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주간 화요일]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 (마르 1,21ㄴ-28)

2018. 1. 9. 오전 5: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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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주간 화요일]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 (마르 1,21ㄴ-28)


한나는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내가 주님께 청을 드려 얻었다.” 하면서, 아이의 이름을 사무엘이라 한다. (1사무 1,9-20)
그 무렵 9 실로에서 음식을 먹고 마신 뒤에 한나가 일어섰다. 그때 엘리 사제는 주님의 성전 문설주 곁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10 한나는 마음이 쓰라려 흐느껴 울면서 주님께 기도하였다.
11 그는 서원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만군의 주님, 이 여종의 가련한 모습을 눈여겨보시고 저를 기억하신다면, 그리하여 당신 여종을 잊지 않으시고  당신 여종에게 아들 하나만 허락해 주신다면, 그 아이를 한평생 주님께 바치고  그 아이의 머리에 면도칼을 대지 않겠습니다.”
12 한나가 주님 앞에서 오래도록 기도하고 있는 동안에  엘리는 그의 입을 지켜보고 있었다.
13 한나는 속으로 빌고 있었으므로, 입술만 움직일 뿐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엘리는 그를 술 취한 여자로 생각하고
14 그를 나무라며, “언제까지 이렇게 술에 취해 있을 참이오? 술 좀 깨시오!” 하고 말하였다.
15 그러자 한나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나리!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닙니다. 저는 마음이 무거워 주님 앞에서 제 마음을 털어놓고 있었을 따름입니다.
16 그러니 당신 여종을 좋지 않은 여자로 여기지 말아 주십시오. 저는 너무 괴롭고 분해서 이제껏 하소연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17 그러자 엘리가 “안심하고 돌아가시오.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당신이 드린 청을 들어주실 것이오.” 하고 대답하였다.
18 한나는 “나리께서 당신 여종을 너그럽게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하고는  그길로 가서 음식을 먹었다. 그의 얼굴이 더 이상 전과 같이 어둡지 않았다.
19 다음 날 아침, 그들은 일찍 일어나 주님께 예배를 드리고  라마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엘카나가 아내 한나와 잠자리를 같이하자  주님께서는 한나를 기억해 주셨다.
20 때가 되자 한나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한나는 “내가 주님께 청을 드려 얻었다.” 하면서, 아이의 이름을 사무엘이라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권위를 가지고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을 고쳐 주신다. (마르 1,21ㄴ-28)
카파르나움에서, 21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22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2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24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25 예수님께서 그에게“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하고 꾸짖으시니,
26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27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28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



연중 제1주간 화요일 제1독서 (1사무1,9-20)


사무엘은 '샤울 메엘'(Shaul Meel : 1사무 1,17.27-28) 에서 나온 이름으로 '하느님께 청을 드린'이란 뜻이다.

"만군의 주님, 이 여종의 가련한 모습을 눈여겨보시고 저를 기억하신다면, 그리하여 당신 여종을 잊지 않으시고 당신 여종에게 아들 하나만 허락해  주신다면, 그 아이를 한평생 주님께 바치고, 그 아이의 머리에 면도칼을 대지 않겠습니다."(10절 참조)

 

실로에 있는 성전에서 한나는 '마음이 쓰라려 흐느껴 울면서' 이렇게 기도하고 서원하였다(10). 그리고 한나는 '오래도록' 기도하였고(12), 입술만 움직이며 속으로 빌었다(13).

얼마나 혼신을 다해 속으로 신음하면서 기도했으면, 얼굴이 뻘겋게 달아 오르고 상기되어서, 엘리 사제가 그를 '술취한 여자'로 생각하고 나무랐겠는가?


한나는 '마음이 무거워, 주님 앞에서 제 마음을 털어놓고 있었을 따름'이며(15), '너무 괴롭고 분해서 이제껏 하소연하고 있었을 뿐'이었다(16).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자가 자식을 못 낳는 것은 심각한 문제인 것 같다. 우리나라는 이런 여자를 '석녀(石女: 돌계집)이라고 부르고, 의학적 용어로는 성기능 장애의 질병인 '불감증'에 걸렸다고 말할 수 있다.

영어로는 '불감증'을 'Frigidity'라고 하는데, 이것은 '얼다'라는 뜻의 'Freeze'에서 파생된 말로, '돌'이란 단어처럼 차갑고 단단하다는 느낌을 준다.


우리나라는 '석녀'에 대한 형벌이 가혹했던 나라였다. 자식을 낳지 못라는 것은 '칠거지악(七去之惡)'의 하나였다. 농가에서 볍씨를 뿌리거나 감자를 심을 때, 콩 씨앗을 뿌릴 때는 여자 품을 샀는데, 이때 다산한 여인은 대우를 받았지만,석녀는 제외 당했다. 


물론 다산한 여인의 번식력을 통해 풍년을 기원하는 속내가 담겨 있지만, 아이를 못 낳으면 품도 팔 수 없다는 절박함이 바로 자식욕으로 나타나고, 이왕 낳을 바에는 아들을 낳겠다는 남아 선호 사상을 잉태시켰다. 전통적으로 민간에 전해 오던 '석녀'를 면하기 위한 이야기는 여기서 생략한다.


유대인들의 자녀 출산은, 욕정의 만족과 더불어 선민 이스라엘의 종족 번식과도 관련되어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협력하는 일이 된다. 그런데, 생명의 절대권을 가지신 하느님께서 여성의 태를 열어 주셔야 임신이 가능하므로, 자녀를 낳을 수 없다는 것은 하느님의 축복에서 제외된 불행한 삶이다.


따라서 종교 율법적인 유대인 사회에서, 항상 소외되고 손가락질을  받는 불행한 처지와  神의 저주받은 죄인 신세를 면하기 어렵게 된다. 그래서 한나처럼, 성모님의 어머니 안나처럼,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처럼,  늘 하느님께서 자식을 점지해 주시도록, 광야에서나 성전에서 기도를 드리고 제물을 바쳤던 것이다.


한나는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청하며 기도드렸고, 일찍 일어나 주님께 예배를 드렸다(19ㄱ). 주님께서는 한나의 속 마음을 보시고 기억해 주셔서(19ㄴ), 때가 되어 훌륭한 예언자가 될 사무엘을 낳게 되었다.


 

 연중제1주간 화요일 복음 (마르1,21ㄴ-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25~26)


마르코 복음 1장 24절에서 더러운 영이 예수님께 대하여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고 부른다. 나자렛이 예수님의 출생지는 아니지만, 유년 시절을 보내신 곳이므로 실질적인 출신지라고 볼 수 있다.


당시 나자렛은 유대인에 의해 경멸받던 지명이므로(요한1,46), 더러운 영이 갈릴래아를 대표할 수 있는 큰 도시인 카파르나움에서 사람들 앞에 예수님을 그렇게 부른 것은 예수님의 권위를 떨어뜨리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리고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에 해당하는 '티 헤민 카이 소이'(Ti hemin kai soi; what do you want with us)를 직역하면, '우리가 당신에게 무엇입니까?'이다. 말하자면 예수님과 더러운 영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므로 우리를 괴롭히지 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서 더러운 영은  자신들을 가리켜, '우리','저희'라는 표현으로 쓰고 있는데, 더러운 영이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과 자신을 복수 위격으로서 말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더러운 영이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의 입을 빌어 말하는 악한 영이 하나가 아니고 여럿이기 때문에 이러한 표현을 썼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라는 표현은 악한 영들이 내용적으로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라, 조롱하며 자신을 방해하는 투설의적 형태의 문장이다. 그러니까 영적으로 상당한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던 악한 영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사탄의 권세를 멸망시켜서 사탄의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 고통 당하고 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다(마르2,10; 1요한3,8).


그리고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에 해당하는 '호 하기오스 투 테우'(ho hagios tou theou; the Holy One of God)마르코 복음 1장 23절'더러운 영'에 해당하는 '프뉴마티 아카타르토'(pneumati akatharto; an evil spirit; an unclean spirit)대조되는 개념으로서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정확하게 깨달을 수가 있는 것이다 (잠언1,7; 야고2,19).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하고 꾸짖으시니  여기서 '꾸짖으시니'이 해당하는 '에페티메센'(epetimesen; rebuked)의 원형 '에피티마오'(epitimao)'엄하게 경고하다','책망하다'는 뜻이다.


당시에 마술사들은 독특한 도구를 사용해서 주술적 행위를 하여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는 시늉을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오로지 당신 자신의 말씀의 권위를 사용하셔서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셨다.


그리고 구마행위를 하시는 예수님의 선포'조용히 하여라''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두 가지 명령으로 나눌 수 있다. 

'조용히 하여라'는 첫번째 명령은 더러운 영이 이미 알고 있는 메시야로서의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발설을 엄하게 금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전에 미리 알려지면, 사람들에 의해 정치적 메시야로 옹립되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데 지장을 받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조용히 하여라'에 해당하는 '피모테티'(phimotheti; he quiet; hold your peace)의 원형 '피모오'(phimoo)라는 단어가 '입에 재갈을 물리다'라는 의미가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까지 그 함구령이 얼마나 비밀스럽게 지켜져야 했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나가라'에 해당하는 두번째 명령은 직접적으로 '치유 행위'와 관련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항변하는 더러운 영을 잠잠케 하시는 데 그치지 않고, 이어서 더러운 영에 들려 고생하는 부마자로부터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는 구마 행위를 하신다.


여기서 '나가라'에 해당하는 '엑셀테'(ekselthe; come)기본형은 '에르코마이'(erchomai)인데, 앞에 '안으로'에 해당하는 '에이스'(eis; into)라는 접두사가 붙으면 '들어가다'는 뜻의 '에이세르코마이'(eiserchomai)가 되고, 앞에 '밖으로'에 해당하는 '에크'(ek; out of)라는 접두어가 붙으면 '나가다'라는 뜻의 '엑세르코마이'(ekserchomai)가 된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 1장 21절의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해당하는 '에이셀톤'(eiselthon; he entered)과 마르코 복음 1장 25절 '나가라'에 해당하는 '엑셀테'(ekselthe; come)대조가 되어, 예수님께서 '회당 안으로 들어오심'더러운 영의 '회당 밖으로 (사람 밖으로) 쫓겨남' 원인이 되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의 들어 오심과 더러운 영의 쫓겨남 사이에는 예수님의 권위있는 말씀의 선포가 놓여 있다(마르1,22).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자로서의 신적 능력과 권세가 있었다. 그래서 더러운 영은 자신의 지혜에 근거한 항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거주하던 사람으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당신의 장면을 '경련을 일으켜 놓고'에 해당하는 '스파락산'(sparaksan; had torn; shook violently)'(큰 충격에 의한) 큰 소리'에 해당하는 '포네 메갈레'(phone megale; with a shriek; with a loud voice)라는 두 단어를 사용해서 더러운 영이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 아래 저항하지 못하는 모습을 시각과 청각적인 이미지를 사용하여 묘사하고 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더러운 영이 자신이 머물렀던 사람에 대해서 행하는 최후의 학대 장면인 경련의 모습을 실감나게 그리면서도, 그가 내지르는 죽음에 이르는 듯한 비명과 통곡의 소리를 동시에 표현함으로써 더러운 영의 극한 상실감과 마지막 저항을 묘사했다.

이것은 공관 복음서 안에서 마르코 복음사가만의 독특한 표현인데, 사탄의 세력의 완전한 패배를 강력하게 암시하는 것이다.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다.>


“그들은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마르 1,21-22).”

여기서 ‘권위’ 라는 말은 일반적인 의미의 권위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권능)’을 뜻하는 말입니다.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하느님의 힘’을 느꼈고,

그 힘에 압도되어서 몹시 놀라긴 했지만,

어떻게 예수님에게 그런 힘이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27절).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마르 1,23-26).”

여기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하는 말은 사실은 ‘더러운 영’이 하는 말입니다.

악령은 예수님을 잘 알고 있고,

예수님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든 저항을 해 보려고 시도합니다.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라는 말은,

자기들이 하는 일에 상관하지 말라고 반항하는 말입니다.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라는 말은,

자기들을 멸망시키지 못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는 말입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라는 말은,

“나는 당신보다 더 힘이 세다.” 라는 뜻으로 하는 말입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라는 말은,

뜻으로는 “나는 당신이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는 것을 아는데,

당신은 당신의 일이나 하고, 나를 그냥 내버려 두어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악령과 대화도 하지 않으시고,

또 악령의 반항이나 말대답도 허용하지 않으시고, 바로 그 악령을 쫓아내십니다.

(악령과 대화하는 것 자체가 그것들의 계략에 빠지는 일이 됩니다.)

만일에 악령이 예수님의 명령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그것들은 곧바로 지옥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악령들도 자기들이 그렇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끝까지 저항하지 못하고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마르 1,27-28).”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을 때에는 하느님의 힘을 느끼기만 했는데,

악령이 쫓겨나는 상황에서는 그 힘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놀라게 됩니다.

여기서 ‘새롭다.’ 라는 말은 ‘전에는 본 적이 없다.’로 해석됩니다.

‘권위 있는 가르침’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힘이 들어 있는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악령은 사람의 말에는 결코 복종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말씀에만 복종하는 존재입니다.


제자들의 경우에는 예수님의 말씀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힘을

카파르나움 사람들보다 더 생생하게 체험했습니다.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르 4,37-41)”

바람과 호수가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악령이 복종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은 만물을 지배하시는 주님”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여기서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라는 제자들의 말은,

“이게 어찌 된 일이냐?” 라는 카파르나움 사람들의 말과 같은 말입니다.

어떻든 제자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신적 권능을 체험했고,

이 체험은 나중에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믿음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도 예수님의 권능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루카 24,19).”

이 말에서 ‘힘’은 ‘하느님의 힘(권능)’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 두 제자는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에서 하느님의 권능을 체험했는데,

그들은 그런 분이 왜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셨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의 의미를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힘’을 제자들에게 위임해 주셨고,

제자들은 그 ‘힘’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용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루카 9,1).”

“베드로가 말하였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사도 3,6)”

그 ‘힘’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교회와 신앙인들을 통해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힘’을 아무나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있고, 믿음을 행실로 실천하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 ‘힘’을 사용할 자격이 있습니다(마태 7,21-23).

만일에 교회와 신앙인들이 자만심에 빠져서 비신자들과 다르지 않게 산다면,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실 때보다(마태 23,1-36)

더 엄하게 교회와 신앙인들을 꾸짖으실 것입니다.

교회와 신앙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의 원천은 예수님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충실하게 살면 그 힘은 더욱 커질 것이고,

반대로 예수님에게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 힘은 더욱 약해질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권위란 상대에게 존중과 신뢰를 얻을 수 있는 내면의 힘과도 같습니다.

우리 사회는 이런 권위를 갖고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할 때 성장합니다.

권위는 상대를 무시하거나 힘으로 누르려는 권력과는 달리 겸손과 사랑으로 상대방을 변화시키고 성장시키는 관계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대의 율법 학자들처럼 성경 지식과 전통에 대한 해석의 권위와 같은 지적 우월감에 빠지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병들고 악령에 갇힌 이들을 해방시키는 하느님의 거룩한 능력을 통해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영적인 권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고 굶주린 사회적 약자들 편에서 그들을 위로하고 함께하시며, 당신 스스로 가난하게 사신 삶의 권위를 지니신 분이셨습니다. 

사람들은 더 많은 지식과 재산으로 사람들을 복종시키는 것이 권위라고 착각하지만,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참된 권위는 하느님을 향한 겸손과 순명으로 하느님 백성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아이를 낳지 못한 한나가 사무엘을 얻게 된 것은, 그녀가 철저하게 자신을 가련한 여종으로 낮추고 하느님의 섭리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도 자신을 ‘주님의 종’으로 낮추시어, 그 비천함을 주님께서 굽어보시고 자비를 베푸셨다고 믿으셨기에, 은총을 가득히 받은 여인으로 존경과 사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세상이 속되고 속물로 가득 차도 하느님의 거룩함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존경하는 성인들의 삶이나, 우리 주변에 거룩한 순명의 삶을 살아가는 숨은 성인들의 겸손과 사랑이 있는 한, 세상의 권력과 권위가 하느님의 영의 권위를 이길 수 없음을 기억합시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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