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주간 목요일]큰 무리 (마르 3,7-12)

2018. 1. 18. 오전 5:4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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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주간 목요일]큰 무리 (마르 3,7-12)

  


요나탄은 아버지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자 사울을 설득하여 다윗을 결코 죽이지 않겠다는 맹세를 얻어 낸다. (1사무 18,6-9:19,1-7)
그 무렵 6 다윗이 필리스티아 사람을 쳐 죽이고 군대와 함께 돌아오자, 이스라엘 모든 성읍에서 여인들이 나와 손북을 치고 환성을 올리며, 악기에 맞추어 노래하고 춤추면서 사울 임금을 맞았다.
7 여인들은 흥겹게 노래를 주고받았다.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네!”
8 사울은 이 말에 몹시 화가 나고 속이 상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다윗에게는 수만 명을 돌리고 나에게는 수천 명을 돌리니, 이제 왕권 말고는 더 돌아갈 것이 없겠구나.”
9 그날부터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게 되었다.
19,1 사울이 아들 요나탄과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겠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나 사울의 아들 요나탄은 다윗을 무척 좋아하였기 때문에,
2 이를 다윗에게 알려 주었다. “나의 아버지 사울께서 자네를 죽이려고 하시니, 내일 아침에 조심하게. 피신처에 머무르면서 몸을 숨겨야 하네.
3 그러면 나는 자네가 숨어 있는 들판으로 나가, 아버지 곁에 서서 자네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겠네. 그러다가 무슨 낌새라도 보이면 자네에게 알려 주지.”
4 요나탄은 아버지 사울에게 다윗을 좋게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임금님, 임금님의 신하 다윗에게 죄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다윗은 임금님께 죄를 지은 적이 없고, 그가 한 일은 임금님께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5 그는 목숨을 걸고 그 필리스티아 사람을 쳐 죽였고, 주님께서는 온 이스라엘에게 큰 승리를 안겨 주셨습니다. 임금님께서도 그것을 보시고 기뻐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임금님께서는 공연히 다윗을 죽이시어, 죄 없는 피를 흘려 죄를 지으려고 하십니까?”
6 사울은 요나탄의 말을 듣고, “주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다윗을 결코 죽이지 않겠다.” 하고 맹세하였다.
7 요나탄은 다윗을 불러 이 모든 일을 일러 주었다. 그러고 나서 다윗을 사울에게 데리고 들어가, 전처럼 그 앞에서 지내게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시고, 당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더러운 영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신다. (마르 3,7-12)
그때에 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또 유다와 8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9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10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11 또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하고 소리 질렀다.
1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연중 제2주간 목요일 제1독서 (1사무18,6-9; 19,1-7)


여인들은 흥겹게 노래를 주고 받았다.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네!"  (7)


'노래를 주고받았다'에 해당하는 '왓타아네이나'(wathaaneina)의 원형 '아나'(ana)의 기본적인 의미는 '노래하다'이다. 

그러나 '아나'(ana)'대답하다'라는 의미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왓타아네이나'는 '한쪽에서 부르고 다른 한 쪽에서는 화답하는 형식'을 가지고 있는 노래의 종류로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흥겹게'로 번역된 '하메사하코트'(hamesahaqoth; as they danced; as they played; '뛰놀며')의 원형 '사하크'(sahaq)부정적 의미로도 쓰이는 표현이다.


능동형으로 사용된 경우에는 '비웃다', '조소하다'라는 부정적 의미를 나타내고, 여기처럼 강조 능동형으로 사용된 경우에는 '악기를 연주하다', '기뻐하다'라는 긍정적인 의미를 가져, 어떻게 보면 비웃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온몸으로 즐거워하고 있는 모습을 나타낸다.

이러한 독특한 표현을 통해서 이스라엘 군대의 개선 퍼레이드의 축제적 분위기가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한편 '수천'에 해당하는 '빠알라파이우'(baalapaiu; as thousands)'천'을 뜻하는 '엘레프'(ellep)의 복수형에 남성 3인칭 단수 소유격 어미가  붙은 형태로서 문자적으로는 '그의 수천명'을 의미하고,  '수만'에 해당하는 '뻬리브보타이우'(beribbothaiu; his tens of thousands)'만'을 뜻하는 '레바바'(rebaba)의 복수형에 남성 3인칭 단수 소유격 어미가 붙은 형태로서 문자적으로는 '그의 수만명'을 뜻한다.

하지만 여기서 비교되는 요소인 '천''만'에 해당하는 '엘레프' '레바바'숫자적 의미 이상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히브리어에서 '레바바'(rebaba) '수없이 많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레바바'와 동일한 어근에서 파생된 명사 '라브'(rab)는 '무수한'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많은 사람들 선두에 있다는 의미로 '우두머리'라는 뜻도 가진다.

그런 차원에서 다윗이 죽인 자의 수효로 묘사된 '수만' 혹은 '만만'이라는 숫자는 보통 군인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하고, 뛰어난 '우두머리'나 행할 수 있는 용맹스러운 전과임을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이다.


따라서 사울은 '수만', '만만' 보다 적은 '수천' 혹은 '천천'으로 자신의 치적을 노래한 산술적 의미 때문에 노한 것이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서 그 노래에는 다윗이 사울 임금보다 더 훌륭한 우두 머리라는 의미까지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불쾌해 하면서 몹시 노했던 것이다.


사울이 사무엘서 상권 18장 8절에서 "이제 왕권 말고는 더 돌아갈 것이 없겠구나"라고 불편한 심기를 표현한 배경에는, 바로 본문의 내용이 왕권 혹은 왕위로 이해될 수 있는 '우두머리'라는 의미까지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중 제2주간 목요일 복음(마르3,7~12)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9)


예수님께로부터 선포되는 복음과 능력의 치유 행위는 바리사이들과 같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극단적인 반대자를 만들어내는 동시에, 예수님의 말씀과 능력을 덧입으려는 추종자들을 양산하는 대조적 결과를 낳았다.


마르코 복음 3장 8절'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는 것은 온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한순간에 몰려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관한 소문이 퍼지자 이곳 저곳에서 끊임없이 계속해서 예수님께로 몰려들었음을 묘사한다.


이것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여기서 '거룻배 한 척'에 해당하는 '플로이아리온'(ploiarion; a small ship)마련하라고 했을 때, '마련하다'에 해당하는 '프로스카르테레'(proskartere; should wait on; ready for)'미리 준비하고 기다리다', '온 힘을 기울여 대기하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당신께 몰려든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작은 배를 준비시키신 것은, 여기의 본문 외에도 하느님 나라의 여러 비유를 가르치시기 위한 경우도 있었다(마르4,1).

그런데 여기서는 특별히 마르코 복음 3장 10절에 나오는 데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한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전능하신 제2위 천주 성자 하느님이시므로 신적인 방법으로 얼마든지 어려움을 모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병고침이나 자연 재해를 다스리는 목적 이외에, 당신을 신기하게 보이도록 하는 깜짝 놀랄 기적 극히 제한함으로써, 당시 희랍 사회에 성행하던 미신적인 '신적 인간'으로 비치는 것을 철저히 경계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마르코 복음 3장 12절에 나오는 데로, 성부 하느님의 구원 사업이 이루어질 때까지, 말씀과 영적을 통해 하느님의 나라가 선포되는 과정에서 당신 자신의 정체가 알려지는 것을 피하셨고, 특히 더러운 영들을 통해 당신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로 알려지는 것을 더욱 원치 않으셨다.


우리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과정에서 효과적인 복음 전파 뿐만 아니라 소위 인기와 명성의 바다에 익사하지 않기 위해서 '거룻배 한 척' 미리 준비시키고 대기시키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깊이 묵상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전교가 잘 되는 한 장소에서 계속해서 오랫동안 머무시지 않고, 또한 당신의 인기와 명성에 연연하지 않으시고, 다른 곳으로 떠나시기 위해 '거룻배 한 척'을 미리 준비하시며 그곳과 거리를 두신다.


오로지 하느님 아버지의 뜻만을 생각하시고 기도하시기 위해 한적한 곳으로 가시기 위해서, 그리고 또 다른 곳에 전교하러 가시기 위해서 인간성의 모든 찌꺼기와 폐단을 초월하시는 동선을 그리신다.


 

분위기와 자존감”

사람마다 고유한 분위기가 있습니다.
따뜻한 분위기의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찬 분위기의 사람도 있고,
밝은 분위기의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둔 분위기의 사람도 있습니다.
정체성의 자연스런 발로가 분위기라 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어느 분의 제 강론에 대한 말씀에서 즉시 와 닿은 말마디가 ‘분위기’입니다.

자존감과 함께 가는 분위기입니다. 자존감(自尊感)과 자만감(自慢感)은 다릅니다.
사랑을 많이 하고 많이 받을수록 자존감
높은 정체성 또렷한 삶에 분위기 역시 밝고 개방적이고 긍정적입니다.
진정 자존감이 높아야 겸손할 수 있습니다.
자존감이 높아야 남 판단도 않고 자기 자랑도 하지 않습니다.
자존감 높아야 남 칭찬할 수 있지 열등감 있으면 남 칭찬에도 인색합니다.
교육은 물론 모든 대인 관계에서도 상대방의 자존감을 키워주는,
지켜주는 일이 참 중요합니다.

자존감이 약할 때 그림자처럼 따라 붙는 열등감입니다.
정도의 차이일 뿐 열등감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치유 받아야 할 마음의 병이자 상처인 열등감입니다.
하여 열등감을 지닌 사람의 분위기는 어둡고 폐쇄적이고 무거울 수뿐이 없습니다.

오늘 1독서에서 다윗과 사울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자존감 높은 밝고 긍정적인 다윗에 비해
사울은 자존감 낮은 어둡고 폐쇄적인 질투의 사람임이 들어납니다.
자존감 높은 다윗이 인기가 좋음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네!”
여인들의 환호를 받는 다윗에 사울은 시기심이 불타올라 다윗을 죽이려 합니다.
정도의 차이일 뿐 사울의 처지라면
누구나 일어나는 시기심을 억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
2인자를 허용하지 않는 권력의 세계이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참 재미있는 것이 외부의 적 골리앗이 사라지니
내부의 동지인 다윗이 졸지에 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에게 궁극의 적은 골리앗도 다윗도 아닌
치유 받아야 할 사울 자신의 열등감임을 깨닫습니다.
병적인 열등감의 발로인 질투심보다 더 해로운 것은 없으니
자신을 물론 이웃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열등감이 바로 더러운 영입니다.

복음의 예수님은 자존감이 충만한 참으로 매력적인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여 물밀듯이 모여드는 병자들이요 마귀 들린 사람들입니다.
자존감이 드높기에 군중들의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거리를 두고자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신 연유입니다.
새삼 사랑은 주님 안에서 거리를 지켜내는,
제자리를 견뎌내는 고독의 능력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더러운 영들은 예수님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지르며 달아납니다.
주님을 만날 때 자존감 부족으로 인해 생긴
질투와 시기심의 더러운 영도 사라집니다.
참으로 사랑의 주님과 만날 때 치유되는 열등감의 상처요
회복되는 자존감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매일 미사의 은총입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시편103).

끊임없이 하느님께 바치는 우리의 찬미와 감사가
열등감의 상처를 치유해주고 자존감 높은 삶을 살게 합니다. 아멘


시기심과 질투심은 인간의 마음을 옹졸하게 만들고, 사리를 올바로 분별하지 못하게 만드는 마음의 병입니다. 필리스티아 사람을 쳐 이겨 이스라엘에 승리를 안겨 준 다윗의 치적과 비교당한 사울의 마음에는, 용맹스럽고 충성스러운 다윗의 모습은 사라지고 자신의 왕위를 위협할 인물로만 보입니다. 시기심에 눈이 어두워져 다윗을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다행히 그의 아들 요나탄의 설득에 마음을 돌리지만 한번 생긴 마음의 병은 치유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명성을 들은 수많은 군중이 먼 지방에서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들은 병들고 지쳤으며 가난하고 고통을 겪고 있었기에 오직 예수님의 치유만을 원했지만, 정작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것을 알아본 것은 역설적으로 ‘더러운 영’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기쁨과 치유의 하느님이 아닌, 두려움과 회피의 대상으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살면서 우리는 주변에서 칭송받을 만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들을 부러워하고, 본받고 싶어 하지만, ‘더러운 영’이 슬그머니 내 마음속에 들어와 상대방을 헐뜯고 폄하하려는 교만이 생깁니다. 세계 교회는 오늘부터 25일까지 역사 안에서 가톨릭 교회와 갈라진 형제들, 곧 정교회와 개신교인들과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 주간’을 보냅니다.
지난해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해였습니다. 하나의 세례와 한 분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과거 역사의 상처로 생긴 오해와 편견의 벽을 허물고 복음의 기쁨 속에서 “하나가 되기를”(요한 17,21 참조) 기도합니다. 비록 종교 개혁이라는 과거에 일어난 일은 바꿀 수 없지만, 그 사건을 다르게 기억하고 되새기는 법은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는 우리를 갈라놓는 것보다 일치시키는 것이 훨씬 크다는 점을 잊지 맙시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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