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주간 월요일]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마르 2,18-22)

2018. 1. 15. 오전 6: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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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주간 월요일]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마르 2,18-22)


사무엘은 주님의 말씀을 거역한 사울에게,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다고 한다. (1사무 15,16-23)
그 무렵 16 사무엘이 사울에게 말하였다. “그만두십시오. 간밤에 주님께서 나에게 하신 말씀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가 사무엘에게 응답하였다. “어서 말씀하십시오.”
17 사무엘이 말하였다. “임금님은 자신을 하찮은 사람으로 여기실지 몰라도,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아니십니까? 주님께서 임금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이스라엘 위에 임금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18 주님께서는 임금님을 내보내시면서 이런 분부를 하셨습니다. ‘가서 저 아말렉 죄인들을 완전히 없애 버려라. 그들을 전멸시킬 때까지 그들과 싸워라.’
19 그런데 어찌하여 임금님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전리품에 덤벼들어, 주님 보시기에 악한 일을 하셨습니까?”
20 사울이 사무엘에게 대답하였다. “저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가라고 하신 그 길을 따라 걸으며, 아말렉 임금 아각은 사로잡고 그 밖의 아말렉 사람들은 완전히 없애 버렸습니다.
21 다만 군사들이 완전히 없애 버려야 했던 전리품 가운데에서  가장 좋은 양과 소만 끌고 왔습니다. 그것은 길갈에서 주 어르신의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려는 것이었습니다.”
22 그러자 사무엘이 말하였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
23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임금님이 주님의 말씀을 배척하셨기에  주님께서도 임금님을 왕위에서 배척하셨습니다.”


시편 50(49),8-9.16ㄴㄷ-17.21과 23(◎ 23ㄴ)
◎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 제사 때문에 너를 벌하지는 않으리라. 너의 번제야 언제나 내 앞에 있다. 나는 네 집의 수소도, 네 우리의 숫염소도 받지 않는다. ◎
○ 어찌하여 내 계명을 늘어놓으며, 내 계약을 너의 입에 담느냐? 너는 훈계를 싫어하고, 내 말을 뒷전으로 팽개치지 않느냐? ◎
○ 네가 이런 짓들 저질러도 잠자코 있었더니, 내가 너와 똑같은 줄 아는구나. 나는 너를 벌하리라. 너의 행실 네 눈앞에 펼쳐 놓으리라. 찬양 제물을 바치는 이는 나를 공경하리라.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


예수님께서는,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느냐는 물음에,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고 하신다. (마르 2,18-22)
그때에 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단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하고 물었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20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21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22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연중 제2주간 월요일 제1독서 (1사무15,16-23)


그러자 사무엘이 말하였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더 낫습니다."  (22)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에 해당하는 '하헤페츠'(hahepets)

'기쁨', '즐거움'을 의미하는 '헤페츠'(hepets) 의문사 '하'(ha)가 붙은 형태로서

'기쁨이겠는가?' 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사무엘이 반문형식으로 표현한 것은 강한 어조의 부정을 나타내면서

동시에 다음에 이어지는 자신의 말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다.


한편 '번제물'로 번역된 '뻬올로트'(beolloth; in burnt offerings)의 원형 '올라'(olla)

'올라가다' 라는 뜻의 동사 '알라'(alla)에서 유래하여 '올라가는 것'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것은 가죽을 제외한 제물 전체를 제단에서 불살라 드려 그 향기로운 냄새를

하느님께서 흠향하도록 드리는 제사를 뜻한다(레위1,3~17).

따라서 '올라'(olla)에는 '완전한 제사'(whole offering)이라는 신학적 의미가 있다.


그리고 '희생 제물'로 번역된 '제바힘'(zebahim)'희생'(sacrifices),

'산 제물'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복수형으로 언급되어 있다는 점에서

'번제물' 이외의 '희생 제물' 모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에 해당하는 '키쉬모아으 뻬콜 예흐와'

(kishmoah beqol yehwa; as much as in obeying the voice of the LORD)

'주님의 목소리(음성)를 듣는 것만큼'이라는 의미이다.

말하자면 '주님께서 번제물들과 희생 제물들보다 당신의 음성을 듣는 것을

더 기뻐하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무엘은 이러한 답변을 통해 사울의 변명에 대한 논란을 뛰어넘어

사울의 뜻하는 바의 정곡을 찌르고 있다.

사무엘은 번제물들과 희생 제물들을 기쁘게 받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단지 제사를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과 비교하여 말하고 있는 것뿐이다(마르코12,33참조).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더 낫습니다'

원문은 '힌네 셰모아흐 밋제바흐 토브 레하크쉬브 메헬레브 엘림'

(hinne shemoah mizzebah tob lehaqshib mehelleb ellim; Behold,

To obey is better than sacrifice, and to heed is better than the fat of rams)이다.


'좋다', '선하다', '낫다'라는 의미의 '토브'(tob; is better)는 원문의 위치상으로 볼 때,

'밋제바흐'(mizzebah; than sacrifice)를 수식하는 형용사로 간주되어

'좋은 제물보다'로 해석할 수 있지만, 그것보다는 '밋제바흐'가 '셰모아으'(shemoah; to obey)와 비교되기 위해 앞에 놓여진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말씀을 듣는 것이'(순종이)에 해당하는 '셰모아으'(shemoah; to obey)

'듣다' 라는 의미를 지닌 '샤마'(shama)의 부정사 연계형이 명사적으로 사용되어

'순종하는 것', '말씀을 듣는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또한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에 해당하는 '레하크쉬브'(lehaqshib; and to heed)

전치사 '레'(le)에 '귀를 기울이다'라는 의미를 지닌 '카샤브'(qashab)

사역형 부정사 연계형이 결합한 형태로 명사적으로 사용되어

'주의를 기울기는 것' 이라는 의미로 번역될 수 있다.


또한 '숫양의 굳기름'으로 번역된 '헬레브 엘림'(helleb ellim; the fat of rams)

양의 내장, 신장 등에 있는 모든 기름을 의미하는데, 모든 굳기름은 오직

주님께 속한 것이었다(레위3,16.17; 7,23-25).


하지만 사무엘은 하느님 대전에 이 모든 제의적 규례를 행하는 것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는 열등한 것임을 알리고 있다.

이러한 제사의 가치에 대한 사무엘의 평가는 형식적인 제사에 대한

예언자들의 비판과 일맥상통한다.


전통적으로 이스라엘에서는 제사가 하느님의 뜻에 부합한다는 사실이 아주 자명하였다.

그러나 사무엘은 당시의 통념을 깨고 단지 동물을 드리는 행위 자체에

제사의 의미가 있지 않음을 밝히고 있다.


하느님께서 제사라는 제도를 이스라엘에 주신 것은 그들이

'당신의 말씀에 순종하는지의 여부를 보기 위함' 이었다.

따라서 사무엘은 제사 제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제사 제도의 근본 정신을 밝히 드러냄으로써,

사울의 껍데기뿐인 형식적인 제사관을 비판하고 있다.


여기 본문에 나타난 정신은 사무엘 이후 많은 예언자들에 의해

주님께 대한 합당한 예배의 기본 자세로 누차 강조되었으며

(시편50,8-15; 이사1,11-17; 예레6,20; 호세아6,6; 미카6,6-8),

마침내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 사실이 다시 확증되고 강조되었으며(마태9,13),

사도 바오로에 의해서도 예배의 근본 정신으로 계승되고 있다(로마12,1-2).


 

 연중 제2주간 월요일 복음(마르2,18~22)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21~22)


'새 천 조각'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찾아온 새로운 복음의 질서

상징하는 반면에, '헌 옷'은 하느님께서 주신 율법을 인간적으로 해석하여

문자적인 준수에 얽매이는 구질서를 상징한다.


'새 천 조각'에 해당하는 '에피플레마 라쿠스 아그나푸'(epiblema rekous agnaphou; a piece of unshrunk cloth)세탁을 한 적이 없어 줄지 않은 옷감 말한다.


그러니까 마르코 복음 2장 21절의 의미는, 이러한 '새 천 조각'이므로

'헌 옷'기우게 되면 그 기운 옷을 세탁할 때 아직 줄어들지 않았던

'새 천 조각'물을 흡수하여 급격히 줄어들면서 '헌 옷'을

망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속 뜻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유대교의 전통은 함께 조화될 수 없으며,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망칠 수 밖에 없는 상충적 관계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서 구시대의 질서인 단식의 문제를 가지고,

하늘 나라의 신랑인 예수님을 맞이하여 기쁨의 복음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을

판단하지 말라고 경고하신 것이다.


한편, 마르코 복음 2장 22절'새 포도주''새' '네온'(neon; new)이지만,

후반절에 나오는 '새 부대''새'는 '카이누스'(kainous; new)이다.

전자의 원형 '네오스'(neos)시간적으로 새롭다는 뜻이고, 후자의 원형

'카이노스'(kainos)본질적으로 새롭다는 뜻이다.


특히 '카이노스'(kainos)는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시고

더러운 영이 들린 자를 고치셨을 때,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새롭고 권위있는 가르침'이라고 했을 때의 '새롭고'에 해당하는

단어의 원형과 같다(마르1,27).


새 포도주는 아직 발효가 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발효가 시작되면서 그 부피가 늘어난다.

이 때 새 가죽 부대는 유연하고 신축성이 있어서 변화에 따라 늘어나지만,

헌 가죽 부대는 그 변화를 견딜 수 없고 곧 터지고 만다.


말하자면, 왕성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낡아서 헌 가죽 부대 같은 바리사이인들의 전통이 수용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에게는 헌 가죽 부대 같은 바리사이들의

슬픔의 단식은 합당하지 않으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도래한 하느님의

나라를 맞이하는 기쁨의 혼인 잔치와 같은 축제가 합당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이 단식하지 않는다는 비난에 대해

'혼인 잔치 집의 비유'(마르1,19~20), '새 천 조각의 비유'(마르1,21),

'포도주와 부대 비유'(마르1,22)를 연이어 말씀하셨다.


과거의 전통적인 종교 관습을 기준으로, 단식하지 않은 문제에 대해

예수님을 비난하는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그런 질문에 국한하지 않으시고 모든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당신 자신으로 말미암아, 이미 도래한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복음이

갖고 있는 역동성을 이런 비유들로 밝히신 것이다.



2014. 01. 20 <연중 제2주간 월요일>\


<단식 논쟁 - 새것과 헌것>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단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르 2,18-20)”


예수님의 답변을 근거로 해서 생각하면,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단식은,

‘신랑을 기다리면서 혼인 잔치를 준비하는 단식’으로,

즉 신앙인으로서 메시아를 잘 맞이하기 위해서 회개하는 단식으로 해석됩니다.

그런데 신랑(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이미 세상에 오셨습니다.

따라서 지금은 신랑을 기다리는 단식을 할 때가 아니고,

신랑과 함께 기뻐해야 할 때입니다.

여기서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라는 말씀은,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하면 안 된다.”로 해석됩니다.

메시아께서 오셨는데도 메시아를 기다리는 단식을 한다는 것은,

오신 분을 메시아로 믿지 않고 배척하는 일이 됩니다.


그런데 “요한의 제자들은 왜 단식을 했을까?” 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요한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메시아로 소개했고, 사람들을 예수님께 보냈습니다.

그런데도 요한의 제자들은 왜 메시아를 기다리는 단식을 했을까?

지금 여기에 나오는 요한의 제자들은 아마도

요한이 제자로 삼아서 데리고 있던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제자가 되어서 요한을 따르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이 곧 메시아라는 요한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거나

믿지 않은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은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들 마음대로 메시아를 기다리는 단식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신랑을 빼앗길 날’이라는 말은,

일차적으로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수난을 당하셨을 때, 당시의 제자들은 일부러 단식하지 않았더라도

충격과 슬픔에 사로잡혀서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기 위해서 단식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려고 수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그 단식에는 우리 자신도 회개하고 보속한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넓은 뜻으로는 “예수님을 떠나서 방황하는 때”를 가리키는 말로 해석됩니다.

(신앙인이 예수님을 떠나는 것은 신랑을 잃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글자 그대로 누가 와서 빼앗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에게 빼앗기는 것과 다르지 않은 일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떠나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예수님께 돌아가려고 할 때,

그때 단식을 하게 되는데, 역시 그 단식도 회개를 하기 위한 단식입니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21-22).”


이 말씀을 앞의 단식 논쟁에 연결해서 생각하면,

바리사이들의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겨냥해서 하신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 대부분의 바리사이들의 단식은 그냥 일상적인 신심 행위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단식을 왜 하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단식 그 자체만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마음으로 단식을 하든지 간에,

단식을 자주 하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으로 평가했습니다.)


더 나쁜 경우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단식이었습니다.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마태 6,16).”

위선자들이 굶는 척을 하는 것은 아니고 실제로 밥을 굶지만,

그래도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단식을 단식으로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그들 마음속에 하느님은 없고,

사람들의 칭찬과 존경을 바라는 욕심만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 라는 뜻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신약시대의 신앙생활에 대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구약시대는 율법의 시대였고, 율법을 잘 지키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던 시대였고,

죄를 안 짓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는 사랑의 시대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모든 신심 행위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으로’ 하는 일이어야 합니다.

또 죄를 안 짓는 것으로 그치면 안 되고, 능동적으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 실천을 안 하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라는 말씀은,

단순히 낡은 것은 버리고 새로운 것을 취하라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옳은 것만 추구하고, 옳지 않은 것은 버려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새것’과 ‘헌것’에 대한 가르침이 아니라,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아무리 오래되었더라도 ‘하느님의 의로움’은 영원히 보존되어야 합니다.

반대로 아무리 새롭더라도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것은 거부해야 합니다.

오래되었다고 해서 항상 낡은 것은 아니고 새롭다고 해서 늘 옳은 것은 아닙니다.

마태오복음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마태 13,52).”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구약성경의 가르침들을 버린 것은 아닙니다.

구약성경의 가르침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새롭게 재해석되어야 하고,

완성되어야 합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송영진 모세 신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새로운 시작을 알릴 때마다 흔히 인용하는 성경 구절입니다.

우리는 늘 새롭게 변화하고 회심하고 싶어 하지만, 생각처럼 잘 되지 않습니다.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일 나 자신이 너무 낡고 고집스러우며 편견과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적 의미에서 단식은 흔히 육신의 배부름과 욕망에서 생긴 영의 혼탁함에서 벗어나 맑은 정신으로 하느님을 찬미하고, 고행을 통하여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에 단식은 순수한 종교적 의미보다는, 이민족의 지배 속에서 유다인들이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는 율법의 조항이자, 사회적 계약으로 전락했고, 단식의 참된 종교적 의미도 사라져 갔습니다.

‘경건한 이들’이라고 자칭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단식을 하지 않는 것이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단식의 참된 의미를 되살려 주십니다. 복음의 기쁨을 누리는 이들, 곧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과 함께 있는 기쁨을 누리는 이들에게 단식 행위는, 마치 혼인 잔칫집에 와서 음식을 함께 나누는 기쁨보다 홀로 떨어져서 자신이 다른 이들보다 더 나은 사람임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독선과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아말렉과 싸워 이긴 뒤에 좋은 전리품의 일부를 취한 것을 두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라는 질책을 받은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주 수단과 목적을 혼동하는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말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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