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주간 목요일]나병 (마르 1,4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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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하느님의 계약 궤를 모시고 필리스티아인들과 싸우지만 크게 패하여 계약 궤를 빼앗긴다. (1사무 4,1ㄴ-11)
그 무렵 필리스티아인들이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려고 모여들었다. 1 이스라엘은 필리스티아인들과 싸우러 나가 에벤 에제르에 진을 치고, 필리스티아인들은 아펙에 진을 쳤다.
2 필리스티아인들은 전열을 갖추고 이스라엘에게 맞섰다. 싸움이 커지면서 이스라엘은 필리스티아인들에게 패배하였다. 필리스티아인들은 벌판의 전선에서 이스라엘 군사를 사천 명가량이나 죽였다.
3 군사들이 진영으로 돌아오자 이스라엘의 원로들이 말하였다. “주님께서 어찌하여 오늘 필리스티아인들 앞에서 우리를 치셨을까? 실로에서 주님의 계약 궤를 모셔 옵시다.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에 오시어 원수들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도록 합시다.”
4 그리하여 백성은 실로에 사람들을 보내어, 거기에서 커룹들 위에 좌정하신 만군의 주님의 계약 궤를 모셔 왔다. 엘리의 두 아들 호프니와 피느하스도 하느님의 계약 궤와 함께 왔다.
5 주님의 계약 궤가 진영에 도착하자, 온 이스라엘은 땅이 뒤흔들리도록 큰 함성을 올렸다.
6 필리스티아인들이 이 큰 함성을 듣고, “히브리인들의 진영에서 저런 함성이 들리다니 무슨 까닭일까?” 하고 묻다가, 주님의 궤가 진영에 도착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7 필리스티아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말하였다. “그 진영에 신이 도착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외쳤다. “우리는 망했다! 이런 일은 일찍이 없었는데.
8 우리는 망했다! 누가 저 강력한 신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겠는가? 저 신은 광야에서 갖가지 재앙으로 이집트인들을 친 신이 아니냐!
9 그러니 필리스티아인들아, 사나이답게 힘을 내어라. 히브리인들이 너희를 섬긴 것처럼 너희가 그들을 섬기지 않으려거든, 사나이답게 싸워라.”
10 필리스티아인들이 이렇게 싸우자, 이스라엘은 패배하여 저마다 자기 천막으로 도망쳤다. 이리하여 대살육이 벌어졌는데, 이스라엘군은 보병이 삼만이나 쓰러졌으며,
11 하느님의 궤도 빼앗기고 엘리의 두 아들 호프니와 피느하스도 죽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의 병을 고쳐 주시고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하시지만 그가 이야기를 널리 퍼뜨리는 바람에 드러나게 고을에 들어가지 못하신다. (마르 1,40-45)
그때에 40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41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42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43 예수님께서는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셨다.
44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45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
연중 제1주간 목요일 (1사무 4,1ㄴ-11)
오늘 독서는 이스라엘이 필리스티안인들과의 싸움에서 패하고, 주님의 계약 궤를 빼앗기는 이야기이다.
엘리 사제의 두 아들, 호프니와 피느하스의 범죄로 인해 하느님의 심판이 시작되고, 그 결과 주님의 궤를 빼앗기게 된다. 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직분을 소홀히하는 범죄를 저질렀다.
사제의 신분으로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를 경멸했고, 하느님께 드려야 할 제물을 먼저 빼앗아 먹었으며, 만남의 천막 어귀에서 봉사하는 여인들과 음란한 죄를 범했다.(1사무 2,11-17.22-25) 그들은 아버지 엘리의 말도 듣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죄를 지으면 하느님께서 중재하여 주시지만, 사람이 주님께 죄를 지으면 누가 그를 위해 빌어 주겠느냐? 그러나 그들은 아버지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주님께서 그들을 죽이실 뜻을 품으셨기 때문이다." (25)
이스라엘은 이제 에벤 에베르 전투에서 비참하게 패배하고, 군사가 사천명 가량이나 죽었다.(1-2) 그래서 군사들이 진영으로 돌아오자, 이스라엘의 원로들이 패배 원인에 대한 반응을 나타내고 대책을 내놓는다.
이스라엘의 원로들은 패배가 전혀 뜻밖이라는 탄식조의 발언을 하며, 필리스티아인들에 비해 병력이나 군비면에서 전혀 손색이 없었음에도, 무참하게 패배한 데에는 분명히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미 엘리 사제와 그 아들들에 대한 심판이 전쟁의 패배로 나타났는데도, 그들은 하느님께도 책임이 있다는 말투를 드러낸다.
"주님께서 어찌하여 오늘 필리스티아인들 앞에서 우리를 치셨을까?" (3)
이들은 지금 전쟁에서 패한 이유를 정확히 모르고 있다. 이들은 하느님은 무조건 전쟁에서 이기게 하시고, 복을 주시는 분으로만 생각하고 있었을 뿐,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심판하시는 분임을 모르고 있다. 하느님은 사랑의 하느님인 동시에 정의의 하느님이신대도 말이다.
바로 <실로>에 있는 주님의 계약 궤를 진중으로 가져오자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전쟁에서 패한 원인이 주님의 계약 궤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주님의 계약 궤만 있으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에 오시어 원수들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도록 합시다." (3-4)
그런데, 그 계약 궤를 지키고 있는 두 사람이 바로 엘리의 두 아들 호프니와 피느하스였다. 하느님의 심판의 대상인 그들이 거룩한 하느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계약 궤를 지킨다는 것은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주님의 계약 궤가 진영에 도착하자, 온 이스라엘은 땅이 뒤흔들리도록 큰 함성을 올렸다." (5)
이제는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에서 나온 함성이다. 그러나 이들은 큰 착각을 하고 있다. 왜냐하면, 주님이 떠나버린 계약 궤는 아무런 능력이 없는 상징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필리스티아인들은 히브리인들의 진영에서의 함성 소리를 듣고, 주님의 궤가 진영에 도착한 사실을 알게 되어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필리스티아인들은 "우리는 망했다! 이런 일은 일찌기 없었는데~" (8) 라고 말한다.
이 말은, 이스라엘이 전쟁 중에 계약 궤를 가지고 온 것이 처음이라는 뜻도 되고, 필리스티아인들이 처음으로 전쟁 중에 공포를 느꼈다는 의미도 된다. 그리하여 필리스티아인들은 히브리인들의 포로와 종이 되지 않기 위해서 "사나이답게 싸우자"고 격려하며 대담하게 싸워서, 이스라엘의 보명 십만명을 죽이고, 하느님의 궤도 빼앗는다. (9-11)
우리 주님께서는 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심으로, 어떤 장소나 어떤 상징적인 물건에 구속받지 않으신다. 주님의 임재가 떠난 계약 궤는, 아무런 힘도 소용도 없는 나무 궤짝에 지나지 않는다. 범죄한 백성이 회개하지 않으면, 주님은 전혀 방패와 도움이 되어 주시지 않는다.
이 전쟁에서 중요한 사건은 바로 엘리의 두 아들이 죽임을 당한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징계이다. 영적으로 타락한 이스라엘 대한 징계인 동시에, 엘리 가문에 대한 심판의 예언이성취된 것을 보여준다. (1사무 2,34)
계약 궤는 하느님이 임재하신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그들은 계약 궤 자체에 어떤 능력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여 그 상징이 의미하고 있는 본질을 바로 알지 못함으로, 미신적인 신앙으로 흘려 버렸다. 무조건 계약 궤만 있으면, 거기에서 능력이 나와서 이기는 것으로 착각하고 오해했던 것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동시에 하느님의 놀라운 특권을 가진 이스라엘이 그 특권을 누리려면,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할 죄는 그대로 품은 채, 계약 궤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계약 궤가 진중에 도착한 것을 보고, 함성을 지르는 것은 소용이 없다. 우리 주님은 겉이 아니라 속(중심)을 보시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눈에 보이는 성전이 화려하고 아름답게 보이면 무엇하는가? 그 성전 안에, 진정으로 살아계신 하느님께서 임재하시는가? 가 중요하다. 겉만 잘 포장된 위선적인 신앙인 말고, 인격의 중심에 항상 주님을 모신 자녀, 겉과 속이 같은, 진실하고 거룩한 주님의 자녀로서 살아가자.
연중 제1주간 목요일 복음(마르1,40~45)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44)
여기서 '모세가 명령한 예물'이란, 모세의 율법에 부정한 이가 정결함을 입었을 경우에 사제에게 가서 바쳐야 할 제물들을 가리킨다.
정결례에 관해 기록된 레위기의 규정을 보면, 이것은 살아있는 정결한 새 두마리, 향백나무, 다홍실, 우슬초였고(레위14,4), 다시 여드레째 되는 날에 바쳐야 하는 것으로는 흠없는 어린 숫양 두 마리와 일 년 된 흠없는 어린 암양 한 마리, 곡식 제물로 바칠 기름 섞은 고운 곡식 가루 십분의 삼 에파와 기름 한 록이었다(레위14,10).
또한 마르코 복음 1장 44절 전반부에 기록된 것처럼, 그 제물을 바치기 전에 자신이 병이 나았음을 먼저 사제에게 보이고 정결한 이로 선언을 받아야 한다(레위13,16.17).
사실 예수님께서는 제사가 바쳐지던 성전보다 더 크신 분이시고(마태12,6), 당신 자신이 임금같은 대사제인 멜키체덱의 반열을 따르신 대사제이시므로, 반드시 구약의 제의적 행위를 필요로 했던 것은 아니다(히브6,20).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치유받은 나병 환자에게 율법의 규정을 준수하도록 명령하신 것은, 당신이 율법을 폐지하거나 부정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온전케 하고 완성하러 오셨다(마태5,17)는 사실을 확인하여 보여 준다.
그러나 이것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치유의 완전성을 보여 준다. 당시 나병 환자의 완치를 공적으로 확인해 주던 사제에게 보여도 아무런 하자가 없을 정도로 예수님의 치유는 완벽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 환자는 적법한 절차를 거쳐 유대인 공동체 안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이것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하는 우리가 적법한 절차를 거쳐 아무런 하자없이 그리스도의 왕국에 당당하게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예표하는 것이다.
<믿음, 순종>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마르 1,40-42).”
여기서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라는 말은,
그 병자가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은 가지고 있지만,
예수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은 아직 부족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 말을 이렇게 풀어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저의 병을 고쳐 주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의향은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부디 저를 가엾게 여겨 주십시오.”
(이 말은, 오늘날 우리가 미사 시작 부분에서 바치는 ‘자비송’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자비송’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틀림없이 자비를 베풀어주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바치는 기도입니다.
만일에 믿음 없이 막연한 기대감만으로 바친다면, 그것은 올바른 기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자비송’의 원문은 ‘키리에 엘레이손’인데,
이것을 원문대로 번역하면 전에 사용했던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입니다.
뜻을 생각하면, ‘자비를 베푸소서.’보다 ‘불쌍히 여기소서.’가 더 좋은 번역입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를 원문대로 번역하면 “나는 원한다.”입니다.
병자를 고쳐 주는 것은 원래 예수님께서 원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일 자체가 예수님께서 원하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병자가 청하지 않아도, 먼저 가엾게 여기시고, 고쳐 주시는 분입니다.
좋은 예가 ‘벳자타’ 못 가에서 병자를 고쳐 주신 일입니다.
“거기에는 서른여덟 해나 앓는 사람도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래 그렇게 지낸다는 것을 아시고는, ‘건강해지고 싶으냐?’ 하고
그에게 물으셨다. 그 병자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그러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다(요한 5,5-9).”
그 병자는 예수님을 몰랐고, 몰랐으니까 안 믿었고,
안 믿었으니까 예수님께 치유를 청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못 속에 넣어 달라는 것만 청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그를 가엾게 여기셨고,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보통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 라고 단순하게 말하지만,
사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예수님은 나를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믿음과
“예수님은 나를 가엾게 여기시는 분”이라는 믿음이 합해져 있는 믿음입니다.
(‘권능’에 대한 믿음과 ‘자비’에 대한 믿음이 합해진 믿음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의 ‘권능’은 믿지만 자비를 안 믿는다면?
그러면 ‘무서워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 없이 두려움만으로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아닙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자비’는 믿지만 ‘권능’을 안 믿는다면?
그러면 신앙생활을 아예 안 하게 될 것입니다.
‘권능’이 없는 분에 대해서는 신앙 자체가 생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셨다.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마르 1,43-45).”
여기서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라는 말씀은,
“내가 너를 고쳐 주었다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단단히 이르셨다.”는 “매우 엄하게 명령하셨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병자가 원래의 생활로 복귀하기를 바라셨지만,
당신에 관한 소문이 퍼지는 것은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즉 사람들이 당신을 ‘병을 잘 고치는 의사’로만 생각하는 것을
막으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에 관한 복음은 들으려고 하지 않고,
몸의 병을 고치는 것만 원하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자비로우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든지 안 믿든지 간에
당신에게 오는 병자들을 물리치지 않으시고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병자들이 몸을 고친 뒤에 영혼 구원을 추구하지 않고
그냥 떠나버리는 것에 대해서는 몹시 안타까워 하셨습니다(루카 17,17-18).
이 이야기에서 그 병자가 예수님의 명령을 어기고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즉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 주신 일을
널리 알리고 퍼뜨린 것을 좋은 뜻으로 생각하면,
‘너무 기뻐서’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자기 기쁨에만 취해서 예수님의 명령을 어긴 불순종입니다.
따라서 받은 은총을 죄로 갚은 것과 같습니다.
“그래도 그의 행동을 ‘죄’ 라고 표현하는 것은 심하지 않은가?”
라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가 예수님의 일을 방해할 의도로 그런 행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께서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으니, 결과적으로 그는 예수님의 일을 크게 방해한 사람이 되었고,
그의 행동은 죄가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병자 외에도,
정말 좋은 의도로 한 말이었는데도 크게 혼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바로 베드로 사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수난 예고 말씀을 하셨을 때,
베드로 사도는 순전히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러면 안 된다고 말렸는데,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라고 그를 매우 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나의’ 의도보다 ‘예수님의 일’이 더 중요합니다.
자신의 생각만을 기준으로 행동하다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에 걸림돌이 된다면,
그것은 본의 아니게 사탄의 일을 하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오늘 복음과 독서에서는 예수님께 치유를 청하는 나병 환자와, 필리스티아인과 싸워 이기려고 하느님 현존의 상징인 주님의 계약 궤를 전면에 내세우는 이스라엘 원로들의 대조적인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겸손하게 청하는 나병 환자의 모습은 치유의 주도권이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전쟁에서 승리하려고 주님의 계약 궤를 이용하는 이스라엘 원로들의 태도에는 주님이 아니라 자신들이 전쟁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는 교만이 엿보입니다.
두 대조적인 태도의 결과는 명확합니다. 겸손한 나병 환자의 청원에는 가엾은 마음으로 ‘손을 내밀어’ 신체적인 고통과 사회로부터 격리된 소외감에서 해방시키는 예수님의 치유가 이루어집니다.
반면, 명분 없는 전쟁에서 승리하려던 이스라엘은 대살육을 당하고, 하느님의 궤까지 빼앗기는 징벌을 받고 맙니다.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겸손과 교만의 두 얼굴을 본 듯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같은 하느님인 듯하지만, 각자가 믿고 기대하는 하느님의 얼굴은 전혀 다릅니다.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고, 당신 얼굴을 보여 주실 것을 기대하지만, 정작 내가 원하지 않은 하느님의 말씀이나 명령 앞에서는 그분을 외면하는 것이 솔직한 우리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고백하는 것은 ‘나’지만, 정작 그 믿음을 이끌어 주시고 지탱해 주시는 분은 주님의 성령이심을 깨닫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음을 기억합시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무릎을 꿇어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저는 한때 허리가 많이 아팠습니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낫지 않았습니다. 한의사에게 침을 맞기도 했고 통증을 완화시켜 주는 약을 먹기도 했습니다. 고통이 너무 심해서 매일 같이 ‘주님, 제발 살려 주십시오. 살려주세요.’ 하고 매달린 적이 있습니다. 아프고 나서야 고통을 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 더 알게 되었습니다.
편찮으신 분이 많습니다. 질병으로 다가온 고통을 이긴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주님께 믿음을 고백해도 아픔은 여전하기 때문에 진정 그분이 함께하시는 것인지 의문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기도합니다. 주님, 하고자 하시면 모든 것을 이루실수 있으시니 고통을 거두어 주시고 당신이 몸소 함께 하고 계심을 느끼게 해 주십시오. 고통이 계속된다면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지켜주시고, 오히려 그 아픔을 통해 당신의 수난 고통을 체험하는 시간으로 인도해 주십시오.
유다인들에게 나병은 하늘에서 내린 형벌로 저주 받은 모습이요,(레위13,34) 죽음으로 향하는 상태(욥기18,13)였습니다. 나병에 걸린 사람은 공공장소나 사람들의 모임에 나타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 없었습니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다가오면 자신이‘불결한 사람’ 이라고 외치면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법으로 규정하였습니다(레위13,45-46). 법은 접근을 막을 뿐 나병을 치유하기 위하여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한계입니다. 문제는 알지만 해결 방법을 모색하지 않는 것은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1,40). 하며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더 이상 다른 길이 없어서 마지막으로,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지푸라기라도 잡고 매달리는 간절한 심정으로 하소연하는 것입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이상의 것이라도 할 마음의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사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항복의 자세입니다. ‘저의 목숨은 당신께 달렸으니 저를 살리든지 죽이든지 알아서 하십시오. 그저 저는 당신의 처분만을 기다립니다. 저로써는 더 이상 할 것이 없습니다.’ 라고 애원하는 자세요, ‘한 말씀만 하십시오. 당신은 저의 주인이고 저를 고쳐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고 저의 희망이십니다.’ 하는 순종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결국 무릎을 꿇은 것은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이러한 간절함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죄인이고 불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기 때문에 더욱 다가와야 하고 또 그 어떤 것도 장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사랑과 자비로 감싸주시고 치유해 주시는 분입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주시는 분입니다.
사실 우리는 육체적 질병뿐 아니라 정신적, 영적인 나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애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릎을 꿇는 자세는 우리가 주님께 나올 때 취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임에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앓고 있는 병에서 치유되려면 먼저 무릎을 꿇는 자세부터 배워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능력과 인간의 협력이 마주하여 능력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성 바오로회 유광수 신부님은 무릎 꿇지 못하는 원인을 다섯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1). 자신이 믿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2). 지금 자신이 어떤 병이 들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주고자 하는 선물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4). 교만함 때문이다. 교만한 자세란 목덜미가 뻣뻣한 자세이다. 몸이 굳어 있는 사람이고, 마음이 완고한 사람이다. 5).하느님으로부터 자신이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주님 앞에 무릎 꿇는 기쁨의 날 되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