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주간 토요일] 나를 따라라 (마르 2,13-17)

2018. 1. 13. 오전 7:3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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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주간 토요일]나를 따라라 (마르 2,13-17)


사무엘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울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주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다스릴 영도자로 세운다. (1사무 9,1-4.17-19 10,1)
그는 벤야민 사람으로서 힘센 용사였다. 2 그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이름은 사울인데 잘생긴 젊은이였다.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 그처럼 잘생긴 사람은 없었고, 키도 모든 사람보다 어깨 위만큼은 더 컸다.
3 하루는 사울의 아버지 키스의 암나귀들이 없어졌다. 그래서 키스는 아들 사울에게 말하였다. “종을 하나 데리고 나가 암나귀들을 찾아보아라.”
4 사울은 종과 함께 에프라임 산악 지방을 돌아다니고, 살리사 지방도 돌아다녔지만 찾지 못하였다. 그들은 사알림 지방까지 돌아다녔는데 거기에도 없었다. 다시 벤야민 지방을 돌아다녔으나 역시 찾지 못하였다.
17 사무엘이 사울을 보는 순간,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이 사람이, 내가 너에게 말한 바로 그 사람이다. 이 사람이 내 백성을 다스릴 것이다.”
18 사울이 성문 안에서 사무엘에게 다가가 물었다. “선견자의 댁이 어디인지 알려 주십시오.”
19 사무엘이 사울에게 대답하였다. “내가 그 선견자요. 앞장서서 산당으로 올라가시오. 두 분은 오늘 나와 함께 음식을 들고, 내일 아침에 가시오. 그때 당신이 마음에 두고 있는 일도 다 일러 주겠소.”
10,1 사무엘은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을 맞춘 다음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당신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그분의 소유인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우셨소. 이제 당신은 주님의 백성을 다스리고, 그 원수들의 손에서 그들을 구원할 것이오.”


예수님께서는 레위를 부르시고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며,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신다. (마르 2,13-17)
그때에 13 예수님께서 호숫가로 나가셨다. 군중이 모두 모여 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14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5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16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7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연중 제1주간 토요일 (1사무9,1-4.17-19 : 10,1)

 

사무엘은 베텔, 길갈, 미츠바, 라마를 순회하며 이스라엘을 다스렸지만,

나이가 들면서 뒤를 이어 이스라엘을 다스릴 지도자가 필요했다.

사무엘은 두 아들 요엘과 아비야에게 판관의 업무를 대행하게 했지만,

아들들은 아버지처럼 엄정한 재판을 하지 않고, 뇌물을 받고 잘못된 판결을 내리는 등

부패한 행동을 자주 저질렀다.

 

이에 대한 백성들의 불안과 원망이 최고조로 이르면서, 왕을 세워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게 된다.(1사무7,15-8,5)

사무엘은 주님의 지시에 따라, 세습적인 왕정 제도의 병폐와 문제점에 대해

백성들에게 설명했으나 그들은 듣지 않았다.

결국 사무엘은 신정(神政)정치를 거부하고, 왕정을 요구하는 백성들에게 왕을 세울 것을 약속하고,

모두 고향으로 돌려 보냈다.(1사무8,10-22)

 

하느님께서 여러 지파 가운데, 가장 미약하고 가장 작은 벤야민 지파에서 왕을 선택하셨다.

하느님께서는 특별한 방법으로 사울을 부르셨다.

즉, 사울은 아버지 키스의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기위해 집을 떠났다가,

우여곡절 끝에 선견자 사무엘을 만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게 된다.(1사무9장)

 

사울은 사무엘로부터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하느님의 뜻이라는  확신을 갖지 못했다.

이런 사울에게 하느님께서는 여러 징표를 보여 주시고, 예언의 은사들 통해 확신을 심어 주셨다.

더우기 하느님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공인하고, 대외적인 확신을 시켜주기 위해 제비뽑기로 뽑으시고 추인하셨다.(1사무10장)

 

사울'큰 자'라는 뜻으로, 얼굴이 준수하고, 다른 사람들 보다 키가 큰 장대한 사람이었다.(1사무9,2)

더우기 인품도 겸손하여 어진 성품을 가진 출중한 인물이었지만,

왕좌에 앉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배척을 받았다.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이스라엘 내부에서는 벤야민 지파 출신이 왕이 된다는 것에 대해 적잖은 반발이 있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십년 전 벌어진 벤야민 지파와의 내전을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판관19장)

 

벤야민 지파는 에브라임 산지에 기거하는 레위인의 첩(소실)을 겁탈한 사건으로, 다른 지파들과 내전을 벌였었다.

이 전쟁으로 벤야민 지파는 다른 지파들의 연합군에 의해, 남자 2만 5천명이 몰살당하는

멸절 위기 상황까지 처해졌다.(판관20,1-47)

산으로 도망간 벤야민 지파의 장정 6백명만이 살아 남을 수 있었다.(판관20,48 : 21장)

 

사울의 선대는 이 내전에서 멸절을 모면한 6백명중의 한 사람이었다.

판관시대 내전으로 인해, 벤야민 지파는 이스라엘 12지파 가운데 가장 작은 지파가 되었고, 이로 인해 적잖은 멸시를 당했을 것이다.

 

이런 현상은 사울이 사무엘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을 때,

"그렇지만 저는 이스라엘의 지파 가운데에서도 가장 작은 벤야민 지파 사람이 아닙니까?"

(1사무9,21)라고 반응하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래서 미츠바에서 벤야민 지파의 사울이 왕으로 제비 뽑혔을 때,

일부의 반응이 시큰둥하고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있었다.

 

이에 대해 사무엘 상권 10장 2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 친구가 어떻게 우리를 구할 수 있으랴?" 하면서

  사울을 업신여기고 그에게 예물도 바치지 않았다.>

 

이제 시작은 좋았으나, 하느님의 뜻을 찾지 않고, 왕이 된 후 자신이 하느님이 된,

자기 식의 의에 사로잡힌, 왕정 제도의 실패작 사울의 행보가 시작된다.


 

 연중 제1주간 토요일 복음(마르2,13~17)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17)

 

마르코 복음 2장 17절은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이 제기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과 이 땅에서

하실 일이 무엇인지 보여 주는 말씀이다.

 

여기서 '건강한 이들'에 해당하는 '호이 이스퀴온테스'(hoi ischyontes;

the healthy)라는 표현은 은유적 표현인데, 자기식의 의(義)를 추구함으로써

스스로 의롭다고 자부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가리킨다.

 

또한 '의사'에 해당하는 '이아트루'(iatrou; a doctor)도 은유적 표현으로서

죄에 빠진 영혼을 치유하고 구원하시는 예수님 당신 자신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러한 표현 속에는 예수님께서 왜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셔야 했는가에 대한 해답이 주어져 있다.

 

바리사이들은 율법의 외적 조항을 가지고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예수님을 단죄하려고 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이야말로 이 세상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못 알아보고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이것은 그들이 얼마나 교만과 위선에 사로잡혀 있었는가

명백히 보여 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건강한 척하면서 당신을 외면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위해 오시지 않고, 자신의 영적 건강을 걱정하던 죄인들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의사이셨다.

 

특히 마르코 복음 2장 17절전반부는 예수님 당시 팔레스티나에서 유행하던

속담으로 알려졌는데,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잘 알고 있던 속담을 이용해서

바리사이들의 교만과 위선을  지적했던 것이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여기서 '부르러'에 해당하는 '칼레사이'(kalesai; to call)의 원형 '칼레오'

(kaleo)구원에로의 초대나 제자로의 부름(마태4,21; 1베드2,9)을 의미한다.

 

이 문장은 동사 하나에 두 개의 목적어 '의인''죄인'이 동시에 사용되어서

서로 강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의인은 진정한 의미의 의인이 아니고,

본인이 자신을 생각하는 관점에서의 자칭 의인이다.

 

왜냐하면 로마서 3장 10~23절에서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의인이

한 사람도 없으며 모두가 죄인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또한 '죄인'이라는 개념 역시 꼭 어떤 죄를 지은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해 겸손한 자세로 응답할 수 있는, 스스로 죄인이라는

의식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루카5,8).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초대를 받을 자격은 겸손하게 자신이

죄인이라는 정확한 자기 의식이 있어야 함을 가르쳐 준다.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님께서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시고,

그의 집에서 다른 세리들과 음식을 잡수시는데,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이 그것을 보고 시비를 겁니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마르 2,16)"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 


당시에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랍비'로 인정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

율법학자들도 그 자리에 앉아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있었습니다(마르 2,6).

나중에 예루살렘의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이

누구에게서 '권한'을 받았느냐고 예수님께 시비를 걸긴 했지만(마르 11,28),

그들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가르치시는 일 자체를 문제 삼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라는 말은,

"랍비가 왜 '부정한' 사람들과 어울리는가?" 라는 뜻이 됩니다.

부정한 사람들(죄인들)과 어울리면 부정하게 된다는 것이

당시의 사고방식이었기 때문에

이 말은 '랍비라면' 그러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말입니다.

또는 "부정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보니 예수는 랍비가 아닌 것 같다."

라는 뜻으로 한 말일 수도 있습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당신이 죄인들을 만나시는 이유를 설명하신 말씀입니다.

또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암시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메시아가 죄인들을 만나는 것은 의사가 병든 이들을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죄인들을 구원하려면 그들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은 죄인이 아니다." 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죄인인 것은 맞지만, 그들을 구원하려고 만나는 것이다."가

예수님 말씀의 뜻입니다.

"부르러 왔다."는 "구원하러 왔다."입니다.

그런데 "의인이 아니라" 라는 말씀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의인은 만나지 않겠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도 아니고,

의인은 부르지(구원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을 만나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들만 만나신 것이 아니라 율법학자들도 만나셨고,

바리사이들, 사두가이들, 사제들, 왕실 관리들, 군인들... 다 만나셨습니다.

남자, 여자, 어른, 어린이, 유대인, 이방인...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만날 수 있었습니다. 


1)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인'을 '진짜 의인'으로 해석한다면...

예수님 말씀의 뜻은 "나는 의인뿐만 아니라 죄인도 부르러 왔다."입니다.

('죄인만'이 아니라 '죄인도'입니다.) 


2) '의인'을 '자칭 의인'으로 해석한다면...

예수님 말씀의 뜻은 "나는 하느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고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는 사람을 부르러 왔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는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교만한 사람은

구원하시지 않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도 구원하시지만, 그들이 먼저 겸손해져야 합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주시는 구원을 스스로 안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들 자신들이 안 받기 때문에 못 받게 됩니다. 


예수님 말씀에는 "그런 말을 하는 너희는 의인이냐?"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판단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은 의인인지 죄인인지 반성해야 합니다.

진짜 의인은 다른 사람들을 가리켜서 죄인이라고 말하지 않고,

 '형제' 라고 말합니다.

물론 형제의 '죄'를 지적하고 꾸짖어야 할 때가 있긴 합니다.

그러나 "너는 구원을 받지 못할 죄인이다." 라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율법학자들이 생각하는 '죄인'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죄인'은 다릅니다.

율법학자들은 '죄인'을

"구원받을 수 없는(구제불능인) 사람 - 회개해도 소용없는 사람

- 하느님께서 버리신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죄인들과 어울리면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죄인'은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 - 잃은 양

-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 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니 더욱더 그런 죄인들을 찾아야 하고, 만나야 합니다. 


아무도 하느님 앞에서 "나는 의인이다." 라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 말을 하면 안 됩니다.)

만일에 그런 말을 한다면, 그 사람은 의인이 아닙니다.

그냥 교만한 위선자일 뿐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의인들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그 의인들은 '한 번도 죄를 지은 적 없는 의인들'이 아니라,

'겸손하게 회개한 의인들'입니다.

(진짜 의인이라면 죄가 없어도 늘 회개할 것입니다.

물론 성모님 외에는 죄가 하나도 없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이론적으로만 생각하면, 죄를 한 번도 지은 적 없더라도

자기 스스로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교만죄 하나 때문에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가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 인간 세상의 모습을 보면,

교만한 사람들은 그 교만죄 때문에 다른 죄들을 더 짓고 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2016년 1월 16일 연중 제1주간 토요일- 耶穌聽了,就對他們說:「不是健康的人需要醫生,而是有病的人;我不是來召義人,而是


예수님께서 세관에 앉아 있던 레위, 곧 세리인 마태오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는 단순한 부르심에 어떻게 레위가 아무 조건 없이 예수님을 따라나설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당시 율법을 지키지 못해 죄인으로 취급받았던 많은 이들을 당신의 식탁 공동체에 초대하시어 그들에게 하느님 백성의 새로운 지위를 인정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들과 식탁에 앉은 것 자체를 단죄했던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말씀으로 세리를 비롯하여 유다 사회에서 소외되던 이들을 새로운 하느님 백성의 일원으로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 누구도 의인이라 자처할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하느님을 닮아 영원한 생명을 향하도록 부름받았지만, 여전히 우리 내면에는 하느님을 벗어나 죽음으로 달려가려는 죄의 경향도 남아 있습니다.

하느님을 외면하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죄의식은 불편하고 모순처럼 느껴지지만, 하느님을 믿는 사람에게 죄의식은 그분의 현존을 늘 기억하게 해 줍니다.

그래서 성경은 의인으로 자처하는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보다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세리와 죄인들에게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은총이 내린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이스라엘의 첫 임금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사울은 총명하고 지혜로운 인물로 사무엘을 통해 축성되지만 그의 본성에 숨겨진 권력의 욕망 때문에 끝내는 하느님을 배반하고 죽음에 이르고 맙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선택의 순간들이 있습니다. 스스로 의인인 척하는 위선의 삶과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삶입니다. 나는 지금 어떤 삶을 선택하고 있습니까?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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