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주간 화요일]안식일의 주인 (마르 2,23-28)

주님께서는 사무엘을 이사이에게 보내어 그의 아들들 가운데에서 임금이 될 다윗에게 기름을 붓게 하신다. (1사무 16,1-13)
그 무렵 1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언제까지 이렇게 슬퍼하고만 있을 셈이냐? 나는 이미 사울을 이스라엘의 임금 자리에서 밀어냈다. 그러니 기름을 뿔에 채워 가지고 떠나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사이에게 보낸다. 내가 친히 그의 아들 가운데에서 임금이 될 사람을 하나 보아 두었다.”
2 사무엘이 여쭈었다. “제가 어떻게 갑니까? 사울이 그 소식을 들으면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암송아지 한 마리를 끌고 가서, ‘주님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고 하여라.
3 그러면서 이사이를 제사에 초청하여라. 그다음에 네가 할 일을 내가 알려 주겠다. 너는 내가 일러 주는 이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어라.”
4 사무엘은 주님께서 이르시는 대로 하였다. 그가 베들레헴에 다다르자 그 성읍의 원로들이 떨면서 그를 맞았다. 그들은 “좋은 일로 오시는 겁니까?” 하고 물었다.
5 사무엘이 대답하였다. “물론 좋은 일이지요. 나는 주님께 제사를 드리러 온 것이오. 그러니 몸을 거룩하게 하고 제사를 드리러 함께 갑시다.” 사무엘은 이사이와 그의 아들들을 거룩하게 한 다음 그들을 제사에 초청하였다.
6 그들이 왔을 때 사무엘은 엘리압을 보고,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가 바로 주님 앞에 서 있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7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
8 다음으로 이사이는 아비나답을 불러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였다. 그러나 사무엘은 “이 아이도 주님께서 뽑으신 이가 아니오.” 하였다.
9 이사이가 다시 삼마를 지나가게 하였지만, 사무엘은 “이 아이도 주님께서 뽑으신 이가 아니오.” 하였다.
10 이렇게 이사이가 아들 일곱을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였으나, 사무엘은 이사이에게 “이들 가운데에는 주님께서 뽑으신 이가 없소.” 하였다.
11 사무엘이 이사이에게 “아들들이 다 모인 겁니까?” 하고 묻자, 이사이는 “막내가 아직 남아 있지만, 지금 양을 치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사무엘이 이사이에게 말하였다. “사람을 보내 데려오시오. 그가 여기 올 때까지 우리는 식탁에 앉을 수가 없소.”
12 그래서 이사이는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왔다. 그는 볼이 불그레하고 눈매가 아름다운 잘생긴 아이였다. 주님께서 “바로 이 아이다. 일어나 이 아이에게 기름을 부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13 사무엘은 기름이 담긴 뿔을 들고 형들 한가운데에서 그에게 기름을 부었다. 그러자 주님의 영이 다윗에게 들이닥쳐 그날부터 줄곧 그에게 머물렀다. 사무엘은 그곳을 떠나 라마로 갔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은 제자들을 비난하는 이들에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라고 하신다. (마르 2,23-28)
23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다.
24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26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27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28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연중 제2주간 화요일 제1독서 (1사무16,1-13)
그 무렵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언제까지 이렇게 슬퍼하고만 있을 셈이냐? 나는 이미 사울을 이스라엘의 임금 자리에서 밀어냈다. 그러니 기름을 뿔에 채워 가지고 떠나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사이에게 보낸다. 내가 친히 그의 아들 가운데서 임금이 될 사람을 하나 보았다." (1)
사무엘 상권 16장은 사울의 이야기가 일단락을 맺고, 다윗이 역사 가운데 새롭게 등장하는 사건을 다룬다. 하느님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시고, 일찌기 이스라엘의 새로운 임금으로 다윗을 선택하기로 결정하셨다.
주님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식의 망령된 제사를 드렸던(1사무15,31) 인본주의적인 임금 사울에 대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아서 당신 백성을 다스릴 영도자로 삼으실 것이라고 예언했으며(1사무13,14), 또 다시 주님의 아말렉족 전멸 명령을 온전히 수행하지 못한 사울을 향해서 하느님께서 '임금보다 훌륭한 이웃'에게 왕국을 찢어줄 것이라고 예언한 적이 있다(1사무15,28).
여기서 '당신 마음에 드는 사람'과 '임금보다 훌륭한 이웃'은 바로 사무엘서 상권 16장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다윗을 지칭하는 것이다.
다윗의 등장을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사무엘서 상권 16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1~13절에서는 다윗이 이스라엘의 새로운 임금으로 기름부음 받는 내용이 소개되고 14~23절에서는 주님의 영이 떠나고 악령이 내린 사울을 시중드는 다윗의 모습이 소개된다.
한편 '나는 이미 ~밀어냈다'에서 '내가 ~했거늘'에 해당하는 '와아니'(waani)는 접속사 '와우'(wau)와 1인칭 주격 대명사 '아니'(ani)가 결합한 것이다. 여기서 접속사 '와우'(wau)는 사무엘이 사울의 폐위에 대해서 슬퍼하지 말아야 될 이유를 나타내는 문장을 이끌고 있다.
또한 주어의 인칭이 동사에 포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 주어를 대명사로 다시 또 기록하고 있는 것은 말씀을 주시는 주체인 하느님 자신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하느님 자신을 나타내는 '아니'(ani)는 '너는' 으로 번역되어 사무엘을 뜻하는 '앗타'(atha)라는 2인칭 단수 인칭 대명사와 대구를 이루고 있다. 즉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과 사무엘의 태도를 대비시켜, '나는' 사울을 버렸는데, '너는' 왜 슬퍼하냐고 지적하고 계신 것이다.
그리고 '메아쓰티우'(measthiu; have rejected him)은 '거절하다', '밀어내다'를 뜻하는 '마아쓰'(maas)의 능동태 미완료로서 남성 3인칭 접미어를 취해서 '내가 그를 버렸다(밀어냈다)' 라는 뜻이다.
하느님께서 사울을 버리신 것은 그가 주님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이지만(1사무15,23.26), 넓게는 이스라엘 전체가 하느님을 임금으로서 인정하지 않고 '배척했던'(1사무8,7; 10,19)결과이며, 사울 임금을 따라서 주님의 명령을 어겼던 결과였다(1사무15,9).
이러한 연관성을 살펴볼 때, 임금과 하느님과의 관계는 이스라엘과 하느님 사이의 관계를 대표한다고 말 할 수 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선택했던 임금이 하느님께 배척받았으므로 더 이상 임금을 요구할 수 없게 되었으며, 하느님께서 주도적으로 이스라엘의 임금을 선택해 주셔야먄 하는 형편이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스라엘의 임금의 권한과 권력이 철두철미하게 하느님의 지배권과 주도권 아래 속해 있음을 드러낸다.
'그러니 기름을 뿔에 채워 가지고 떠나라'
사울의 폐위에 대해 슬퍼하는 사무엘에게 하느님께서 새로운 명령을 내리신다. '(너는)~채워 가지고'에 해당하는 '말레'(malle)는 '넘치다', '풍부하다', '충만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레'(malle)의 강조형 명령법이다. 이 동사는 공간적 '가득함'(탈출10,6)이나 시간의 '만료'(창세25,25)를 나타낼 때도 사용된다.
그리고 '말레' 동사는 일반적으로 능동형이나 수동형으로 사용되지만, 여기처럼 강조형으로 사용될 경우에는 말한 것의 이행을 강조하는 표현으로서 '채우다'는 직접적인 의미 말고도 '온전히 이행하다', '힘을 다하다'라는 뜻도 갖는다 (여호14,8; 1열왕9,24).
여기서도 이 동사는 사무엘이 주님의 명령에 따라 자신의 뿔에 기름을 채워야 한다는 뜻으로도 쓰였지만, 더 나아가 이제 애도의 시간을 끝내고 새로운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과 하느님의 지시에 온전히 따라야 한다는 뉘앙스까지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뿔에'에 해당하는 '카르네카'(qarneka; your horn)는 '뿔'을 의미하는 명사 '카렌'(qaren)에 사무엘을 지시하는 남성 2인칭 단수 접미어 '카'(ka)가 결합한 형태로 '너의 뿔'로 직역이 된다.
여기의 '뿔'은 사울이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 사용된 '기름병'(1사무10,1)과 비교된다. 이 뿔은 다윗의 기름부음을 다룬 사무엘서 상권 16장 ~13절의 처음과 마지막 절에서 반복되어 강조됨으로써 사울이 기름부음 받은 것과 다윗이 기름부음 받은 것이 주님 앞에서 차이점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낸다.
즉 사울이 임금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는 '기름병'으로 받았지만, 주님에 의해서 새로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워질 다윗은 '뿔'로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뿔'은 사무엘서 상권 2장 1절과 10절의 한나의 기도 속에도 이미 나타나 있지만,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전적으로 부어주시는 하느님의 능력을 상징한다.
여기 등장하는 '뿔'도, 한나를 미천한 여인에서 기쁨과 감사의 여인으로 높이신 하느님의 능력이 새롭게 선출된 이스라엘의 지도자 다윗에게도 부어질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기름'에 해당하는 '셰멘'(shemen; oil)은 일반적으로 '올리브 기름'을 뜻한다. 이 기름은 요리할 때(1열왕17,12), 희생 제물과 예배와 관련하여(레위2,15-16; 에제45,14), 화장품이나 향로(아모6,6; 시편104,15), 등잔(탈출25,6; 레위24,2) 등에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여기처럼 임금이나 사제나 예언자들을 세우는 데 사용될 때에는(레위8,12; 1열왕1,39) 하느님의 풍성한 축복과 능력이 내려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특히 사울과 다윗의 기름부음 받는 장면을 비교해 볼 때, 사울의 장면에서는 다만 '기름을 부으라'는 명령만이 나오지만, 다윗의 경우에는 '뿔'에 기름을 채우라는 명령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구체적인 명령은 이스라엘의 새로운 지도자를 주도적으로 세우시는 하느님의 강한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연중 제2주간 화요일 복음 (마르2,23-28)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27~28)
마르코 복음 2장 27절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라는 구절은 병행 구절인 마태오 복음 12장 1~8절이나 루카 복음 6장 1~5절에는 없는 내용이다.
아마도 마르코 복음사가가 다른 복음사가가 전승된 내용들 중에 간과한 내용을 강조하기 위해 빠트리지 않고 기록한 것 같다.
그리고 이 구절의 메시지는 바리사이들이 안식일에 관한 39개 세부 조항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사람들을 단죄하고 힘들게 만들었던 것과는 달리, 안식일의 참된 의미가 오히려 사람들을 위하여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가르쳐 준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사람'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셨다. 또한 '그러므로'에 해당하는 '호스테'(hoste; therefore)도 병행구절에는 없고 마르코 복음에만 있는 단어인데, 앞문장과 뒷문장이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런데 여기서는 앞문장을 받기보다는 안식일에 대한 전체의 논쟁을 결론짓기 위해 도입된 말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바리사이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데에는 열심이었지만, 안식일이 왜 있는지에 대한 진정한 의미는 깨닫지 못했고, 그 결과 그들은 사람들에게 안식을 제공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단죄와 억압, 죄의식의 굴레만을 덧씌었을 뿐이다.
이에 비해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분명한 의미와 안식을 사람들에게 되찾아 주셨다. 따라서 본문은 예수님이야말로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는 표현인 것이다.
마르코 복음 2장의 전체적인 내용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죄사함의 권한이 있으시고(10절),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부르러 오셨으며(17절), 혼인 잔치 집의 신랑(19절)이실 뿐 아니라 안식일의 주인(28절)까지 되시는 분으로서 나온다.
즉 이 네 편의 논쟁은 모두 예수님의 신적(神的)인 권위에 도전하려는 바리사이들이 율법에 대한 자신들의 인위적 규범을 근거로 제시하며, 예수님을 책잡으려는 시도를 다루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도전에 대해 바리사이들이 반론을 펴지 못할 정도로 각각의 명쾌한 답변들을 일일이 제시하였다(10,17.22.28절).
그런데 그 답변들을 살펴보면, 어떤 분야에 대한 질문이든지 하나의 공통된 관점들을 유지하고 있는데, 그것은 답변자이시고 논쟁을 일으킨 행위의 중심 자체가 되시는 예수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점진적 계시이다.
예수님은 바로 '땅에서 죄를 사하시는 권한을 가지신 분'(10절)이시고, '죄인을 부르러 오신 분'(17절)이시며, '새 포도주, 즉 새로운 질서로서의 복음을 가져오신 분'(22절)이시며, '안식일의 주인이신 분'(28절)이시라는 것이다.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마르 2,23-26)”
마태오복음을
보면,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마태 12,1).
바리사이들은
제자들의 ‘배고픔’은 보지 않고,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다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배고픔을 먼저 보라는 뜻으로
다윗이 배가 고파서 율법을 어긴 일을 말씀하십니다.
그 일은 사무엘 상권 2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 다윗이 율법을 어긴 일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다윗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배고픈 사정은 똑같은데, 바리사이들은 왜 다윗이 한 일은 비난하지 않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한 일은 비난했을까?
다윗은 율법을 어겨도 되고 일반 서민들은 어기면 안 되는가?
율법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다윗을 비난하지 않았다면 서민들에 대해서도 비난하면 안 됩니다.
(서민들을 비난하려면 다윗이 율법을 어긴 일을 먼저 비난해야 합니다.)
2)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신명기에 있는 십계명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여라.
엿새 동안 일하면서 네 할 일을 다 하여라.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의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다. 그날 너의 아들과 딸, 너의 남종과 여종, 너의 소와 나귀,
그리고 너의 모든 집짐승과 네 동네에 사는 이방인은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여 너의 남종과 여종도 너와 똑같이 쉬게 해야 한다. 너는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였고, 주 너의 하느님이 강한 손과 뻗은 팔로 너를 그곳에서
이끌어 내었음을 기억하여라. 그 때문에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는 것이다(신명 5,12-15).”
십계명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안식일은 모든 사람이 함께 쉬는 날”이라는 점입니다.
내가 쉬는 것도 중요하지만, 남을 쉬게 해 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만일에 어떤 사장이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 일을 멈추고 미사 참례를 하면서도,
자기 공장의 노동자들에게는 주일에도 일을 하라고 시켰다면,
그래서 노동자들이 하루 종일 일하느라고 주일을 지키지 못했다면,
주일을 안 지킨 사람은 노동자들이 아니라 사장입니다.
먹고사는 데에 지장이 없는 사람이 주일에 일하지 않고 쉬는 것은 당연한데,
주일에도 일하지 않으면 굶주릴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주일을 지키지 못하는 것을 비난하면 안 됩니다.
(먹고살기 위해서 주일에도 쉬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교회와 사회가 모두 나서서 그 사람이 쉴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합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하느님의 계명은 “안식일에는 굶어라.”가 결코 아닙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 주셨을 때,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주님이 너희에게 안식일을 주었다. 그래서 엿샛날에는 너희에게
이틀 치 양식을 준다. 그러니 이렛날에는 저마다 제자리에 머무르고,
아무도 자기가 있는 곳을 떠나 밖으로 나가지 마라(탈출 16,29).”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아도 굶는 일이 없도록
미리 배려해 주셨습니다.
바로 이 ‘배려’와 ‘사랑’이 안식일 율법의 근본정신입니다.
따라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은 ‘사랑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안식일이든지 다른 날이든지 간에
자기 이익을 위해서 남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사람은,
또 굶주리는 사람들의 사정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고
사랑 실천도 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는 일하지 마라.” 라는 규정 자체를
폐지하신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말씀의 뜻은, “남의 사정도 모르면서 함부로 비난하지 마라.”이지
“각자 알아서 마음대로 행동하여라.”가 아니라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남을 함부로 비난해도 안 되고,
자기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지나치게 너그러워도 안 됩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마태 7,3-5).”
(주일에도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정에 대한 판단 기준은
각자의 양심일 수밖에 없는데,
우리는 자신의 양심이 항상 예리하게 살아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27-28)”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안식일을 정하신 것은,
사람들을 쉬게 해 주기 위해서”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에게서 하루를 빼앗기 위해서 안식일을 정하신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루의 안식을 온전히 사람들에게 주려고 정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 것은 하느님께 ‘하루’ 라는 시간을 봉헌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하루’ 라는 시간을 온전히 얻는 일이기도 합니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주일을 지키지 못했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정말로 못 지킨 것인지, 아니면 안 지킨 것인지......
반대로 주일을 잘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몸만 지키고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잘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형식이 아니라 마음과 정성입니다.
‘사랑’이 신앙생활의 근본정신이기 때문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인간은 일하는 기계도, 의무에 종속된 노예도 아니기에 쉼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안식일은 본디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말한 대로, “우리 인간이 하느님 안에서 쉬기까지 참된 평화란 없다.”는 고백을 기억하게 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내 육신을 쉬게 하는 데 잠이 필요하듯, 내 영혼은 경쟁과 적자생존의 굴레에서 벗어나 어느 것에도 매임 없이 자신을 비웠을 때 얻게 되는 하느님의 안식을 필요로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생존을 위한 필요를 제외하고는 누구나 하느님 안에 쉴 권리와 의무가 있다는 것이 안식일의 제정 이유임을 확인해 주고자 하십니다. 제자들이 배고픔을 해결하려고 밀 이삭을 뜯어 먹거나, 다윗 일행이 배가 고파 하느님의 집에서 제사 빵을 먹은 것을 두고, 단순히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에 그들이 죄인으로 취급받아야 한다는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사람을 위해 안식일을 세워 주신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생긴 것이 아님을 일깨워 주십니다.
하느님을 믿는 우리는 결코 하느님께 종속된 노예와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 구원을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지옥 불에 대한 두려움이나 죄의식에 빠져 하느님의 영 안에 누리는 기쁨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붓자 주님의 영이 줄곧 그에게 머물렀다고 합니다. 우리도 세례성사를 통하여 기름부음을 받았기에 우리 영은 언제나 하느님 안에 머뭅니다. 혹시 내가 스스로 세운 규정이나 계명에 얽매여 하느님 안에 누리는 영의 자유와 기쁨을 가두고 옹졸하게 살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봅시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