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곰곰이 되새겼다 (루카 2,16-21)
주님께서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고 하신다. (민수 6,22-27)
22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23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일러라. ‘너희는 이렇게 말하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축복하여라.
24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25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26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27 그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바오로 사도는,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게 하셨다고 한다. (갈라 4,4-7)
형제 여러분, 4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5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6 진정 여러분이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아빠! 아버지!”하고 외치고 계십니다.
7 그러므로 그대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그리고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마리아는 베들레헴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긴다. (루카 2,16-21)
그때에 목자들이 베들레헴으로 16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
17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
18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19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20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
21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게 되자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그것은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 준 이름이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제1독서 (민수6,22-27)
◀구약의 사제(제사장)의 임무▶
① 사제는 <(번)제단>에서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속죄하고 성결케 하는 일을 행했다(레위16,18~19). (번)제단은 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갈바리아산 십자가 제단을 의미한다.
번제단의 인간의 죄 대신에 바쳐지는 동물을 통한 속죄 제사의 희생은 신약의 무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류의 죄를 대신한 구속 성혈의 공로를 의미한다.
② 사제는 <물두멍>에서 수족을 닦는 일을 행했다(탈출30,19~21). <물두멍>의 씻음은 영적으로 회개와 성령을 의미한다.
사제는 날마다 자신을 씻어야 하고, 씻어야만 <성소>에 들어가 봉사를 할 수 있고 씻지 않으면 죽었다. 물두멍에서 씻는 행위는 세례성사와 고백성사를 의미한다.
③ 사제는 <제사상>에 <제사빵>을 놓아 두어야 했다 (탈출 25,30 ; 레위24,6~8). 사제는 성소안에 있는 제사상에 매 안식일마다 12개(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를 올려 놓아야 한다.
<제사빵>은 영적으로 영원한 생명의 빵(성체; 요한복음 6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④ 사제는 <등잔대>(탈출25,31~40)에 불이 꺼지지 않게 점검하고, 정리하는 일을 했다(탈출30,7~8). 올리브유의 순결한 기름으로 등불을 켜고, 저녁부터 아침까지 사이 사이 점검하고,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하는 사명이 있었다.
이 빛은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영혼의 양식인 말씀을 상징한다. 시편 119장 105절에 "당신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입니다."라고 되어 있다.
⑤ 사제는 <분향 제단>에 향을 피워야 했다(탈출30,7~8). 사제는 아침 마다 향기로운 향을, <등>을 정리(손질)할 때와 저녁(해거름)에 등을 켤 때도 피워야 한다.
사제는 분향 제단에서 향이 끊이지 않고 타오르도록 해야 할 책임이 있는데 향을 피우는 것은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를 의미한다.
묵시록 5장 8절에는 "향이 가득 담긴 금 대접들은 성도들의 기도입니다."라고 계시되어 있으며, 묵시록 8장 4절에는 "그리하여 천사의 손에서 향 연기가 성도들의 기도와 함께
하느님 앞으로 올라갔습니다."라고 나온다.
◀구약의 대사제(대제사장)의 임무▶
① 지성소에서 속죄하는 일을 행했다. 1년에 한 번 대 속죄일인 7월 10일에 지성소에 들어가서 자신과 온 백성들의 지은 죄를 속죄하는 의식의 임무를 담당했다(레위16,17 ; 히브9,7).
② 판결하는 일을 했다(신명21,5).
③ 만남의 천막안의 모든 일을 총지휘했다(민수3,21~37 ; 4,46~48).
④ 하느님의 말씀(율법)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2역대15,3 ; 신명6,6~7 ; 8,3). 대사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여 살 수 있도록 가르치는 임무를 담당했다.
⑤ 대사제는 대를 이어 종신토록 직무를 담당했다.
⑥ 대사제는 축복하는 일을 하였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그들을(레위의 자손 사제들) 선택하시어 당신을 섬기고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셨으며, 그들의 판결에 따라 모든 송사와 폭력 사건이해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신명21,5)
대사제는 모든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축복을 빌어 주어야 한다. 주님께서 대사제 아론과 그의 아들들 사제들에게 일러,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위해 축복을 빌라고 하셨다.
그 축복이 바로 유명한 사제의 축복이다(민수6,24-26).
"주님께서 그대(이스라엘 자손)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민수6,22-26)
주님께서는 사제가 백성들을 행해 비는 복을 그대로 이루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민수6,27)
주님께서는 사제들에게 축복권을 주셨다(신명21,5). 축복은 사제가 하지만, 축복을 보장하시고 이루어 주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사제는 계속 축복해야 한다. 주님의 종 모세도 백성들을 위해 하느님 앞에서 마음껏 축복했다.
바로 유명한 축복장이 있는 곳이 신명기 28장 1-6절이다.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분의 모든 계명을 명심하여 실천하면, 주 너희 하느님께서 땅의 모든 민족들 위에 너희를 높이 세우실 것이다.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이 모든 복이 내려 너희 위에 머무를 것이다.
너희는 성읍 안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 몸의 소생과 너희 땅의 소출도, 새끼 소와 새끼 양을 비롯한 너희 가축의 새끼들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의 광주리와 반죽통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는 들어올 때에도 복을 받고, 나갈 때에도 복을 받을 것이다."
한국 교회는 음력이든 양력이든 설에는 항상 새해 첫날이기 때문에, 미사를 통해 사제의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민수기 6장 22-27절의 말씀을 선포한다.
구약을 통해 사제들의 변천사를 보면, 축복의 변천사도 함께 묵상할 수 있다. 아담으로부터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은 족장(가장) 사제들이었고, 그 다음 율법시대에는 아론과 그 아들들, 그 다음은 레위지파, 그 다음은 나지르인으로 넘어가다가 이제 신약의 시대에는 영원한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로 말미암아 만인 사제단이 탄생하였다.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짓는데에 쓰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영적 제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치는 거룩한 사제단이 되십시오." (1베드2,5)
"여러분은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 주신 분의 위업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1베드2,9)
오늘 2018년 1월 1일 천주의 모친 마리아 대축일이며 세계 평화의 날이고, 무술년 개띠 해 새해 새 아침 양력 설을 맞아 우리 모두는 영원한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이신 사제의 축복을 받는다.
오늘 사제의 축복을 받은 우리들도 이 세상 한 복판에서 삶의 노고와 희생을 통해 영적 제물을 바치는 사제이기에,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 가깝게는 가족들, 친지, 친척, 친구들, 믿음의 형제 자매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축복하고 복을 빌어 주자. 그러면 그 복이 그대로 그리고 몇 배가 되어 되돌아 올 것이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복음(루카2,16~21)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곰곰히 되새겼다." (19)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계명이나 옛 사람의 전통들과 비교하여 자신의 말씀을 강조하기 위해 '에고 데'(ego de), 즉 '그러나 나는' (마태5,22)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셨다.
여기에서도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루카2,18) 목자들이 하는 말에 대하여 놀라고 이상하게 여겼지만, 마리아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루카 복음사가는 접속사 '데'(de; but)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간직하고'로 번역된 '쉬네테레이'(syneterei; kept; treasured up)는 마음속에 '간직하다', '지키다'는 뜻이다.
여기서 이 단어는 미완료 과거형으로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목자들이 전해 준 천사의 모든 말을 마리아가 계속해서 소중히 간직해 나갔던 사실을 나타낸다.
마리아의 이런 태도는 계시, 즉 '이 모든 일'로 번역된 '타 레마타 타우타' (ta remata tauta; all these things)에 대한 반응이다.
이와 같이 계시에 대한 신중한 반응은 12살된 예수님을 성전에서 다시 찾았을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대한 태도(루카2,51)와 요셉의 꿈을 들었을 때의 야곱의 태도(창세37,11)에서도 볼 수 있다.
루카 복음 2장 51절과 창세기 37장 11절에서는 '쉰테레오'(syntereo)의 동의어로서 '계속하여 간직하다'를 의미하는 '디아테레오'(diatereo)가 쓰여 동일한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마음속에 ~곰곰히 되새겼다'
원문을 직역하면, '그녀의 마음속에 깊이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이다.
여기서 '곰곰히 되새겼다'로 번역된 '쉼발루사'(symballousa; and pondered them)의 원형 '쉼발로'(symballo)는 '함께'를 의미하는 접두어 '쉼'(sym)과 '던지다'를 의미하는 동사 '발로'(ballo)의 합성어이다. 문자적으로 '함께 던지다', '함께 가져가다'는 뜻이다.
이것이 '마음 속에'에 해당하는 '엔 테 카르디아'(en te kardia; in heart)와 함께 쓰이면, '마음속으로 스스로 의논하다', '마음속으로 깊이 생각하다', '숙고하다'는 뜻이 된다.
여기서는 이것이 현재 분사로 사용되어서 깊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있는 마리아의 상태를 보여 준다.
마리아는 자신이 직접 들은 성모영보(수태고지; 루카1,27~38)와 목자들을 통해 전해 들은 구세주 탄생에 대한 메시지가 실제로 자신에게 이루어진 것을 확인했으며, 이 사건들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앞으로 이 아이가 어떤 존재로 성장할 것인지에 대해 계속하여 곰곰히 생각하였던 것이다.

<평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한 천사가 목자들에게 나타나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0-12).”
아기 예수님께서 누워 계신 ‘구유’는 ‘아무것도 없음.’을 상징합니다.
<‘구유’는 단순히 ‘가난함’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함보다 더 높은 차원의 ‘아무것도 없음.’, 즉 완전한 무(無)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음.’은 ‘하느님만 계심.’을 뜻합니다.
따라서
구유에 누워 계시는 아기 예수님의 모습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내려오신 하느님의 모습이고,
우리를 위한 표징이 됩니다.
천사의
말을 들은 목자들은 곧바로 베들레헴으로 갑니다.
“그리고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루카 2,16-20).”
구유에
누워 계시는 아기 예수님의 모습은 ‘참 평화’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권력,
군대, 재산 같은 세속적인 힘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기심도
없고, 욕심도 없고, 죄도 없고,
그런
것들에서 비롯되는 두려움, 불안, 근심, 걱정도 없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아무것도 없고 오직 하느님만 계십니다.
그래서 ‘참 평화’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표징이 됩니다.
천사가
목자들에게 나타나서 예수님의 탄생을 알려준 뒤에
하늘의 수많은 천사 군대가 이렇게 찬미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여기서
말하는 ‘평화’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누리게 되는
완전하고
영원한 행복, 안식, 생명 등을 모두 포함하는 복된 상태를 뜻합니다.
그런데
그 평화를 얻으려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려면 회개해야 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믿음을 삶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이렇게 찬미했습니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루카 1,78-79).”
‘어둠과
죽음의 그늘’은 절망, 고독, 허무감만 가득한 곳입니다.
그래서
그곳에는 참 평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희망, 사랑, 영원한 생명으로 충만한
하느님
나라로 인도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
인도를 제대로 받으려면,
우리 쪽에서도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이런 지시를 하셨습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루카 10,5-6).”
예수님의
복음은 우리를 ‘평화의 길’로 안내하는 초대장 같은 것입니다.
그
초대를 받아들여서 그 길로 나아가면 참 평화를 얻겠지만,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주시는 것을 받거나 안 받는 것은 우리 쪽의 선택입니다.
받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에게 억지로 주시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 가운데에는 전쟁만 없으면 평화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고,
아무 일 없이 몸이 편안하면 그게 평화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또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이 두 말씀을 합하면 이렇게 됩니다.
“나는 너희에게 거짓 평화가 아니라 참 평화를 준다. 거짓 평화에 속지 마라.
참 평화를 얻으려면 많은 고난을 겪을 수도 있겠지만,
낙심하지 말고 그 평화를 얻으려는 노력을 멈추지 마라.”
전쟁이 없어도 미움이 있다면 그것은 평화가 아닙니다.
몸이 편안해도 양심이 편안하지 않다면 그것은 평화가 아닙니다.
양심이 마비된 사람이라면 자기 혼자서 마음 편하게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도 하느님 앞에 서게 될 때가 되면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고,
자기가 평화라고 생각했던 것이 평화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경우에 대해서 요한 1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었다는 것은,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분처럼 살고
있기에 우리가 심판 날에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서 드러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1요한 4,17-18).”
이 세상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마음 편하게 살았더라도
하느님 앞에 섰을 때 두려워서 떨게 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거짓 평화 속에서 살았던 사람이고,
참 평화를 누릴 자격을 얻지 못하게 되는 사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 4,4-7).”
송영진 모세 신부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한 해의 시작과 함께 가장 많이 주고받는 말입니다. ‘복’(福)이란 한자어는, 하느님[示]께서 각자[一]에게 필요한[口] 밭[田]을 주셨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약속하신 말씀과 상통합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세상 사람들에게 가장 큰 복은 재물과 건강, 부귀와 영화겠지만, 하느님 백성인 우리에게 참된 복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상속자들입니다. 인간으로서 감히 얻을 수 없는 하느님의 몫을 상속받게 된다는 놀라운 사실을 새해 첫 날부터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님을 낳으신 성모님의 인생 속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성모님께서는 목자들이 전해 준 믿기지 않을 이야기를 들으시고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고 합니다.
화려하지만 사라져 버릴 세상이 주는 복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새겨 놓으신 하느님의 영의 선물을 받으신 성모님께서는 어떤 처지에서도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는 믿음의 복을 누린 분이셨습니다.
복은 혼자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은 서로 빌어 주는 것입니다.
새해 첫 날을 어제와 별 다르지 않은 날로 느끼는 대부분의 사람들 마음처럼, 행복과 희망은 저절로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결심하는 능력입니다. 새해에 내가 결심하고 하느님께 청한 것이 정말 내게 필요한 것인지 성모님처럼 곰곰이 되새겨 보면 좋겠습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