 받아서, 예수님과 함께 하는 생활입니다.)

사도들 경우에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끊임없이 도와주셨습니다.

그래서 배반자 유다 외에는 모두 다 끝까지 충실하게 그 길을 갔습니다.

(배반자 유다는 예수님의 도움을 거부하고 스스로 떨어져 나갔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오늘 예수님을 따라 나선 베드로와 안드레아는 본디 세례자 요한의 제자로 보입니다.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 곧 기름부음받은 ‘새 다윗’을 기다리던 이들이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소개된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것은 어쩌면 그들에게 당연한 행동일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실 때, 그들이 예수님을 ‘라삐’(스승님)라 부르고, 그분의 거처를 물은 것은, 이미 마음속으로 예수님을 율법 교사들과 같은 권위를 지닌 스승으로 여기고 따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자랑하거나, 그들을 설득하지 않으시고, “와서 보아라.”고만 하십니다. 화려하고 명예로운 라삐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예수님의 모습에 베드로와 안드레아는 새로운 빛과 희망을 보았을 것입니다. 
시몬에게 ‘케파’, 곧 베드로(반석)라는 새 이름을 주신 것은 그에게 맡겨질 새로운 소명을 뜻합니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공생활 기간 동안 영광과 치욕의 역사를 체험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교회의 양 떼를 맡기신 것은 이 첫 만남에서 베드로를 “눈여겨보며” 그의 선한 마음을 읽어 내셨기 때문입니다. 
요한 사도는 믿음으로 사는 우리 안에 ‘하느님의 씨’가 담겨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 씨는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만난 첫 마음이고, 열정이며, 때로는 좌절과 죄악을 치유하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의 씨입니다. 내 안에 뿌려진 그 씨앗을 어떻게 가꾸느냐에 따라 나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도 하고, 악마의 자녀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나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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