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주간 토요일] 소문(마르 3,20-21)
다윗은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탄, 그리고 주님의 백성과 이스라엘 집안이 칼에 맞아 쓰러진 것을 애도하고 단식하며, 애가를 지어 부른다. (2사무 1,1-4.11-12.19.23-27)
그 무렵 1 다윗은 아말렉을 쳐부수고 돌아와 치클락에서 이틀을 묵었다.
2 사흘째 되는 날, 어떤 사람이 옷은 찢어지고 머리에는 흙이 묻은 채 사울의 진영에서 찾아왔다. 그가 다윗에게 나아가 땅에 엎드려 절을 하자,
3 다윗이 “너는 어디에서 왔느냐?” 하고 물었다. 그가 다윗에게 “이스라엘의 진영에서 빠져나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4 다윗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서 말해 보아라.” 하자, 그가 대답하였다. “싸움터에서 군사들이 달아났습니다. 또 많은 군사가 쓰러져 죽었는데, 사울 임금님과 요나탄 왕자님도 돌아가셨습니다.”
11 그러자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었다. 그와 함께 있던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하였다.
12 그들은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탄, 그리고 주님의 백성과 이스라엘 집안이 칼에 맞아 쓰러진 것을 애도하고 울며, 저녁때까지 단식하였다. 다윗이 애가를 지어 불렀다
19 “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살해되어 언덕 위에 누워 있구나. 어쩌다 용사들이 쓰러졌는가?
23 사울과 요나탄은 살아 있을 때에도 서로 사랑하며 다정하더니 죽어서도 떨어지지 않았구나. 그들은 독수리보다 날래고 사자보다 힘이 세었지.
24 이스라엘의 딸들아, 사울을 생각하며 울어라. 그는 너희에게 장식 달린 진홍색 옷을 입혀 주고 너희 예복에 금붙이를 달아 주었다.
25 어쩌다 용사들이 싸움터 한복판에서 쓰러졌는가? 요나탄이 네 산 위에서 살해되다니!
26 나의 형 요나탄, 형 때문에 내 마음이 아프오. 형은 나에게 그토록 소중하였고 나에 대한 형의 사랑은 여인의 사랑보다 아름다웠소.
27 어쩌다 용사들이 쓰러지고 무기들이 사라졌는가?”
예수님의 친척들은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여 그분을 붙잡으러 나선다. (마르 3,20-21)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20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21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연중 제2주간 토요일 제1독서 (2사무 1,1-4.11-12.19.23-27)
사무엘 상권 31장과 사무엘 하권 1장에 기록된 사울의 죽음은 두 부분이 조금 다르다. 사무엘 상권 31장에는 사울이 필리스티아인 궁수의 활을 맞고 큰 부상을 입자, 자기 무기병에게 자신을 칼로 찔러 죽이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무기병은 너무 두려워 찌르지 못한다. 그래서 사울은 자기 칼을 세우고 그 위에 엎어져 자결한다. (1사무 31,3-5참조)
그런데 오늘 사무엘 하권 1장에서는 길보이산의 전투에서 사울이 창을 맞아 겨우 목숨이 붙어 있었는데, 아말렉 사람이 사울의 간절한 부탁으로 자신이 죽이고, 머리에 쓴 왕관과 팔에 낀 팔찌를 벗겨 다윗에게 가져왔다고 전한다. (2사무 1,1-10참조)
학자들은 아말렉인이 사울의 죽음을 다윗이 기뻐할 것이고, 자신이 죽인 것으로 거짓말을 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다윗은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탄,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 집안이 칼에 맞아 쓰러진 소식을 듣고, 옷을 찢으며 울고 단식한다. 그리고 다윗은 사울을 죽였다는 아말렉인을 자기 부하를 시켜 죽인다.
"네가 어쩌자고 겁도 없이 손을 뻗어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를 살해하였느냐?" (14) "가까이 가서 그를 쳐라." (15) "네 피가 네 머리위로 돌아가는 것이다. 네 입이 너를 거슬러 '제가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를 죽였습니다.' 하고 증언하였기 때문이다." (16)
다윗의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에 대한 충성에는 변함이 없다. 사울이 살았으나 죽었으나 임금에 대한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사울의 죽음이 다윗에게 기쁜 소식이 아니었고,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에 대한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한다.
다윗은 하던 모든 일을 멈추고, 노래를 짓고 애도를 한다. 영웅의 업적을 기록하는 '야사르의 책'에 사울이 용감하게 싸우다 죽었다고 기록하여 벤야민 지파 사울에 대해 자신의 유다 지파에게도 가르칠 것을 명한다. (2사무 1,17-27)
다윗이 그동안 사울의 집요한 추적에도 가만히 있었던 것은 사울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의한 것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세상이 된 그 순간에도, 다윗은 하느님께 어디로 가야할 지를 여쭙고, 헤브론에 가서 7년 반이나 기다렸다. (2사무 2,1-11)
사울과 요나탄의 죽음에 대해서 다윗은 수만가지 생각과 감정들이 오고갔을 것이다. 자신을 그렇게 비방하고 헐뜯고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수십년을 아무 이유없이 대적해 온 사울에 대해, 다윗은 놀랍게도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을 토로하지 않는다.
자신의 속마음이야 어떻든 간에, 원칙적으로 하느님 앞에 이스라엘 임금으로서의 사울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고 진심으로 애도했다. 사울의 죽음은 이스라엘의 적인 이방인들에게는 기쁜 일이고,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손실이요 해이기 때문이다.
다윗은 이런 안목으로 자신의 모든 감정들 위에 바로 하느님이 세우신 나라인 이스라엘의 손실에 대해 가장 크게 애도하고, 사울에 대해 애도하고 있다.
다윗의 개인적인 감정은 가장 마지막에 나온다.
"나의 형 요나탄 형 때문에 내 마음이 아프오. 형은 나에게 그토록 소중하였고 나에 대한 형의 사랑은 여인의 사랑보다 아름다웠소." (1사무 1.26)
요나탄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애통해 하는 마음을 슬프디 슬프게 토로하고 있다.
다윗은 감정의 사람이 아니다. 다윗은 하느님의 사람이다. 다윗은 성령의 사람이다. 모든 것을 하느님의 관점에서, 하느님의 편에서 보고 판단하고, 원칙을 잡는 신본주의자이다.
우리 자신은 무엇이 원칙인가? 우리는 매사에 하느님보다는, 진실이라는 사실 보다는, 감정으로 사람과 사건을 대하고 있지는 않는가?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의 큰 안목과 가슴으로 보도록 노력하고, 개인적 감정은 개인적 감정일 뿐이며 매사에 하느님의 뜻으로 돌아가는 훈련이 참으로 필요한 것 같다.
연중 제2주간 토요일 복음 (마르3,20~21)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1)
'예수님의 친척들'에 해당하는 '호이 파르 아우투'(hoi par autou; his family)는 '그에게 속한 자들' 또는 '그와 함께 한 자들'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친구들'이라고 번역할 수 있지만, 마르코 복음 3장 31절 이하의 예수님의 가족들이 예수님을 데리러 오는 문맥과의 조화를 생각하면, 이들은 '예수님의 가족들'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리고 '붙잡으러'에 해당하는 '크라테사이'(kratesai; to take charge of; to lay hold on)의 원형 '크라테오'(krateo)는 '체포하다'라는 뜻이라서 (마르6,17; 12,12참조), 예수님께 대한 그의 가족들의 태도가 얼마나 무지하고 살벌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예수님께서 당신의 일을 이해하지 못한 그들에 대해 영적인 의미에서 가족이 될 수 없다고까지 말씀하신 반응이 더 잘 이해될 수 있다.
또한 예수님의 친척들이 보인 이런 부정적인 모습은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큰 영적 무지와 어리석음에 빠져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는지에 대한 척도가 된다.
이제 예수님께 대한 평가의 하나인 '그가 미쳤다'에 대해서 알아볼 차례이다.
'예수님께서 미쳤다'에 해당하는 '엑세스테'(ekseste; He is beside himself; He is out of his mind)의 원형 '엑시스테미'(eksistemi)는 '~의 밖으로' 라는 뜻의 전치사 '에크'(ek)와 '어떤 상황이나 관계 속에 있다'는 뜻의 동사 '히스테미'(histemi)의 합성어이다.
말하자면, 이 단어는 예수님께서 현재의 상황이나 현상들에 대하여 정상적인 이해가 불가능한 상태에 있다는 뜻이다.
예수님께 대한 이런 단정적인 소문은 예수님의 가족들로 하여금 그를 집으로 데려가야 한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특히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미쳤다'는 말은 곧 '마귀가 들렸다'는 뜻이었다(마르1,23).
이 구절 이후에도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대해 베엘제불이 들렸고,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하는 내용이 나온다(마르3,22).
특히 마르코 복음 3장 30절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그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고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마르코 복음 6장 1절 이하를 보면 고향 사람들도 예수님의 일에 대해서 신뢰하지 않았고, 요한 복음 7장 5절에는 예수님의 형제들(사촌들을 말함) 역시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또한 마르코 복음 3장 21절과 3장 31~35절의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판단하고 그를 붙들러 온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마르코 복음 3장 22~30절에서 예수님을 향해 베엘제불이 들렸다고 하는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 학자들과 예수님의 논쟁을 앞뒤에서 둘러싸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한편에서는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고 마귀를 내쫓는 기적을 행하시는 능력의 소유자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소문도 돌았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예수님께서 단순히 마귀들려 미쳤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멀리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학자들 뿐만 아니라(마르3,22), 그의 일을 지켜본 갈릴래아의 사람들이나(마르3,21 후반절) 심지어 자신의 친척들과 가족들까지(마르3,21 전반절)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마귀에 들려서 미친 사람 취급을 했다는 사실을 통해 볼 때, 예수님께 대한 비난에 가까운 배척과 오해, 영적 무지와 불신이 더 지배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과 베엘제불>
예수님께서는
식사를 하실 겨를도 없이 바쁘게 일하시는데(마르 3,20),
미쳤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하고(마르 3,21),
베엘제불이
들렸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서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마르 3,22).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미쳤다는 소문에 대해서는 대응을 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진짜로
미쳤는지 아닌지는
직접
와서 보기만 해도 확인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서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말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반격을 하십니다.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서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말은
예수님에게
어떤 초자연적인 힘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
힘이 '하느님의 힘'이라는 것은 인정하기 싫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싫으니까 예수님의 일도 싫고, 그래서 인정하기를 싫어한 것입니다.)
그런
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논리적으로' 반박하십니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
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일어나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마르 3,23-26)."
마귀
우두머리의 힘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은
마귀들이
분열되어서 서로 싸우는 일이고, 그러면 사탄의 나라가 망하는 일인데,
마귀 우두머리가 그런 일을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뜻입니다.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마르 3,27)."
이 말씀에서 '힘센 자'는 마귀 우두머리입니다.
예수님은 마귀 우두머리, 즉 사탄(베엘제불)보다 더 힘이 세신 분이고,
사탄을 묶어 놓으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들을 쫓아내신 일은
이미 당신의 권능으로 마귀 우두머리를 제압하셨음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교를 싫어하고, 종교인들을 싫어해서
하느님의
일까지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히
교회의 사회 참여와 관련해서 그런 일이 많이 생깁니다.
(걸핏하면
색깔 논쟁을 일으키고, '종북' 세력이라고 모함하고...)
사랑과
정의와 평화는 분명히 하느님의 일이고,
그것들의
실현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개인감정 때문에, 또는 정치적인 이유로 그 일 자체를 부정해 버리면,
그것은 하느님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마르 3,28)."
이 말씀에서 '신성을 모독하는 죄'와 '성령을 모독하는 죄'가
어떻게 다른지 구분하기가 어려운데,
이 말씀의 뜻은, "어떤 죄든지 다 용서받을 수 있지만,
용서받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용서받지 못한다."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몰라서 못 믿고,
그래서 예수님의 신성을 모독한다고 해도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 구원, 용서, 해방 등을
인정하지 않고 모독하고 부정한다면 용서받을 수가 없습니다.
('신성 모독'은 예수님의 신성을 안 믿는 것,
'성령 모독'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 용서, 해방 등은,
특히 '용서'는 분명히 하느님의 일입니다.
(사탄이 사람들에게 구원, 용서, 해방을 주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일을 부정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용서를 부정하는 사람이고,
용서받기를 거부하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은 용서받기를 거부함으로써 용서받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나는 사람들을 마귀에게서 해방시키려고 왔는데,
이 일을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서 하는 일이라고,
즉 사탄의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해방을 거부하고 스스로 사탄의 노예가 되는 것과 같다."
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감옥 문을 열어 주었는데도 "이것은 자유가 아니다." 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그냥 감옥 안에 있겠다고 고집부리는 것과 같고,
스스로 자유를 거부하는 일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인지 몰라서 못 믿는 것은 그럴 수 있다고 해도,
당신이 하시는 일은 믿어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요한 10,38)."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요한 14,11)."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마귀들을 쫓아내는 일은 하느님의 힘으로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마귀들을 쫓아내신 일은 하느님의 힘으로만 할 수 있는 일,
즉 하느님의 일을 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것을 모를 수가 없습니다.
몰라서 못 믿는 것과 알면서도 부정하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게라사인들의 지방'에서 마귀를 쫓아내셨을 때,
그 지방 사람들은 예수님께 감사드리기는커녕
떠나 달라고 요구했습니다(마르 5,17).
그들은 하느님을 안 믿는 이방인들이었기 때문에
하느님도, '하느님의 힘'도, '하느님의 일'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말씀 없이 그 지방을 떠나셨습니다.
그러나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서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예님을 비방한 자들은 율법학자들입니다(마르 3,22).
그들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하느님도, 하느님의 힘도, 하느님의 일도
이방인들보다는 좀 더 잘 알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님을 인정하기가 싫어서
하느님의 일을 부정하는 죄를 지었고,
결과적으로 사탄의 편에 서고 말았습니다(마태 12,30).
송영진 모세 신부
예수님의 친척들이 그분을 미쳤다고 생각해서 붙잡으러 옵니다. 기적을 일으키고, 복음의 기쁨을 전하는 일보다는, 사회의 지도층에 도전하고 막말을 하며 제자들을 불러 모아 군중을 몰고 다니는 예수님을, 어린 시절부터 가까이 살아온 친척들은 ‘미쳤다’고 여기고, 가문에 먹칠을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엇엔가 깊이 열중하거나, 남들이 보기에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 때,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 전혀 다른 생각으로 살 때 “미치지 않고서는 그렇게 살 수 없다.”고 표현하곤 합니다. 우리도 미치도록 열심히 살아야 하는데, 무엇에 미치느냐가 중요합니다.
어떤 세상의 가치와도 바꿀 수 없는 하느님의 진리에 미친 순교자들, 가난하고 헐벗은 이웃들을 위해 자신의 재산과 삶을 송두리째 넘겨준 성인들, 정의를 지키고 인권을 보호하려고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는 이들, 소외된 이웃을 위해 말없이 남모르게 희생하고 봉사하는 이들.
이 모든 사람은 하나의 진리에 미친 이들입니다. 그것은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고, 거짓이 진실을 이길 수 없으며, 끊임없이 나를 비우고, 완벽하지 않은 나를 사랑하며, 이웃의 모습 속에서 나를 들여다보는 지혜를 가질 때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단순하면서도 놀라운 진리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미워했던 사울과 요나탄의 죽음 앞에 처절한 애가를 부르며 여인의 사랑보다 아름다웠던 우정과 사랑을 표현합니다. 미움과 분노를 우정과 사랑으로 승화시킨 다윗의 모습을 보며 우리도 언젠가는 정의와 평화,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을 미치도록 사랑해야 하지 않을까요?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