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공현 전 수요일]하느님의 어린양 (요한 1,29-34)
요한 사도는,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며, 그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한다. (1요한 2,29-3,6)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29 의로우신 분이심을 깨달으면, 의로운 일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3,1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2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그분께 이러한 희망을 두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
4 죄를 저지르는 자는 모두 불법을 자행하는 자입니다. 죄는 곧 불법입니다.
5 여러분도 알다시피, 그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그분 안에는 죄가 없습니다.
6 그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모두 그분을 뵙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 자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하고 말한다. (요한 1,29-34)
그때에 29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0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31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32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33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34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주님 공현 전 수요일 제1독서 (1요한 2,29-3,6)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3,1)
요한은 앞의 요한1서 1장과 2장에서 성도가 하느님과 친교하는 자라는
사실에 촛점을 맞추어그들이 추구해야 할 신앙과 생활에 대하여 권면하였다.
이제 이어지는 요한1서 3장 1절에서 4장 6절까지에서는
성도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그들이 지향해야 할 신앙과 생활을 천명한다.
먼저 요한1서 3장 1-3절에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입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성도의 신분을 밝히고 성도가 가져야 할
장래의 소망과 현재의 거룩하고 순결한 삶에 대하여 밝힌다.
'하느님의 자녀'
'하느님의 자녀'로 번역된 '테크나 테우'(tekna theu)에서, '하느님의'로 번역된 '테우'(theu)는 소유격으로서 우리가 하느님의 소유임을 가리킨다.
또한 '자녀'로 번역된 '테크나'(tekna)는 동의어 '휘오스'(hyos)가
법적 의미에서의 자녀란 의미가 강한 것에 비교하여,
혈육의 의미가 강한 단어이다.
즉 '휘오스'(hyos)가 양자를 나타낼 때 자주 쓰이는 한편,
'테크나'(tekna)는 친자를 가리킬 때 자주 쓰인다.
바오로는 성도가 사탄의 자녀에서 그리스도의 구속 성혈의 공로로
하느님의 자녀로 그 신분이 바뀐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휘오스'(hyos)란 용어를
주로 사용한(로마8,14.15 ; 갈라4,7) 반면에,
요한은 하느님과 성도간의 친밀감을 강조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테크나'란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대속의 값으로 지불하고
우리를 자신의 소유로 삼으셨기에, 우리는 그분의 소중한 소유가 되었다는
사실이 이러한 표현 가운데 잘 드러나는 것이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였기 떄문입니다'
원문상으로는 주절만 현재 시제일뿐 '호티'(hoti)이하의 종속절은
부정 과거 시제(Aorist)이다.
'그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로 번역한
'호티 우크 에그노 아우톤'(hoti uk egno auton)에서,
'에그노'(egno)는 '기노스코'(ginosko)의 부정 과거형으로서,
'우크 에그노'(uk egno)는 과거에 '알지 못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처럼 세상이 하느님을 알지 못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 공생활을 하실 때에 유대인들이 그를 하느님의 아드님,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어떻게 갈릴래아에서 나오겠느냐고 하면서
갈릴래아 출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았고(요한7,41),
산헤드린 최고 의회는 예수가 자칭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말하자
그를 신성 모독자로 몰아 처형했다(미태26,63-66).
요한이 여기서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언급하는 것은
바로 여기의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나타내기 위함이며,
이것은 나아가 본절 상반절과 관련시켜 볼 때 예수 그리스도를
성부 하느님과 동일한 분으로 규정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시 말하면 본문의 '그분'(auton)은
분명히 상반절의 '아버지','하느님'을 받는 대명사이다.
그런데 요한은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한다'가 아닌 '알지 못했다'는
부정 과거 시제를 사용함으로써, 세상이 역사적으로 특정한 기간에
그 하느님을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나타내어, 그들이 알지 못한 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은 하느님과 동일한 분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세상이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으므로
그에게 속한 그리스도인까지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요한15,19) 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자신과 그리스도인과 세상과의 관계를 설명하셨던 적이 있다.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2)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으로 번역된 '호모이오이 아우토 에소메타'
(homoioi auto esometha ; we shall be like him)에서,
'호모이오이'는 '~처럼'(like)이고, '아우토'는 '그분'(him)이며,
'에소메타'는 '우리가 될 것이다'(we shall be)이다.
이것은 '신을 보면 신처럼 된다'라는 그리스의 신비적 사상과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의 영광가운데 머무르게 되면,
하느님의 영광과 임재가 나타난다'라는 유대적 사상과 유사성을 지닌다.
그러나 요한은 여기서 위와같은 사상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계시를 근거로 진리를 설파하고 있다.
성도가 완전히 영광스런 상태가 되는 시점은,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
성도들이 완성된 하느님 나라의 일원이 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머무르며,
그리스도를 온전히 보게되는 그 때이다(1코린13,12).
우리가 그리스도를 볼 수 있을 때 우리의 영광스러움(glorification)이 시작되고 완성된다.
영광스럽게 완성된 후의 성도의 모습이 어떠할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아마 타볼산에서 예수께서 영광스럽게 변모된 모습과 유사할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마태17,2).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하느님을 경험하고 만나는 자가
즉각적으로 완전한 자로 변모된다고 가르쳤다.
요한은 이와같은 영지주의자들의 잘못된 사상을 의식하면서,
현재에 완전해지는 것은 없으며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 후에야
완전한 상태로 변모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신적 지식과 경험이
이 세상안에서 사람들을 완전하게 변화시킨다는 교리의 허구상을
직접적으로 지적하는 것이다.
동시에 고난의 현장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장차 이루어질
영광스런 모습을 바라보며 종말론적 희망을 갖게 해준다.
'그분께 이러한 희망을 두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 (3,3).
여기서 '희망'으로 번역된 '엘피다'(elpida)의 원형 '엘피스'(elpis)는
'바라는 것' 또는 현재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소망을 나타낸다.
이 단어는 특히 성도들의 현재의 삶 속에서 경험되는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약속된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며 기다리고 인내하는
문맥에서 많이 사용되었다(로마4,18 ; 2코린10,15 ; 필리1,20).
본절에서도 이 '희망'은 그리스도의 재림시 그를 대면할 때,
그를 따라 거룩하고 영광스럽게 변모될 것을 기대하는 희망을 가리킨다.
그러한 희망을 가진 자는 누구든지 주님의 순결하심과 같이 자신을 순결하게 해야 한다.
여기서 '순결하게 하다'라는 뜻으로 번역된 '하그니제이'(hagnizei)의
원형 '하그니죠'(hagnizo)는 '깨끗하게 하다', '정결케 하다', '정결례를 행하다'라는
뜻으로 거룩함과 정결함을 위해 정결례를 행하는 거룩한 행위를 뜻한다.
즉 종말에 영광스런 모습으로 주님을 대면할 것을 기대하는 성도는
자신들을 마치 구약의 성별된 자들이 정결례를 행하듯이,
거룩함으로 자신을 정결케 해야 한다는 말이다.
요한은 여기서 하느님의 자녀가 가져야 할 중요한 삶의 자세가
죄로부터 떠나 자신을 순결하게 하는 삶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하느님의 자녀는 죄를 떠나 죄를 짓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순결하게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종말론적인 신앙을 소유한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이다.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에서 '순결'로 번역된 '하그노스'(hagnos)는
마치 남자를 알지 못하는 순결한 처녀와 같은 상태를 나타내는 말로서,
'정결', '순전', '성결', '깨끗' 이라는 뜻을 가지나,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무죄성을 나타낸다.
그리고 여기서 '처럼'(같이)로 번역된 '카토스'(kathos)는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의 순결함의 모범이 됨을 잘 보여준다.
모든 성도들이 추구해야 할 정결함의 목표와 모델은 바로 무죄하여
한 점의 티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순결'이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영이 이미 신적 지식과 경험을 통해 완전하게 되었다고 주장하며 또한 육체를 악한 것으로 보아 경시하면서
윤리적 삶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고 오히려 방종한 생활을 했다.
요한은 이러한 그들의 비윤리적인 종말론적 구원관을 견제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 공현 전 수요일 복음(요한1,29~34)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29ㄴ)
여기서 '없애시는'에 해당하는 '호 아이론'(ho airon; who takes away)에서
'아이론'(airon)은 '아이로'(airo)의 현재 분사이다.
지속과 반복의 의미를 갖는 현재 시제는 무죄하신 그리스도의 대신 속죄가
십자가 위에서 단 한번에 성취된 것이기는 하지만, 믿는 이들에게 있어서
그 효력이 영원토록 유효함을 드러낸다.
희랍어의 '아이로'(airo)는 '지고 간다'는 뜻도 있지만, 여기서는
'없이하거나 제거한다'는 의미가 더 적합하다.
즉 그리스도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속죄의 제물로서의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이것은 구약 시대에 죄를 완전히 없게 할 수 없어서 성전에서 매일
반복적으로 드려지던 동물의 희생 제사와는 확실히 구별된다.
구약의 제사들은 아자젤 염소에게 죄를 지어서 광야로 가게 하거나
(레위16,8.21~22), 제물을 번제단 위에서 불살랐는데, 이것은
죄를 없애지 못하고 죄를 기억하게 할 뿐 이었다(히브10,3.4).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몸을 단 한 번 바치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거룩함을 얻게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히브10,10)라는 감격적인 말씀은 그분의 속죄가
완전한 것이었음을 명시적으로 드러낸다.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세례자 요한에 의해 예수님께 붙여진 이 위대한 칭호는 요한 복음사가의
기록들에서만 발견되며, 다른 세 복음서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사도행전 8장 32절과 베드로 1서 1장 19절에 각각 한번씩 나오는 것을
제외하고, 요한 복음사가의 기록들에 집중되어 있다.
'어린양'을 뜻하는 '암노스'(amnos; Lamb)는 신약 성경에서
네 번밖에 나오지 않는다(요한1,29.36; 사도8,32; 1베드1,19).
요한 복음사가의 기록들에서도 같은 뜻을 가진 '아르니온'(arnion)이
더 많이 발견된다.
요한 복음사가가 예수님께 이 칭호를 사용할 때에는 유대인들의 의식 속에
들어 있는 어린양에 대한 독특한 관념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암노스'(amnos)의 히브리어 상응어는 '케베쉬'(kebesh)이다.
이 용어는 '어린양' 뿐만 아니라 '양'(sheep)을 가리켜서 쓰이기는 하는데,
대부분 희생 제물의 문맥에 나타난다(탈출29,38; 레위4,32; 민수15,5).
요한 복음사가는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예수님을 어린양이라고
부를 때에 과월절(유월절; 해방절) 어린양을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탈출12,3).
시기적으로 과월절이 멀지 않았고(요한2,13), 이스라엘 후손들이 이집트에서
나오던 바로 그 밤에, 이스라엘의 집을 보호해 준 것이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피(탈출12,11.13)였음을, 유대인들은 모두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세례자 요한의 증거는 예수님께서 당신 백성을 구원할 분이시며,
과월절 어린양처럼 자기 희생을 통해 이것을 성취할 것임을 강하게 암시한 것이다.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호 암노스 투 테우'(ho amnos tu theu;
the Lamb of God)라는 세례자 요한의 선언은 구원의 주체가
하느님이심을 분명히 하고 있다.
사람이 잡아서 제단에 드리던 양은 그 수가 무수히 많아도
인간의 죄를 완전히 씻어 주지 못했다.
흠없고 티없는 어린양, 곧 죄 없으신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만이 이 일을 하실 수가 있었다.

<하느님의 어린양>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요한 1,29-31).”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말은,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죄를 뒤집어쓰고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어린양’은 탈출기 12장에 나오는 과월절의 어린양과
이사야서 53장에 나오는 어린양이 합해진 상징으로 해석됩니다.
탈출기에 나오는 어린양은, 이집트에 열째 재앙이 내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신해서 죽었습니다.
“너희가
있는 집에 발린 피는 너희를 위한 표지가 될 것이다.
내가
이집트를 칠 때, 그 피를 보고 너희만은 거르고 지나가겠다.
그러면
어떤 재앙도 너희를 멸망시키지 않을 것이다(탈출 12,13).”
이사야서의
어린양은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었습니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 받은 자, 하느님께 매 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이사 53,4-5).”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사람 손으로 만들지 않은, 곧 이 피조물에 속하지 않는 더 훌륭하고
더 완전한 성막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당신의 피를
가지고 단 한 번 성소로 들어가시어 영원한 해방을 얻으셨습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 그리고 더러워진 사람들에게 뿌리는 암송아지의 재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그 몸을 깨끗하게 한다면, 하물며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얼마나 더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새 계약의 중개자이십니다. 첫째 계약 아래에서 저지른
범죄로부터 사람들을 속량하시려고 그분께서 돌아가시어,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약속된 영원한 상속 재산을 받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히브 9,11-15).”
예수님은 죄의 노예로 살고 있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대사제이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양으로서 세상의 죄를 없애셨는데도
왜 이 세상에는 아직도 죄가 있는가?” 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없애셨다는 말은, 죄 자체를 없애셨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들이 죄에서 벗어나서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의 자유의지를 그대로 두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속죄와 용서와 구원의 은총을 받으려면,
인간들이 스스로 회개하고 능동적으로 그 은총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6,15-16).”
오순절 날 성령을 받은 베드로 사도가 복음을 선포했을 때, 사람들은 사도들에게
“형제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물었습니다(사도 2,37).
그때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손들과 또 멀리 있는 모든 이들,
곧 주 우리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이에게 해당됩니다(사도 2,38-39).”
그리고 다음 말을 덧붙였습니다.
“여러분은 이 타락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십시오(사도 2,40).”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의 죄를 없애셨다는 것을 믿는다면,
회개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서 구원받으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말에서,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라는 말은,
“예수님은 인간 세상에 오실 때에는 시간적으로 나보다 뒤에 오셨지만,
사실은 창조 이전부터 계셨던 분이고,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다.” 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기 때문에,
그분의 위대성을 세례자 요한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따라서 세례자 요한의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다.” 라는 말은,
자기와 비교해 볼 때 자기보다 더 위대하신 분이라는 뜻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보다 더 위대하신(높으신) 분이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라는 요한의 말은,
하느님의 계시를 받기 전까지는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몰랐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일’과 ‘말씀’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또
이 말은, 예수님은 인간적인 학문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이신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공부를 통해서 알게 되는 분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만나게 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에 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루카 10,22).”
하느님을
알고 싶다면 먼저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믿음 없이는 하느님에 대해서도 예수님에 대해서도 알 수 없습니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라는 말은, “내가 물로 주는 세례는 메시아 예수님을 맞아들일
준비를
시키는 세례일 뿐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나만 보지 말고 예수님께 가라.” 라고 촉구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의로운 일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다.”는 요한 사도의 고백은 놀랍습니다.
율법과 계약에 묶인 유다인들의 종교관을 넘어 의로우신 하느님을 깨닫는 것만으로 하느님의 자녀로 불린다는 확신은 그리스도인이 지닌 특권이자 희망입니다. 이런 희망을 품고 하느님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는 본디 현재에 얽매여 살면서 자신이 만들어 놓은 헛된 희망의 굴레에 갇혀 불만과 불평, 이기심과 탐욕에 빠질 때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느님 안에 희망하는 사람은, 현실의 고통이나 슬픔이 영원하지 않음을 알고, 현실의 축복이나 영광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희생하고 나눌 줄 알며, 소유와 경쟁을 위하여 타인을 이기적 욕망의 도구로 삼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자신이 기다렸던 메시아를 만났다는 확신을 갖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며,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안에 머무르시기에 죄를 짓지 않으시는 순결하신 분이시며, 하느님께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자신을 희생 제물로 온전히 바치실 어린양이십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 안에서 밝혀진 하느님의 사랑에 있음을 세례자 요한은 깨닫고 선포한 것입니다.
우리가 현세에 살고 있는 한 죄를 짓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자본주의 세상은 한순간도 우리의 욕망을 잠들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알기에 끊임없이 회개와 보속의 삶, 자비와 사랑의 삶에 맛들일 것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