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공현 전 금요일]하느님의 천사들 (요한 1,43-51)

2018. 1. 5. 오전 6:2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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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공현 전 금요일]하느님의 천사들 (요한 1,43-51) 


      


요한 사도는,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하자고 한다. (1요한 3,11-21)
사랑하는 여러분, 11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말씀은 이것입니다. 곧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2 악마에게 속한 사람으로서 자기 동생을 죽인 카인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가 무슨 까닭으로 동생을 죽였습니까? 자기가 한 일은 악하고 동생이 한 일은 의로웠기 때문입니다.
13 그리고 형제 여러분, 세상이 여러분을 미워하여도 놀라지 마십시오.
14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는 것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죽음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
15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알다시피, 살인자는 아무도 자기 안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16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17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18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음을 알게 되고, 또 그분 앞에서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20 마음이 우리를 단죄하더라도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또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21 사랑하는 여러분, 마음이 우리를 단죄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필립보를 제자로 부르시고, 나타나엘에게,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요한 1,43-51)
그 무렵 43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기로 작정하셨다. 그때에 필립보를 만나시자 그에게“나를 따라라.”하고 이르셨다.
44 필립보는 안드레아와 베드로의 고향인 벳사이다 출신이었다.
45 이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만나 말하였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46 나타나엘은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하였다. 그러자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와서 보시오.”하고 말하였다.
47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당신 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48 나타나엘이 예수님께“저를 어떻게 아십니까?”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그에게“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하고 대답하셨다.
49 그러자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50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이르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51 이어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주님 공현 전 금요일 제1독서(1요한3,11-21)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알다시피, 살인자는 아무도 자기안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15)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자이며, 살인한 자는 영생이 그 안에 없으니 따라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그 안에 영생이 없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미워하다'라는 뜻으로 번역된 '미손'(mison) 원형 '미세오'(miseo)신약성경에서 40회 사용되었는데, 특히 요한1서에서는 형제 사랑과 관련하여 그 반대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요한은 요한1서 2장 9절에서 형제에 대한 미움은 어둠 속에 있는 표라고 말했으나, 본절에서는 더 극단적으로 살인하는 자라고 말한다. 사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이미 교훈하신 내용이다(마태5,21.22).

예수님께서 미움과 살인을 동일시하는 것은 살인은 미움(분노;화;성)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카인의 예와 같이 형제에 대한 미움의 극단적 행동은 살인으로까지 이어지며 그 살인의 시작은 미움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미움을 살인의 행위와 동일시하신 것이다.


'살인자'라는 뜻의 '안트로폭토노스'(anthropoktonos)는 고의적인 목적으로 계획되고 준비된 살인을 하는 자라는 말이다.

요한1서 3장 12절에서 '죽인'으로 번역된 '스파조'(sphazo) 살인을 비롯해서 짐승의 살육을 포함한 단어지만, '안트로폭토노스'는 '사람'을 뜻하는 '안트로포스'(anthrophos)'죽이다'라는 뜻을 지닌 '크테이노'(kteino)합성어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오직 사람을 죽이는 자(murderer; manslayer)만을 지칭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살인의 원조를 악마라고 말씀하셨다(요한8,44). 따라서 이 세상의 모든 살인자는 마귀에게서 났고, 그에게 속한 자들이다.


한편, 요한은 본절에서 요한1서 3장 14절의 '사랑하지 않는 자'를 '미워하는 자'로 제시함으로써, 미워함이 곧 사랑하지 않는 소극적 자세에 대한 적극적 반응임을 나타낸다. 또한 형제 사랑에는 어떤 회색 지대도 없음을 보여준다.

사실 하느님 대전에는 하느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녀, 곧 형제를 사랑하는 자와 미워하는 자 두가지 종류의 인간밖에 없다.


 '영원한 생명' (eternal life)

 형제에 대한 미움이 곧 살인임을 피력한 요한은 이러한 자를 영원한 생명과 관련시켜 설명한다.

여기서 특별히 영생을 말하는 것은, 당시 영지주의 이단들이 실제 삶에 있어서는 형제를 무시하고 미워하면서도, 그들 스스로는 특별한 영지를 가지고 있으며 영생하는 자처럼 처신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한은 그들의 주장이 허구임을 밝히기 위해서, 영생이 형제를 미워하는 자와는 전혀 상관이 없음을 설파했던 것이다.

실로 '영원한 생명'으로 번역된 '조엔 아이오니온'(zoen aionion)는 복음의 주제일 뿐 아니라 요한의 주요한 신학 주제에며,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이다.


요한은 예수를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으며(요한3,15.16),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임을 설파하였다(1요한5,20).


영원한 생명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은총으로서, 하느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아가게 하는 구원(salvation)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형제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영생이 없다고 말함으로써, 형제 사랑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도 부각시키는 것이다.


위의 요한의 서간을 읽으면서 우리는 참 구원과 영생에서 먼 사람들이구나!~~하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누구를 미워하고 욕하고 싸우는 것은 우리 속에 상대방에 대한 사랑과 상생 혹은 공생 공존의 의식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너무 자조적인 생각을 가질 필요가 없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대로 경천애인,애주애인을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의 노력하는 마음을 보신다.



 주님 공현 전 금요일복음 (요한 1,43-51)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47ㄷ)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48ㄴ)


'거짓이 없다'로 번역된 '돌로스'(dolos; deceit; false)'미끼', '올무', '속임', '간교함', '교활함', '거짓됨' 등을 뜻한다.

이것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게 하는 요소들 가운데 하나이며(마르7,22),  사탄의 속성 가운데 하나이고(마태26,4), 하느님께서 죽어 마땅하다고 경고하신 죄의 목록 중에 포함된 것인데(로마1,29), 나타나엘의 마음 속에는 대개의 사람들에게 발견되는 이것이 없다는 게 그의 훌륭한 인품에 대한 예수님의 증거이다.


특히 '없다'로 번역된 '우크 에스틴'(ouk estin; is nothing)이라는 현재 시제는 사실은 그가 계속적으로 온전한 마음을 유지했음을 시사한다. 


요한 복음 1장 4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고 말씀하신다.   'i saw you under the fig tree.'


이스라엘 사람들은 누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다, 포도나무 아래에 있다, 올리브나무 아래에 있다'라고 하면, 그것은 묵상기도 중에 있다, 명상 중에 있다는 말로 알아듣는다.


우리들은 이런 성경 말씀에 대한 전지식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 말씀이 무슨 뜻이길래  나타나엘이 놀라운 반응을 나타내면서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요한1,49) 라는 신앙 고백을 할까? 하고 의아해한다.


나타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묵상기도를 하고 있을 때 그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까 나타나엘의 놀라움과 신앙고백의 반응은 자신의 영혼의 속,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면의 기도 내용을 알아차리시고 다 알고 계시는 분은 인간이 아닌 하느님 밖에 더 계시는가?

바로 그것을 아시는 예수님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메시아이시다라는 말이다.


'무화과나무'에 해당하는 '쉬케'(syke; fig tree) 이스라엘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수종이며, 유다 민족의 번영을 상징하는 표현으로도 나타난다.

더욱이 무화과나무는 잎이 무성하고 그늘이 짙어서, 그 무성한 가지 아래 앉아 율법을 배우고 기도와 묵상을 하는 것은 경건한 유다인들의 오래된 관습이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는 지적은 그가 메시야 오심을 희망하면서 경건한 생활에 힘써 왔다는 것을 알게 한다. 특히 '있는 것을'로 번역된 '온타'(onta; when you were)현재 분사 시제그가 계속해서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 이 일을 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가 이같이 하는 모습을 '보았다'라고 했는데, '보았다'에 해당하는 '에이돈'(eidon; i saw)시각으로 감지하는 것을 나타내는데, 카나 출신 나타나엘이 경건하게 묵상에 잠긴 모습을 신적(神的) 전지(全知)로 이미 보셨던 것이다.


아마 나타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에 약속된 메시야가 과연 오셨는가?  도대체 세례자 요한은 누구이며, 예수라는 분은 누구신지를 아버지 하느님께 물으면서 묵상하고 있었을거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타나엘에게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천주 성자 이신데, 같은 하느님으로서 성부 하느님 사이에 천사가 왜 필요하겠는가?

이것은 육신을 취하신 예수님의 현재 위치이신 이 세상과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은 초월적인 영적인 차원에 계시는 성부 하느님 사이의 간극을 의미하는 말이다.


동시에 성령의 도구인 천사들이 성자 하느님과 성부 하느님 사이를 오르내리는 것은 여기 나타나엘의 묵상기도를 포함해서 지상에서의 모든 기도가 반드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부 하느님께 봉헌되며, 성부 하느님으로부터의 기도의 응답도 반드시 예수님을 통하여 주어진다는 명명백백한 진리를 계시하시는 내용이다.


또한 성령의 도구인 천사가 날개가 있다면 단번에 성부 하느님께 오를텐데, 오르락 내리락 한다는 것은 우리도 완덕의 근원이시고 모범이신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 하느님께 가는 길이 step by step 한 단계 한 단계씩 서서히 이루어진다 뜻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주시는 완덕과 성덕에의 진보도, 은총과 은사를 받아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의 선익을 위해 봉사하는 일도 서서히 이루어지는 일이므로, 너무 욕심을 내거나 예수님을 앞서 가거나 서둘러서는 안되고, 한 단계 한 단계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밟아 가야 한다는 사실을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필립보와 나타나엘을 부르시다.>


“이튿날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기로 작정하셨다.

그때에 필립보를 만나시자 그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필립보는 안드레아와 베드로의 고향인 벳사이다 출신이었다.

이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만나 말하였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나타나엘은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였다.

그러자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요한 1,43-46).”


여기서 “필립보는 안드레아와 베드로의 고향인 벳사이다 출신이었다.” 라는 말은,

안드레아와 베드로가 같은 고향 사람인 필립보를 예수님께 데리고 갔음을

암시하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또 벳사이다 출신인 필립보가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 강 건너편 베타니아’(요한 1,28)에 와 있다는 것은

필립보도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음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필립보도 안드레아처럼 요한의 소개로 예수님께 갔을지도 모릅니다.


필립보와 나타나엘이 친구 사이였는지는 모르지만,

어떻든 두 사람은 서로 잘 아는 사이였던 것 같고,

필립보는 나타나엘을 예수님의 제자가 될 만한 사람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이라는 말은 메시아를 뜻합니다.

필립보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나타나엘에게 말한 것은,

메시아께서 세상에 오셨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 준 일과 같습니다.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라는 말은,

“세상 사람들은 그분을 나자렛 출신이며 요셉의 아들인 예수로만 알고 있지만,

나는 그분을 메시아로 믿습니다.”로 해석됩니다.

안드레아도 자기 형 베드로에게 가서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라고 증언했습니다(요한 1,41).

메시아를 만남으로써 정말로 기쁨을 얻었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됩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라는 나타나엘의 말은,

“메시아께서 나자렛에서 나온다는 예언은 없었소.”로 해석됩니다.

구약성경은 메시아께서 태어나실 곳은 베들레헴이라고 예언했습니다(마태 2,6).

나자렛은 구약성경에서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는 마을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예수님이 왜 베들레헴 출신이 아니라 ‘나자렛 출신’으로 불리게

되었는지 알고 있지만(마태 2,23), 당시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와서 보시오.” 라는 필립보의 말은, “예수님을 직접 만나보면,

그분이 메시아라는 것을 믿게 될 것이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안드레아에게 “와서 보아라.”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요한 1,39).

와서 보라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과

그분의 삶을 직접 본다면,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믿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삶’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에 관한 사도들의 증언을 믿기 때문이고,

또 예수님을 믿은 사도들의 삶과 죽음이 어떠했는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필립보의 말은, 구약성경의 예언은 무시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의 말은,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의 삶을 직접 본다면,

성경의 예언이 예수님에게서 실현되었음을 확인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도,

말로 하는 증언보다 ‘삶’으로 하는 증언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실 때,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마태 23,3).

말과 행실이 다르다면, 아무리 말을 잘해도 선교활동을 할 자격이 없습니다.

오히려 역효과만 생길 것입니다.

아마도 안드레아가 베드로에게 가서 메시아를 만났다는 말을 할 때에도,

또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라는 말을 할 때에도,

기쁨과 확신에 찬 모습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모습은 누가 보아도 굉장히 크게 변화된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말’보다도 그 기쁨과 확신에 찬 모습이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당신 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러자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요한 1,47-49)”


예수님께서는 ‘진실한 사람’이라고 나타나엘을 칭찬하십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라는 말씀은,

당시의 율법학자들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성경과 율법을 공부하던

관습에서 나온 표현인데, 여기서는 “네가 성경과 율법을 공부하면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다.” 라는 뜻입니다.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라는 말씀은, “너를 부른 것은 필립보가 아니라,

사실은 나다.”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예수님께 소개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예수님께서 필립보를 통해서 나타나엘을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필립보 자신은 의식하지 못한 일이었겠지만...)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라는

나타나엘의 말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다는 고백입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 1,5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 1,51)”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과

천사들이 예수님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믿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것은 예수님의 시중을 들기 위해서이고,

이것은 ‘예수님은 곧 하느님’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예수님을 구약에 예언된 예언자로 알아본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자신의 체험을 전했을 때, 나타나엘은 편견의 늪에 갇혀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고 반문합니다. 필립보는 자신이 체험한 것을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라고 말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던 모습을 눈여겨보셨고 그의 흠 없는 인품을 알아보십니다. 자신의 내면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죄스러움을 가졌지만, 나타나엘은 예수님을 스승으로, 더 나아가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고백하기에 이릅니다. 
한 사람의 진면목을 알아보려면 내 안에 편견과 선입견이 없어야 합니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것은 내 마음이 상대방과 공감할 수 없도록 벽을 쌓았기 때문입니다.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것도 아벨과 비교당한 속상함을 넘어, 하느님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자기 편견에 사로잡혀 미움의 포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우리 안에 미움과 분노가 커지면, 상상으로나 말이나 글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이며 살게 되는지 되돌아보면 압니다. 
요한 사도는 사랑은 자신뿐만 아니라 내 형제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끄는 힘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라고 힘주어 말합니다. 혹시 지금 내가 미워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로 말미암아 내가 죽음의 고통 속에서 용서와 자비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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