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주간 금요일]중풍 병자 (마르 2,1-12)

2018. 1. 12. 오전 7:42:38

글자


 

[연중 제1주간 금요일]중풍 병자 (마르 2,1-12)


이스라엘의 원로들이 임금을 세워 달라고 사무엘에게 청하자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임금을 세워 주라고 이르신다. (1사무 8,4-7.10-22ㄱ)
그 무렵 4 모든 이스라엘 원로들이 모여 라마로 사무엘을 찾아가 5 청하였다.
“어르신께서는 이미 나이가 많으시고  아드님들은 당신의 길을 따라 걷지 않고 있으니, 이제 다른 모든 민족들처럼 우리를 통치할 임금을 우리에게 세워 주십시오.”
6 사무엘은 “우리를 통치할 임금을 정해 주십시오.” 하는 그들의 말을 듣고, 마음이 언짢아 주님께 기도하였다.
7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백성이 너에게 하는 말을 다 들어 주어라. 그들은 사실 너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나를 배척하여, 더 이상 나를 자기네 임금으로 삼지 않으려는 것이다.”
10 사무엘은 자기한테 임금을 요구하는 백성에게 주님의 말씀을 모두 전하였다.
11 사무엘은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이 여러분을 다스릴 임금의 권한이오. 그는 여러분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자기 병거와 말 다루는 일을 시키고, 병거 앞에서 달리게 할 것이오.
12 천인대장이나 오십인대장으로 삼기도 하고, 그의 밭을 갈고 수확하게 할 것이며, 무기와 병거의 장비를 만들게도 할 것이오.
13 또한 그는 여러분의 딸들을 데려다가, 향 제조사와 요리사와 제빵 기술자로 삼을 것이오.
14 그는 여러분의 가장 좋은 밭과 포도원과 올리브 밭을 빼앗아  자기 신하들에게 주고,
15 여러분의 곡식과 포도밭에서도 십일조를 거두어, 자기 내시들과 신하들에게 줄 것이오.
16 여러분의 남종과 여종과 가장 뛰어난 젊은이들, 그리고 여러분의 나귀들을 끌어다가 자기 일을 시킬 것이오.
17 여러분의 양 떼에서도 십일조를 거두어 갈 것이며, 여러분마저 그의 종이 될 것이오.
18 그제야 여러분은 스스로 뽑은 임금 때문에 울부짖겠지만, 그때에 주님께서는 응답하지 않으실 것이오.”
19 그러나 백성은 사무엘의 말을 듣기를 마다하며 말하였다. “상관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임금이 꼭 있어야 하겠습니다.
20 그래야 우리도 다른 모든 민족들처럼, 임금이 우리를 통치하고  우리 앞에 나서서 전쟁을 이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1 사무엘은 백성의 말을 다 듣고 나서 그대로 주님께 아뢰었다.
22 주님께서는 사무엘에게, “그들의 말을 들어 그들에게 임금을 세워 주어라.” 하고 이르셨다.


예수님께서는 지붕을 벗기고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내려보낸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자를 고쳐 주신다. (마르 2,1-12)
1 며칠 뒤에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2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
3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4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보냈다.
5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6 율법 학자 몇 사람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7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8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그들이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신 영으로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9 중풍 병자에게‘너는 죄를 용서받았다.’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10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11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12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연중 제1주간 금요일 제1독서 (1사무8,4-7.10-22ㄱ)

 

사무엘은 "우리를 통치할 임금을 정해 주십시오." 하는 그들의 말을 듣고, 마음이 언짢아 주님께 기도하였다.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백성이 너에게 하는 말을 다 들어 주어라. 그들은 사실 너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나를 배척하여, 더 이상 나를 자기네 임금으로 삼지 않으려는 것이다." (6~7)


사무엘서 상권 8장 5절에 나오는대로, 당시 이스라엘 모든 원로들이 왕정을 요구한 이유는 '다른 모든 민족들처럼' 되기 위해서이다. 즉 그들은 하느님의 선택받은 백성답게 하느님의 말씀에서 행동의 근거를 찾기보다는  무작정 이방인들의 정치 체제를 모델로 삼았던 것이다. 


원로들의 요구는 하느님께서 세우신 판관이 아닌 다른 모든 민족들과 같은 임금을 세워달라는 것이었다. 이같은 원의가 담고 있는 것은 정치적인 안정이었는데, 그들은 지금처럼 보이지 않는 하느님에 의해 다스려지기 보다는 눈에 보이는 강한 임금이 나타나 강력한 리더쉽으로 자신들을 이끌 때 더욱 더 효과적으로 나라가 번영할 수 있고 안정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제 사무엘서 상권 8장 6절은 이러한 이스라엘의 모든 원로들의 왕정 요구에 대한 사무엘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다. 

'마음이 언짢아'로 번역한 '와이예라으'(waiyerah; but displeased)일차적으로 '떨다'(이사15,4)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야라으'(yarah)를 원형으로 하는데, 이것은 분노나 격정에 휩싸였을 때 몸이 떨리는 것을 나타내므로, '슬프다'(1사무1,8) 또는 '몹시 화가 나고 속이 상하다', '불쾌하다'(1사무18,8)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사무엘이 원로들이 말한 것을 언짢게 여긴 것을, 정치적 권력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무엘을 포함한 지도층과 하층 계급 사이의 대결로 본문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옳지 않다.

만약에 세속적인 의미의 정권 유지에 대한 불만이었다면 사무엘 역시 세속적인 방법들을 통해 반응했을텐데, 사무엘의 즉각적인 반응은 주님께 기도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기도하였다'로 번역된 '와이트팔렐'(waithpallel; and prayed)계속적 '와우'(wau; and)가 사용된 단어로서,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원로들로부터 마음에 언짢은 일을 당했을 때 인간적인 대처 방법을 구하지 않고 즉시 하느님께 기도하였음을 나타내준다. 사무엘은 이러한 상황에서 믿음의 지도자가 취할 자세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기도하였다'에 해당하는 '와이트팔레'(waithpallel)의 원형 '팔랄'(pallal)일차적으로 '기도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여기처럼 수동의 뜻이 강한 재귀형으로 사용될 경우에는 '중재(중보)하다'라는 어감을 포함하고 있다.


사무엘은 이미 이스라엘의 모든 원로들이 요구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기도했다고 보기보다는 자신의 불쾌한 감정을 자제하고 하느님께 그들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간구했다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이해이다.


이제 사무엘서 상권 8장 7절에서 하느님께서는 사무엘에게 그 백성의 요구를 다 들어주라고 명령하신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백성들의 요구가 정당했음을 인정하신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왕정에 대한 그들의 요구가 인본주의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것임을 아셨지만, 백성들이 생각하고 있는 인본주의적 왕정 체제가 아닌 신본주의적 왕정 체제로 이스라엘을 이끌고 가실 것이므로 이것을 허용하신 것이다.

그러나 왕정을 요구하는 그들의 근본 동기가 그릇되었음을 간과하지 않으시고, 사무엘서 상권 8장 7절 후반부에서 그것을 분명하게 지적하시며 그들을 질책하신다.


원문에는 '왜냐하면'으로 번역된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키'(ki)'배척하다', '버리다', '거절하다'는 뜻을 가진 의미의 동사 '마아쓰'(maas) 역시 2회 반복 사용되어 매우 강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특히 여기서 두 동사는 모두 완료형으로 쓰여 그들의 배반이 이미 재론의 여지가 없이 굳어진 것임을 보여준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강조적 문장으로, 그들의 행위가 겉으로 드러난 것처럼 사무엘을 배척한 것이 아니라 실상은 하느님의 임금되심을 배척한 것임을 암시적으로 드러내어 하느님께 대한 반역임을 분명히 했다. 


 연중 제1주간 금요일 복음(마르2,1~12)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보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4~5)


'중풍 병자'에 해당하는 '파랄뤼티코스'(paralytikos; the sick of the palsy)에서 영어 단어 'paralysis'가 나왔다. 이 병은 뇌출혈(cerebral hemorrhage)등으로 몸의 일부분이나 전신을 움직일 수 없게 되는 증상을 갖는다.


마르코 복음 2장 3절에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침상)에 실어서 예수님께로 옮겨졌다. 학자들에 의하면, 이 중풍 병자를 옮긴 사람들은 그의 종들이라고 간주하는 경우도 있고, 가족이나 친구들로 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마르코 복음 2장 5절에서 중풍 병자와 그를 메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를 치유하셨다는 구절을 볼 때, 주인의 명령에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종들은 아니라고 본다.


한편 '지붕을 벗기고'에 해당하는 '아페스테가산'(apestegasan; they uncovered; they made an opening in the roof)원형 '아포스테가조'(apostegazo)'지붕의 덮개를 벗기다'(unroof)는 정도의 뜻이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의 가옥 구조지붕이 평평하고 외부의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계단을 통해 지붕 위로 올라갈 수 있었으며, 팔레스타인에 있던 서민들의 집의 지붕은 들보를 중심으로 나무들을 걸치고 짚으로 덮고 진흙을 발라 놓은 것이었기 때문에 쉽게 벗겨 낼 수가 있었다.


중풍 병자가 누운  들것을 멘 자들은 군중들이 너무 많아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로 데려 가기 힘들자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집의 지붕으로 올라간 것이다.

그러나 집의 지붕을 갑자기 벗겨 내고 구멍을 내어 들것을 내림으로써, 방 안에 모여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흙 먼지가 쏟아져 내리게 하고, 느닷없이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계시는 그 가운데로 달아내리기 위해서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여기 치유 기사의 주인공이 된 사람도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데에는 '군중들'이라는 장벽이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유에 대한 확신과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로 나아갔고, 그 결과 중풍 병자는 질병으로부터 자유를 얻었다.


'그들의 믿음'에 해당하는 '텐 피스틴 아우톤'(ten pistin auton; their faith)에서 '아우톤'(auton; their)3인칭 복수 인칭 대명사가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병을 가진 당사자만의 믿음이나 반대로 그를 예수님께로 이끌고 나간 동료들의 믿음만이 아닌, 그들 모두의 믿음의 결과였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여기서 '보시고'에 해당하는 '이돈'(idon; saw)의 원형 '호라오' (horao)어떤 대상을 시각적으로 관찰하다는 뜻만이 아니라 인지적으로 상대를 파악한다는 뜻도 갖는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와 그를 메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셨다는 것단순히 나타난 행동 뿐만 아니라 그 마음 속에 있는 믿음도 꿰뚫어 보셨다는 뜻이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얘야'에 해당하는 '테크논'(teknon; son)'자녀'(마태2,18)를 가리킨다. 히브리적으로는 신적인 존재에 대한 추종자(1베드1,14), 영적인 상하 복종 관계에서의 따르는 자(에페5,8)라는 의미를 갖는다.


여기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서 그렇게 부르시는 것은 예수님 당신의 치유 능력을 믿고서 자신의 몸을 맡기는 믿음을 보시고 당신을 따르는 자라는 의미로 불렀다고 본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에 해당하는 '테크논, 아피엔타이 수 하이 하마르티아이' (Teknon, aphientai sou hamartiai; Son, your sins are forgiven)에서 드러난데로,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신 행위는 중풍 병자의 죄를 먼저 제거함으로써 병을 치유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모든 병이 직접적으로 죄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의 중풍 병자는 죄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병에 걸렸으므로, 예수님께서 죄사함을 선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죄의 용서의 선포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 자신에게 죄를 사하는 권한이 있다는 사실을 선포하기 위해서였다(마르2,10).


원래 죄의 용서는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고유 권한이기에(시편50,1.2; 130,4; 느헤9,17; 이사1,18), 예수님께서 죄의 용서를 선포하셨다는 것은 당신 자신이 성자 하느님이시며(로마9,5), 당신에게 죄사함의 권한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중풍 병자를 고치시다.>


“며칠 뒤에 예수님께서는 다시 카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내려 보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율법 학자 몇 사람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르 2,1-7)”


이 이야기의 주제는 “예수님은 하느님의 권한과 권능을 가지고 계신 분”,

즉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 첫 번째는 집에 가득 차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중풍 병자가 예수님께 다가가는 것을 막는 ‘장벽’이 되어 있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된 것 아닌가?”,

또는 “의도적으로 가로막은 것은 아니지 않은가?” 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 이야기의 끝부분을 보면,

사람들의 벽에 막혀서 지붕을 통해 예수님께 다가갔던 중풍 병자가

건강해진 다음에는 사람들 가운데를 지나서 밖으로 걸어 나갑니다(12절).

처음에는 없던 통로가 나중에는 생겼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처음부터 사람들이 그 중풍 병자를 도와주려고 했다면,

그래서 조금씩 옆으로 비켜 앉았다면, 지붕에 구멍을 내고

중풍 병자를 달아내려 보내는 복잡한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통로를 만들어 주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이 지붕으로 올라가서 구멍을 내고

병자를 달아 내리는 동안에 그것을 구경만 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사람들은 이웃의 사정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이기적인 사람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도와줄 수 있는데도 도와주지 않는 것,

또는 이웃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고 되어 있는데,

이 사람들은 복음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천은 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실천할 기회가 바로 옆에서 생겼는데도

아무 일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과 중풍 병자 사이에서 장벽이 되었다는 점에서

다음 이야기가 연상됩니다.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르 10,13-14)”

누구든지 예수님께 다가갈 수 있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막을 권한은 아무에게도 없습니다.

(교회와 신앙인은 예수님과 세상 사람들 사이를 연결하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만일에 통로가 되기는커녕 가로막는 장벽이 된다면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2) 두 번째는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5절).

그런데 그들에게는 ‘믿음’ 이상의 ‘무엇’이 더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웃에 대한 사랑, 간절함, 희생정신, 열정, 끈질김,

난관을 어떻게든 극복하려는 용기와 인내 같은 것들입니다.

만일에 그런 것이 없었다면, 처음에 예수님께서 계신 집에 도착했을 때,

가득 차 있는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께 다가갈 수 없는 상황을 보고서

실망했을 것이고, 그냥 포기하고 되돌아갔을 것입니다.

사실 신앙생활은 믿음만으로 할 수 있는 생활이 아닙니다.

믿기는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마태 7,7-8).” 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능동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상황은 조금 다르지만, 예리코의 바르티매오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마르 10,46-48).”

여기서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바르티매오 사이에서 장벽이 되고 있는데,

만일에 바르티매오가 사람들이 자기를 꾸짖는 말에 주눅이 들어서 포기해버렸다면

그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3) 세 번째는 율법 학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어떤 일에 대해서 분석하고 비판하는 일은 잘하지만,

그 일에 참여하지는 않고 항상 멀찍이 떨어져 있기만 합니다.

(공부 좀 했다는 학자들이 흔히 그런 함정에 빠집니다.)

그들은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이 지붕에 구멍을 내고

병자를 달아내려 보내는 동안에 그것을 구경만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남의 일’을 ‘남의 일’로만 생각하고 ‘자기 일’로는 생각하지 않는,

즉 사랑은 없고 이기심만 가득한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고,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의 죄를 용서하시는 말씀을 하셨을 때에는

마치 자기 일처럼 즉각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점에서는

“하느님께 봉사한다는 명목으로 예수님을 박해하는 자들”과

다르지 않습니다(요한 16,2).


물론 율법학자들의 입장에서는, 아직 예수님을 잘 모르고 있었으니까

그랬다고 변명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식을 통해서 만나는 분이 아니라

‘믿음’으로 만나게 되는 분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치유하시는 장면은 다른 병자의 치유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병자를 곧바로 치유하지 않으시고,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먼저 선언하십니다. 병이 내 몸을 평소 못 챙긴 탓이라고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병은 죄의 결과’라는 예수님 시대의 생각이 오늘날에는 낯선 것이 사실입니다. 율법 학자들 입장에서는 병의 치유에 앞서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죄의 용서를 선언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신성 모독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병이 자신의 죄과라고 믿던 중풍 병자에게 예수님께서 죄의 용서를 먼저 선언하시고 치유하신 사건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으로부터 오셨고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권한을 가지신 분이심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단순히 신체의 자유를 넘어 죄로부터 해방된 영혼의 자유를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백성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 민족의 침략으로부터 보호받고자 세속에서 백성 위에 군림하는 임금을 세워 달라고 아우성칠 때, 사무엘은 그 임금이 얼마나 백성을 수탈하고 억압하며, 불의한 요구를 할지 미리 경고합니다. 권력자가 백성을 억누르는 독재를 경험해 본 우리 입장에서는 충분히 공감이 갑니다. 그러나 당장의 이익에 눈이 먼 이스라엘 백성은 그런 불합리에도 상관없이 꼭 임금을 세워 달라고 합니다. 
하느님을 백성의 주인으로 삼지 않고, 인간의 권력욕에 빠진 임금을 세워 달라는 이스라엘 백성이나, 예수님의 치유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율법 학자들의 모습 속에서 인간이 지닌 교만의 역사를 봅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진정 나를 치유하시기를 겸손하게 청하고 있는지 되돌아볼 때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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